실패하면 안 되는 판정의 역설

판정 규칙이란 성공의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때로 판정이 실패하면 절대적으로 곤란한 경우도 생기지요. 잠긴 문을 못 빠져나가면 더이상 진행이 안되는 상황에서의 자물쇠 따기 판정이라든지, 진짜로 이 판정에 실패하면 세계가 멸망하는 상황이라든지, 주인공의 목숨이 걸려있다든지.

판정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못 빠져나갈 정도로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도 곤란하지만, 진행자도 사람인지라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세가지 정도 해결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판정 결과를 속인다

적이 주인공에게 실제 가한 피해가 32HP인데 한 20HP 정도로 속인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주인공을 살리거나 진행의 정체를 막기 위한 전통적인 해결책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문도 많이 드는 방법입니다. 특히 진행중 주사위 결과를 자주 속여야 한다면 규칙 선택이 잘못됐거나 파워 레벨을 잘못 설정한 등, 뭔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판정 결과를 속이는 방식의 변형으로는 주사위 나온 것을 보고 적의 능력치나 판정 난이도를 낮춘다든지, 결과가 안좋게 나온 주사위를 적당히 무시하고 다시 굴리라고 한다든지, 판정 반복의 시간간격이나 벌점을 무시한채 재판정을 시킨다든지 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편하고 유서깊은(..)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자주 사용해야 한다면 규칙 선택이나 진행상의 문제가 있지 않나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판정에 초인적인 난이도를 요구하고 있거나 모든 적이 다 주인공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자라면 특히 더…

2. 판정을 하지 않는다

정 실패를 바라지 않는다면 판정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역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어서, 판정을 해야할만큼 성공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꾸 판정을 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규칙의 전부 혹은 일부가 유명무실해지기 쉽습니다.

대표적으로 전투능력에만 치중한 주인공 일행이 사회판정을 해야 할 경우, 사회판정은 판정 없이 연기로 지나가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모든 주인공이 전투능력에 치우쳐 있다면 사회판정 규칙은 그냥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사회능력에 투자한 주인공이 있다면 사회판정의 부재는 그 주인공의 투자를 쓸모없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판정 없이 지나가지는 않을테니 결과적으로 우리의 약골 주인공은 사회능력은 유명무실해졌고 전투능력은 떨어지니 다른 주인공보다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규칙책의 어떤 부분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을 사문화시킬지는 진행자와 참가자가 합의할 문제이지만, 그러한 합의가 뚜렷이 없는 한 판정규칙, 특히 주인공들이 투자한 능력의 판정규칙은 왠만해서는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1번과 2번 해결책은 또한 그 실행이 오직 진행자의 자비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진행자의 자의성 문제가 생기기 쉬우며, 심지어는 진행자가 참가자를 가지고 노는 결과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으로서는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들이 주인공을 흠씬 두들겨패다가 다 죽을 지경이 되자 ‘그러면 다음에 다시…’ 하고 핫핫핫 웃으며 사라진다든지 말이죠. 이럴 경우 참가자들은 주인공들의 운명에 대한 제어력을 완전히 빼앗기며, 무력감과 소극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3. 갈등판정의 개념을 도입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완전한 해결책은 이것입니다. 대개의 기성 규칙책은 갈등판정보다는 행동판정을 전제로 하고 있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갈등판정은 어떤 규칙에든 쉽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요. 갈등판정과 행동판정의 개념은 예전에 쓴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면 안 되는 판정에서 갈등판정의 활용은 꽤나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판정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미리 정해놓기 때문에 실패하면 안되는 부분은 아예 판정에 걸지조차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 속에서 우리에 갖힌 상태에서 자물쇠를 따고 탈출해야 한다면, 이 상황에 처하게 한 신을 (혹은 진행자를) 원망하기보다는 판정에 걸린 결과를 협상할 수 있습니다. 자물쇠따기 판정 실패 -> 주인공의 익사 혹은 진행자의 선심이라는 결과보다는, 판정에 걸린 결과를 자물쇠를 따느냐 마느냐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죠. 판정에 실패한다고 자물쇠를 따기에 실패하는 대신 실패하면 따는 것이 늦어서 동료를 도와주지 못한다든지, 볼썽사납게 따서 비웃음을 산다든지, 신발에 숨긴 자물쇠 따는 도구를 들킨다든지. 역으로 말하면 성공할 경우 자물쇠를 재빨리 따고 탈출해서 동료가 잡혀가는 것을 막거나, 멋지게 따서 탄성을 자아내거나, 신발에 숨긴 도구를 들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주사위운이나 진행자의 자비에 의존하지 않아도 실패하면 안되는 판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성공 못지않게 실패 역시 재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패가 ‘도둑 A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꼬르륵.’으로 이어지는 것보다는 ‘이런, 물속에 갖혀있는 사이 전사 B가 잡혀갔습니다! 이젠 어쩌죠?’로 이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더 재밌으니까요.

갈등판정의 활용에는 판정과 결과의 시간적 분리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 진행한 바빌론 베이브 5화의 경우, 주인공 사사트는 도망노예들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기 위해 베두인들을 설득해야 했죠. 이 경우 판정에 걸린 것을 ‘베두인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동의할 것이냐’가 아닌 ‘베두인이 배신하지 않고 무사히 안내해줄 것이냐’로 바꿈으로써 일단 사막을 건너는 여정을 시작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판정의 결과설정에 따라서는 판정과 결과가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판정과 결과가 시간상으로 따로 나타난다는 것은 또한 의외성이라는 흥미로운 극적 요소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바로 알 수가 없으니까요. 물론 판정의 결과가 참가자의 예상범위에서 너무 벗어나면 곤란하다는 일반원칙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판정에 실패해서는 안되는 경우의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에 제시한 것 외에도 규칙책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로는 극점수와 같은 추가 자원의 활용과 서술권의 활용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던전이나 트롤베이브 같은 몇몇 인디 규칙책은 ‘참가자가 판정에 성공하면 진행자가 그 결과를 서술하고, 참가자가 실패하면 진행자가 그 결과를 서술한다’는 서술권 분리 규칙을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규칙이 있는 경우는 참가자가 판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서술을 통해 그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판정에 성공하는 것은 서술적 제어력을 잃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술권을 얻기 위해 실패를 바라는 경우마저 생각할 수 있죠. 간단한 규칙이면서도 성공과 실패의 일반적인 관계를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10 thoughts on “실패하면 안 되는 판정의 역설

  1. 진야의 방문자

    (DnD의 경우도)
    결국은 승리할것이 분명한 일반적인 전투에서도 단일 판정의 실패는 더 많은 자원의 소모(hp라던가 주문이라던가 혹은 시간!)로 이어지곤 합니다.
    요는 자원의 소모이니 ‘적당한 실패’를 적당한 자원의 소모로 대체해도 괜찮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활극적인 RPG를 주로 하다보니 일시적인 능력치의 하락이나 상태이상, 아이템 상실 등이 괜찮지 않을까 했지만, 그러한 페널티 들이 다음 번 활동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도움이 별로 안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결국 난관을 뒤로 미루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갈등판정을 마스터가 미리 마련을 해놓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갈등 판정의 원래의미와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말입니다.)
    플레이가 더 즐거워질것 같아서 두근두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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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삭풍

    아아 정말 공감합니다…
    pc들이 죽어버리면 곤란하니 지나치게 큰 피해를 입으면 적당히 줄여주거나 한적이 있는지라…
    또 판정에 실패하면 의도한 스토리와 달라버리는게 겁나서 상기에 제시된 행동을 한적도 있습니다.
    판정이란건 필요하지만 여러모로 곤란할때도 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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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킹랑

    좀 다른 관점으로는 실패해도 플레이가 계속 연결이 될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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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aleaf

    “진행상 실패하면 안되는 판정” 때문인지, 요사이 나오는 d20 규칙에는 플레이어 자원을 제공하더군요.
    d20 모던이나 에버론 처럼 소극적인 포인트(특정 판정에 +? 보너스)부터,
    트루20이나 M&M처럼 적극적인 포인트(특정 판정에 절반 이상 보장, 이야기 플롯 생성, 상처 치유등)를 주더군요.
    어차피 진행자가 판정을 속일 바에는 아예, 참가자에게 이런 자원을 주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작위적이다 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어차피 서사적인 RPG는 짜고치는 고스톱이고, “진행자가 봐주고 있다.”라고 느낄바에 참가자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낫겠죠.

    갈등 판정은 참 좋은 예시같습니다. 보통 마스터가 판정을 한 후에 “실패”했다는 결과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테크닉을 쓴다면 어느쪽이든 재밌는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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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펠군

    1번과 같은 상황을 없애기 위한 마스터 스크린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 스크린 안에서 굴린 굴림 결과는 마스터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적당한 조작이 들어갈 여지가 충분히 있고, 그것을 돕는 것이 바로 마스터 스크린이죠.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기에 플레이어들이 봐준다는 느낌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마스터 스크린은 그냥 표 몇개 붙혀놓은 종이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반드시 체크의 성공만이 그 상황의 타개방법이다! 라는 방식 자체가 진행자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이스의 숫자에 따라 RPG에는 100% 성공이라는 단어는 사용하기 힘들기에, 진행자는 실패, 또는 성공에 따른 이야기 전개나 또는 그 외의 방법을 충분히 생각하고 상정해놓는 것이 기본 중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랄까 어느 시스템의 마스터링(텔링이었를지도) 가이드에서 본 글 같기도 합니다만 -긁적긁적

    하여간 여기서 오픈록 스킬 판정에 실패! 모두 익사 꾸르르르르는 컴퓨터 게임에서나 나올 시나리오죠. 그걸 RPG 시나리오에서 정말 써먹으면 그건 진행자의 그냥 자질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세이브 로드 컨티뉴가 있지만, RPG에서는 세이브 로드 컨티뉴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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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펠군

    뭐 오픈록 뿐 아니라 그 하나의 판정이 실패했다고 게임이 엉망이 된다는 것 자체가 시나리오의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나왔을 때는 마스터 스크린의 도움과 자신의 진행 능력을 믿어야지요. -또는 충분히 PC들의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 할 수 있는 상황이라던가요.
    (그 어느 분이 쓰신 마스터 지침서에서 본 건데 ‘절대로 생명에는 이상 없는 졸라 위험한 함정!’이라는 글과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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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nefos

    ‘참가자가 판정에 성공하면 진행자가 그 결과를 서술하고, 참가자가 실패하면 진행자가 그 결과를 서술한다’는
    이거 오타 같아요. 성공하건 실패하건 진행자가 서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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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Tealeaf

    글쎄요. 참가자들이 조금 능숙해지면 스크린이 있더라도 눈치 채지 않나요?^^
    차라리 목숨줄을 마스터가 전부 가지고 있는게 때로는 “마스터가 갖고 논다”라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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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로키

    진야의 방문자// 자원의 소모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사위를 사용하지 않는 자원관리형 규칙들과도 일맥상통하고요. 다만 규칙상으로 좀더 일체화가 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죠.

    갈등 판정은 미리 준비한다기보다는 그때그때 협상하는 거지만, 어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둔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

    삭풍// 예, 그런 면이 있죠. 판정의 곤란함에서 나름 벗어나보고자 이런저런 모색을 하는 과정에서 이 글도 쓴 거고요.

    Tealeaf// 글쎄요, 극점수나 블루로즈/True20 계열의 신념과 같은 참가자 자원은 반드시 속임수라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주인공이 아닌 참가자가 가진 자원이라고 생각하면 작위적일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요.

    더군다나 말씀하신대로 진행자의 의도와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는 참가자에게 자기 주인공의 운명에 대한 일정 권한을 준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킹랑//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문단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는 거죠. ^^ 다만 진행자도 사람이니 예기치 않게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펠군// 시나리오 부분은 이 글의 전제를 둘째 문단에서 설명했다고 생각되고… 제가 말한 판정결과를 속인다는 얘기는 몰래 속이는 것도 포함하는 얘기라서요. 자꾸만 그 규칙으로 인해 나오는 결과를 부정해야 한다면, 내지는 진행자가 선택한 파워레벨에서 원치 않는 결과가 계속 나온다면 뭔가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nefos// 아뇨, 오타가 아닙니다. ^^ 던전과 트롤베이브에는 실제 그런 서술권 분배 규칙이 있죠. 아, 그리고 혹시 오해하셨을까봐.. 던전이란 클린턴 R. 닉슨이 만든 인디 규칙책 Donjon이지 D&D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Tealeaf//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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