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RPG Life

Something Positive – 하드웨어 사망사건 1부

옛날 Something Positive 중에서 RPG 관련이 있어서 번역해봅니다. 이거나 저번에 번역한 것 외에도 RPG 얘기가 많이 나오는 만화이긴 하지만, 특히 2005년 5월에 한 시리즈는 문제 참가자 얘기가 재밌더라고요. 원본 만화는 여기에.

Somethng Positive 2005-05-22

Something Positive 2005년 5월 22일자

무릇 마스터의 진정한 친구란 캠페인 돌리기 피곤한 날에 단편으로 때워주는 존재..(크흑)

정기 온라인 미니컨벤션?

Story Games 쪽에서 이 글 (영문)을 보고 떠오른 생각인데, RPG인들이 모여서 얘기하고 놀다가 원하면 플레이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정기적으로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금요일과 토요일 밤마다 열리는 IRC 대화방이라든지요.

물론 지금도 IRC나 다이스&챗 잡담방이 있는 걸로 알고 저도 한두 번 그런 식으로 사람이 모여서 플레이한 적도 있습니다. (영혼의 우물, 오티엘 밴드 이야기 등) 하지만, 목적이 잡담이나 무한잠수(?)가 아닌 플레이 쪽에 맞춰져 있어서 플레이를 할 가능성이 높은 공간, 말하자면 정기적 온라인 미니컨벤션 성격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가제 ‘RPG의 밤’ 정도? RPG뿐만 아니라 온라인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도 할 수 있을 테고요.

채팅방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건 고정적 정보 전달입니다. 예를 들어 RPG의 밤을 위해 사람들이 채널에 모인 상태에서 몇 명이 의기투합해서 IRC 채널이나 다이스&챗 방을 열어서 플레이를 시작했다고 하죠. 그렇게 하면 새로 들어온 사람은 남 잠수하는 모습 혹은 빈 방만 구경하다가 슬그머니 나가기 쉽습니다. 즉, 이벤트가 진행중이어도 찾아갈 수 없는 일이 생기죠.

그래서 그런 부분은 게시판하고 연계하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IRC 채널 방제에 ‘(게시판 글 링크): 오늘 RPG의 밤 이벤트 목록’ 하는 식으로 입력해 놓고, 방에서 갈라져 나가는 사람들은 댓글로 IRC 채널, 다이스&챗 방 등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적어놓고 사람이 더 필요하다든지, 인원은 다 찼지만 관전 환영이라든지, 몇 시에 끝났다든지 하는 식으로 현재 상태에 따라 글을 편집할 수 있겠죠. 본 채널에서는 잡담이나 구인 등을 할 수 있을 테고요.

이런 미니컨벤션 형태의 이점이라면 인디 RPG 생체실험 대상 획득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는 부담 없이 가끔만 들러도 단편이나 단기 플레이를 안정적으로 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입니다. 뜻과 시간대가 맞으면 여러 세션을 진행할 수도 있을 테고, 장기 캠페인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겠죠. 짧은 플레이 중심이 되므로 플레이테스트 등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도 있고요. 그 외에 RPG인들이 폭넓게 서로 만나고, 생각을 나누고, 플레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홍보가 잘 된다면 초보자들이 찾아와서 RPG의 뜨거운 맛(?)을 볼 수 있을지도요.

한계라면 TRPG도 아니고 ORPG인 만큼 하루 저녁 플레이로는 많은 이야기를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특히 인물 제작이 복잡한 규칙이라면 진행할 사람이 인물을 미리 만들어 온다든지 하는 부담을 지지 않으면 단편 플레이는 어렵겠죠. 해결책으로는 다이스&챗의 황실 특수 수사대 플레이처럼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 모이는 사람끼리 그때그때 등장 인물이 달라지는 옴니버스 방식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기적 온라인 미니컨벤션은 RPG인들이 모이고 플레이를 찾을 수 있는 좋은 만남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기존 잡담방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방법이고요. 추가적으로 필요한 요소라면 홍보, 그리고 안정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게 꾸준히 시간을 공지하고 같은 시간에 방을 여는 관리 정도겠죠.

RPG 산업과 RPG 취미

사업으로서 RPG는 별로 판매량이나 수익성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주:TRPG 혹은 펜&페이퍼 RPG를 가리키는 것이며, CRPG나 MMORPG 얘기는 아닙니다) 원체 소수 취미인 데다가 원한다면 돈을 별로 안 들이고도 즐길 수 있는지라,(주:’어둠의 경로’ 따위 얘기가 아니라 좋은 무료 규칙도 많고, 규칙책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오랫동안 플레이할 수 있죠.) 돈이 많이 되기는 구조적으로 좀 어렵죠. 소비자와 공급자층의 분리가 적은 것도 다르게 말하면 좋아서 하는 일이지 돈이 되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전세계 최대 규모의 RPG 회사인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 (Wizards of the Coast)마저도 수입의 규모는 모회사인 완구 회사 하스브로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겁스(GURPS)로 잘 알려진 SJ사나 7번째 바다 (7th Sea), 오륜전설 (Legend of the Five Rings) 등을 출간한 AEG도 수익이 많이 나는 쪽은 RPG 라인이 아닌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이라고 들었습니다.(주:정확한 수치를 조사하지는 못했으므로 거의 풍문에 가까운 얘기긴 합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지적 주시기 바랍니다.)

RPG 산업의 이러한 현실 때문에 RPG의 미래는 어둡다는 얘기가 습관적으로 나옵니다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제 생각과 경험상 산업으로서의 RPG와 취미로서의 RPG는 별개이며, 전자의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후자의 전망까지 어둡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위에서 말했듯 RPG는 별로 돈이 들지 않는 놀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RPG 산업에는 돈이 안 들어가고 있어도 RPG 취미는 활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저만 해도 지금 1년 가까이 하고 있는 캠페인에서 실제 RPG 상품에 들인 돈은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규칙책에 들어간 2만원이 전부인 등, 적어도 제 경험상 RPG라는 취미의 활기와 RPG 산업의 건강은 큰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상품이 꾸준하게 나오는 원동력으로 RPG 산업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해도 독자적 소규모 출판이 대형 출판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PDF 판매, 주문이 들어올 때만 인쇄하는 POD (Print on Demand) 책 등 신기술을 이용한 저가 출판 방식의 활용이 늘어나는 추세니까요.

이러한 추세는 한편으로는 수익이 낮아도 비용을 낮추고 규모를 줄이면서 RPG의 상업적 창작은 존속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업이 아닌 부업 내지는 취미로서 RPG 창작의 미래를 시사해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지금도 RPG에 전업으로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도 하고요.

결국 RPG 취미를 활성화시키는 것과 RPG가 고수입 산업이 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후자는 별로 현실적이지 않기도 하고요. 그보다는 소규모 출판이나 비상업적 창작 활성화 등 RPG 취미에 활기를 불어넣는 방안을 생각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큰 돈이 되는 산업의 뒷받침이 없어도 이 취미는 얼마든지 존속할 수 있고, 또 재밌을 수 있으니까요.

바바와 나 – 내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

2004년 12월, 처음 RPG를 시작했을 때 저는 RPG라는 취미가 어떤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처음 찾은 것이 존 킴 (영문)의 글, 그리고 제가 처음 가입한 RPG 사이트였던 다이스&챗 강좌/토의 란에 있는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였습니다.

바바의 글은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것 같고, 저도 그의 논지에 모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링 강좌를 비롯한 그의 글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제가 RPG를 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재해석이나 비판도 들어갔지만요.

그래서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같이 토론해볼 수 있게 제가 바바 히데카즈의 글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RPG는 게임이다 (+ α)

아마도 제일 논란이 큰 대목인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적습니다. 바바 히데카즈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RPG는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으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수준 향상을 할 수가 없으므로 RPG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발전도 없으니까 게임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는 것이 저의 이해입니다.

즉, ‘RPG는 게임으로밖에 할 수 없으므로 게임이다’라기보다는 ‘RPG는 게임으로 해야 질리지 않고 오래 하므로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논해야 한다’는 것이 바바 히데카즈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규범적인 논의라기보다는 논리적 범주의 논의이기는 했지만 RPG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오는 게임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요지로 글을 쓴 적도 있죠. 특히 규칙하고 관련해서 플레이 내용상 중심적인 부분을 규칙의, 즉 게임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그에 따르는 효과를 활용하면 더욱 즐거운 플레이가 되니까요.

그러나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은 옳긴 옳되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RPG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게임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것은 바바가 주장하는 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RPG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것이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게임이 아니어도 RPG에서 방법론을 고려하면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주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서사, 서술, 혹은 극(劇)입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첫 번째 이유는 RPG에는 게임적 요소 외에도 극적 요소가 있어서입니다. 이것은 바바가 혐오해 마지않는, 방법론이나 발전이 없는 규칙 무시성 덩실덩실 RPG뿐 아니라 계속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RPG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RPG가 게임이라는 것만으로는 RPG를 논하기에 불완전하다고 봅니다.

바바가 RPG의 극적 요소를 논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 배경이 있기는 합니다. 체계도, 방법론도, 규칙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재밌으면 그만이야’ 식의 시장 전략이 일본 RPG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 바바가 얼마나 이를 가는지 보면 이해할 수 있죠.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 자체는 맞지만, 어떻게 하면 재밌는데?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 방법론이 부재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바가 글을 썼던 특수한 배경일 뿐이지 RPG 에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도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RPG의 게임성에 충실하다 보면 극적 서술은 저절로 나오니까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극을 돕는 도구로써 규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저도 규칙이 서사와 따로 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사를 뒷받침하는 플레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도구성 참조.)

그러나 저처럼 규칙과 서사의 관계를 밀접하게 본다 해도 규칙과 게임성은 서사를 도울 뿐이지 서사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극적 감각이나 집단적 서술의 흐름에는 게임성과는 다른 방법론과 발전 방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능력치를 서술해서 판정에 추가로 주사위를 얻는 것은 게임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순간에 어떤 능력치를 어떤 식으로 서술하면 재미있을지는 극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쪽을 잘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쪽도 잘한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술에도 방법론과 발전이 있다는 점은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와 바로 이어집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는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에서도 수준 향상을 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바바의 주장에는 규범적인 데가 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게임이 아니면 수준 향상을 논할 수 없고, 수준 향상이 없으면 RPG계에 발전이 없으므로 게임 아닌 RPG는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러나 게임이 아닌 극적 영역에도 분명 방법론을 세우고 수준 향상을 꾀할 수 있습니다. RPG와 영화나 소설의 기법을 접목한다든지, 즉흥극과 RPG를 연계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시도, RPG 특유의 집단적 서술을 다루는 이론과 방법론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바는 RPG가 게임이 아니라면 연기 지도를 받을 수도 없지 않느냐며 발전의 여지를 부인하지만, 실은 게임이 아닌 영역에서도 발전을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있으며 계속해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RPG에 게임이 아닌 영역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RPG계에 해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이 아니면 발전도 없다는 전제야말로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보고요.

2. RPG를 정말 즐기려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바바가 쓰는 모든 글의 진짜 핵심이며, RPG는 게임이며 게임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이에 잘못된, 정확히는 불완전한 논리 단계가 들어가서 RPG는 게임이라는 결론에도 불완전한 데가 생겼다는 점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RPG를 질리지 않고 계속 즐기려면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흠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라면 RPG에서 계속 높은 수준을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놀이를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제 생각에 RPG의 고유한 재미는 극과 게임성, 사회성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이중 어느 한두 가지에서 RPG보다 우월한 오락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준 높은 극적 재미만 생각한다면 책이나 영화가 나을 수도 있고, 게임성만을 생각한다면 CRPG나 체스가 나을 수도 있겠죠. 함께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냥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서 높은 자유도를 추구할 때에만 RPG를 하는 진짜 의미가 나오면서 다른 활동에 대한 비교우위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의 요소를 의미있게 결합하려고 하면서 발전의 필요성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제가 RPG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강박적으로 글을 쓰니까 바바 히데카즈의 영향입니다. 발전을 추구하면서 RPG를 정말 재미있게 즐기려면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400편을 넘어가는 글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어떻게 하면 더 재밌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답입니다.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최종 결론은 없지만, 그 모색 자체가 즐거움이기도 하죠.

3. 규칙을 많이 접해라

또 하나 많이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면 규칙을 여러 가지 접해보라는 충고였습니다. 당시에는 갓 시작했던 차라 D&D 클래식과 AD&D 정도밖에 몰랐는데, 그 얘기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다양한 RPG를 읽고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상한 규칙만 합니 어떤 규칙이 어떤 용도에 적합한지, 끌어올 수 있는 시도나 발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 취향에 맞는 규칙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익혀갔고 플레이도 그만큼 풍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4. 규칙은 중요하다

바바 히데카즈의 파워 플레이와 론 에드워즈의 System Does Matter (영문)에 특히 영향을 받아 제 나름 생각해본 것이 규칙의 도구성이니 규칙의 효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규칙의 중요성을 정리하자면 규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경향성을 형성하기는 하며, 이러한 효과가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제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들입니다. 이해한 바에는 변형도 있고 가미도 있지만, 결국 핵심은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실험,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RPG는 그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한 놀이이며, 그런 끝없는 새로움이 제게는 RPG의 진짜 재미이니까요.

RPG를 곤란하게 하는 행동유형

RPG를 하다 보면 실제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규칙도, 시나리오도, 인물 표현도 아니고 바로 실제 플레이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회적인 놀이라는 RPG의 본질적 성격은 재미의 근원이지만, 의사소통과 협력을 어렵게 하는 행동은 RPG의 재미를 망치기 쉽죠. 어떤 행동 혹은 성격 유형이 곤란한지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경험에 기반을 두지만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보고 찔리는 분은 개인적으로 문의하십..),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문제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어떤 한 사람을 완전히 한 유형에 집어넣을 수 없는 게 보통일 것입니다.

문제 행동 유형은 제가 느끼기에 곤란한 순서로 나열해 보았고, 마지막은 나머지로 설명할 수 없는 포괄적인 유형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의 바른 암살자

아마 수동적 공격성이라는 성격 유형과 꽤 잘 들어맞을 것입니다. 예의 바른 암살자 유형의 특징은 우선 말 그대로 예의 바르고 조용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2번부터 나올 유형들과는 달리 일찍 진단하고 가려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얌전하다 보니까 시비가 붙어서 파토나는 일도 좀처럼 없죠. 그래서 제가 곤란하게 꼽는 유형 1위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고요.

예의 바른 암살자의 문제는 바로 이 조용하고 얌전하다는 점에서 나옵니다. 조용한 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반대와 비판, 거절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조용하고 얌전해진 사람들이거든요. 때문에 예의 바른 암살자는 의견을 교환하는 데 상당히 인색합니다. 의견을 내라고 해도 잘 내지 않고 (님들의 침묵 참조), 상대가 뭔가 제안하면 마지못해 대충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예의 바른 암살자는 6번 투명인간과는 달리 플레이 내용에 아예 관심을 끄거나 포기한 건 아닙니다. 다만, 정당한 토의 과정에서 남과 부딪히고 제안이 거절당하는 게 싫을 뿐이죠. 같은 이유로 다른 참여자의 제안에도 별 저항 없이 동의하지만, 그건 진정한 합의가 아니라 무원칙한 회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죠. 공개적인 토의가 아닌 다른 형태로 표출할 뿐.

예의 바른 암살자는 모두가 의견을 교환하는 토의 자리가 아닌, 남이 반대하기 곤란한 순간에 기습 작전을 펼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 도중에 제안이 아닌 단정의 형태로 뭔가를 서술해버린다든가, 원하는 설정을 토론 없이 최종 결정의 형태로 끼워넣으려고 한다든가. 제안해서 거절당하기는 두렵고 그렇다고 플레이상 욕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결국 토론을 차단하는 기습적인 형태로 ‘의견’이 아닌 ‘결정’을 은근히 강요하는 것이 예의 바른 암살자의 특징입니다. 자기 의견을 ‘나의 의견’이 아닌 ‘당연히 그래야 할 것’으로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것도 의견 제시를 두려워하는 예의 바른 암살자에게 볼 수 있는 행동이죠.

예의 바른 암살자 유형은 허심탄회한 의사소통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RPG의 재미를 저해하는 유형입니다. 게다가 이런 행동은 딱히 지적할 잘못은 없으면서도 (그것이야말로 예의 바른 암살자가 피하려는 바이니) 짜증과 적개심을 은근히 쌓이게 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위에 얘기한 대로 예의 바른 암살자는 기본적으로 대립을 회피하는 얌전한 성향이라 자칫하면 감정적 학대를 유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짜증이 나니까 주변에서 화풀이를 하면 예의 바른 암살자는 그런 취급에 대해 항의하지는 못하고 더욱 움츠러드는 거죠.

이런 수동적 공격성은 유달리 심한 사람도 있지만 누구든지 가끔은 보일 수 있으며, 다른 문제 행동을 보강하는 보조적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추가(주:동환님과 얘기한 부분입니다.): 물론 반드시 플레이 외적 토의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참여자 사이 역할 분담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역할 내에 있는 부분을 뜻대로 하는 것을 기습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는 일단 다른 참여자의 영역, 혹은 공동 영역이라고 인정한 부분인데 제안이나 의논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강요, 그것도 은근슬쩍 강요하려는 행동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2. 제왕 (황소고집)

뭐든지 자기 식대로 해야 하는 게 이 행동 유형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의사소통과 협조를 아예 거부해버리죠. 때로는 예의 바른 암살자의 수법을 일부 사용해 의논을 슬슬 피하기도 하고, ‘싫으면 나가라’는 식으로 벽을 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은 아래 4번 황야의 레인저와 마찬가지로 남하고 놀기 싫다는 뜻이니까 소원대로 해주면 됩니다. (..)

추가(주:역시 동환님과 얘기한 부분입니다.): 사실 이 문제 유형이란 뭐든지 정도의 문제라서, 자기 목소리가 확실하고 주장이 분명한 분은 오히려 환영입니다. 바로 자기 뜻을 꺾어버리면 밀고 당기는 재미가 없죠. 문제는 자기 의견을 절대로 꺾지 않거나 의견이 꺾이면 삐져서 뒤끝이 안 좋은 분입니다.

3. 프리마돈나 (질투쟁이)

이 유형은 뭐든지 자기가 제일이어야 합니다. 인물 능력치든 주목도든 뭐든 자신이 우선이어야 하고 다른 참여자는 그런 자신을 우러러봐야 합니다. GMPC를 굴리는 진행자일 수도 있고, 진행자를 끼고 일행 최강 PC를 만든 참가자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결론은 ‘너 혼자 놀아’인 겁니다.

추가: 이것 역시 억지스럽고 짜증나는 정도가 아니면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자기 인물이 돋보이는 걸 원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고, 서로 멋져 보이려고 하는 플레이야말로 활발하고 즐겁죠. 문제는 그 기준이 ‘내가 멋진 것’이 아니라 ‘남보다 멋진 것’일 때, 더 큰 문제는 ‘남을 깎아내리기’가 일상이 될 때입니다.

4. 황야의 레인저 (천상천하 유아독존)

제 경험으로는 참가자에게만 나타나는 유형인데, 이 유형은 다른 참가자하고 협력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1:1 플레이가 아닌데도 1:1 플레이를 하고 싶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주인공은 비사회적인 성격이라서 다른 주인공에게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든가, 습관적으로 일행에서 이탈하면서 진행자가 자기만 따라오기 기대한다든가 하는 행동을 보이죠.

3번 프리마돈나 기질도 보인다면 혼자 잘나고 싶어서 하는 짓이고 (반사회적이고 고독한 주인공을 하고 싶은 ‘개폼’이 많죠), 6번 투명인간 기질이라면 혼자 떨어져서 그냥 구경만 하고 싶어서 그러기도 합니다. 어쨌든 혼자 놀고 싶으면 혼자 놀게 해주자는 게 제 지론입니다.

추가(주:역시 동환님과 얘기한 부분.): 역시 가끔씩 주인공이 혼자 돋보이거나 일행하고 떨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사회적인 성격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되는 건 일관되게 일행하고 따로 놀려고 할 때, 그리고 더 짜증나는 건 인물의 성격을 모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아니라 주인공을 극적으로도 분리시키는 핑계로 삼을 때입니다. 즉, ‘얘는 반사회적인 놈이라 일행하고 아예 안 놀아요’하고 ‘얘는 반사회적인 놈이라 일행이랑 갈등이 생겨요’의 차이인 거죠. 특히 반사회적인 인물은 일행하고 함께 다닐 이유가 확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5. 세기의 석학(주:승한님이 해주신 얘기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도움 주신 승한님께 감사드립니다.)

지식으로 남을 누르려고 드는 유형입니다. 지식을 논의의 근거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지식으로 논의를 차단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되는 유형이죠. 토의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려는 예의 바른 암살자나 제왕일 수도 있고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프리마돈나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이라면 특정 배경 세계나 규칙에 집착한 나머지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그게 모두에게 더 재밌다고 해도) 견딜 수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조하지만 아는 게 많고 그 지식을 활용한다고 해서 문제 유형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판정의 공평성이나 일관성에 문제가 보여서 지적할 수도 있고 (이것도 절대 자기 뜻을 안 굽히면 제왕 쪽으로 가지만요), 진행에 고려 사항으로 배경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시할 수도 있죠. 다만 ‘이러이러한 게 있으니까 저러저러한 방향으로 하면 어떨까?’ 하고 ‘이러이러한 게 있으니까 꼭 저러저러하게 해야 해!’의 차이 정도입니다.

이는 반드시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실제로 세기의 석학 중에서는 초보자에게 도움을 많이 주거나 판정이 애매할 때 중재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도 많으므로 이 유형의 곤란도는 대체로 낮습니다. 대신 제왕 등 다른 유형 쪽으로 기울면 비약적으로 곤란해지죠.

6. 투명인간(주:동환님에게 들은 내용이 일부 들어갔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람입니다. 특히 ORPG를 할 때는 이 사람이 장을 보러 갔나, 딴 짓 하나, 자나 싶을 정도로 심각하기도 하죠. (실제로 컴퓨터 앞에서 조는 일시 투명인간 증세도 있고..(…)) 때로는 정말로 플레이 내용에 관심이 없이 딴 짓 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구경만으로도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행자는 못하지만, 플레이 방식에 따라서는 참가자로서는 그냥 무난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로 조용한 것이라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테고, 정말로 구경이 재밌으면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을 유형이죠. 참가자 전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플레이에서 지나치게 조용하다면 참가자 대신 관객으로 은퇴(?)시키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7.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

RPG는 사회적인 놀이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긋날 길은 수도 없이 많으므로 한정된 유형에 그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유형은 다 집어치우고라도 정말 같이 지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극도로 무책임하다든가, 자제를 못 한다든가, 폭력적이라든가, 아니면 그냥 뭔가 파장이 안 맞는다든가. 이런 사람은 보통 나뿐만 아니라 다른 참여자들도 다 싫어하는데 참는 일이 많죠.

문제가 누구에게 있든 RPG는 재미있으려고 하는 놀이이며, 소중한 시간이 들어가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재미가 없고 감정만 상하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의지가 없다면 내가 나오든, 그쪽이 나오든 끝내는 게 백 배 낫습니다.

이상과 같이 RPG에서 제가 본 문제 행동 유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노우맨, 언어의 홍수 등 RPG를 통해 만난 분들에게 본 유형도 있지만, RPG하고 직접 상관은 없으므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RPG를 곤란하게 하는 문제의 진단과 해결에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꿈 속의 RPG (?)

며칠 전에는 RPG 책을 읽는 꿈을 꿨습니다. 그것도 실존하는 책이 아니라 본 적도 없는 책을 말이죠.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특이했던 건 책이 굉장히 고급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슨 박물관 책처럼 커다랗고 무거운 양장본이었고, 표지는 검은색에 은회색으로 신비한 느낌의 문양이 크게 그려진 디자인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얘기 들은 바로는 노빌리스가 그런 제본이 아닌가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서는 본 적이 없는 형태의 RPG 책이었습니다.

속도 굉장히 호화로워서, 종이도 두껍고 질이 좋더라고요. 그렇다고 막 번쩍거리는 종이는 아니고, 왜 글레이즈 페이퍼라고 하던가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페이지는 전부 흑백으로 꾸며졌고, 레이아웃도 엄청 고급스러운 느낌.

삽화는 두 개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둘 다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는 오른편 페이지 밑부분에 가로 7.5cm, 세로 7.5cm 정도 크기의 작은 정사각형 속에 추상 문양이 있었고, 그 밑에는 검은 배경에 금속성이 나는 흰색 혹은 엷은 은회색으로 알파벳이 아닌 뭔가 기하학적 느낌의 가상 문자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가문 설명 들어가는 장의 첫머리, 삽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왼편 페이지에 역시 작은 정사각형으로, 30대쯤 돼 보이는 남자의 그늘이 드리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늘에 가려서 눈은 안 보였지만 입매나 턱선에서 지적이고 강한 얼굴이라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양복 입은 모습과 로브 입은 모습이 똑같이 어울리고 위엄이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달까요. 밑에는 이름과 함께 지금 설명 들어가는 가문의 인물이라는 짤막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배경 부분을 읽으면서 알렌이라는 그 이름을 자꾸 본 걸로 봐서 아마 배경상 주요 인물 중 하나? 성은 M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내용은 어두운 풍의 현대 판타지로, 현대의 마법사 가문들과 그들의 마법, 그리고 권력다툼을 다루는 내용의 RPG였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WoD처럼 파벌 다툼과 현실 비판적 내용, 펜드래건처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대규모 서사, 그리고 아르스 마기카처럼 마법사들 간의 힘과 경쟁이라는 요소가 들어간? 규모도 있고 드라마틱해서, 읽으면서 어둡고 서사적인 분위기에 두근두근했었죠.

배경과 역사 설명이 끝나고 가문 설명 들어가는 부분은 완전히 검은 페이지에 표지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신비한 느낌의 은회색 문양이 있었고 그 페이지를 넘기니까 위에 나온 알렌 그림과 첫 가문 설명이 나왔습니다. 가문 설명을 읽기 시작할 때쯤 잠이 깼습니다.

깨고 나니 내용을 거의 다 잊은 점이 아쉽더라고요. 현실적으로 RPG 회사가 그렇게 정성이 들어간 비싼 책을 만들어도 수익이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뭐 하여튼 현실에서는 본 적도 없는 RPG 책을 꿈속에서 보다니, 저도 참 못 말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플레이와 구매, 식사와 식욕

귀스타브 도레,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55)[/footnote]”]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구스타브 도레, 1855)Wishsong님의 최근 구매 글을 보니 문득, 요즘에 저는 RPG 구매가 확 줄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는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지름신과 싸우던 때가 있었는데 (그리고 거의 항상 졌습..), 최근 한 반 년은 갖고 싶은 것도 확 줄고, RPG 관련 구매를 할 때도 예전에는

‘갖고 싶어! (하악하악)’

…이었다면 요즘에는

‘음.. 아무래도 꼭 필요하겠는걸. 돈이 되나?’

…하는 분위기가 되더군요.

이런 변화가 생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산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도 있겠고, 워낙에 규칙을 많이 구입하고 읽어봐서 웬만한 목적에 사용할 규칙은 이미 갖춘 점, 지름신 강림 제1 사유인 RPG 게시판 방문이 줄었다는 점 등이 주요 요인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구매가 줄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정기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RPG를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RPG 제품을 읽는 대신 플레이를 해야 하다 보니 책을 별로 안 사게 되었고, 현재 하는 캠페인과 규칙에 집중하다 보니 새로움에 대한 욕구도 줄었죠. RPG 게시판 방문이 감소한 것도 정기 플레이를 해서인 것 같습니다. 플레이가 없을 때는 허전해서 플레이나 규칙책 얘기라도 보려고 게시판을 많이 돌아다니게 되지만, 플레이가 있으면 플레이하고, 플레이 기록 올리고, 플레이 계획 짜는 쪽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되거든요. 그리고 가끔 RPG 게시판을 찾아가도 별로 구매 욕구는 생기지 않는다는 게 제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RPG 실제 플레이와 구매의 관계는 마치 식사와 식욕의 관계와도 비슷하더군요. 허전하면 뭔가 자꾸 주워먹으면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배가 부르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원리죠. 구매를 하더라도 지름신과 씨름하는 욕구형 구매가 아닌, 현재 캠페인에 좋은 발상이나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제품 중심의 필요형 구매가 되는 것 같습니다.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 자료용으로 클론 워즈 애니를 구입한다든지,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에 참고하려고 플레인스케이프 자료집을 산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건 제가 그렇다는 얘기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정기적인 캠페인을 하면 오히려 구매 욕구가 늘어난다는 분도 봤고요. 어쨌든 저에게 RPG를 정기적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즐거울 뿐만 아니라 돈까지 아끼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님들의 침묵 (?)

진행자의 전형적인 악몽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진행자: 자, 우리 무슨 캠페인 할까?
참가자:
진행자: 뭐 할래? 모험물? 활극? 로맨스? 정치물? 공포물?
참가자:
진행자: 응? 말 좀 해봐.
참가자: 진행자 네 맘대로 해. 우린 아무거나 다 좋아.
진행자: 에, 그래도… 어, 알았어.
(며칠 후)
진행자: 자 얘들아! 정치물 캠페인을 준비했어! 재미있게 해보자.
참가자:
참가자: 그런데 있잖아…
진행자: 응?
참가자: 정치물만 빼고 다 좋아.
진행자: @#$%!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팀 내 의사결정은 종종 한 사람 (보통 진행자)의 부담이 됩니다.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결정에는 책임이 따르고, 이것저것 생각을 해야 하는 등 귀찮으니까요. 나 외에 다른 사람이 결정의 부담과 책임을 전부 짊어진 채, 그 결정이 좋으면 혜택을 누리고, 나쁘면 모든 책임을 부정하고 욕만 하는 건 편한 위치이죠.

하지만, 막상 결정의 부담을 진 사람에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침묵하는 다수’ 대신 결정을 내리고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니까 말이죠. 침묵하는 다수는 좀 더 좋은 결정이 나오도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그 결정이 잘못된 것은 결정권자의 개인적인 실패가 되고, 결국 결정권자는 지쳐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다른 해악도 큽니다. 우선 침묵하는 다수는 플레이에서 뭔가 마음이 안 드는 점이 있어도 침묵하기 쉽습니다. 아무래도 결정 단계에서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발언권이 적은 거죠. 이러한 침묵은 그만큼 재미없는 플레이를 만듭니다. 속으로는 ‘재미없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발언력은 적으니 웬만하면 참는 거죠.

또 하나, 침묵하는 다수는 진행자를 쉽게 독재자로 만듭니다. 혼자 결정의 부담을 짊어진 사람에게는 결정 권한도 그만큼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참가자의 줄어든 발언권만큼 진행자의 발언권은 커집니다. 그래서 참가자의 침묵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권을 짊어진 진행자도 있지만, 오히려 참가자의 언로를 차단하거나 참가자 의견을 묵살하는 진행자도 많습니다. 어느 쪽이든 플레이는 재미없어지는 결과가 됩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넘어가면, 제가 진행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참가자의 침묵입니다. 저는 세상 무엇보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데, 동의도 거절도 제3의 길도 아닌 저 침묵 속에 숨은 것은 하나의 사회적 폭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참가자가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 안 하는 순간이야말로 진행을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확답을 줄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정보가 부족하다든지, 말해도 안 들어줄 것 같다든지) 얘기해야지. 마냥
침묵하면서 시간을 끄는 태도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결정의 부담을 상대에게 전부 떠넘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불쾌합니다.

물론 이런 침묵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참가자로서 저는 꽤 지적이 많은 편이었고, 이러한 지적은 종종 진행자와 충돌로 이어지곤 했거든요. 그런 피곤한 일은 피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이긴 하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반대를 숨긴 침묵보다는 차라리 정직한 충돌이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있는 갈등을 숨길 뿐이죠.

침묵을 깨는 것이 곧 캠페인을 깨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침묵의 유혹은 더욱 큽니다. 얼마 전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 분위기가 영 가라앉고 PbW (플레이 바이 위키) 외전도 별로 쇄신에 도움이 안 돼서 참가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본 결과, 생각보다 참가자들이 플레인스케이프 (Planescape) 배경에 지식이나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굳이 플레인스케이프처럼 어려운 배경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플레인스케이프 자료를 통째로 번역하기에는 배경에 대한 열의에 비해 제 부담이 너무 컸고, 배경을 바꿔서 다른 형태로라도 캠페인을 유지한다 해도 참가자들에게 그다지 의지나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망할 수 있는 미래는 삽질, 오로지 삽질뿐이었기에 결국 캠페인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침묵을 깨서 캠페인이 깨진다면 결국 침묵이 가장 현명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서로 솔직하게 의논해서 드러난 문제들은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 의논에서 말미암아 생긴 것들은 아니었으니까요. 바쁜 시간을 내서 재미없는 캠페인을 계속하느니 캠페인을 과감하게 끝내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즐겁습니다. 어느 쪽이든 열린 논의를 두려워할 이유는 되지 못하죠.

RPG는 사회적인 놀이이며, 사회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사소통입니다. 의사소통에 무엇보다 치명적인 독은 침묵입니다. 침묵 속에 숨은 것은 반드시 동의나 만족이 아니며, 불만과 반대도 얼마든지 해소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묻혀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이라는 안개를 헤매면서 서로 눈치 보는 플레이는 문제를 키우게 됩니다.  할 말이 있는데 참는 침묵은 배려와 양보가 아닌 수동적 폭력이며 책임전가, 침묵의 강요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권력을 붙들려는 유치한 공작일 뿐입니다. 침묵의 장막을 걷으면 플레이도, 인간관계도 훨씬 건강해진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반대자가 아니라, 반대하되 말이 없는 겁쟁이들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추신: 쓰다 보니 가끔 RPG 얘기를 하는 건지 정치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좀 섬뜩… 어쨌든 정치 얘기가 아니라 RPG 얘기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이치가 작용하니까 유사점이 느껴질 수도 있을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