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 –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이런저런 RPG 규칙을 접하다 보니 RPG 규칙에는 가상현실을 다루는 것과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민님의 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과 같은 맥락이군요, 다 써놓고 나니..(..) 그 논지를 좀 더 상세하게 제 나름 발전시켰다고 생각해 주세요 (?).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가상공간의 물리법칙과 논리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힘센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성공적으로 들어올릴 확률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같은 일을 해낼 확률보다 높다든지 하는 식이죠. 가상현실에서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성공할 만한 것은 참여자의 공감보다는 그 물리법칙을 표현하는 규칙으로 판단합니다. 장기 캠페인을 받쳐줄 만한 규칙의 분량과 범위에 대한 논의라든지, 다양한 상황을 표현하려면 규칙은 많은 게 좋다는 주장의 전제에는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D&D, 겁스 (GURPS), 7번째 바다 (7th Sea), WoD (World of Darkness) 등 제가 아는 모든 상용 규칙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퍼지 (FUDGE),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미딕 (Mythic Roleplaying),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 등 많은 인디 RPG도 마찬가지죠. 판정은 기본적으로 실력과 상황 수정치에 따른 확률을 이용하는 굴림이며, 낙상이나 익사, 폭발 등 다양한 상황을 처리하는 규칙이 있기도 합니다.

반면 위에서 예를 든 규칙책에도 가상현실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규칙도 있습니다. D20 계열이나 변형에서 볼 수 있는 액션 포인트라든지 겁스에서 추가 규칙으로 할 수 있는 CP 소모, 7번째 바다의 극주사위나 배경 규칙, WoD의 의지력 규칙, 미딕의 무작위 사건 생성 규칙, 과거의 그늘에서 특정 조건에 맞는 RP를 하면 성장하는 열쇠 규칙 등이 그 예입니다.

이들 규칙은 가상현실 속에 있는 등장인물의 실력이나 의지보다는 참여자의 극적 욕구를 반영하며, 가상현실 법칙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가상현실의 법칙에 저항하거나 서술을 조작합니다. 즉,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룬다는 면에서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규칙과는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상현실 법칙이 아닌 플레이의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을 판정의 근간으로 삼는 규칙도 더러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도전-응대식 판정, 폴라리스 (Polaris)의 서술 교섭,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의 반박 경매 규칙,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의 장면 판정 등이 그 예이지요. 서술권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진행자의 역할인 만큼 참가자에게 서술권을 많이 주는 규칙일 수록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 분배도 분산적 성격을 보입니다.

이들 규칙책에서는 물리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는 참여자 간 공감으로 해결하며, 정말로 판정이 필요한 때는 극적 방향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입니다. (참가자: ‘경비를 다 죽여요!’ 진행자: ‘경비는 다 죽습니다!’ 참가자: ‘마왕도 죽여요!’ 진행자: ‘음… 그건 판정을 해볼까요?’)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아무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달을 쏘아서 적의 머리에 떨어뜨려요’ 같은 선언도 통과합니다. 수정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면 ‘장군은 한 달음에 산을 넘어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였다’ 같은 글도 역사적 진실이 됩니다. (신화적인 분위기라면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을 중시한다면 포도원의 개들이나 안방극장 대모험 같은 규칙은 장기 캠페인을 하기에는 빈약하다거나, 상황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속의 법칙을 표현하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까요. 반면 저는 가상현실 표현보다는 극적 욕구 연출이 훨씬 우선이라 가상현실 표현 때문에 극적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잘 참지 못해서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 쪽을 선호합니다. 결국 어느 쪽이 우선이느냐, 혹은 극적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을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겠죠.

참고로 극적 욕구나 연출 얘기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마음대로 가야 성이 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나리오 중심 진행은 거의 가상현실 중심 규칙의 특권에 가깝습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규칙은 시나리오에 나올 만한 요소들을 바로 움직일 수 있으므로 누구 한 사람이 앞으로 이야기를 예상하거나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규칙을 할 때는 다른 참여자와 의견이 충돌하고 그 충돌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극적 의외성과 역동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는 부담이 적거나 없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매력적이고요.

대비해 놓기는 했지만 물론 가상현실 표현과 극적 요소의 조작은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죠. 예를 들어, 제가 얘기한 극적 욕구와 가상현실의 충돌 부분을 많은 가상현실 중심 규칙에서는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으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번 판정은 극적 욕구상 꼭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가상현실 법칙상 확률이 낮아서 극점수를 소모한다든지요. 그런 규칙은 자원 관리 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술적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심심해서 제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규칙이 RPG의 재미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기준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표현이 자신의 재미에 얼마나 중요한지,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것이 몰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 이러한 판단은 전에 적었듯 규칙의 선택, 수정, 제작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6 thoughts on “판정 –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1. 기생수

    아… 그때의 그 이야기군요.

    말씀하신 맥락에서 덧붙이자면… 가상현실표현을 중심으로 한 룰에서 극적 욕구를 다룰 때의 그 ‘논의 과정을 개념화’하는 것이 전에 한참 이야기하던 ‘합의에 의한 플레이’ 이야기로 연결되는 거겠군요. 상용룰의 대세(?)인 가상현실 중심룰의 바탕에서 참가자 전원의 극적욕구를 다루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겠네요.

    보통은 가상현실룰은 극적 역할 룰에 비해서 다루는 양도 많고 복잡한 편이기에 ‘룰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양적으로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한명한명의 극적 욕구를 섞고 종합하고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참가자들의 동의를 받아야하는데…그 동의를 위한 필요조건이 가상현실 룰의 이해와 준수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겠네요. 가상현실은 참가자 전원이 엇비슷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그 시스템이 그리는 세계의 ‘내적법칙’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즉 가상현실룰을 중심으로 하는 모델에서는 극적 욕구에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개연성’을 가상현실룰을 통해서 갖추면, 더 그럴듯해보여서 극적욕구를 인정받고 관철되기가 더 용이해지고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쉬워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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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합의에 의한 플레이 말씀은 좋은 정리 같네요. 극을 형성하는 과정을 순수하게 팀내 의사결정 구조에만 (진행자가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구조이든 전원 합의하는 구조이든) 맡겨두지 않고 규칙이 개입하는 데 따른 효과는 이전에도 했던 토의였고 앞으로도 논의할 수 있는 내용이 되겠죠.

      가상현실 중심 규칙에서 극적 욕구의 반영에 규칙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극적 욕구의 반영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가상현실 중심 규칙이 닿지 않는 영역 아닐까요?

      예를 들어 주인공 중 하나가 배경상 왕의 서자여서 왕과 대면하는 장면을 하고 싶다면, 극을 다루는 규칙이 없는 상황에서는 참가자가 진행자에게 제안하거나 진행자가 알아서 긁어주는 (?) 방법을 취할 것입니다. 극을 직접 다루는 규칙이 있다면 참가자가 직접 서술한다거나 장면을 신청하는 방법 등을 택할 수 있겠죠.

      일단 왕을 만난 후에 자신을 인정하라고 설득할 수 있을지 같은 건 판정에 달렸겠지만, 이때 판정에 대한 지식은 왕을 설득하는 확률을 높이는 전술적인 의미 외에는 극적 욕구 충족과 특별히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극적 욕구의 반영에 가상현실 규칙에 대한 지식이 어떤 식으로 중요한지는 약간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생각하시는 예는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것 같아서, 괜찮으시다면 부연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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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생수

    으흠…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엔, 극적욕구를 지원해주는 룰은 그러한 욕구를 내는 형식의 틀과 결정권, 의사결정과정을 규정해주고 있지만, 가상규칙룰은 그러한 욕구가 ‘말이 되어’ 보이는 걸 돕는 역할을 하기에 분류하신 두가지 범주의 룰이 욕구의 충족과 타인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접근 방향이 다른 것 같습니다.

    본문의 예를 빈다면 가상규칙룰은 맨주먹으로 장군이 3만대군을 죽이는 그 ‘과정과 내적 법칙’을 물리적/장르적 룰의 작동으로서 설명해줘서, 다른 사람이 ‘그런 억지가 어디있냐’라는 말에 미리 대답을 해주는 셈이겠네요. 그렇게 개연성을 줌으로서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게 하여 죽이고 싶다는 극적 욕구를 타인이 좀더 쉽게 동의하게 해주고, 또한 그 수준에서 장군의 플레이어가 3만 대군을 죽일수는 있지만 100만 대군은 죽이는 건 말이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는 것이겠죠. (그외에 논의의 맥락과는 좀 다르지만, 3만대군을 죽이는 ‘그림’을 룰의 반자동적 작동으로서 플레이어가 좀 덜 신경써도 묘사해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네요)

    가상규칙룰이 극적요소를 지원하는 룰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거라면, 그 3만 대군을 죽이는 물리적/장르적 법칙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법칙을 알수록 자신의 더 ‘다양한’ 욕구를 타인에게 더욱 설득력있고 개연성있게 보여줘서 동의를 얻기 쉽다는 의미에서 ‘양적인 지식’을 언급했습니다. (물론 이건 가상규칙 중심의 모델에서의 이야기 입니다. 의사 결정과정을 다루는 극적욕구쪽의 룰과는 다른 위상의 이야기죠.)

    가상규칙룰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이미 그 시스템의 규칙을 읽어둠으로서 상대적으로 더 엇비슷하게 그 세계관의 물리법칙이나 장르법칙을 이해하게 됩니다. (“겁스는 리얼해”) 때문에 그 시시콜콜한 규칙들 속에서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 범위에 대한 ‘이해의 교집합’을 조금이라도 “더” 넓힌 상태에서 그 속에서 극적 욕구를 반영한 선언을 하면 합의를 하기 쉬워진다는 의미겠네요.

    이 역시 잡음이 종종 나오는 걸로 봐선 더 쉽게한다는 것뿐이지 완벽한건 아니죠. 그렇기에 룰의 작동 바깥의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합의에 의한 플레이가 그걸 보충하는 것이구요. (‘니 캐릭터 장군은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일 수는 있지만, 그거 별로 전체 스토리에는 좋지 않은 것 같아’, ‘그런가?’ 가상규칙을 준수해온 과정이 3만 대군을 죽일 정당성은 어느정도선에서 부여했기에 굳이 원한다면 자신의 의견을 좀더 설득력있게 밀려고 시도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욕구만을 경쟁적이고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게 플레이의 목적은 아니니까요. 이런 면에서 지원과 견제를 동반하는 … 본문에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두가지 성질의 룰은 상호보완적 관계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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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기생수

    다시 정리하면, ‘가상규칙의 양적인 지식 이야기’ 는 가상 현실룰들의 작동이 욕구의 동의와 합의의 ‘설득력’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꺼낸 이야기 입니다. 물론 그 설득력을 마치 절대적 권한처럼 오해하는 건 잘못된 플레이겠죠. 상황과 장면의 종류는 많고 그 면면에 사용되는 가상현실룰들은 각자 그상황 그 장면 그캐릭터의 설득력이 되니까 다양한 상황을 위해서는 다양한 룰이 필요해집니다.

    뭐 가상현실룰이 고작 이 용도 밖에 없다면야 너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룰 자체가 가진 상황 묘사력이라는 또다른 큰 ‘장기’가 있기에 그 많은 분량을 참아줄만하고… 더 나아가 익히는 것자체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쪽을 더 선호하겠죠.

    사실은 후자가 이미 예전부터 알려져있던 장기이고… 전자가 참가자 전원(마스터포함)의 욕구반영을 중요시하게 되면서 발견된 용도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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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호.. 그런 효용도 있군요. 가상현실 역시 극의 요소라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네요. 확실히 가상현실 표현 규칙이 없는 룰북은 양이 적고 배우기 쉬운 점은 좋지만 가상현실의 법칙이나 논리에 대해 심각한 의견 차이가 생긴다면 해소할 원칙이 ‘합의’나 ‘최종결정권자의 결정’ 외에는 없긴 해요. 마치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규칙이 없을 때 극적 방향에 대한 의견 차이를 해소하는 방법이 합의나 진행자의 결정인 것과 비슷하게요. 저는 지금까지는 가상현실 법칙에 대해서 심각한 의견 차이를 겪은 적은 없지만, 캠페인이 길고 참여자 사이에 공감이 적을 수록 많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겠죠.

      아주 자세한 가상현실 규칙과 그런 규칙의 부재 사이에 있는 방법으로 ‘장르적 현실’ 규정이라든지 ‘우리 플레이에 어울리는 현실’ 규정 같은 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활극 플레이에는 온갖 곡예와 공중 돌기와 스턴트가 어울리지만, 역사 배경의 2차대전 플레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식으로요.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이는 게 어울리는 플레이는 거의 익절티드 정도고.. 그런 식으로 장르 혹은 분위기에 맞게 물리 법칙의 범위를 정하는 규정을 만들어 둔다면 나중에 합의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공감대를 확보해 두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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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기생수

    ‘장르적 현실’ 규칙은… 사실 이미 있기는 있거나 대부분의 상용룰 규칙은 이미 ‘장르적 현실’ 규칙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경향상… 겁스같은 범용성 지향과정에서 사실성을 갖춰버린 케이스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시스템은 이미 각자가 시스템이 지향하는 특정 로망을 지원하고, 특정 현실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장르룰일 겁니다. 때문에… D&D로 드래곤은 때려잡아도 히틀러를 때려잡는건 뭔가 이상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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