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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적 규칙과 서사적 규칙 도식

RPG와 최적경험 2편 (아직 미완성, 비공개) 쓰다가 갈라져나온 내용입니다. 도식을 만들기는 했는데 그 글에는 딱히 들어갈 곳이 없어서 일단 여기에 올려놓죠. 이전에 썼던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논의를 시각화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면은 OpenOffice Draw로 제작했습니다.

묘사적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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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서사 내에 존재합니다. 이야기의 구조나 진행과 같은 서사적 요소를 직접 다루지는 않고, 판정을 통해 전체 서사 내의 일부 사건을 확정합니다. 보통 전투규칙이 제일 정교하고 양도 많지만, 사회적이거나 정신적인 사건 역시 판정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요소를 되도록 정교하게 규정하려고 할 수록 규칙이 복잡해집니다. 겁스, D&D 3.5 등. 7번째 바다 (7th Sea)나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처럼 기본적으로 묘사적인 규칙에 서사적 요소를 추가한 절충형도 있습니다.

서사적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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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곧 게임입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에서는 서사가 끝나는 조건이나 결말의 향방도 규칙으로 결정합니다. 규칙으로 다루는 요소도 대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호감도나 타락 등 극적인 것입니다. 서사를 규칙의 논리로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는 만큼 규칙은 보통 간결하고 해석의 폭이 큽니다. 결국 서사를 만들어가는 작용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규칙의 역할입니다. 폴라리스 (Polaris), 달을 쏘다 (Shooting the Moon),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등.

진행자와 참가자 서술권 구분의 영향

최초의 RPG는 괴물을 죽이고 보물을 획득하는 던젼 탐사물이었습니다. 지금은 훨씬 다루는 내용이 다양해졌지만, 요즘은 과연 RPG가
던젼에서 벗어난 일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대개의 RPG는 던젼 탐사보다는 복잡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외관이 던젼이 아니라고 해도 가장 기본적이고 손쉬운 구도는 일행이 외부
세계와 맞서 싸우는 것이니까요.

그 원인을 저는 전통적인 진행자/참가자 구분에서 찾습니다. 진행자는 ‘세계’를, 참가자는 ‘주인공 일행’을 맡아서 서술
영역을 분배하는 구조에서 참가자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직접 서술권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안과 합의와 같은 보완적 수단으로 서술권자에게 의견을 알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권과 구체적인 표현은 서술권자의 권한입니다.

이러한 서술권 구분은 긴장감과 의외성의 원천이기도 하며, 따라서 대립에는 딱 적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제어하는 몬스터와 던젼에 참가자가 제어하는 주인공 일행이 맞서는 내용에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RPG가 던젼에서 나온 지금도 진행자의 서술 영역인 ‘세계’와 참가자의 서술 영역인 ‘주인공’의 대립은 계속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서술권 구분이 외부 세계와의 대립에 얼마나 적합하게 되어 있는지는 참가자가 세계와 대립 외의 상호작용을 하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외부 세계의 요소를 예를 들어 이용하거나 조종하려고 하면 정보가 일단 부족합니다. 따라서 서술권자인 진행자에게 묻거나 진행자와 협의해서 설정으로 정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진행자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등, 참가자가 직접 서술할 수 있는 영역인 주인공의 행동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진행자와 참가자 구분 속에서는 대립이 가장 편해집니다. 참가자는 자기 서술 영역이 아닌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서술 영역인 주인공을 독자적으로 움직여 그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고, 반대가 있으면 그 반대를 극복하는 형태가 대체로 가장 빠르고 쉽습니다. 그리고 정보와 제어권의 분리 때문에 이러한 대립은 더욱 긴장감이 넘치고 재미있어지지요.

그런 대립적 소재가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은 역으로 그러한 구도의 생명력과 재미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고 해도 그
속에는 정치, 추리 등 굉장히 다양한 소재를 담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진행자와 참가자 구도,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쉽게 나오는 주인공
일행 대 세계의 대립 구도에는 상당한 생명력과 유연성, 범용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는 구도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RPG의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그만큼 나올 수 있는 이야기도 폭이 넓어졌는데, 일행의 모험을 벗어나 개별 주인공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룰 때는 종종 다른 참가자들은 구경을 해야 하고 (물론 관객 시점도 재밌을
수 있지만 적어도 직접 참가는 하지 못하죠), 주인공이 세계와 맞서 싸우는 대신 정보와 권력으로 세계를 이용할 때는 종종
위에 말한 정보와 서술권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RPG로 좀 더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려면 서술권 분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한 예로는 이번 공화국의 그림자에서 참가자가 주인공 (PC) 외에 조연 (NPC)도 맡은 것만 하더라도 이야기의 폭을 확 넓히고 일행의 제약을 줄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세션 쪽 글 중에서도 그런 플레이 기록이 눈에 띄었고, 길드타운도 그런 예죠.) 마찬가지로 장면 연출권이라든지 세계 설정, 인물 등장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서술권의 분배 형태가 이야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국 서술권 분배는 플레이를 위한 도구이고, 도구란 원하는 목적에 맞게 고르고 형성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는 구도를 벗어나 좀 더 폭넓은 소재의 플레이를 편하게 하려면 서술권의 분배, 명시적·암묵적 규칙 등 놀이에 사용하는 도구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책에 있는 명시적 규칙으로 분배한다면 어떤 형태가 원하는 놀이의 모습에 어울리는가, 제안과 논의로 서술권 외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합의가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등등. 그런 사고의 유희와 구조 분석이 제게는 RPG의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판정, 합의와 서사적 규칙

유용한 사용이 까다로운 겁스 기능 용례 댓글에서 한 논의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논의 자체는 서술에 직접 개입하는 규칙에 대한 것이었지만, 제가 제대로 대답하려면 서술권 개념 정립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엮인글로 뺐습니다.

RPG 등 서사적 요소가 있는 놀이 속에서는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A는 죽었습니다.” “서울에는 비가 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서술이며, 그 서술을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서술권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RPG에서는 진행자와 참가자의 서술 영역이 다릅니다. 참가자는 보통 자신의 주인공의 행동, 반응 등이 서술 범위이며, 진행자는 주인공 외의 인물과 배경 세계가 서술 범위입니다. 즉, 원칙적으로 참가자는 주인공에 대해 서술권이 있으며, 진행자는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 서술권이 있습니다.

물론 서술권의 분리가 절대적이라면 놀이는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 따로 놀다가 끝날 뿐이죠. 그래서 RPG에는 자신의 원칙적인 서술 영역이 아닌 범위에 영향을 미칠 수단이 있습니다. 그 수단이란 크게 판정과 합의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갑이 조연 을을 설득한다고 할 때, 을의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보기에 저건 을이 설득당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을이 설득당한다고 서술할 수 있습니다. 즉, 갑의 참가자는 자신의 서술 영역이 아닌 을의 행동에 갑의 행동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려고 했고, 을의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여기에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해 그 서술을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서술 영역
외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 중 합의입니다.

반면 갑이 을을 설득하려는데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생각하기에는 을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거나 을이 설득당할지 불확실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갑이 설득이나 협박 등 판정을 통해 을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판정을 해서
갑이 성공하면 을은 설득당하고, 갑이 실패하면 을은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서술 영역 외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 중
판정
입니다.

그러나 판정으로 해결할 때에도 놀이 분위기가 건강하다면 어떤 종류의 합의는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판정으로 결과가 달라질 수는 있다는 합의이지요. 위의 예에서 참가자와 진행자는 을이 판정을 통해 설득당할 수는 있다는 합의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이 시점에서 갑이 무슨 짓을 해도 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판정을 애당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얘 마음은 안 변해. 끝.’으로 끝내면 갑의 참가자의 극적 욕구 (을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무시당하는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이 점을 상의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충족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자기 집이 날라갈 상황에서 말만으로는 씨도 안 먹힐 것 같은데, 그 부분을 해결해주면 어떨까?” 하는 논의가 된다면 그건 또 다른 모험의 태동이기도 하죠.

이때 판정으로 을이 설득당할 수 있다는 합의가 없는데도, 즉 진행자가 생각하기에는 아예 판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참가자와 그걸 조정하기 싫어서 을에게 말도 안 되는 높은 의지력을 부여하거나 갑의 판정에 역시 말도 안 되는 페널티를 주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파토에 한 발짝 다가선 증세입니다. 판정의 바탕에 있는 합의를 무시했으니까요.

위의 예로는 설득이라는 묘사적 규칙을 들었지만, 서사적 규칙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서사적 규칙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제안이 괜찮다 싶으면 합의로 그냥 갈 수 있고, 불확실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를 때 판정을 매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사적 규칙도 묘사적 규칙과 마찬가지로 판정을 할 때는 판정의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며 그럴 수 없다면 서로 상의하고 조정하겠다는 합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서사적 규칙이라고 해서 플레이의 기본 전제를 바꾸는 것은 아니며, 상호 존중과 예의의 중요성은 서사적 규칙을 사용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의외성의 4요소

RPG를 하다 보면 종종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재미이자 때로는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외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전에 역할극에 대한 글에 썼던 것을 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의외성의 첫 번째 원인으로는 정보 차단이 있습니다. 진행자가 다음에 무슨 적이나 상황을 내보낼지, 참가자가 진행자의 설정에 무슨 반응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겠지요. 같이 노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 서술권의 영역이 다른 점이 여럿이서 하는 놀이에서 의외성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로는 상이한 극적 욕구가 있습니다. 위의 정보 차단과도 관련이 있는데,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 같지 않은 만큼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긴장이 종종 예상치 못한 결과를 냅니다. 폴라리스 (Polaris)의 교섭 규칙처럼 아예 이것을 판정 규칙으로 활용하는 예도 볼 수 있고, 규칙상 위치는 없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밀고 당기는 균형과 긴장이 있을 때 의외성이 가장 커지겠지요.

세 번째는 인물과 상황의 극적 상호작용입니다. 글을 쓸 때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인물과 상황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A와 맺어주려고 했는데 자꾸 B하고 가까워진다든지, 치고받고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친구가 된다든지. 이렇듯 인물이 독자적 생명력을 띠기도 한다는 점이 보드게임과 다른 RPG의 재미이겠지요. 심지어는 사전 논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극적 욕구를 서로 조화했을 때도 실제 상호작용의 결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네 번째는 판정의 의외성입니다. 주사위나 카드 등 무작위의 요소가 있을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데, 계속 펌블이 떠서 형편없는 적에게 주인공 일행이 몰살당한다든지 비교적 강한 적을 한 방의 크리로 단칼척살해버린다든지 하는 때가 가장 의외이겠죠. 무작위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판정 과정 자체에서 정보 차단, 상이한 극적 욕구, 극적 상호작용 등 다른 의외성의 요소를 판정 규칙이 종종 끌어냅니다.

이렇게 의외성의 요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급했듯 의외성은 재미를 증진할 수도 있고, 재미를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의외성을 어떻게 하면 가장 적당한 수위로 조정할 수 있는가, 어느 요소를 살리고 어느 요소를 제한하고 싶은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역할극에 대한 생각

종종 규칙 없는 RP (소위 역할극, 역극, 혹은 소꿉놀이)를 함께 하는 오체스님과 얼마 전에 한 얘기인데, 오체스님은 개인적으로 규칙 없는 놀이가 가장 좋다고 하시더군요. (주사위만 나오면 불안해하시는 모습에 짐작은 했습니다만..(..)) 반면 저는 규칙이 있는 편을 선호하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역할극이 RPG와 다른 점은 크게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역할극은 놀이와 인간관계 사이에 분리가 없습니다. 진행 방향, 예를 들어 주인공이 괴물에게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문제는 모두 명시적, 혹은 묵시적 합의로 결정하고, 결정을 내릴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기준이 없으므로 결국은 놀이 속 인물의 문제가 아닌 그 놀이를 하는 사람의 의사소통이 됩니다. 객관적 기준이 없는 만큼 이러한 의사결정을 인간관계와 분리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요.

물론 규칙이 있는 RPG에도 규칙 없이 합의로 결정하는 영역은 광범위합니다. 캠페인 설정이라든지, 인물 설정, 때에 따라서는 놀이의 진행 방향 등. 그러나 서로 진행 방향에 대해 의견이 다를 때, 혹은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이 같아도 과정의 난이도나 따르는 대가에 대해 이견이 있을 때 이를 해소할 기준은 있습니다. (그 기준이 어떤 성격이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가장 좋은 규칙도 달라지겠지요.)

역할극에 그러한 기준이 없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은 보통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진행 방향에 대한 비생산적인 신경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를 생각해 서로 조심하고 눈치보면서 자신의 욕구와 극적 재미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배려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의 논리인 배려가 놀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면 어느쪽도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역할극도 감이 맞는 사람끼리 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하면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렵기는 합니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합의해야 하고, 플레이와 좋은 감정을 유지하려면 서로 더 조심해야 하니까요. 적어도 놀이와 인간관계 사이에 규칙이라는 기준의 방벽이 없는 만큼 마음껏 밀고 당길 여유는 훨씬 적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의견이 강하고 성격이 괄괄한 편이라 역할극을 할 때는 더 조심하게 됩니다. 특히 상대가 순응적인 성격일 때면 자칫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런 성격인 만큼 상대 역시 강한 의견으로 반대해 오든, 아니면 규칙을 매개로 스스로 원하는 방향을 밀든 활발하게 반대하고 논의하고 부딪치는 편을 선호합니다.

반면 성격과 취향에 따라서는 그런 전투적(..)인 의사결정보다는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화합을 더 중시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기 의견을 존중해주고 감각이 잘 맞는 상대가 있다면 상대에게 떠밀리거나 플레이가 재미없을 우려는 많이 줄겠지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상황, 그리고 놀이와 인간관계를 얼마나 분리하는 것이 본인에게 재밌느냐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RPG에 비해 역할극은 긴장감과 의외성이 적습니다. 긴장감과 의외성의 원인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같이 플레이하는 다른 참여자의 생각과 결정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둘째는 참여자가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 셋째는 인물과 상황의 상호 반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의외성, 넷째는 주사위나 카드 등 규칙에서 나오는 우연의 요소입니다.

역할극에서는 의외성의 네 번째 요소인 규칙은 일단 배제하고 있고, 두 번째인 역동적 균형 역시 위에서 얘기한 조심성과 상호 배려 때문에 약해질 여지가 큽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의견 충돌에 휘말릴 가능성은 커지고, 해소할 객관적 기준이 없는 만큼 이러한 충돌은 기피의 대상이 되니까요.

의외성의 첫 번째 요소인 정보 차단은 경과를 미리 얘기하고 정하는 것이 많을 수록 약해질 텐데, 역할극에는 위에 얘기한 이유로 의견 충돌의 완충지대를 둘 동기가 있으므로 제 경험상으로는 미리 정해두는 게 꽤 많아지더라고요. 남는 것은 의외성의 세 번째 요소인 상호 반응 정도인데, 이것도 경과를 이미 정해둔 정도에 비례해 약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긴장감과 의외성이 적다는 점 역시 취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장점일 수 있습니다. 긴장감과 의외성이 적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안정적이고 안전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플레이의 방향에 따라 인물이 죽거나 인간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되거나, 원치 않는 극적 방향으로 흐르거나 하는 결과를 미리 차단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특히 놀이 속의 인물과 특정 극적 결과에 애착이 크면 클 수록 이러한 안정성은 큰 매력이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이 역할극과 RPG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선호도야 있지만, 저에게 좋은 것이 다른 분에게도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자 원하는 게 다르니까요. 또한, 역할극을 하지 않는다 해도 놀이와 인간관계 분리의 정도라든지 의외성의 정도도 취향에 따라 조정할 수 있을 테고요. (다 규칙대로 하되, 참가자 동의 없이 주인공이 죽는 일은 없다든지.) 그런 점을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역할극은 흥미로운 소재인 것 같습니다.

판정 –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이런저런 RPG 규칙을 접하다 보니 RPG 규칙에는 가상현실을 다루는 것과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민님의 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과 같은 맥락이군요, 다 써놓고 나니..(..) 그 논지를 좀 더 상세하게 제 나름 발전시켰다고 생각해 주세요 (?).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가상공간의 물리법칙과 논리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힘센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성공적으로 들어올릴 확률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같은 일을 해낼 확률보다 높다든지 하는 식이죠. 가상현실에서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성공할 만한 것은 참여자의 공감보다는 그 물리법칙을 표현하는 규칙으로 판단합니다. 장기 캠페인을 받쳐줄 만한 규칙의 분량과 범위에 대한 논의라든지, 다양한 상황을 표현하려면 규칙은 많은 게 좋다는 주장의 전제에는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D&D, 겁스 (GURPS), 7번째 바다 (7th Sea), WoD (World of Darkness) 등 제가 아는 모든 상용 규칙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퍼지 (FUDGE),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미딕 (Mythic Roleplaying),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 등 많은 인디 RPG도 마찬가지죠. 판정은 기본적으로 실력과 상황 수정치에 따른 확률을 이용하는 굴림이며, 낙상이나 익사, 폭발 등 다양한 상황을 처리하는 규칙이 있기도 합니다.

반면 위에서 예를 든 규칙책에도 가상현실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규칙도 있습니다. D20 계열이나 변형에서 볼 수 있는 액션 포인트라든지 겁스에서 추가 규칙으로 할 수 있는 CP 소모, 7번째 바다의 극주사위나 배경 규칙, WoD의 의지력 규칙, 미딕의 무작위 사건 생성 규칙, 과거의 그늘에서 특정 조건에 맞는 RP를 하면 성장하는 열쇠 규칙 등이 그 예입니다.

이들 규칙은 가상현실 속에 있는 등장인물의 실력이나 의지보다는 참여자의 극적 욕구를 반영하며, 가상현실 법칙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가상현실의 법칙에 저항하거나 서술을 조작합니다. 즉,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룬다는 면에서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규칙과는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상현실 법칙이 아닌 플레이의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을 판정의 근간으로 삼는 규칙도 더러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도전-응대식 판정, 폴라리스 (Polaris)의 서술 교섭,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의 반박 경매 규칙,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의 장면 판정 등이 그 예이지요. 서술권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진행자의 역할인 만큼 참가자에게 서술권을 많이 주는 규칙일 수록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 분배도 분산적 성격을 보입니다.

이들 규칙책에서는 물리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는 참여자 간 공감으로 해결하며, 정말로 판정이 필요한 때는 극적 방향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입니다. (참가자: ‘경비를 다 죽여요!’ 진행자: ‘경비는 다 죽습니다!’ 참가자: ‘마왕도 죽여요!’ 진행자: ‘음… 그건 판정을 해볼까요?’)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아무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달을 쏘아서 적의 머리에 떨어뜨려요’ 같은 선언도 통과합니다. 수정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면 ‘장군은 한 달음에 산을 넘어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였다’ 같은 글도 역사적 진실이 됩니다. (신화적인 분위기라면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을 중시한다면 포도원의 개들이나 안방극장 대모험 같은 규칙은 장기 캠페인을 하기에는 빈약하다거나, 상황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속의 법칙을 표현하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까요. 반면 저는 가상현실 표현보다는 극적 욕구 연출이 훨씬 우선이라 가상현실 표현 때문에 극적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잘 참지 못해서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 쪽을 선호합니다. 결국 어느 쪽이 우선이느냐, 혹은 극적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을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겠죠.

참고로 극적 욕구나 연출 얘기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마음대로 가야 성이 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나리오 중심 진행은 거의 가상현실 중심 규칙의 특권에 가깝습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규칙은 시나리오에 나올 만한 요소들을 바로 움직일 수 있으므로 누구 한 사람이 앞으로 이야기를 예상하거나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규칙을 할 때는 다른 참여자와 의견이 충돌하고 그 충돌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극적 의외성과 역동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는 부담이 적거나 없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매력적이고요.

대비해 놓기는 했지만 물론 가상현실 표현과 극적 요소의 조작은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죠. 예를 들어, 제가 얘기한 극적 욕구와 가상현실의 충돌 부분을 많은 가상현실 중심 규칙에서는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으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번 판정은 극적 욕구상 꼭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가상현실 법칙상 확률이 낮아서 극점수를 소모한다든지요. 그런 규칙은 자원 관리 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술적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심심해서 제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규칙이 RPG의 재미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기준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표현이 자신의 재미에 얼마나 중요한지,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것이 몰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 이러한 판단은 전에 적었듯 규칙의 선택, 수정, 제작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바와 나 – 내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

2004년 12월, 처음 RPG를 시작했을 때 저는 RPG라는 취미가 어떤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처음 찾은 것이 존 킴 (영문)의 글, 그리고 제가 처음 가입한 RPG 사이트였던 다이스&챗 강좌/토의 란에 있는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였습니다.

바바의 글은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것 같고, 저도 그의 논지에 모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링 강좌를 비롯한 그의 글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제가 RPG를 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재해석이나 비판도 들어갔지만요.

그래서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같이 토론해볼 수 있게 제가 바바 히데카즈의 글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RPG는 게임이다 (+ α)

아마도 제일 논란이 큰 대목인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적습니다. 바바 히데카즈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RPG는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으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수준 향상을 할 수가 없으므로 RPG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발전도 없으니까 게임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는 것이 저의 이해입니다.

즉, ‘RPG는 게임으로밖에 할 수 없으므로 게임이다’라기보다는 ‘RPG는 게임으로 해야 질리지 않고 오래 하므로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논해야 한다’는 것이 바바 히데카즈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규범적인 논의라기보다는 논리적 범주의 논의이기는 했지만 RPG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오는 게임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요지로 글을 쓴 적도 있죠. 특히 규칙하고 관련해서 플레이 내용상 중심적인 부분을 규칙의, 즉 게임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그에 따르는 효과를 활용하면 더욱 즐거운 플레이가 되니까요.

그러나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은 옳긴 옳되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RPG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게임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것은 바바가 주장하는 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RPG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것이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게임이 아니어도 RPG에서 방법론을 고려하면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주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서사, 서술, 혹은 극(劇)입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첫 번째 이유는 RPG에는 게임적 요소 외에도 극적 요소가 있어서입니다. 이것은 바바가 혐오해 마지않는, 방법론이나 발전이 없는 규칙 무시성 덩실덩실 RPG뿐 아니라 계속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RPG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RPG가 게임이라는 것만으로는 RPG를 논하기에 불완전하다고 봅니다.

바바가 RPG의 극적 요소를 논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 배경이 있기는 합니다. 체계도, 방법론도, 규칙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재밌으면 그만이야’ 식의 시장 전략이 일본 RPG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 바바가 얼마나 이를 가는지 보면 이해할 수 있죠.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 자체는 맞지만, 어떻게 하면 재밌는데?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 방법론이 부재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바가 글을 썼던 특수한 배경일 뿐이지 RPG 에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도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RPG의 게임성에 충실하다 보면 극적 서술은 저절로 나오니까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극을 돕는 도구로써 규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저도 규칙이 서사와 따로 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사를 뒷받침하는 플레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도구성 참조.)

그러나 저처럼 규칙과 서사의 관계를 밀접하게 본다 해도 규칙과 게임성은 서사를 도울 뿐이지 서사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극적 감각이나 집단적 서술의 흐름에는 게임성과는 다른 방법론과 발전 방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능력치를 서술해서 판정에 추가로 주사위를 얻는 것은 게임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순간에 어떤 능력치를 어떤 식으로 서술하면 재미있을지는 극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쪽을 잘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쪽도 잘한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술에도 방법론과 발전이 있다는 점은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와 바로 이어집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는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에서도 수준 향상을 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바바의 주장에는 규범적인 데가 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게임이 아니면 수준 향상을 논할 수 없고, 수준 향상이 없으면 RPG계에 발전이 없으므로 게임 아닌 RPG는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러나 게임이 아닌 극적 영역에도 분명 방법론을 세우고 수준 향상을 꾀할 수 있습니다. RPG와 영화나 소설의 기법을 접목한다든지, 즉흥극과 RPG를 연계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시도, RPG 특유의 집단적 서술을 다루는 이론과 방법론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바는 RPG가 게임이 아니라면 연기 지도를 받을 수도 없지 않느냐며 발전의 여지를 부인하지만, 실은 게임이 아닌 영역에서도 발전을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있으며 계속해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RPG에 게임이 아닌 영역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RPG계에 해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이 아니면 발전도 없다는 전제야말로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보고요.

2. RPG를 정말 즐기려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바바가 쓰는 모든 글의 진짜 핵심이며, RPG는 게임이며 게임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이에 잘못된, 정확히는 불완전한 논리 단계가 들어가서 RPG는 게임이라는 결론에도 불완전한 데가 생겼다는 점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RPG를 질리지 않고 계속 즐기려면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흠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라면 RPG에서 계속 높은 수준을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놀이를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제 생각에 RPG의 고유한 재미는 극과 게임성, 사회성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이중 어느 한두 가지에서 RPG보다 우월한 오락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준 높은 극적 재미만 생각한다면 책이나 영화가 나을 수도 있고, 게임성만을 생각한다면 CRPG나 체스가 나을 수도 있겠죠. 함께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냥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서 높은 자유도를 추구할 때에만 RPG를 하는 진짜 의미가 나오면서 다른 활동에 대한 비교우위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의 요소를 의미있게 결합하려고 하면서 발전의 필요성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제가 RPG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강박적으로 글을 쓰니까 바바 히데카즈의 영향입니다. 발전을 추구하면서 RPG를 정말 재미있게 즐기려면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400편을 넘어가는 글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어떻게 하면 더 재밌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답입니다.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최종 결론은 없지만, 그 모색 자체가 즐거움이기도 하죠.

3. 규칙을 많이 접해라

또 하나 많이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면 규칙을 여러 가지 접해보라는 충고였습니다. 당시에는 갓 시작했던 차라 D&D 클래식과 AD&D 정도밖에 몰랐는데, 그 얘기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다양한 RPG를 읽고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상한 규칙만 합니 어떤 규칙이 어떤 용도에 적합한지, 끌어올 수 있는 시도나 발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 취향에 맞는 규칙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익혀갔고 플레이도 그만큼 풍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4. 규칙은 중요하다

바바 히데카즈의 파워 플레이와 론 에드워즈의 System Does Matter (영문)에 특히 영향을 받아 제 나름 생각해본 것이 규칙의 도구성이니 규칙의 효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규칙의 중요성을 정리하자면 규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경향성을 형성하기는 하며, 이러한 효과가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제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들입니다. 이해한 바에는 변형도 있고 가미도 있지만, 결국 핵심은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실험,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RPG는 그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한 놀이이며, 그런 끝없는 새로움이 제게는 RPG의 진짜 재미이니까요.

규칙은 도구다

세션 게시판을 검색하다가 천승민님의 1년 전 글 룰의 본분을 우연히 보고 쓰는 답글입니다.  원문이 옛날 글이라서 승민님의 현재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조심스럽지만, 예전에 RPG에서 규칙의 영역이라는 글에서 한 토론과 연관성이 보이고 규칙의 영역을 더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승민님의 블로그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에 나름 반론이라면 반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쪽에 엮습니다. (황무지에 업데이트를 보고 싶어서 그런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정합니다 (?))

규칙의 도구성

기본적으로 저는 규칙, 혹은 룰은 플레이를 돕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승민님 글에 달린 덧글 중 신승백님이 말씀하시는 지향성의 문제죠. 철저하게 전술적이고 수치화된 워게임식 전투 중심이 원하는 플레이의 형태라면 D&D 3.5는 더없이 좋은 규칙, 즉 도구입니다. 반면 인물의 배경과 인간관계, 감정 등이 원하는 플레이의 중심이라면 승민님과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이유로 규칙과 서사는 두 마리 토끼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후자와 같은 플레이를 D&D 3.5 규칙을 사용해서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할 수 있고, 그런 훌륭한 서사적 플레이도 실제로 많이 나와있죠. 하지만, 규칙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려고 할 때 (피트와 클래스, 수치 등) 플레이의 중요 사항 (망국의 엘프 왕자)에서 주의가 분산된다면 그 분산을 극복하려고 소모하는 시간과 에너지는 효율 면에서는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규칙의 여백

신승백님께서 말씀하신 AD&D에서 나타난 현상도 꽤 일반적입니다. 애매모호한 부분, 즉 규칙이 허술하거나 다루지 않는 부분에서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 말이죠. 저도 WoD 계열 규칙에 대해 생각이 같은데, 사실상 WoD가 정말로 지향하는 플레이는 바로 이 애매모호한 부분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거든요.

제가 그나마 조금 아는 뱀파이어를 예로 들면, 뱀파이어는 정치적 플레이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규칙에서 정치물을 지원하는 지향성은 별로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반 기능 판정과 동료, 연줄 등 몇 가지 장점은 있지만 정치적 구조라든지 인간관계 그 자체를 다루는 규칙은 없는 걸로 알거든요. 결국 정말로 정치적인 플레이는 규칙과 별로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진행자가 재량에 따라 상황을 만들고, 참가자가 그 속에서 필요에 따라 기능 판정을 하기도 하고 제안을 하기도 하지만 규칙은 정치적 상황의 내용은 다루지 않죠.

규칙을 타는 플레이

이처럼 규칙이 비는 부분에서, 말하자면 ‘규칙을 피하며’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D&D 3.5가 수치화된 전술적 전투를 재미있게 지원하듯, 극적이고 서사적인 캠페인이라든지 미묘한 연애 심리, 비정한 정치, 가슴 아픈 비극 등을 직접 규칙의 내용으로 다루는 규칙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규칙을 피하는 대신 규칙의 흐름을 타고 플레이하는 것이죠. 규칙과 플레이 스타일이 두 마리 토끼가 아닌 한 마리 토끼, 아니면 최소한 한 방향으로 나란히 달려가는 두 마리 토끼가 되는… 이 대목이 위의 ‘규칙의 영역’ 글에서 승민님과 토론했던 부분, 즉 어떤 부분이 규칙의 영역에 적합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부분과도 닿는 것 같습니다.

규칙과 서사가 두 마리 토끼가 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묻는다면 뭐, 재미가 있다면 딱히 문제는 없다는 것이 1차적인 대답입니다. 예전에 승한님이 쓰신 RPG의 전제에 대한 답글에서 성일님도 말씀하셨듯, RPG는 자신이 재미있는 것만한 게 없죠. 다만, 플레이의 진짜 지향점을 규칙의 여백에서 다루는 방식은 개별 취향을 벗어나 순수히 효용적인 분석을 할 때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위에 링크한 규칙의 영역 글 본문에서 다룬 내용과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규칙의 영역’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여기서도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뱀파이어 예시를 확장해 보죠. 뱀파이어 규칙에 몽테뉴 궁정음모 규칙처럼 폐쇄된 사회 (예를 들어 한 도시의 혈족 사회) 내에서 복잡하게 얽힌 부탁과 협박, 비밀 관계를 다루는 규칙을 넣는다고 가정해 보지요. 여기서 궁정음모 규칙이 그 목적에 비추어 얼마나 완성도 높은 규칙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좀 있지만, 어쨌든 뱀파이어의 지향이라고 하는 정치를 직접 다루는 규칙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논의를 진행합니다.

규칙의 영역

규칙의 영역을 다룬 이전 글에서는 어떤 내용이 규칙의 영역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효과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영역 내에서 하는 행동에 일정한 경향성을 형성한다는 점, 두 번째는 참가자가 상당 부분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형성력을 갖는 영역이 된다는 점. (첫 번째 효과는 원문에서는 ‘포상’이라는 말을 썼었고 승민님은 진행자의 일방적인 포상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신 것 같은데, 저는 진행자의 포상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규칙 자체의 포상, 즉 규칙상 유리한 방향으로 참가자 행동이 형성되는 경향성이 생긴다는 얘기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경향성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사용하겠습니다.) 뱀파이어 규칙에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하면 이 두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차례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행동의 경향성. 어떤 규칙이 있으면 참가자는 그 규칙 속에서 가능하면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1차적 반응이고, 이것이 규칙이 형성하는 경향성입니다. 이 경향성은 물론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규칙상으로 불리하지만 인물 설정에는 어울리는 선택을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선택 관계여야 할까요? 규칙상 유리한 것이 곧 설정에 어울린다면, 그리고 플레이 스타일에 어울린다면 ‘이기려는’ 본능을 극복하면서 굳이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 없이 이기려는 본능이 곧 캐릭터나 플레이 스타일을 돕도록 할 수 있으니까요.

뱀파이어에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한다는 예시도 같은 맥락입니다.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하면서 규칙상 유리하려면, 곧 이기려고 한다면 우선 남의 부탁을 많이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부탁 점수가 쌓여서 필요할 때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 부탁을 들어주면 부탁 점수가 얼마나 쌓일지, 이 부탁을 하면 자기 부탁 점수가 얼마나 깎일지 하는 의사판단이 플레이의 중심이 되고, 이것은 실제로 부탁과 의무 관계가 복잡하게 쌓이는 폐쇄적이고 정치적인 사회에서 내리는 의사판단과 방향을 같이합니다. 부탁을 하고 들어주는 것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RP와 판정도 들어가므로 그런 의사판단의 과정에서 사건과 서술 또한 쌓여가고요. 이런 식으로 규칙이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 규칙을 피하는 대신 규칙의 흐름을 타는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탁을 들어주는 건 가장 정석적이고 안전한 방법일 뿐이고, 좀 더 빠르지만 위험한 방법으로는 남을 협박하는 것도 있습니다. 협박으로 생기는 유용성 점수는 스스로 부탁 점수를 쌓을 필요가 없다는 점, 즉 대가성이 없다는 점에서 부탁보다 훨씬 효용은 높지만 대신 인간관계는 한층 나빠지고, 이 협박을 우려먹을 때마다 상대가 적이 되는 날은 가까워져 옵니다.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 타기도 정치 플레이의 또 다른 재미이고, 동시에 중요한 규칙상 (혹은 게임적) 의사판단이기도 하죠.

음모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일반 플레이에서도 이러한 경향성은 진행자, 때로는 참가자가 생각하는 상식만큼 나타나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규칙에 그게 들어갔을 때만큼 직접적인 의사판단의 대상이 되거나 참가자 행동의 경향성을 강하게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관점에 따라서는 그게 오히려 장점일지도요. ‘규칙의 영역’에서 승민님이 말씀하신 반복성이나 제약성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역을 다루는 규칙이 없이는 내가 저 인물을 협박하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부탁을 들어주면 그가 내 부탁도 들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진행자의 재량에 따라 꽤 폭넓게 형성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합의에 따른 플레이라 해도 각자의 영역은 대개 존중되니까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이지요. 이 점은 규칙의 두 번째 효과, 즉 참가자의 독자적 상황 형성권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둘째, 참가자의 독자적 판단과 형성권. 일단 규칙의 영역에 들어온 사안은 진행자의 재량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면서 참가자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되므로 그만큼 참가자의 상황 형성권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이고 엄격한 규칙일수록 진행자가 그 규칙에 반해서 규칙에 기반을 둔 참가자 판단을 부인하려면 무거운 ‘입증 책임’을 지게 되니까요.

다시 뱀파이어의 예로 돌아가면, 혈족인 철수는 나중에 영희에게 무슨 부탁을 할 날을 대비해서 열심히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죠. 그러던 어느 날, 철수가 뒤에서 조종하는 기업에 유리하도록 영희가 조종하는 언론사에서 기사를 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궁정 음모 규칙을 사용하지 않을 때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이 부탁은 영희가 안 들어줄 것 같다면 진행자 재량으로 안 들어줄 수도 있고, 합의에 따른 플레이라 하더라도 참가자가 능동적으로 목소리를 내서 ‘내가 영희에게 이러이러한 부탁을 들어줬으니 영희도 이런 부탁 정도는 들어줄 것 같다’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궁정음모 규칙 같은 것을 사용해서 영희에게 들어준 부탁 점수가 4점이 있고 철수가 하는 부탁은 2점이라면, 왜 영희가 부탁을 안 들어주는지는 진행자가 설명할 몫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참가자가 항변할 수 있는 기반도 한결 강해지지요. 그만큼 뭔가가 규칙의 영역에 들어오면 참가자가 독자적으로 예측하고 판단해서 상황을 형성할 여지는 넓어집니다.

규칙의 본분?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규칙과 서사는 논리필연적으로 선택관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워게임에서 시작한 역사적인 이유가 작용해서 규칙의 영역은 전투와 다른 판정, 물리규칙 정도로 제한된다고 흔히 생각하기도 하지만, 다른 영역을 다룸으로써 그 영역에서 규칙의 효과 (경향성 형성, 서사에 대한 참가자 재량 확대)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듯 규칙에 본분이 있다면 플레이를 편하게 하는 도구로서이며, 원하는 플레이스타일을 구현할 때 규칙에 저항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는다면 그 구현은 한결 편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유형론

Georgios님이 쓴 진행자 유형을 허락을 받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독일어였고 원작자가 영어로 옮긴 걸 제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으니 벌써 3개 국어..(..) RPG는 국제적인 취미인 겁…

로빈 로스의 참가자 유형은 RPG 조언의 고전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진행자는 참가자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가정을 깔고 있어서이다. 물론 책은 참가자가 아닌 진행자가 대상이기는 했지만, 참가자 유형을 알아보는 것은 절반일 뿐이고 정말 재미있는 플레이를 하려면 진행자의 흥미와 욕구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진행자 유형을 정립하는 시도를 했다. 많은 의견과 활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주의사항: 로스의 참가자 유형과 마찬가지로 진행자 유형도 당연히 배타적이지 않다.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진행자는 둘 이상의 유형에 속한다. 또한, 같은 유형에 속하는 진행자라고 반드시 진행 방식이 비슷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진행자 기대치를 파악하는 시작점으로는 제기능을 하리라 본다.)

세계 창조자는 깊이 있는 배경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세계는 얼굴없는 인물이 단조로운 건물 사이를 배회하는 무미건조한 장소가 아니다. 역사가 있는 세계, 다양하고 흥미로운 풍경, 살아 숨쉬며 무궁무진한 세부사항을 자랑하는 세계와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인물 군상이 있는 곳이다. 세계 창조자는 RPG 자료집, 참고 서적과 다큐멘터리, 장르 문학 등에서 엄청난 양의 자료를 가져다가 배경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배경은 그의 작품이며 참가자는 그의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일: 세계 창조자와 플레이한다면 배경에 관심을 두고 그 세밀함을 즐기는 것이 좋다. 특히 진행자가 기존 배경을 사용한다면 많은 참조와 의도적인 모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투가는 참가자와 경쟁하는 진행자이다. 그는 주인공 일행의 적수가 되는 것을 즐긴다. 그에게 플레이는 일행이 무엇인가를 걸고 싸울 때에야 비로소 시작한다. 그렇다고 결투가가 전투에만 가치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참가자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게 얻은 승리, 참가자들이 아슬아슬하게 패배를 피하는 상황을 좋아한다. 하지만, 참가자가 좋은 전술과 전략을 보이면 그들이 쟁취한 승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규칙 판정을 엄격하게, 하지만 공평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승리는 무의미하다.

스타일: 결투가와 플레이한다면 도전을 회피하거나 전술·전략 외의 이유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결투가형 진행자에게서 뭔가 얻어내려면 반드시 노력이 들어가며, 계속해서 실력을 보여야 한다. 결투가의 말은 곧 법이지만, 명예의식 또한 강하므로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편파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

구성의 대가는 자신을 모든 실을 조작하는 인형술사로 여긴다. 그는 참가자들이 풀어내야 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성을 만들어 낸다. 그에게 배경 세계는 장소라기보다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인과의 그물이다. 따라서 때로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발단이 놀라운 반전과 복합적인 줄거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구성의 대가는 참가자들을 계속해서 교란하고 놀라게 하되, 돌아보면 일관적이고 말이 되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스타일: 진행자가 구성의 대가 유형이라면 플레이 내 사건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아무리 작은 세부 사항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퍼즐 조각을 모두 참가자에게 쥐여주는 것을 즐기지만, 맞추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참가자들은 지속적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로 가설을 주고받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가정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플레이 내에서 시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식전(式典) 책임자는 분위기와 몰입감이 넘치는 플레이를 중시한다. 그는 참가자들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독특한 플레이를 진행하고 싶어한다. 현장감을 생생히 살리는 온갖 장치를 사용하는 것도 이 유형의 특징이다. 조명, 배경 음악, 소품, 전단 등. 각 조연의 대사와 행동에 진정성이 있는 것도 식전 책임자 유형에게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에게 RPG는 무엇보다 하나의 경험이자 현실 도피이다.

스타일: 식전 책임자와 잘 지내려면 최대한 몰입하고 농담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엉뚱한 순간에 잡담을 하거나 분위기를 깨는 행동을 하는 것은 미움을 사는 지름길. 이 유형은 특히 주인공 입장에서 벗어나 순수히 참가자로서만 하는 플레이를 싫어한다. (순수한 전술적 플레이도 여기 들어갈 수 있다.)

배우 유형 진행자는 모든 노력을 조연에 쏟아붓는다. 그는 참가자에게 개성 넘치고 특이한 조연을 선보이고 싶어한다. 배우 유형에게 배경 세계는 인물들의 호오(好惡)와 장단점이 중심이 된다. 그에게 RPG는 곧 인물간 상호작용이다. 그러려면 물론 각 조연에게 규칙이나 제약에 제한받지 않는 일관된 성격이 있어야 한다. 배우 유형은 각 인물이, 그리고 그들과 참가자의 관계가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스타일: 배우 유형 진행자와 잘 지내려면 주인공에게도 개성이 있어야 한다. 참가자가 조연과 그들의 행동 동기를 알게 되듯 배우 유형은 참가자 인물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어한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는지. 인물 행동에 모순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떤 내적 갈등이나 충돌이어야 한다. 인물 행동의 일관성에 참가자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이유여서는 안 된다.

감독 유형은 RPG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매체로 여긴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꾸며가려고 그는 모험 구조, 도전, 극적 갈등 등 RPG 내적 수단뿐 아니라 그가 아는 모든 서사 예술에서 장치를 끌어온다. (3막 구조, 장르 법칙, 영화 언어 등.) 감독형 진행자는 중요한 대목을 플레이하는 데만 관심을 보인다. 줄거리를 진행하거나 인물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하는 장면이라면 피하거나 잘라버리기 십상이다.

스타일: 감독 유형은 참가자들도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를 기대한다. 즉, 이야기를 만들어갈 기회를 찾아서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행자는 참가자가 상황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서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을 즐긴다.

제공자는 플레이에 자신만의 욕구가 없는 유형이다. 그의 재미는 곧 참가자가 느끼는 재미이다. 많은 제공자는 모두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즐기며, 종종 진행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진행을 잡곤 한다. 모험은 종종 참가자 선호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또한, 참가자 권한이 많은 편이 참가자에게 재미있다면 제공자형 진행자는 언제든지 참가자에게 권한을 넘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늘 참가자와 기대치를 타협할 의무를 느낀다.

스타일: 제공자 유형과 잘 지내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참가자가 이 유형을 가장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공자도 두 가지 경우에는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 우선, 참가자는 대충이라도 자신이 RPG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공자형 진행자에게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과 실제 선호가 다른 참가자이다. 또한, 제공자는 다른 어떤 진행자보다 플레이가 재미있었다는 확인을 바란다. 진행을 잘했으며 플레이가 즐거웠다는 말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제공자를 소진으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다.

각 유형 설명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유형에도 부정적인 변형이 많다. 결투가는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킬러 진행자가 될 수 있으며, 구성의 대가 중에는 대가는커녕 준비조차 제대로 안 해서 모험 내용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진행자도 보인다. 세계 창조자는 자기 창조물에 넋을 잃고 끝없는 장광설이나 쓸데없는 묘사로 참가자들을 지루하게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작용은 이들 진행자 유형의 잘못된 모습이며, 이를 이유로 진행자의 다양한 욕구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진행자 유형론을 번역해보았습니다. 의구심이 든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진행자도 자신만의 욕구와 필요가 있는 참여자라는 생각의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또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옮겼습니다.

보면서 그동안 제가 겪은 진행자 유형을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더군요. 예를 들어 아루스 캠페인 진행자 아사히라군은 결투가 성향이 강한 것 같았고, 7번째 바다 플레이를 함께했던 란님은 구성의 대가, 언더월드 진행자였던 제노시아님은 세계 창조자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진행자도 유형만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진행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대응하면 서로 재미있는지, 나에게 맞는 진행자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면 더욱 풍요로운 RPG 생활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RPG의 기능적 구분 – 설정, 진행, 참가

지난번에 Wishsong님과 성일님의 글에 답변하면서 떠오른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RPG, 혹은 다른 놀이를 할 때 참여자가 맡을 수 있는 기능에는 크게 설정, 진행, 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의 초기 조건을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정하는 것이고, 진행은 설정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참가는 참가 수단 (RPG의 경우는 인물)을 움직여서 설정의 초기 조건을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수정 (07/06/24 08:19): 성일님의 반론대로 진행과 참가의 구분은 인적 구분이 개입한 면이 큽니다. 참가는 진행 중 서술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정리해보고 싶으니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보통 RPG에서는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의 역할, 참가는 참가자의 역할입니다만, 일반적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가 설정과 진행 권한을 나누어 가질 수도 있으며, 설정과 진행 일부를 규칙책과 카드에 맡겨놓고 진행자 없이 참가자만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인적 구분이라면, 사람이 아닌 기능에 따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기능적 구분입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부 구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리가 평소 놀 때 하는 각 활동이 전체 놀이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효용이 있겠지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각 상세 구분마다 제가 아는 규칙의 예를 들겠습니다.

1. 설정

1.1. 배경 설정

놀이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진행자 권한으로 전부 설정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모두 아는 배경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주로 상황 설정의 맥락이 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2. 상황 설정

놀이의 틀이 될 극적 상황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인물 설정에 제약이자 맥락 역할을 하며, 배경 설정을 의미 있게 활용하는 초점이 되기도 합니다.

1.3. 계획

놀이 속에서 벌어질 사건의 전개나 향방을 정하는 기능입니다. 반드시 소설이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하는 것은 아니고, 시나리오의 종류에서 다루었듯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진행자의 영역이지만,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다룬 성일님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참가자가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많은 순기능이 있습니다.

1.4. 장면 설정

미시적인 설정 기능으로, 한 장면의 초기 조건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습한 지하실입니다’ 하는 식으로 시작해서 이 장면에서 참가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설정의 다른 세부 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장면 설정은 특히 진행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진행 기능에 속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를 두고 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설정에 들어갑니다. 장면 설정도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이지만, 역시 참가자의 의견을 받기도 합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은 장면 설정 처리에서 흥미로운 데가 있는데, 각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원하는 장면을 얘기하는 장면 신청 규칙이 그것입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참가자는 ‘김 장군하고 박 장군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이끌 것인가 조정 앞에서 결판이 나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식으로 원하는 장면을 PD에게 신청합니다. 장면의 결말은 정하지 않고 (둘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지휘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김 장군, 박 장군), 장면의 배경은 무엇인지 (조정), 장면에 나올 사건은 무엇인지 (북방 원정군 지휘관 결정) 얘기하는 형식이지요. 그러면서 서로 제안도 주고받으며 (“조 부인을 사이에 둔 감정 문제도 나오면 재밌겠다”라든지)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의 과정이 있든 없든 각 참가자에게 규칙으로 이러한 장면 설정권을 보장(강제?)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장면 신청 규칙의 부수적 결과라면, 장면 설정 권한을 참가자들에게 주기 때문에 진행자 (PD)에게는 장면 설정권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신청 사항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권한은 있고 또 언제든지 제안이나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장면의 뼈대를 구성하는 창의적 권한은 기본적으로 참가자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진행자가 장면을 구성하고 참가자는 제안만 하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2. 진행

2.1. 서술

놀이 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정의 초기 조건이 변하는 것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기능입니다. 종종 참가에 반응해서 나옵니다. ‘고요한 연못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장면 설정, ‘돌을 던져요’가 참가라면 ‘크툴루가 튀어나옵니다’는 서술일 것입니다. 역시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에 들어갑니다.

폴라리스 (Polaris)는 서술 중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의식(儀式) 언어를 사용한 교섭으로 처리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서사나 설정의 영역도 넘나들지만…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노란색으로 강조한 글자가 의식 언어입니다.)

마음: 강 도령은 “이 간신 놈!” 하고 외치며 이 대감의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
후회: 하지만 그러려면 그 순간 포졸들이 들이닥쳐야 한다.
마음: 그리고 또한 강 도령과 장래를 약속한 선화 낭자가 이 대감의 딸이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선화 낭자’를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복수가 부르는 비극’을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마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강 도령의 축복 중 ‘하인 돌쇠’를 발동해서 울부짖는 선화가 아버지의 죽음을 못 보게 돌쇠가 막았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의 효과로 마지막 서술을 대폭 수정)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아버지를 죽인 강 도령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마음: 일의 전말은 이와 같았더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서술을 받아들이고 갈등을 끝냄.)
후회: 이 대감이 죽어가는 사이 포졸들은 강 도령을 포위하고…

폴라리스의 교섭 규칙은 이처럼 의논이나 합의가 아니라 규칙으로 서술상 의견 충돌을 해소하는 점이 특이합니다. 게다가 서로 기본적으로 적수인 ‘마음’과 ‘후회’는 서로 제안이나 이견 조율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양보 없이 각자 의견을 밀고 나가면서도 일관성 있는 결론을 낼 수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2.2. 조연 RP

넓은 의미에서는 서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조연을 움직이는 것도 진행의 한 가지 기능일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과 조연을 오가는 인물도 있는 만큼 (여러 인물을 참가자와 진행자가 돌려가며 맡을 수 있는 아르스 마기카가 좋은 예죠) 늘 뚜렷한 구분은 아닙니다.

위에서 얘기한 폴라리스에서는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누어서 맡는데, ‘후회’가 전통적인 진행자에 가장 가깝지만 주인공과 사회적, 권력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남자 조연은 ‘보름달’이, 정서적, 감정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여자 조연은 ‘그믐달’이 맡습니다. 조연의 행동은 ‘후회’ 혹은 ‘마음’이 특수 교섭 언어로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2.3. 서사

역시 넓은 의미로는 서술에 들어갑니다만, 주인공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범위에서 생기는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좀 더 거시적으로, 주인공들이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는 범위에서도 배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사라고 조금 욕심을 내어 구분해 보았습니다. 서술과 마찬가지로 참가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참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도적 길드 마스터를 죽여서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옆 나라에서 홍수가 나서 난민이 몰려드는 것은 후자의 예입니다.

2.4. 규칙 운용과 해석

판정의 과정과 결과를 규칙에 따라 서술하고 해석하는 기능입니다. 규칙을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고, 참가자가 개별 판단에 따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단순 서술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규칙으로 규정한 영역에 발생하는 두 번째 효과를 참조하시길. 진행자가 최종 결정권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참가자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로 이러한 마찰의 핵심은 규칙의 올바른 해석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주도권 혹은 참가의 의의가 살지 않는다는 불만의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긴 하지만요.

3. 참가

3.1. 인물 설정과 변화

놀이 속 사건의 주체이자  참가의 수단이 될 인물을 설정하고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참가자 인물 (주인공, PC) 설정을
통해 보통 참가자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설정 기능이기도 합니다. 조연 (NPC) 설정은 배경이나 상황 설정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참가의 기본 틀이며, 참가자의 욕구를 표시하는 중요한 신호가 되어 설정, 진행 기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보통 인물 설정은 참가자 한 명의 권한으로 생각하지만, 이 과정에 진행자와 다른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습니다.

3.2. 선언

참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에서 나온 주인공 행동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에는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라는 전술적 판단, 이 장면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고 싶다는 극적 욕구, 인물의 성격과 배경에는 이런 것이 어울린다는 인물 자체의 성질 등 많은 층이 있습니다. 보통은 개별 참가자의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 제안, 의논, 혹은 합의가 들어갈 수 있겠죠.

3.3. 판정

선언의 일종이지만 위의 규칙 운용과 해석에서 말했듯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한 전술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규칙을 매개로 놀이에 참가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수치상의 능력만 들어가고 주인공의 배경이나 정서, 인간관계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수치상의 능력에 주인공 자체의 특징이 들어간다면 그러한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라면 ‘명사수 1d6’과 마찬가지로 ‘어려서 당한 사고 때문에 다리를 전다 1d6’도 판정에 도움이 되고,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이라면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 면모를 발동해서 판정에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용하려면 이러한 능력치나 면모가 판정에 들어가야 하므로 이런 내용은 판정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에도 영향을 주고, 이렇게 해서 생기는 ‘이야기’는 판정의, 그리고 참가의 또 다른 층을 이룹니다.

이처럼 일단 거칠게 설정, 진행, 참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잡아보았습니다. 말했듯 이 구분을 칼같이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각 활동이 놀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데에 효용이 있는 구분이긴 하지만요. 논의와 사고의 틀이 되는 하나의 도구일 뿐, 이리 비틀고 저리 끼우다 결국 부러지면 버리고 더 좋은 걸 만들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