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를 곤란하게 하는 행동유형

RPG를 하다 보면 실제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규칙도, 시나리오도, 인물 표현도 아니고 바로 실제 플레이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회적인 놀이라는 RPG의 본질적 성격은 재미의 근원이지만, 의사소통과 협력을 어렵게 하는 행동은 RPG의 재미를 망치기 쉽죠. 어떤 행동 혹은 성격 유형이 곤란한지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경험에 기반을 두지만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보고 찔리는 분은 개인적으로 문의하십..),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문제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어떤 한 사람을 완전히 한 유형에 집어넣을 수 없는 게 보통일 것입니다.

문제 행동 유형은 제가 느끼기에 곤란한 순서로 나열해 보았고, 마지막은 나머지로 설명할 수 없는 포괄적인 유형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의 바른 암살자

아마 수동적 공격성이라는 성격 유형과 꽤 잘 들어맞을 것입니다. 예의 바른 암살자 유형의 특징은 우선 말 그대로 예의 바르고 조용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2번부터 나올 유형들과는 달리 일찍 진단하고 가려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얌전하다 보니까 시비가 붙어서 파토나는 일도 좀처럼 없죠. 그래서 제가 곤란하게 꼽는 유형 1위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고요.

예의 바른 암살자의 문제는 바로 이 조용하고 얌전하다는 점에서 나옵니다. 조용한 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반대와 비판, 거절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조용하고 얌전해진 사람들이거든요. 때문에 예의 바른 암살자는 의견을 교환하는 데 상당히 인색합니다. 의견을 내라고 해도 잘 내지 않고 (님들의 침묵 참조), 상대가 뭔가 제안하면 마지못해 대충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예의 바른 암살자는 6번 투명인간과는 달리 플레이 내용에 아예 관심을 끄거나 포기한 건 아닙니다. 다만, 정당한 토의 과정에서 남과 부딪히고 제안이 거절당하는 게 싫을 뿐이죠. 같은 이유로 다른 참여자의 제안에도 별 저항 없이 동의하지만, 그건 진정한 합의가 아니라 무원칙한 회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죠. 공개적인 토의가 아닌 다른 형태로 표출할 뿐.

예의 바른 암살자는 모두가 의견을 교환하는 토의 자리가 아닌, 남이 반대하기 곤란한 순간에 기습 작전을 펼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 도중에 제안이 아닌 단정의 형태로 뭔가를 서술해버린다든가, 원하는 설정을 토론 없이 최종 결정의 형태로 끼워넣으려고 한다든가. 제안해서 거절당하기는 두렵고 그렇다고 플레이상 욕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결국 토론을 차단하는 기습적인 형태로 ‘의견’이 아닌 ‘결정’을 은근히 강요하는 것이 예의 바른 암살자의 특징입니다. 자기 의견을 ‘나의 의견’이 아닌 ‘당연히 그래야 할 것’으로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것도 의견 제시를 두려워하는 예의 바른 암살자에게 볼 수 있는 행동이죠.

예의 바른 암살자 유형은 허심탄회한 의사소통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RPG의 재미를 저해하는 유형입니다. 게다가 이런 행동은 딱히 지적할 잘못은 없으면서도 (그것이야말로 예의 바른 암살자가 피하려는 바이니) 짜증과 적개심을 은근히 쌓이게 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위에 얘기한 대로 예의 바른 암살자는 기본적으로 대립을 회피하는 얌전한 성향이라 자칫하면 감정적 학대를 유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짜증이 나니까 주변에서 화풀이를 하면 예의 바른 암살자는 그런 취급에 대해 항의하지는 못하고 더욱 움츠러드는 거죠.

이런 수동적 공격성은 유달리 심한 사람도 있지만 누구든지 가끔은 보일 수 있으며, 다른 문제 행동을 보강하는 보조적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추가(주:동환님과 얘기한 부분입니다.): 물론 반드시 플레이 외적 토의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참여자 사이 역할 분담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역할 내에 있는 부분을 뜻대로 하는 것을 기습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는 일단 다른 참여자의 영역, 혹은 공동 영역이라고 인정한 부분인데 제안이나 의논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강요, 그것도 은근슬쩍 강요하려는 행동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2. 제왕 (황소고집)

뭐든지 자기 식대로 해야 하는 게 이 행동 유형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의사소통과 협조를 아예 거부해버리죠. 때로는 예의 바른 암살자의 수법을 일부 사용해 의논을 슬슬 피하기도 하고, ‘싫으면 나가라’는 식으로 벽을 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은 아래 4번 황야의 레인저와 마찬가지로 남하고 놀기 싫다는 뜻이니까 소원대로 해주면 됩니다. (..)

추가(주:역시 동환님과 얘기한 부분입니다.): 사실 이 문제 유형이란 뭐든지 정도의 문제라서, 자기 목소리가 확실하고 주장이 분명한 분은 오히려 환영입니다. 바로 자기 뜻을 꺾어버리면 밀고 당기는 재미가 없죠. 문제는 자기 의견을 절대로 꺾지 않거나 의견이 꺾이면 삐져서 뒤끝이 안 좋은 분입니다.

3. 프리마돈나 (질투쟁이)

이 유형은 뭐든지 자기가 제일이어야 합니다. 인물 능력치든 주목도든 뭐든 자신이 우선이어야 하고 다른 참여자는 그런 자신을 우러러봐야 합니다. GMPC를 굴리는 진행자일 수도 있고, 진행자를 끼고 일행 최강 PC를 만든 참가자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결론은 ‘너 혼자 놀아’인 겁니다.

추가: 이것 역시 억지스럽고 짜증나는 정도가 아니면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자기 인물이 돋보이는 걸 원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고, 서로 멋져 보이려고 하는 플레이야말로 활발하고 즐겁죠. 문제는 그 기준이 ‘내가 멋진 것’이 아니라 ‘남보다 멋진 것’일 때, 더 큰 문제는 ‘남을 깎아내리기’가 일상이 될 때입니다.

4. 황야의 레인저 (천상천하 유아독존)

제 경험으로는 참가자에게만 나타나는 유형인데, 이 유형은 다른 참가자하고 협력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1:1 플레이가 아닌데도 1:1 플레이를 하고 싶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주인공은 비사회적인 성격이라서 다른 주인공에게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든가, 습관적으로 일행에서 이탈하면서 진행자가 자기만 따라오기 기대한다든가 하는 행동을 보이죠.

3번 프리마돈나 기질도 보인다면 혼자 잘나고 싶어서 하는 짓이고 (반사회적이고 고독한 주인공을 하고 싶은 ‘개폼’이 많죠), 6번 투명인간 기질이라면 혼자 떨어져서 그냥 구경만 하고 싶어서 그러기도 합니다. 어쨌든 혼자 놀고 싶으면 혼자 놀게 해주자는 게 제 지론입니다.

추가(주:역시 동환님과 얘기한 부분.): 역시 가끔씩 주인공이 혼자 돋보이거나 일행하고 떨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사회적인 성격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되는 건 일관되게 일행하고 따로 놀려고 할 때, 그리고 더 짜증나는 건 인물의 성격을 모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아니라 주인공을 극적으로도 분리시키는 핑계로 삼을 때입니다. 즉, ‘얘는 반사회적인 놈이라 일행하고 아예 안 놀아요’하고 ‘얘는 반사회적인 놈이라 일행이랑 갈등이 생겨요’의 차이인 거죠. 특히 반사회적인 인물은 일행하고 함께 다닐 이유가 확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5. 세기의 석학(주:승한님이 해주신 얘기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도움 주신 승한님께 감사드립니다.)

지식으로 남을 누르려고 드는 유형입니다. 지식을 논의의 근거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지식으로 논의를 차단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되는 유형이죠. 토의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려는 예의 바른 암살자나 제왕일 수도 있고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프리마돈나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이라면 특정 배경 세계나 규칙에 집착한 나머지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그게 모두에게 더 재밌다고 해도) 견딜 수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조하지만 아는 게 많고 그 지식을 활용한다고 해서 문제 유형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판정의 공평성이나 일관성에 문제가 보여서 지적할 수도 있고 (이것도 절대 자기 뜻을 안 굽히면 제왕 쪽으로 가지만요), 진행에 고려 사항으로 배경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시할 수도 있죠. 다만 ‘이러이러한 게 있으니까 저러저러한 방향으로 하면 어떨까?’ 하고 ‘이러이러한 게 있으니까 꼭 저러저러하게 해야 해!’의 차이 정도입니다.

이는 반드시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실제로 세기의 석학 중에서는 초보자에게 도움을 많이 주거나 판정이 애매할 때 중재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도 많으므로 이 유형의 곤란도는 대체로 낮습니다. 대신 제왕 등 다른 유형 쪽으로 기울면 비약적으로 곤란해지죠.

6. 투명인간(주:동환님에게 들은 내용이 일부 들어갔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람입니다. 특히 ORPG를 할 때는 이 사람이 장을 보러 갔나, 딴 짓 하나, 자나 싶을 정도로 심각하기도 하죠. (실제로 컴퓨터 앞에서 조는 일시 투명인간 증세도 있고..(…)) 때로는 정말로 플레이 내용에 관심이 없이 딴 짓 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구경만으로도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행자는 못하지만, 플레이 방식에 따라서는 참가자로서는 그냥 무난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로 조용한 것이라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테고, 정말로 구경이 재밌으면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을 유형이죠. 참가자 전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플레이에서 지나치게 조용하다면 참가자 대신 관객으로 은퇴(?)시키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7.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

RPG는 사회적인 놀이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긋날 길은 수도 없이 많으므로 한정된 유형에 그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유형은 다 집어치우고라도 정말 같이 지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극도로 무책임하다든가, 자제를 못 한다든가, 폭력적이라든가, 아니면 그냥 뭔가 파장이 안 맞는다든가. 이런 사람은 보통 나뿐만 아니라 다른 참여자들도 다 싫어하는데 참는 일이 많죠.

문제가 누구에게 있든 RPG는 재미있으려고 하는 놀이이며, 소중한 시간이 들어가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재미가 없고 감정만 상하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의지가 없다면 내가 나오든, 그쪽이 나오든 끝내는 게 백 배 낫습니다.

이상과 같이 RPG에서 제가 본 문제 행동 유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노우맨, 언어의 홍수 등 RPG를 통해 만난 분들에게 본 유형도 있지만, RPG하고 직접 상관은 없으므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RPG를 곤란하게 하는 문제의 진단과 해결에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7 thoughts on “RPG를 곤란하게 하는 행동유형

  1. 아카스트

    흑흑 로키님 제게 불만이 있으셨으면 직접 말로 하셔도 괜찮았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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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방인

    나쁜 말이라는거는 진짜 아예 대판 싸우고 다시는 안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한 한국사회에서는 사람앞에서 대놓고 할수가 없는것이라. 자기를 욕하는( ? ) 소리를 들을 기회가 한국사회에선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 앞에서 저에 대해서 대놓고 비판을 해주는 사람을 믿는 편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욕하고 비판해 줄수 있는 사람이라면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녀도 ‘걔는 원래 날 싫어하는 놈이다’ 라고 별충격 없이 넘어갈수 있으며, 앞에선 욕해주고 내가 없을때 남들 앞에선 날 칭찬해준다면 그거야말로 더 이상 바랄게 없는 경우기 때문이죠.
    이런 ‘피하고 싶은 RPG참가자 유형’ 에 대해서 여기와서 글을 볼때마다 과연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며 다른 참가자들은 혹시 나를 싫어하거나 별로 안좋아하면서도 그냥 그냥 참고 가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히 고민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RPG입문때 이상한놈(…) 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난 이후에는 그냥 맘맞는 사람들끼리 계속해서 수년간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해서 RPG를 즐겨왔고… 다챗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처음으로 여기 플레이에 합류해 ‘패거리’ 이외의 사람들과 처음 접했으니 실제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손발을 맞춰본 경험이라고 해봐야 제로에 가깝군요.
    혼자서 장연설을 늘어놓는걸 즐기는거 말고 저의 다른 문제점은 뭘까요(…) 혹시라도 다른사람들이 싫어하면서도 참고 있는 또다른 문제점 같은건 없는걸까요(…)
    몹시도 궁금해지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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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저는 욕할 것 있으면 면전에서 하는 편이죠. 지적 안 들으셨으면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셔도 돼요. 이방인님은 가장 실력 있다고 생각하는 참가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적극적인 거야 원칙적으로 RPG에서는 미덕이고, 분명하고 중심적인 갈등을 제시하니까 진행자로서는 편하죠.

      자락스 설정 초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설정도 있었지만 그거야 지적을 잘 받아들이시니까 문제 없고, 또 굳이 아쉬운 점이라면 어떤 인물이든 비슷하게 열혈스럽게 표현하시고 여성 캐릭터를 하시는 걸 본 일이 없다는 정도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저하고 잘 맞는 참가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Reply
    1. 로키

      트랙백을 쓰시려면 글을 작성하실 때 트랙백 칸에 트랙백 URL을 입력하시면 됩니다. (뭔가 도움이 안 되는 설명인데..(..)) 블로그마다 다른데, 제가 이글루스 하던 당시에는 글 입력 상자 밑부분에 트랙백 입력 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저도 처음 블로깅할 때 많이 헷갈린 부분이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자연 알게 되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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