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들의 침묵 (?)

진행자의 전형적인 악몽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진행자: 자, 우리 무슨 캠페인 할까?
참가자:
진행자: 뭐 할래? 모험물? 활극? 로맨스? 정치물? 공포물?
참가자:
진행자: 응? 말 좀 해봐.
참가자: 진행자 네 맘대로 해. 우린 아무거나 다 좋아.
진행자: 에, 그래도… 어, 알았어.
(며칠 후)
진행자: 자 얘들아! 정치물 캠페인을 준비했어! 재미있게 해보자.
참가자:
참가자: 그런데 있잖아…
진행자: 응?
참가자: 정치물만 빼고 다 좋아.
진행자: @#$%!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팀 내 의사결정은 종종 한 사람 (보통 진행자)의 부담이 됩니다.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결정에는 책임이 따르고, 이것저것 생각을 해야 하는 등 귀찮으니까요. 나 외에 다른 사람이 결정의 부담과 책임을 전부 짊어진 채, 그 결정이 좋으면 혜택을 누리고, 나쁘면 모든 책임을 부정하고 욕만 하는 건 편한 위치이죠.

하지만, 막상 결정의 부담을 진 사람에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침묵하는 다수’ 대신 결정을 내리고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니까 말이죠. 침묵하는 다수는 좀 더 좋은 결정이 나오도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그 결정이 잘못된 것은 결정권자의 개인적인 실패가 되고, 결국 결정권자는 지쳐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다른 해악도 큽니다. 우선 침묵하는 다수는 플레이에서 뭔가 마음이 안 드는 점이 있어도 침묵하기 쉽습니다. 아무래도 결정 단계에서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발언권이 적은 거죠. 이러한 침묵은 그만큼 재미없는 플레이를 만듭니다. 속으로는 ‘재미없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발언력은 적으니 웬만하면 참는 거죠.

또 하나, 침묵하는 다수는 진행자를 쉽게 독재자로 만듭니다. 혼자 결정의 부담을 짊어진 사람에게는 결정 권한도 그만큼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참가자의 줄어든 발언권만큼 진행자의 발언권은 커집니다. 그래서 참가자의 침묵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권을 짊어진 진행자도 있지만, 오히려 참가자의 언로를 차단하거나 참가자 의견을 묵살하는 진행자도 많습니다. 어느 쪽이든 플레이는 재미없어지는 결과가 됩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넘어가면, 제가 진행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참가자의 침묵입니다. 저는 세상 무엇보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데, 동의도 거절도 제3의 길도 아닌 저 침묵 속에 숨은 것은 하나의 사회적 폭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참가자가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 안 하는 순간이야말로 진행을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확답을 줄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정보가 부족하다든지, 말해도 안 들어줄 것 같다든지) 얘기해야지. 마냥
침묵하면서 시간을 끄는 태도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결정의 부담을 상대에게 전부 떠넘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불쾌합니다.

물론 이런 침묵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참가자로서 저는 꽤 지적이 많은 편이었고, 이러한 지적은 종종 진행자와 충돌로 이어지곤 했거든요. 그런 피곤한 일은 피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이긴 하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반대를 숨긴 침묵보다는 차라리 정직한 충돌이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있는 갈등을 숨길 뿐이죠.

침묵을 깨는 것이 곧 캠페인을 깨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침묵의 유혹은 더욱 큽니다. 얼마 전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 분위기가 영 가라앉고 PbW (플레이 바이 위키) 외전도 별로 쇄신에 도움이 안 돼서 참가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본 결과, 생각보다 참가자들이 플레인스케이프 (Planescape) 배경에 지식이나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굳이 플레인스케이프처럼 어려운 배경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플레인스케이프 자료를 통째로 번역하기에는 배경에 대한 열의에 비해 제 부담이 너무 컸고, 배경을 바꿔서 다른 형태로라도 캠페인을 유지한다 해도 참가자들에게 그다지 의지나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망할 수 있는 미래는 삽질, 오로지 삽질뿐이었기에 결국 캠페인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침묵을 깨서 캠페인이 깨진다면 결국 침묵이 가장 현명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서로 솔직하게 의논해서 드러난 문제들은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 의논에서 말미암아 생긴 것들은 아니었으니까요. 바쁜 시간을 내서 재미없는 캠페인을 계속하느니 캠페인을 과감하게 끝내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즐겁습니다. 어느 쪽이든 열린 논의를 두려워할 이유는 되지 못하죠.

RPG는 사회적인 놀이이며, 사회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사소통입니다. 의사소통에 무엇보다 치명적인 독은 침묵입니다. 침묵 속에 숨은 것은 반드시 동의나 만족이 아니며, 불만과 반대도 얼마든지 해소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묻혀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이라는 안개를 헤매면서 서로 눈치 보는 플레이는 문제를 키우게 됩니다.  할 말이 있는데 참는 침묵은 배려와 양보가 아닌 수동적 폭력이며 책임전가, 침묵의 강요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권력을 붙들려는 유치한 공작일 뿐입니다. 침묵의 장막을 걷으면 플레이도, 인간관계도 훨씬 건강해진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반대자가 아니라, 반대하되 말이 없는 겁쟁이들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추신: 쓰다 보니 가끔 RPG 얘기를 하는 건지 정치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좀 섬뜩… 어쨌든 정치 얘기가 아니라 RPG 얘기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이치가 작용하니까 유사점이 느껴질 수도 있을 뿐이죠.

6 thoughts on “님들의 침묵 (?)

  1. nefos

    동감. 타인을 위해 배려,양보하는 것과 자신의 호오를 밝히고 적절히 주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호오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사전준비가 그만큼 철저해야한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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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그렇죠. 배려와 양보도 의사교환을 하면서 해야지, 의견을 묻는데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건 배려는커녕 ‘엿먹어’로밖에 안 보여서 말이죠..(..) 어떤 종류의 사전준비가 있으면 각자의 호오를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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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nefos

      사전준비 때 무엇을 하면 좋을까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보단 김성일님이 답변을 달아주는게 좋을거 같네요.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거리가 별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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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아무래도 성일님 답변을 받기에는 세션에 올리는 게 빠를 것 같아 그쪽에도 올려봤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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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방인

    저같은 경우는 그 장면에서의 선택이 제 캐릭터와 별반 관계가 없는… 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상관 없는 장면일때 주로 침묵하게 되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봅니다(…) 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의견 표출’ 이라는건 잘됐을때도 잘못됐을때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댓가를 요구하는데… 침묵에는 그런 댓가가 수반되지 않는 법이거든요(…) 굳이 자신의 캐릭터와 별반 관계가 없는 장면에서 괜히 나섰다가 그 의견이 덜컥 채택되어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결과가 좋지않아 돌아오는건 싸늘한 시선뿐이더라(…) 라는 상황은 정말이지 엿스럽거든요(…)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개입을 장려하려면 역시 그 장면이 모든 캐릭터에게 엇비슷하거나 완전히 동등한 정도의 의미를 갖게 만들어야 할텐데 역시 그게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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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부분에까지 별 말이 없는 걸 뭐라고 하는 건 아니죠. 그런 때는 ‘말해도 좋지만’ 말이 없는 게 불쾌한 정도는 아니니까요. 글에서 다루는 건 주로 자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부분인데 말이 없을 때, 직접 의견을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을 때, 그리고 모두와 관련이 깊은 결정인데 (캠페인 향방이라든지) 진행자야 너는 떠들어라 우리는 상관없다 모드일 때죠. 즉 캠페인에 대한 주인의식이 치명적으로 부족할 때랄까요. 제가 열거한 경우에까지 의사를 표시하는 부담을 지기 싫다면 그건 플레이도 하기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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