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참가자의 문제

RPG는 무엇인가를 ‘하는’ 놀이인만큼 참가자가 적극적인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오늘 한 언더월드 3기 21화 플레이에서 시하야님의 관전 후 지적을 듣고, 때로는 적극적인 태도의 참가자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적극성에 편중이 생겼을 때나 과도할 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요.

적극성의 편중과 과도함이 유발할 수 있는 문제는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일부 참가자만 적극적일 경우 소극적 참가자를 더 소극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지나치게 대사량이 많을 경우 특히 ORPG에서는 진행자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소극적인 참가자의 소극화 가중. 이것은 적극성의 편중에 의해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사실 모든 참가자가 똑같이 적극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서 재미를 느낄테고, 어떤 사람은 지켜보면서 간간히만 얘기해도 재미를 느낄지 모르니까요. 예전에 참가자 유형에 대한 글에서 언급했듯, 참가자의 욕구에 따라서는 적극성을 지나치게 유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참가자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문제삼는 이유는, 한두명의 참가자가 너무 적극적이면 나머지 참가자들 (특히 원래 소극적이었다면)은 자신들이 행동할 이유나 기회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가 뭔가 상황을 제시해도 ‘저 참가자가 반응하겠지, 뭐’라고 생각하고 가만 있는다거나, 다른 참가자가 열심히 말하는 통에 개입할 틈이 없다거나요.

게다가 이러한 과정은 악순환이 되기 쉽습니다. 적극적 참가자는 좀 가만 있으려 해도 다른 참가자들의 반응이 없으면 ‘앗, 큰일났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고 나서게 되고, 그러면 또 소극적 참가자들은 ‘음…이번에도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상황이 심해지면 결국 플레이는 적극적 참가자들만 계속 반응하고 행동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이 현상이 심해지면 예전에 다루었던 편애와도 맞닿을 수 있다고 봅니다.

두번째로, TRPG에서도 어느정도 그렇겠지만 특히 ORPG에서는 진행자의 ‘버퍼링’ 문제가 있습니다. 타자로 치다 보면 정보량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치는 동안에도 참가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이미 상황이 변해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가자들의 질문이나 선언이 많으면 진행자가 처리해야 할 분량은 더 늘어나고, 그 결과 진행은 느려집니다. 이것은 적극성이 지나치거나 시간적으로 집중되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활발한 선언과 질문 자체를 문제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RPG는 참가자의 선택과 판단 위에 성립하며, 이들 요소를 부정하는 것은 취미로서의 RPG를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참가자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한꺼번에 몰리면 진행자로서는 처리에 지연이 생기기 쉽기 때문에 참가자의 입력을 어느정도 분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때로 적극적인 참가자는 그 사실을 잊고 진행자에게 너무 빨리, 많은 대응거리를 주어서 본의아니게 진행을 지연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해 보았지만, 특정한 상황 (편중됨, 혹은 과도함)에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 적극적 참가 자체를 문제라고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적극적 참가는 전개를 예상 외의 방향으로 이끌고, 게임내의 결과를 통해 진행자와 다른 참가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으니까요. 이러한 이점을 취하면서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적극적 참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참가의 적극성을 다른 참가자들에게 돌리는 것이 한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인공에게 주목을 끄는 것도 좋지만 다른 일행에게도 주목이 돌아가도록 신경쓰는 것이죠. 다른 주인공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사건을 다른 주인공과 연관짓거나 (‘그리고 보니 그 용의자 갑돌씨하고 동향 사람이네?’), 다른 주인공의 대사나 행등에 적극 대응하는 식으로 말이죠. 가장 능동적인 참가자들은 진행자 경력 또한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더욱 이러한 역할에 적합하다고 봅니다.

둘째, 진행자가 할 수 있는 일로는 무대 조명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하야님이 얘기하신 건데, ORPG에서는 ‘이번 장면은 을순이 처리해 주세요’ 하는 식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지정도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종의 대화권 설정 의미도 있기 때문에 대사의 양과 흐름 또한 제어할 수 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같은 경우는 화면 존재감과 장면 신청 규칙을 통해 무대 조명 분배를 규칙 자체적으로 지원하고 있기도 합니다.

셋째, 역시 적극적 참가자가 할 수 있는 일로 가장 쉬우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조금 기다리는 것입니다. 진행자가 한참 장면 첫머리 묘사를 치고 있을 때 아무리 떠오르는 질문이 많아도 다 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또 어떤 대사에 다른 참가자들이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진행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다른 참가자들의 적극성을 유도하는 것 외에도, 조금 기다리는 것을 습관화하면 훨씬 다듬어진 대사와 선언이 나온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참가자의 적극성이 편중되거나 과도할 때 유발할 수 있는 문제와 그 대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가자의 적극성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RPG는 뭔가를 ‘하는’ 게임이니까요. 하지만 RPG는 동시에 뭔가를 ‘같이 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대사량이 월등히 많은 참가자라면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RPG를 모두와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니면 혼자서만 하고 있는가.

2 thoughts on “적극적인 참가자의 문제

  1. 천승민

    마스터링만 줄기차게 하다보니 가끔 플레이어를 할 기회가 떨어졌을때 너무 기뻐서 왕왕 저런 “과도하게 적극적인” 참가자가 됬던 기억이 있습니다. ;;;

    말씀하신 방법들 역시 진행자의 재량으로서 절제가 가능한 부분들이고, 역시 RPG플레이 현장(?)에서는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의사조율이 가능하다는 RPG의 기본 성격상… 그냥 대상이 되는 플레이어에게 “비중이 좀 지나치게 너 중심으로 돌아가는 면이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들의 개성도 같이 띄워주는 방향으로도 표현해봐”라고 직접 조율하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요.

    즉 제 경험상으로는 말씀하신 “첫째”가 가장 즉효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기본 예의만 있다면 다같이 재미있게 즐기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선의는 누구에게도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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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저도 그래요..^^ RPG를 제일 재밌게 해주는 요소 중 하나인 참가자의 적극성에 ‘과도’ 같은 말을 쓰자니 참으로 얄궂지만 말이죠. 스스로 적극적이면서 다른 참가자의 적극성 역시 끌어내는 참가자는 진행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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