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 합의와 서사적 규칙

유용한 사용이 까다로운 겁스 기능 용례 댓글에서 한 논의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논의 자체는 서술에 직접 개입하는 규칙에 대한 것이었지만, 제가 제대로 대답하려면 서술권 개념 정립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엮인글로 뺐습니다.

RPG 등 서사적 요소가 있는 놀이 속에서는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A는 죽었습니다.” “서울에는 비가 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서술이며, 그 서술을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서술권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RPG에서는 진행자와 참가자의 서술 영역이 다릅니다. 참가자는 보통 자신의 주인공의 행동, 반응 등이 서술 범위이며, 진행자는 주인공 외의 인물과 배경 세계가 서술 범위입니다. 즉, 원칙적으로 참가자는 주인공에 대해 서술권이 있으며, 진행자는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 서술권이 있습니다.

물론 서술권의 분리가 절대적이라면 놀이는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 따로 놀다가 끝날 뿐이죠. 그래서 RPG에는 자신의 원칙적인 서술 영역이 아닌 범위에 영향을 미칠 수단이 있습니다. 그 수단이란 크게 판정과 합의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갑이 조연 을을 설득한다고 할 때, 을의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보기에 저건 을이 설득당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을이 설득당한다고 서술할 수 있습니다. 즉, 갑의 참가자는 자신의 서술 영역이 아닌 을의 행동에 갑의 행동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려고 했고, 을의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여기에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해 그 서술을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서술 영역
외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 중 합의입니다.

반면 갑이 을을 설득하려는데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생각하기에는 을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거나 을이 설득당할지 불확실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갑이 설득이나 협박 등 판정을 통해 을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판정을 해서
갑이 성공하면 을은 설득당하고, 갑이 실패하면 을은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서술 영역 외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 중
판정
입니다.

그러나 판정으로 해결할 때에도 놀이 분위기가 건강하다면 어떤 종류의 합의는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판정으로 결과가 달라질 수는 있다는 합의이지요. 위의 예에서 참가자와 진행자는 을이 판정을 통해 설득당할 수는 있다는 합의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이 시점에서 갑이 무슨 짓을 해도 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판정을 애당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얘 마음은 안 변해. 끝.’으로 끝내면 갑의 참가자의 극적 욕구 (을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무시당하는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이 점을 상의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충족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자기 집이 날라갈 상황에서 말만으로는 씨도 안 먹힐 것 같은데, 그 부분을 해결해주면 어떨까?” 하는 논의가 된다면 그건 또 다른 모험의 태동이기도 하죠.

이때 판정으로 을이 설득당할 수 있다는 합의가 없는데도, 즉 진행자가 생각하기에는 아예 판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참가자와 그걸 조정하기 싫어서 을에게 말도 안 되는 높은 의지력을 부여하거나 갑의 판정에 역시 말도 안 되는 페널티를 주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파토에 한 발짝 다가선 증세입니다. 판정의 바탕에 있는 합의를 무시했으니까요.

위의 예로는 설득이라는 묘사적 규칙을 들었지만, 서사적 규칙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서사적 규칙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제안이 괜찮다 싶으면 합의로 그냥 갈 수 있고, 불확실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를 때 판정을 매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사적 규칙도 묘사적 규칙과 마찬가지로 판정을 할 때는 판정의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며 그럴 수 없다면 서로 상의하고 조정하겠다는 합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서사적 규칙이라고 해서 플레이의 기본 전제를 바꾸는 것은 아니며, 상호 존중과 예의의 중요성은 서사적 규칙을 사용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3 thoughts on “판정, 합의와 서사적 규칙

  1. 기생수

    뭔가 제가 언급한 그런 룰들을 쓰지 않는 이유와는 미묘하게 다른 긍정적인 면을 추가로 가져오셔서 약간 어긋난 논점에서 변호하시는 느낌도 있고… 그게 아니면 제 댓글과 연관이 있는 글이라기보단 뭔가 촛점이 다른 별도의 글을 쓰신 느낌이 있지만…

    그 미묘하게 어긋난 부분의 인식을 좁히고 일일이 차이가 있는 내용이나 섞인 내용들을 구별해서 별도로 답하고 또 제 이야기를 반복하고 부연하기에는 좀 힘도 딸리고 보람도 적은 힘든 작업이 될 것 같고 해서 저는 논의를 더 잇는 걸 포기하겠습니다. 죄송해요.

    애시당초 그런 룰들의 기본 특성이나 성질에 대한 전제의 일치가 안되면, 그 각각의 전제를 안고 이야기를 각자가 진행해도 접점은 없지요.

    의견이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개념이 비슷한 분이라면 추상적인 개념 이야기를 해도 소소한 단어의 의미나 인식 차이를 ‘공통의 전제’가 좁혀줍니다. 그러나 전제가 다른 분과 추상적인 개념이야기를 시작하면 각자의 이야기를 그냥 늘어놓기 쉽습니다. 애써 좁혀도 그건 대개 그렇게 길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던 의미없는 부분에서만 좁혀지기 쉽더군요.

    뭐 끈질기게 이야기하면 전제 차원에서 좁혀지지 못할 것도 없는데… 당장은 그럴만한 정력이 없네요.

    어떻게든 다른 전제하에서 추상적 개념의 이야기를 하기는 하게 된다면, 주제를 가능한한 더 좁혀서 내용을 간결하게 하고, 그 간결한 내용물을 보고 각자가 길게 생각하고 플레이에 반영해보는게 더 시행착오를 줄일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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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특별히 서사적 규칙의 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규칙을 사용한 판정을 할 때 기본적으로 전제한 합의는 묘사적 규칙이나 서사적 규칙이나 차이가 없고, 그 전제가 어긋나면 어느 쪽이든 무리가 생긴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글에서 서사적 규칙 얘기를 한 건 마지막 두 문단뿐이고요. 즉, 승민님이 말씀하신 서사적 규칙의 문제는 서사적 규칙 특유의 것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라는 정도?

      생각해 보면 승민님이 말씀하신 규칙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것인지, 어떤 부분에서 무리가 생겼는지 모르겠어서 논의가 겉돈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규칙이 어떤 성격이든 규칙을 사용한 결과는 받아들일 만하다는, 그럴 수 없다면 규칙 외에 다른 수단으로 (예를 들어 상의를 통해) 해소한다는 합의는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서로 머릿속에 들어가볼 수 없는 이상 의사소통은, 특히 대면 상황이 아니면 이런저런 오해가 생기게 마련이고, 이해의 차이를 좁히는 법은 더 많은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얻는 것보다 수고가 더 크다고 느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신다면 저는 말씀하신 그 전제의 차이를 좁혀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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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생수

    사실, 아무하고도 사고의 기반이 되는 전제 자체를 줄여나가는 건 힘든 작업이지만, 그것 이외에도 로키님과 저 개인적인 측면에서 토론 방식 자체에서 자신의 논지를 피력하는 방법에 있어서 오해를 수정하는데 보통의 경우보다 더 힘이 든 상성이랄까 습관의 차이랄까 하는게 있어보이기도 해서 포기한 면도 있어요.

    그래서 전제의 차이를 좁히려면 그 이전차원에서 메타토론적인 이야기를 교환해야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원래 이야기에서 너무 멀리 나가는 거고 전제를 수정하는 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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