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무엇이 문제인가

며칠 전에는 하룻저녁에 세분이나 RPG 전투가 싫다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분은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두분은 새로 소개받은 분이어서 기분이 묘하더군요. 전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분들의 취향이나 경험상으로는 전투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RPG 속의 전투,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 소지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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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진행자가 참가자들 물먹이기가 상당히 쉽다는 점. 대개의 규칙에서는 적의 힘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진행자가 적을 말도 안되게 강하게 만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원성을 좀 들을 각오가 돼있다면야…) 그리고 실제로 일부 진행자들이 줄거리를 자기 뜻대로 진행시키기 위해, 혹은 적으로 나오는 등장인물에 대한 애착, 혹은 지기 싫어서(…) 등의 이유로 주인공들에 비해 심하게 강한 적들을 내보내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줄거리상 적이 강한 게 말이 되는 경우도 많겠지요. 방금 수련을 시작한 햇병아리가 무림의 최고 고수에게 물정 모르고 덤빈다든가, 위험하다고 수없이 경고받고서도 드래곤과 싸운다든가. 하지만 참가자들이 선택하지 않은 전투인데 너무 적이 강해서 형편없이 진다거나, 혹은 전투면 전투마다 깨진다면 아무래도 참가자들은 재미없어질 것입니다. 이럴 경우 전투가 싫어지는 건 고사하고 RPG 자체가 싫어지지 않는다면 다행입니다.

또 한가지 전투가 싫어질만한 이유라면 주인공에 대한 참가자의 애착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주인공이 다치거나 지는 것이 싫을 수 있겠지요. 특히 전투는 주인공이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는 갈등이기 때문에 그 위험을 무릅쓰기 싫은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행자가 습관적으로 너무 강한 적을 내보낸다면 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집니다.

전투 규칙은 또한 다른 규칙보다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기본 판정은 비교적 단순해도 전투 판정에는 종종 수많은 선택 사항과 변형이 붙어서 복잡해지지요. 전투 판정이 기본 판정과 전혀 다른 하위 체계를 이루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결과 첫째, 전투 규칙은 더 배우기가 어려워지고 둘째, 전투가 느려집니다.

전투 규칙을 배우기 어렵다는 것은 가뜩이나 RPG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 규칙 학습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게다가 전투 규칙을 제대로 모르면 활약의 기회를 빼앗기거나 자기 주인공이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 있습니다.

전투 규칙의 복잡성 때문에 전투가 느려지는 것은 ORPG에서 더욱 심각해지는 문제로, 전투 하나로 한 세션이 다 지나가는 경우도 흔히 보입니다. 전투가 좋은 참가자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전투가 별로 취향이 아닌 참가자에게는 지루하겠지요. 게다가 전투를 좋아하는 참가자조차도 그 느린 진행 속도에는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전투가 느리면 느려질수록 전투의 긴박감이란 증발해 버리기 쉬우니까요.

전투 자체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투가 많아지면 생길 수 있는 문제라면 극중 문제 해결 수단의 획일화입니다. 모든 종류의 갈등에 ‘머리통을 깨부숩니다’로 대응한다면 (그리고 그런 대응이 늘 허용된다면) RPG의 미덕 중 하나인 다양한 해결책과 발상의 모색은 사라져 버릴 겁니다. 물론 스트레스 해소에 오크 머리통 깨부수기만한 것이 없다고 해도 그런 건 개인적으로 CRPG에서 훨씬 하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피해를 감수하며 오크와 직접 싸우는 것보다는 적대 오크 클랜간의 대립을 부채질해 서로 피튀기며 싸우게 한 다음에 약화된 승자 쪽을 간단하게 쓸어버린다… 하는 쪽이 좀더 RPG 특유의 묘미가 느껴지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전투 중심의 RPG는 종종 진정성이랄까, 진실성이 떨어집니다. 예전에 힘의 종류라는 글에서 다루었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보통 가장 중요한 힘은 정치적, 금전적, 종교적 힘, 그리고 개인이 속한 집단의 힘이지 개인의 팔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팔뚝 힘 센 것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 많은 게임의 논리는 사람에 따라서는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투가 RPG에서 가장 인기있는 활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역시 전투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적을 쓸어넘기는 것만한 재미가 없지요. 또 전투력은 실제 사회에서 더 중요한 사회적 힘과는 달리 가장 개인적인 능력이라는 점에서 가장 단순명쾌합니다. 이런저런 사회적인 압박에서 벗어난 원초적인 스트레스 해소랄까요.

두번째는 대개의 RPG 규칙이 전투를 가장 비중있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D&D, 7번째 바다, 겁스… 아마도 첫번째 이유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대개의 규칙책에서는 전투 규칙이 가장 복잡하고, 전투야말로 가장 전술적인 재미가 있는 게임 내 활동이기 쉽습니다. 바바 히데카즈의 글 파워 플레이에 나왔듯 말이지요. 규칙에서 어떤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어떤 부분을 다루지 않느냐에 따라 플레이중 강조점이 크게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개의 기성 규칙은 전투 중심적이며, 그 때문에 플레이 역시 전투 중심으로 흐르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위에서 말한 폐해들이 상당 부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 RPG가 모의전쟁 게임에서 시작했다는 점, RPG 인구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여기서 자세히 다룰 성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전투가 취향에 맞는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또 전투 과다로 인한 폐해 때문에 전투, 심지어는 RPG 자체가 싫어지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해결책은 불행히도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참가자들이 원하는 것을 서로 자유롭게 의논해서 파악하며, 늘 참가자의 의견을 반영하고 그들이 지루하지 않게 배려하라… 같은 원론적이고 당연한 소리로 해결될 건 별로 없으니까요. RPG는 곧 의사소통입니다. 그걸 모르는 RPG인은 없죠. 하지만 블로그에서 누가 떠든다고 갑자기 실천되는 부분은 아닙니다.

실험적인 인디 규칙책 같은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그늘, 안방극장 대모험, 트롤베이브, 포도원의 개들, 라이서스, 페이트 등등 많은 인디 규칙이 전투와 비전투 판정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놀이가 전투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한 바 있습니다. 또 판정 자체도 간단해서 전투라고 특별히 느리지도 않았죠.

결국 제목 그대로 대안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문제점만 잔뜩 늘어놓은 느낌이군요. 어쨌든 취향이 아니든, 과거에 경험이 안 좋았든 전투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RPG인도 즐길 수 있는 RPG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다양성이라면 또 굉장한 게 RPG의 힘이라고 생각하니까요. ^^_M#]

7 thoughts on “전투, 무엇이 문제인가

  1.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생각 참 많이하게 되는 사람 1호입니다<-. 개인적으로 전투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게되는데(제가 바로 저 위에서 말하는 강한 적을 내놓길 좋아하는 마스터죠, 그래서 플레이어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분들에게 물어보면 사실상 전투가 싫다기 보다는 형편없이 깨지는게 싫다고 하시더군요. 최근에 스타일을 바꿔서 그분들이 적정한 선의 캐릭터를 만들고 이 캐릭터를 적으로 삼는 정도로 플레이를 해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꽤 괜찮아졌단 말입니다. 이걸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 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시는 마스터는 적의 시트를 플레이어들이 한번 만들게 해보고 그 적으로 한번 플레이어들과 이야기를 진행해봐라. 라는 것일까나요. 적의 강함은 그 적의 연기의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닳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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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지만 가끔 저도 모르게 강한 적을 만들어버리곤 그대로 전투에 투입시켜버리곤 해서 아직도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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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ihaya

    뭐.. 강한 적에 대해서는 d20에서는 CR이라는 훌륭한 룰이 있긴 하죠.
    너무 강한 적이 나오는 건 오히려 마스터쪽에서 자기 힘 과시? 혹은 자기가 사랑하는 NPC라서 과도한 애정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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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로키

    PC들은 캠페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주인공도 때로 깨지고 뒹굴고 눈물을 삼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인공은 세계에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는 영웅입니다. 그래서 진행자의 NPC에 대한 애착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RPG인들이 꼽는 진행자 최악의 습관 중에 들어갈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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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nefos

    마스터의 애정은 NPC나 시나리오보다 PC에 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전투로 해결하려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자체를 유리하게 만드는 방법이나 공식, 규칙이 나와있는 룰은 거의 없는거 같습니다. 그런 상황자체를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각 PC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의해 나타나는데 전투자체에 매달리게 되면 큰 틀에서 바라보기 어렵기 때문에 치고박는데만 매달리다보면 반복의 일상이 되어 흥미를 잃는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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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아사히라

    아, 잘읽었어요 누나.
    물론 저는 전투를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왜 전투를 좋아하는지, 이 글을 보니까 대충 알 것 같아요.
    누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인텔리한 캐릭터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를 계속 추구하는 이유는
    저레벨에서 매직 유저는 대체로 자가 보호를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좀 강한 클래스를 하다보니 그것이 습관화되어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클래스를 선택하는 습관이 굳어진 게 아닌가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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