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와 나 – 내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

2004년 12월, 처음 RPG를 시작했을 때 저는 RPG라는 취미가 어떤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처음 찾은 것이 존 킴 (영문)의 글, 그리고 제가 처음 가입한 RPG 사이트였던 다이스&챗 강좌/토의 란에 있는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였습니다.

바바의 글은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것 같고, 저도 그의 논지에 모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링 강좌를 비롯한 그의 글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제가 RPG를 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재해석이나 비판도 들어갔지만요.

그래서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같이 토론해볼 수 있게 제가 바바 히데카즈의 글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RPG는 게임이다 (+ α)

아마도 제일 논란이 큰 대목인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적습니다. 바바 히데카즈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RPG는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으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수준 향상을 할 수가 없으므로 RPG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발전도 없으니까 게임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는 것이 저의 이해입니다.

즉, ‘RPG는 게임으로밖에 할 수 없으므로 게임이다’라기보다는 ‘RPG는 게임으로 해야 질리지 않고 오래 하므로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논해야 한다’는 것이 바바 히데카즈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규범적인 논의라기보다는 논리적 범주의 논의이기는 했지만 RPG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오는 게임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요지로 글을 쓴 적도 있죠. 특히 규칙하고 관련해서 플레이 내용상 중심적인 부분을 규칙의, 즉 게임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그에 따르는 효과를 활용하면 더욱 즐거운 플레이가 되니까요.

그러나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은 옳긴 옳되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RPG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게임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것은 바바가 주장하는 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RPG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것이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게임이 아니어도 RPG에서 방법론을 고려하면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주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서사, 서술, 혹은 극(劇)입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첫 번째 이유는 RPG에는 게임적 요소 외에도 극적 요소가 있어서입니다. 이것은 바바가 혐오해 마지않는, 방법론이나 발전이 없는 규칙 무시성 덩실덩실 RPG뿐 아니라 계속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RPG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RPG가 게임이라는 것만으로는 RPG를 논하기에 불완전하다고 봅니다.

바바가 RPG의 극적 요소를 논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 배경이 있기는 합니다. 체계도, 방법론도, 규칙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재밌으면 그만이야’ 식의 시장 전략이 일본 RPG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 바바가 얼마나 이를 가는지 보면 이해할 수 있죠.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 자체는 맞지만, 어떻게 하면 재밌는데?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 방법론이 부재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바가 글을 썼던 특수한 배경일 뿐이지 RPG 에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도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RPG의 게임성에 충실하다 보면 극적 서술은 저절로 나오니까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극을 돕는 도구로써 규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저도 규칙이 서사와 따로 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사를 뒷받침하는 플레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도구성 참조.)

그러나 저처럼 규칙과 서사의 관계를 밀접하게 본다 해도 규칙과 게임성은 서사를 도울 뿐이지 서사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극적 감각이나 집단적 서술의 흐름에는 게임성과는 다른 방법론과 발전 방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능력치를 서술해서 판정에 추가로 주사위를 얻는 것은 게임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순간에 어떤 능력치를 어떤 식으로 서술하면 재미있을지는 극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쪽을 잘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쪽도 잘한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술에도 방법론과 발전이 있다는 점은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와 바로 이어집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는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에서도 수준 향상을 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바바의 주장에는 규범적인 데가 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게임이 아니면 수준 향상을 논할 수 없고, 수준 향상이 없으면 RPG계에 발전이 없으므로 게임 아닌 RPG는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러나 게임이 아닌 극적 영역에도 분명 방법론을 세우고 수준 향상을 꾀할 수 있습니다. RPG와 영화나 소설의 기법을 접목한다든지, 즉흥극과 RPG를 연계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시도, RPG 특유의 집단적 서술을 다루는 이론과 방법론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바는 RPG가 게임이 아니라면 연기 지도를 받을 수도 없지 않느냐며 발전의 여지를 부인하지만, 실은 게임이 아닌 영역에서도 발전을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있으며 계속해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RPG에 게임이 아닌 영역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RPG계에 해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이 아니면 발전도 없다는 전제야말로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보고요.

2. RPG를 정말 즐기려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바바가 쓰는 모든 글의 진짜 핵심이며, RPG는 게임이며 게임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이에 잘못된, 정확히는 불완전한 논리 단계가 들어가서 RPG는 게임이라는 결론에도 불완전한 데가 생겼다는 점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RPG를 질리지 않고 계속 즐기려면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흠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라면 RPG에서 계속 높은 수준을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놀이를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제 생각에 RPG의 고유한 재미는 극과 게임성, 사회성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이중 어느 한두 가지에서 RPG보다 우월한 오락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준 높은 극적 재미만 생각한다면 책이나 영화가 나을 수도 있고, 게임성만을 생각한다면 CRPG나 체스가 나을 수도 있겠죠. 함께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냥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서 높은 자유도를 추구할 때에만 RPG를 하는 진짜 의미가 나오면서 다른 활동에 대한 비교우위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의 요소를 의미있게 결합하려고 하면서 발전의 필요성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제가 RPG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강박적으로 글을 쓰니까 바바 히데카즈의 영향입니다. 발전을 추구하면서 RPG를 정말 재미있게 즐기려면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400편을 넘어가는 글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어떻게 하면 더 재밌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답입니다.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최종 결론은 없지만, 그 모색 자체가 즐거움이기도 하죠.

3. 규칙을 많이 접해라

또 하나 많이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면 규칙을 여러 가지 접해보라는 충고였습니다. 당시에는 갓 시작했던 차라 D&D 클래식과 AD&D 정도밖에 몰랐는데, 그 얘기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다양한 RPG를 읽고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상한 규칙만 합니 어떤 규칙이 어떤 용도에 적합한지, 끌어올 수 있는 시도나 발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 취향에 맞는 규칙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익혀갔고 플레이도 그만큼 풍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4. 규칙은 중요하다

바바 히데카즈의 파워 플레이와 론 에드워즈의 System Does Matter (영문)에 특히 영향을 받아 제 나름 생각해본 것이 규칙의 도구성이니 규칙의 효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규칙의 중요성을 정리하자면 규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경향성을 형성하기는 하며, 이러한 효과가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제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들입니다. 이해한 바에는 변형도 있고 가미도 있지만, 결국 핵심은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실험,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RPG는 그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한 놀이이며, 그런 끝없는 새로움이 제게는 RPG의 진짜 재미이니까요.

5 thoughts on “바바와 나 – 내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

  1. 킹랑

    로키님의 글에서 ‘RPG의 고유한 재미’ 부분에서 제가 생각하는 RPG라는건 무엇인가의 답에 가까운 생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로키님의 말을 인용한뒤 살짝 바꾸면 제 머리속에선 “극과 게임성 그리고 사회성이 결합하여 높은 자유도를 가지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유희.” 라는 답이 나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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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rr...

    언제나 절 ‘생각하는 RPGer’로 만드는 로키님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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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킹랑// 그거 괜찮은데요.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대개의 보드게임하고 구분되고, 높은 자유도 면에서 MMORPG하고 구분된다든지 말이죠. 물론 정의 면에서는 불완전한 데가 많지만 (RPG를 어떻게 정의할지는 좀 애매하죠), ‘좋은’ RPG의 속성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Rrr…//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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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게임 + α라는 주장에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펠로스의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 그 많은 대화들은 그다지 게임적인 고려는 없었지만, 굉장히 플레이의 재미에 도움이 되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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