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를 다녀오다 – 현실세계 배경 역할놀이에 대한 단상

조금 전에는 페이를 다녀왔습니다. 뭔 소리냐고요? 페이(Paix, 평화) 시는 7번째 바다 배경세계인 테아의 최강대국, 몽테뉴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이 거주하며 일하는 곳입니다. 제가 다녀온 곳은 지구 최강대국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대사관 거리입니..(퍽)

그쪽 길은 주로 제 3세계 대사관 구역인지 포르투갈, 인도네시아, 터키, 라트비아, 룩셈부르그, 멕시코, 이집트, 그리스, 에스토니아 대사관 등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오래된 집들을 개조해서 쓰는 것처럼 보였고, 각 대사관 앞에는 작은 정원도 있더군요. 개중에는 꽤 잘 꾸민 정원도 있었고, 이집트 대사관 앞에는 흐드러지게 핀 노란 장미가 인상깊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 국기를 같이 건 곳도 보였고, 더러는 UN기를 같이 걸어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한국 대사관은 뒤퐁 서클에서 Q 가 쪽을 향해 매사츄세츠 가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셰리단 서클에 있었습니다. 정원이랄 게 거의 없더군요. 좀 잘해놓지 그게 뭡니…(퍽)

대사관 외에 그 근방에서 재밌게 구경한 것이라면 체코슬로바키아 첫 대통령 토마스 마사릭의 동상, 또 건너편 거리에는 마하트마 간디 동상이… 셰리단 서클에는 무슨 기마상이 있었는데, 내일 다시 갈 때 자세히 봐야겠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봐도 별거 없군요. 그냥 말탄 콧수염 아저씨 동상이고, 받침대에는 ‘셰 리 단’ 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씌여있을 뿐…)

또 대사관 거리의 뒤퐁 서클 쪽 초입에는 ‘위스틴 대사관로 (Westin Embassy Row)’라는 호텔이 있더군요. 정문 옆쪽에는 ‘무도회장’이라고 된 입구가 있던데, 아마 주말이나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저곳으로 대사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화려하게 빼입고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그런 화려하면서도 긴장되는 파티를 RPG로 해도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뒤퐁 지하철역의 코네티컷가 출구쪽은 가는 길이 어찌나 가파르고 긴지, 한 500m는 넘을 것 같은 에스컬레이터가 저 위에 조그맣게 보이는 하늘을 향해 까마득하게 올라갑니다. (이대 지하철도 많이 들락날락했지만 상대가 안됩니…) 아예 계단이 없고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둘, 내려가는 게 하나. 저 에스컬레이터 작동 안되면 아마 올라가는데 체력판정 몇번은 들어갈 것 같더군요.

코네티컷가 출구에서 나와보니 신체 멀쩡한 어린 놈들(아마 16~17)이 행인에게 돈을 청하고, 주변에는 스타벅스, 벤&제리, 뒤퐁 공원 등이 있고…

뒤퐁 공원은 가운데에 조각상 분수대가 있는 원형 공원으로, 수많은 새들이 풀밭에서 뭔가 열심히 주워 먹고 사람이 바로 근처까지 와도 신경을 안 쓰더군요.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이라는 한계 때문에 썩 한가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꾸며놓은…

뒤퐁 공원을 원형으로 감싼 도로인 뒤퐁 서클은 뉴 햄프셔, 매사츄세츠, 코네티컷 3개의 가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DC 교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죠. (갑자기 관광가이드 모드?) 아마 말로만 듣던 로터리 방식의 도로인 것 같습니다. 신호등 없이 원형 도로에 진입하는 차량 쪽에게 양보하는…

뭐 대충 저런 동네입니다. 이것저것 모험의 여지가 무지 많아보이는 곳. 지하철 입구에서 모금하는 녀석을 적당히 달래고 을러서 정보 얻어내고, 대사관 앞 장미를 손질하는 정원사와 얘기를 나누고, 간디 동상 뒤에 암살자가 숨어있어도 재밌을 것 같은 곳. (마지막 부분은 단순한 악취미일지도…<-) 뒤퐁 공원의 비둘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게 중요한 단서가 된다거나, 지하철 출구로 도망치는 악당들을 잡기 위해 급히 에스컬레이터를 작동시킨다거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죠.

따지고 보면 현실세계만한 발상의 보물창고도 없습니다만 (게다가 모든 자료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 RPG로 정작 하려고 하면 가장 답답한 게 ‘잘 모르는데’ 하고 겁부터 지레 먹게 된다는 점일까요. 매사추세츠 가에 쭉 이웃하고 있는 대사관들만 해도, 재밌는 발상은 수십가지쯤 떠올라도 일단 주인공들이 그리스 대사관으로 들이닥치면 진행자가 그 내부 구조를 알 리가 없죠. 가상세계가 배경이라면 청산유수처럼 만들어낼 내용들을 배경이 현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창작욕이 위축되는 면이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한 역할놀이의 어려움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아무리 흥미로운 곳이라도 속속들이 알기는 불가능하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할 수 있는만큼 자료를 모은 뒤 나머지는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만들어내는 것이겠지만요. 뒤퐁 서클 주변이나 대사관 동네 같은 경우 관광이나 홍보 책자에서도 자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여러모로, 부담이 아닌 재미로 다가오는 현실 배경 역할놀이는 제게 큰 과제이자 도전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매사츄세츠가 2000번지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실 속의 페이 시에서부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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