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가 룰링을 할 때 명심할 사항

예전에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전 룰링(Ruling)이라는 개념을 무척 좋아합니다. (‘월드 인 페릴과 룰링’(링크) 참조) 룰링이라는 개념을 다시 설명하자면, 모든 상황에 일일이 룰을 적용하는 대신, 마스터의 감각과 상식을 활용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룰링입니다. 룰이 간단할수록 룰링의 비중은 더욱 커지지요. 예를 들어 전사 PC가 수영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RPG에는 능력치 규칙은 있어도 수영 규칙은 없다고 칩시다. 이때 마스터가 “힘을 써야 하니까 근력 판정해!” “지구력이 필요하니까 건강 판정해!”라고 결정을 하면 그게 바로 마스터의 판단, 즉 룰링입니다.

마스터가 룰링을 잘 한다면 규칙을 적게 사용해도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룰보다 룰링에 더 의존할수록 마스터의 부담은 점점 더 커집니다. 명문화된 규칙, 즉 룰과는 달리 룰링은 마스터의 판단과 재치에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썼던 ‘월드 인 페릴과 룰링’은 특히 AWE 마스터링을 할 때 가질 자세에 관한 글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룰링을 할 때 명심할 사항을 적어보겠습니다.

  1. 인과 관계를 명확하게 만듭니다. 전투에서 할 수 있는게 “공격!” 밖에 없는 단순한 RPG를 예로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PC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린 다음 단검으로 찌르려 한다면,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쓰러지는지 보기 위해 규칙에도 없는 근력 판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 근력 판정을 해야 할까요? 넘어지지 않고 버티려면 힘이 필요하니까요. 사기 판정 같은 게 없는 RPG에서 고블린이 HP가 0이 되지도 않았는데 항복합니다. 왜일까요? 더 싸워봤자 승산도 없고 도망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블린이 제정신이라면, 항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항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일까요? PC들이 가는 길에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여기에서 항복하면 죽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룰링을 적용하든, 그 룰링을 뒷받침할 만한 인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2.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인과 관계는 디테일에서 드러납니다. “상대가 세게 몸을 부딪혔네요. 근력 판정하세요.” 보다는 “상대가 세게 몸을 부딪쳤네요. 여러분을 쓰러뜨린 다음 단검으로 찌르려는 것 같습니다. 버티지 못하면 넘어집니다. 근력 판정하세요.” 라고 좀 더 살을 덧붙이면 플레이어들에게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릴 것입니다.
  3. 일관성을 갖춥니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다시 벌어졌을 때는 같은 논리로 룰링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전에 수영할 때는 근력 판정을 했는데 이번에 건강 판정을 했다면 일관성에 맞지 않습니다. 다만, 플레이어들이 이해할만한 묘사를 한다면 다른 논리를 적용해도 괜찮습니다.
  4. 마스터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장르의 지식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 RPG에서 마을에 네이팜탄이 떨어져서 불이 붙었을 때, 플레이어들이 “강물을 부어서 끕니다!”라고 선언하면 마스터는 네이팜탄이 물로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정도의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많이 알수록 룰링도 쉬워집니다. 해당 장르에서 많이 벌어질 만한 상황을 연구하세요.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는 게 자연스러울지 생각하세요. AWE의 강령-원칙-GM 액션은 이런 부분의 70% 정도를 채우지만, 나머지는 마스터 자신의 노력입니다.
  5. 룰링을 할 때는 테이블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성문화된 규칙으로서 누구나 다 따를 수 있는 룰과는 다르게 룰링은 팀 관습과 문화에 가깝습니다. 플레이어들이 동의할 수 없는 룰링은 횡포입니다. 던전 월드의 태그를 잘 활용한 사례로 들곤 하는 HP 16짜리 용 이야기(링크)’는 테이블에 따라서는 마스터의 횡포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입니다.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이루어지면 좋겠네요.

[Let’s Read] 미쓰라스 (6장)

6장: 게임 규칙

아주 오랜만에 다시 미쓰라스 소개글을 재개하네요. 독촉해주신 qws2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6장은 플레이 중에 발생하는 여러 상황을 규칙으로 설명합니다. 겁스 캠페인북에서 소개하는 각종 상황 규칙과 유사합니다.

포함된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알파벳 순서입니다)

산(Acid)

산 농도가 강할수록 피해가 커지고 지속 시간이 길어집니다.

행동, 시간, 이동

미쓰라스의 행동 단위는 전투 라운드, 국지적 시간, 전략적 시간으로 나뉘어집니다. 전투 시간을 나타내는 전투 라운드는 5초이며, 캐릭터의 각종 활동(자물쇠 따기, 정찰, 탐색 등등)을 나타내는 국지적 시간은 몇 분에서 몇 시간 정도의 단위이며, 더욱 큰 활동(특정한 목적지로 가기, 도시 뒤지기 등등)을 나타내는 전략적 시간은 며칠에서 몇 달, 몇 년까지 걸릴 수 있습니다.

이동은 캐릭터가 각종 교통수단을 사용해 하루에 얼마나 갈 수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나이

캐릭터가 나이를 먹으면서 노화 판정을 하고, 능력치가 감소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질식과 익사(호흡 규칙)

캐릭터가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참지 못할 경우 얼마나 피로가 쌓이는지 나타냅니다.

출혈

출혈의 위험을 다룹니다. 각 상황(전투, 치료 실패, 병)에서 나타나는 출혈을 몇 쪽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캐릭터 성장

마스터는 적당한 때(성공한 모험마다, 특정 시간의 경과마다)에 플레이어에게 성장 판정을 시킬 수 있습니다. 캐릭터는 성장 판정으로 능력치(크기 제외), 열정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전문 기능을 습득하고, 새로운 마법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원래 가진 기능은 성장 판정 대신 훈련을 통해서도 더욱 갈고 닦을 수 있습니다.

질병과 독

질병과 독이 유입되는 경로, 그 결과 받는 상태(고통이나 질식, 출혈, 정신질환, 죽음 등등…), 병과 독의 예시 등을 듭니다.

하중

캐릭터는 자신의 힘(STR)에 비례해 더욱 많은 짐을 질 수 있습니다. 하중 항목은 캐릭터가 얼마나 많은 짐을 질 수 있는지, 초과할 경우 어떤 페널티를 받는지, 갑옷의 무게는 어떻게 계산하는지, 비인간의 하중은 어떻게 결정하는지 다룹니다.

추락

추락 높이와 캐릭터 크기, 지면 상태에 따라 받는 피해를 다룹니다. 떨어지는 물체에 맞을 때, 탈것에서 떨어질 때 내용도 다룹니다.

피로

캐릭터는 생명점 말고도 10단계에 이르는 피로 단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캐릭터는 출혈이나 호흡 곤란, 특정 종류의 마법 사용 등에 따라 피로 단계에 영향을 받으며, 각 피로 단계마다 기술 판정, 이동, 전투시 우선권, 행동 점수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피로가 10단계에 이르면 죽습니다.

더욱 큰 불일수록 빨리 불이 붙고 피해도 더 큽니다.

상처 치료

미쓰라스는 각 신체 부위 별로 HP를 적용하며, HP를 얼마나 잃었는지에 따라 작은 부상, 큰 부상, 심각한 부상으로 나눕니다. 이번 항목은 부상 단계별 회복 시간, 회복 방법, 영구적인 상처(심각한 부상을 입을 때 남을 수 있습니다)를 다룹니다.

물건

물건의 방호점과 HP를 다룹니다. 보통 물건을 파괴할 때 계산합니다.

행운 점수

행운 점수의 사용 방법(판정 결과 바꾸기, 전투 때 추가 행동 하기, 피해 단계 줄이기)을 다룹니다.

열정

캐릭터의 열정을 언제 사용하는지 더욱 자세하게 다룹니다. (열정과 관련 있는 기능 판정에 보너스를 줄 때, 열정과 반하는 선택을 할 때, 다른 열정에 대항할 때, 열정에 반하는 정신 마법에 저항할 때 등)

생존

캐릭터가 적대적인 환경에서(더위나 추위, 굶주림, 탈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다룹니다.

덫의 목적과 발동 방식, 덫에 맞설 때 판정, 덫에 저항하는 방식, 효과, 예시 덫 등을 다룹니다.

가시 거리

캐릭터가 각종 상황(맑을 때, 안개가 낄 때, 눈이 내릴 때 등등)에서 얼마나 멀리 볼 수 있는지, 상대 크기에 따라 얼마나 쉽게 볼 수 있는지 다룹니다.

날씨

바람의 세기, 온도, 강수량 등을 다룹니다.

 

 

 

6장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7장은 미쓰라스의 꽃인 전투입니다.

월드 인 페릴의 전투를 처리하는 법

월드 인 페릴에서, 히어로가 악당에게 심각한 상태를 주었다면 편집장은 악당이 전투를 계속 할지 점검하세요. 심각한 상태는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뼈가 으스러지거나, 희망을 잃는 등 정말 ‘심각’한 상태입니다. 도망칠 건가요? 아니면 항복할 건가요? 전투를 계속 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요?

상태 한계가 바닥나지 않더라도 히어로는 악당을 언제든지 무찌를 수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중간 부분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일시적으로나마 체포한 걸 기억하세요.

그렇다면 상태 한계가 바닥나지 않았는데 히어로에게 잡힌 악당은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세요. 힘을 기르고, 음모를 꾸미고, 동료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6-을 굴리면 그런 일이 발생하겠죠.

상태 한계가 바닥났을 때, 악당은 비로소 진짜 패배를 인정합니다. 히어로는 그제서야 발뻗고 잘 수 있습니다… 새로운 악당이 등장할 때까지, 혹은 악당의 상태가 회복될 때까지 말이지요. 하지만 악당(특히 마스터마인드)의 상태 한계가 바닥나면, 하나의 스토리아크가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부분은 책의 FAQ(p.204)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변경의 약탈자들(Freebooters on the Frontier) 소개

던전월드는 팬들과 게임 제작자들이 각종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AWE 자매작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지요.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변경의 약탈자들(Freebooters on the Frontier)’ 입니다. (링크)

변경의 약탈자들은 초보 모험자들이 대박을 꿈꾸며(은화 만 냥을 벌면 게임이 끝납니다) 위험한 모험에 나서는 내용입니다. 기존 던전 월드보다 훨씬 생존과 모험 관련 규칙을 강화했고, 같은 회사에서 만든 자료집인 ‘위험한 야생지대(The Perilous Wilds)’와 함께 사용하면 완벽한 탐험물이 됩니다.

변경의 약탈자들은 위험한 야생지대와 함께 큰 인기를 끌어서 2판은 아예 독자적인 RPG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도 무척 기대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현재 플레이테스트 자료를 공개 중이니, 한 번 보세요! (링크)

늑대 떼와 겨울 눈(Wolf-packs & Winter Snow) 소개

<늑대 떼와 겨울 눈>은 빙하기를 배경으로 한 OSR RPG입니다. 주로 <불꽃공주의 애가>(Lamentations of the Flame Princess)의 룰을 개조해 만들었고, 그 외에 <울타리 너머>(Beyond the Wall), <모험가, 정복자, 왕>(Adventurer, Conqueror, King)도 참조했습니다. 원래 2016년에 나온 작품인데, 1년 사이에 다시 개정판을 만들었습니다. (개정판 PDF 기준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주요 특징

<늑대 떼…>은 OSR RPG로, D&D를 기반으로 한 다른 자매작들과 많은 공통점을 공유합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눈에 띄는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캐릭터: 플레이어들은 PC로 사냥꾼, 전문가, 마법사, 네안데르탈인을 각각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각 직업은 특정 분야를 특기로 하는데 사냥꾼은 전투를, 전문가는 잡다한 기술과 지식을, 마법사는 마법을, 네안데르탈인은 엄청난 생존력을 특기로 합니다. 그 외에 추가 직업들도 있는데, 별도의 허락 없이는 NPC 전용입니다. (예를 들어 인육을 먹는 직업인 웬딩고라든지, 신적 존재와 계약을 맺고 마법을 쓰는 미스틱 등등…)

Flesh와 Grit: 캐릭터의 HP는 실제 생명력인 Flesh와 의지나 끈기 등을 나타내는 Grit로 나누어집니다. 보통 전투에서는 Grit가 먼저 깎인 다음, 모든 Grit가 바닥나면 그제야 Flesh가 깎입니다. Grit는 짧은 휴식을 취하면 모두 회복되며, Flesh는 하루 잘 때마다 1점씩 회복됩니다.

기능: 각 캐릭터는 운동이나 공예, 동물지식 등 각자 기능을 갖춥니다. 각 기능은 6면체를 굴려 판정하는데, 기본적으로 1이 나오면 성공합니다. 각 기능은 관련 능력치의 보너스를 받으며(예를 들어 지능이 14(+1 보너스)면 지능 관련 기능을 굴릴 때 성공률이 1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가면서 기능의 성공률도 올라갑니다.

극복 판정: <늑대 떼…>에서 PC들이 피하거나 버텨야 하는 요소는 네 가지입니다: 날씨(날씨에서 비롯되는 문제), 위험(물리적인 위험을 피하거나 버틸 때), 마법(초자연적 요소에 저항할 때), 독.

공격 판정: 사냥꾼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는 레벨이 올라도 공격 보너스를 받지 않습니다. 상대의 AC보다 같거나 높게 나오면 명중입니다.

하중: 캐릭터는 자신이 든 물건의 수가 근력 수치보다 높으면 하중 페널티를 받습니다. 특별히 무겁거나 불편한 물건은 복수의 물건으로 칩니다.

경험치: 캐릭터는 위험한 짐승을 죽이고 고기를 얻거나(반드시 진짜 위협이 되어야 합니다), 동굴을 탐사해서 부족이 살 수 있을 만큼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면 경험치를 얻습니다. 특히 동굴 탐사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서 GM이 동굴을 어떻게 만들지, 어떤 위험을 배치할지 소개합니다.

마법: 마법사는 자기 성소(동굴이나 오두막)에 아는 주문들을 그려서 기록합니다. 성소 안에서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읽어서 사용할 수 있으며, 바깥에서는 각 주문을 외워서 사용해야 합니다. 마법의 사용은 위험하며, 남이 그린 주문을 익히려고 하거나 무리해서 마법을 사용하면 마법의 폭주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족: PC들은 레벨이 높아지면서 자신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모아 부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늑대 떼…>에서는 부족을 이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부족을 유지해야 할지 규칙을 소개합니다.

플레이 방식: <늑대 떼…>는 빙하시대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의 생존을 주요 테마로 합니다. 그래서 각종 무작위 표를 이용해 PC들에게 위험요소를 던지는 플레이를 권장합니다. 하루하루 캐릭터들은 식량과, 맹수와, 적대적인 부족과, 위험한 환경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마법적인 위협에 시달립니다. 캐릭터들이 하루하루 분투하며 주변 세계를 알아가고, NPC들과 각종 집단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 커다란 캠페인으로 흘러가게 되지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OSR 게임들은 기존 D&D 규칙에 무언가 다른 데에서 볼 수 없는 재미있고 개성적인 요소를 결합한 작품입니다. 예전에 소개한 <The Nightmares Underneath>라든지, 올해 소개할 <울타리 너머…> 같은 작품들이 그 예입니다. <늑대 떼와 겨울 눈> 역시 그런 기준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재미있는 RPG입니다. 아마 빙하시대 원시인들을 다룬 RPG로는 이만한 작품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A Quick Primer for Old School Gaming (고전파 RPG 속성 지침서)을 통해 보는 올드 스쿨 마스터링과 그 위험성.

http://froggodgames.org/quick-primer-old-school-gaming

요즘 누메네라를 플레이하면서, 이 게임이 올드 스쿨 RPG의 플레이 방식을 지향한다고 느껴져서 이 글을 소개합니다.  위 지침서는 소드&위저드리(Swords & Wizardry)의 제작자인 매튜 J. 핀치가 쓴 올드 스쿨 RPG 입문서입니다. 지침서에서는 크게 네 가지 내용을 설명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1. 하나하나 룰에 의존하는 대신 상식으로 플레이하기 (룰 말고 룰링)
  2. 캐릭터 능력 말고 플레이어 능력으로 해결
  3. 평범한 인간이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는 플레이 지향
  4. 인위적인 “게임 밸런스”는 잊어라.

필자는 올드 스쿨 RPG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소개하기 위해 (편견을 듬뿍 담아) “따분하게 흘러가는 최신 RPG의 플레이 스타일”과 비교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최신 RPG)

마스터: “어둠 속에 복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플레이어: “덫 판정할래요.”

마스터: “굴려 보세요.”

플레이어: “15요”

마스터: “함정이 있네요.”

 

(고전 RPG)

마스터: “어둠 속에 복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플레이어: “물통에 있는 물을 바닥에 흘려서 바닥의 패턴을 확인할래요.”

마스터: “바닥에 흘린 물이 네모난 형태로 흘러가네요.”

플레이어: “함정인가요?”

마스터: “그럴지도요.”

플레이어: “제거할 수 있나요?”

마스터: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파악하기는 어려워요. 밟으면 함정이 열려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플레이어: “그냥 옆으로 지나쳐 갈래요.”

이 글만으로는 올드 스쿨 쪽이 좀 더 재미있게 보이는데, 저는 이런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합의한 게임 외적/내적 기준과 상호 존중하는 마음 없이 상식과 플레이어 실력에만 의존해 플레이하면 그 안에서 악의가 섞이기 쉽습니다. 예전에 한창 논의되었던 “사도 마스터링과 이에 대항하는 편집증적인 플레이”가 재현되겠지요.

특히 마스터는 “내가 창의적으로 마스터링을 하니까 너도 창의적인 플레이를 해야 해!”처럼 플레이어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플레이어 지식으로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아래처럼 악명높은 그림투스 트랩 같은 덫 모음은 자칫하면 테이블에서 다툼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제가 마스터라면 이런 덫을 쓰더라도 (플레이어가 아니라)PC는 이 정도 덫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할 거라고 간주하고 지각력 판정이나 덫 지식 판정을 요구할 것입니다. 마스터의 창의성은 플레이어를 돕고 창의적인 행동을 하도록 발휘되어야 하지, 플레이어를 괴롭히고 시험하는데 발휘되어서는 안 됩니다. 플레이어가 마스터의 ‘창의성’을 따라잡지 못해서 플레이어가 불쾌해했다면 룰링을 잘못 적용한 사례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그런 면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마스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정한 AWE의 강령-원칙-MC 액션을 좋아합니다. 상식과 규칙 사이에서 중용을 잘 잡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쓴 ‘월드 인 페릴과 룰링(클릭)’과 ‘롤플레잉 실력 격차 줄이기(클릭)’도 어느 정도 위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플레이어와 마스터의 창의성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플레이어의 실력 격차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줄일 수 있는지 생각을 하면서 쓴 글이니까요.

The Nightmares Underneath(TNU) 소개.

배경소개

TNU는 이슬람 문명풍의 “꿈의 왕국(The Kingdoms of Dreams)”을 배경으로 하는 OSR RPG입니다. 꿈의 왕국은 법과 이성을 내세우면서 폭정과 우상숭배에 빠진 옛 세상을 타파하고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심연의 혼돈에서 악몽의 세력이 세상을 침범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악몽의 세력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이들을 매개로 삼아 현실에 침입합니다. 이러한 악몽의 영역에 접촉한 사람들은 대부분 미쳐버립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미치지 않고 견디는 강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모험자이자, PC입니다. PC들은 이 세상에 침입한 악몽을 격퇴하고, 그 와중에 얻는 각종 보상으로 살아갑니다.

 

규칙 특징

TNU는 옛 D&D를 기반으로 한 RPG입니다. 여기에 D&D 5판의 이점/불이점(Advantage/Disadvatage) 규칙, 그리고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의 판정 일부를 좀 섞었다고 보면 됩니다. 특이한 점만 좀 소개하겠습니다.

  1. 자신의 기능을 사용하거나, 신체/정신적인 활동을 할 때, 또는 내성 굴림을 할 때는 능력치 판정을 합니다. D20을 굴려 능력치보다 낮으면 성공입니다. 매우 어려운 일을 할 때는 능력치 절반으로 판정을 합니다. 도움이나 방해가 있으면 이점/불이점을 적용해서 주사위를 하나 더 굴려 높은 주사위, 또는 낮은 주사위를 선택합니다.
  2. 무언가 여러 가지 결과가 나올 만한 일(교섭 등)을 할 때는 2d6+능력치 수정치로 판정합니다. 6-가 나오면 나쁜 결과, 7-9가 나오면 약한 성공, 10~11이 나오면 성공, 12가 나오면 대성공입니다.
  3. 겨루기를 할 때도 2d6+능력치 수정치로 굴려 높은 쪽이 이깁니다.
  4. 각 직업은 전사 1d8, 도적 1d6, 학자 1d4 같은 식으로 d6, d8 처럼 히트 다이스(Hit Dice)를 가집니다. 히트 다이스는 캐릭터의 생명력, 그리고 적에게 주는 피해에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PC는 길게 휴식을 할 때마다 주도권(Disposition)을 굴립니다. 이 주도권은 자신의 레벨x히트 다이스(Hit Dice)만큼 굴립니다(다른 D&D풍 RPG의 HP라고 보면 됩니다). 전투에서 주도권이 모두 깎이면 건강 수치를 깎습니다. PC는 건강 수치가 깎일 때마다 일시적으로 전투불능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며, 0이 되면 죽습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때도 히트 다이스만큼 피해를 줍니다. 양손 무기면 주사위 크기가 한 단계 늘어나고, 맨손이나 즉흥무기로 공격하면 한 단계 줍니다.
  5. 마법은 마법사 같은 일부 클래스가 사용하는데, 기존 D&D의 반스식 마법을 살짝 바꿨습니다. 마법을 쓴 다음 잊어버리면 별 문제 없이 사용이 가능하고, 마법을 쓴 다음 그대로 유지하려면 제어 판정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주문이 폭주해서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캐릭터 레벨보다 높은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제어 판정이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가치관과 직업

TNU의 가치관은 질서, 혼돈, 중립, 선, 악인데, 이중 “악”은 특이하게도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의미보다는 캐릭터의 동기가 “누군가를 해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캐릭터는 단순히 폭력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정의롭고 선하지만 용서하지 못할 적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직업도 달라집니다.

암살자(Assassin): 암살자입니다. 가볍게 무장을 한 채 은신과 기습공격에 능합니다.

음유시인(Bard): 음유시인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주도권 회복을 돕고, 필요할 때 자신의 주도권을 다른사람에게 옮기고, 마법을 씁니다.

투사(Champion): 마녀 사냥꾼이나 성기사, 종교재판관 등 신념을 위해 싸우는 용사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특수 능력을 얻고, 같은 가치관을 가진 동료에게 보너스를 주고, 다른 가치관을 찾아내고, 어느 정도 잘 싸웁니다.

사교도(Cultist): 꿈의 왕국에서 우상으로 간주하는 옛 신들을 숭배하는 성직자입니다. 마법을 쓰고, 자신이 적으로 정한 부류의 상대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전사(Fighter): 전문적인 전사입니다. 아주아주 잘 싸웁니다. 각종 무기를 쓰고, 무거운 걸 잘 듭니다.

학자(Scholar): 과학자나 의사, 철학가, 학자 등입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치를 치료하고, 숨겨진 것을 찾아내고, 마법 물건을 잘 사용하고, 약간의 마법을 씁니다.

도둑(Thief): 도둑입니다. 잘 숨고, 잘 훔치고, 다른 사람보다 숨겨진 걸 더 빠르게 더 잘 찾습니다.

마법사(Wizard): 마법사입니다. 마법을 누구보다 잘 사용하고, 제어도 잘 합니다.

 

모험과 일상

TNU의 던전은 특정한 종류의 악몽의 세력이 현실로 침입해 와서 현실의 무언가를 닻으로 삼아 뿌리박는 형태입니다. 각 던전은 다양한 형태를 하며, 악몽이 양분으로 삼는 특정한 감정과 생각에 따라서 괴물이 형성됩니다. PC들은 이 던전에 들어가 괴물들을 무찌르고 그 닻을 무력화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PC들이 모험에 실패하면 점점 던전은 세력을 넓혀갑니다. 악몽의 던전 속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 갖가지 신체적/정신적/마법적인 부작용이 생기고, 자칫해서 죽으면 악몽의 세력에 굴복하여 동료들의 적이 됩니다.

PC들이 던전을 끝마치고 마을에서 일상을 보낼 때는 단순히 먹고자는 것 뿐만 아니라 마을에 투자를 하고 대학교나 인쇄소, 찻집, 호텔, 사령술 길드 등 새로운 시설을 짓고, 기존에 지어진 시설을 발전시키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설에서는 각종 서비스를 제공받고, 능력치를 올리고,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게임의 결말

PC들이 10레벨이 되면 은퇴를 하고 행복하게 살거나, 계속 9레벨인 채 모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TNU는 지금까지 본 OSR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책도 근사합니다. 제작자는 Lulu.com에서 책을 사기를 권장하는데(책 질이 더욱 좋다고 해서), Lulu에서 책을 사면 드라이브스루 무료 쿠폰도 줍니다.

또한 TNU를 AWE로 즐길 수 있도록 A World Full of Nightmares라는 별도의 서플도 제공합니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원작으로 즐기는 편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월드 인 페릴과 룰링.

월드 인 페릴을 마스터링할 때는 “Rulings Not Rules(룰이 아니라 룰링을)“라는 문구를 명심하세요.

이 문구는 올드 스쿨 RPG인들이 즐겨 쓰는 말로, RPG를 할 때 모든 상황에 일일이 규칙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마스터의 감각과 상식을 활용해서 판단을 내리라는 의미입니다. 룰이 간단할수록 룰링의 비중은 더욱 커지지요. 예를 들어 전사 PC가 수영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RPG에는 능력치 규칙은 있어도 수영 규칙은 없다고 칩시다. 이때 마스터가 “힘을 써야 하니까 근력 판정해!” “지구력이 필요하니까 건강 판정해!”라고 결정을 하면 그게 바로 판단, 즉 룰링입니다. 예전에 쓴 플레이어의 롤플레잉 실력 격차 줄이기 (http://blog.storygames.kr/entry/roleplaying_ability_gap) 역시 룰링과 관련이 있습니다. 좋은 롤플레잉은 마스터가 룰링을 쉽게 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월드 인 페릴은 특히 룰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파워 목록의 각 수준(간단함/힘듦/한계선)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시적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단지 마스터가 난이도를 보고 해당 능력을 사용하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결정해야 합니다. 약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적의 약점을 노리면 어떤 추가 효과가 있나요? 역시 이야기 속 상황에 따라 마스터가 그 효과를 선택합니다. 이점 역시 ‘타고난 파워가 아니다’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지만, 마스터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다른 파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느슨한 부분이 이 RPG의 결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월드 인 페릴이 AWE(아포칼립스 월드 엔진)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AWE는 다른 RPG보다 룰링을 하기 좋은 RPG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강령-원칙-편집장 액션을 살펴보세요. 방금 벌어진 일을 강령-원칙-편집장 액션의 틀 내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생각하세요. 월드 인 페릴에서는 상황에 맞는 룰링이 룰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편집장이 룰링을 할 때 따라야 할 ‘강령-원칙-편집장 액션’은 단순히 지침이나 조언 따위가 아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불의 정령에게 불로 공격을 한다면 줄 수 있는 상태 정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p.127 참조). 반대로 이야기 속 상황에 따라, PC가 제압하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상태를 주었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p.204 참조)

그렇다면, 이 룰링을 잘 하기 위해 마스터가 명심할 사항은 무엇일까요?

  1. 강령-원칙-편집장 액션을 몸에 배도록 명심합니다: 강령-원칙-편집장 액션은 월드 인 페릴의 가장 중요한 규칙입니다.
  2. 이야기 속 상황과 캐릭터들이 쓴 수단을 고려합니다: 현재 이야기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히어로와 악당은 무슨 파워를 사용하나요? 적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룰링을 할 때는 룰링을 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3. 일관성을 갖춥니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다시 벌어졌을 때 같은 논리로 룰링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전에 수영할 때는 근력 판정을 했는데 이번에 건강 판정을 했다면 일관성에 맞지 않습니다. 다만, 플레이어들이 이해할 만한 논리를 든다면 그편이 우선입니다.

제가 월드 인 페릴을 한국에 출간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월드 인 페릴에 소개된 룰링을 잘 활용한다면 다른 슈퍼히어로 RPG 이상으로 유연하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월드 인 페릴을 산 독자분들도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롤플레잉 실력 격차 줄이기

트위터에서 말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RPG에서 사용하는 기능/능력/전투/기타 등등 판정은 대부분 ‘어떻게 하는가?’ 대신 ‘무슨 목적인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기술자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폭주하는 기계를 멈춰서 도시를 구하는 데 목적이 있지, 기계를 어떤 원리로 멈출지는 (아마도) 모를 것입니다. 플레이어들은 보통 캐릭터만큼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많은 경우 판정에 사용하는 특성의 이름(교섭, 민첩성, 공학, 근접전)만으로 캐릭터가 사용하는 수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공학 기능을 사용해 기계를 멈춰요.”로 선언을 끝내는 플레이어가 있는 한편, 상상력을 동원해 “기계를 멈추기 위해 동력부의 에테르 엔진을 냉각기로 얼려서 날개로 가는 동력을 끊어요.”라고 선언하는 플레이어도 있을 것입니다. 마스터는 물론 좋은 롤플레잉에 보너스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실제로 좋은 롤플레잉에 보상을 주는 RPG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롤플레잉에 계속 보너스를 준다면, 캐릭터의 공학 실력 대신 플레이어의 화술 실력이라는 OOC(Out of Character) 요소 때문에 이익/불이익이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말을 잘 하는 플레이어는 서툰 플레이어보다 판정에 분명한 이익을 받아야 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롤플레잉 실력의 격차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를 들겠습니다:

하나, 규칙을 세밀하게 만든다.

첫번째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규칙으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하는가?’를 규칙으로 해결하려면 캐릭터가 사용하는 방법, 드는 노력과 자원, 투입한 역량과 수단으로 기대하는 효과, 치러야 하는 대가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세한 규칙이 필요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전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세한 규칙이 플레이어의 롤플레잉을 저해하고 그저 주사위 굴림의 횟수를 늘릴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자세한 규칙은 플레이어가 롤플레잉 실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캐릭터를 좀 더 그럴듯하게 플레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적을 공격하는 방법이 단순히 “공격!” 이 아니라 “5피트 이동해서 파워 어택으로 피해 3점 늘려 대검으로 공격!”이라면, 플레이어가 검도 고수는 아니더라도 검도의 고수처럼 행동하고 기분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규칙이 자세해지면, Role플레이보다 Roll플레이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지나치게 자세한 규칙에서 어떤 폐해가 생기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규칙을 좀 더 자세히 사용하려면 이 RPG가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는 부분에 규칙을 집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던전 판타지풍 RPG에서 교섭 규칙보다는 던전 탐사와 전투 규칙 비중이 높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둘, 플레이어의 목적과 수단, 그리고 수단을 사용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한다.

앞에서 말했듯 마스터는 판정할 때 플레이어가 무슨 목적으로 행동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왜 이 플레이어는 교섭 판정을 하나요? 교섭 판정으로 상대를 자수시키려는 건가요? 아니면 물건값을 깎으려는 건가요? 우선 플레이어의 목적을 먼저 파악하세요.

목적을 파악한 다음, 마스터는 캐릭터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 즉 “어떻게?”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보통 어느정도 캐릭터의 행동을 묘사하기 마련이므로, 캐릭터가 사용한 수단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될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는 명확하게 이해를 하기 위해 언제든지 플레이어에게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플레이어는 캐릭터만큼 전문가가 아니므로, 구체적인 세부사항 대신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마스터가 이해할 수 있는) 묘사면 충분합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쓰는 마스터링 기법을 소개하겠습니다. 판정 목적과 캐릭터가 사용하는 수단을 파악한 다음에는 “지금 묘사한 방법이 어떤 식으로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세요?”라고 한번 더 물어보세요(즉, 그 수단을 사용한 이유를 물어보세요). 이 질문은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마스터는 이 질문을 해서 플레이어가 이야기 속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혹은 자신이 플레이어가 선언한 목적을 제대로 파악한 건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캐릭터가 사용한 수단에 따라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도 명확할 때가 있습니다.

세가지 예시를 들겠습니다.

첫번째 예시:

마스터: “지금 적군의 장군은 침대에서 쿨쿨 자요. 어떻게 할래요?”

플레이어: “살금살금 기어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단검으로 목을 따서 일격에 죽입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민첩성 판정하세요.” (마스터는 추가 질문을 생략합니다. 이미 ‘적을 죽인다(행동 목적)’ ‘단검으로 목을 벤다(수단)’ ‘입을 막고 단검으로 목을 따면 소리없이 곧바로 죽을 테니까(수단을 선언한 이유).’ 라는 세 가지 요인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예시:

마스터: “사무실은 온통 불바다입니다. 어떻게 할래요?”

플레이어: “불을 끕니다.”

마스터: “어떻게요?” (불을 끈다는 목적은 파악했으니 수단을 묻습니다)

플레이어: “사무실에는 정수기통이 있겠죠? 안에 있는 물로 불을 끕니다.”

마스터: “척 봐도 정수기통 물로는 불을 끄기 턱없이 부족해요.“ (수단을 사용한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됩니다. 물로 불을 끄려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이야기 속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알고 지적합니다)

플레이어: “그렇군요. 그럼 사무실에 쓰러진 사람이 있는지 둘러봅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지각력 판정하세요.” (새로 바뀐 선언은 행동의 목적인 ‘쓰러진 사람을 찾는다’와 수단인 ‘눈’, 수단을 사용한 이유인 ‘눈으로 찾는 게 당연하니까’가 명확하므로 마스터는 곧바로 판정을 시킵니다).

세번째 예시:

마스터: “도둑질한 아이가 잡혀 왔습니다. 어떻게 할래요?”

플레이어: “설득합니다.”

마스터: “무슨 내용으로 설득하고 싶나요?” (목적을 묻습니다)

플레이어: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요.”

마스터: “어떻게 설득할래요?” (목적을 실현할 수단을 묻습니다)

플레이어: “손을 꼭 붙듭니다.”

마스터: “왜 그런 수단을 썼나요?” (플레이어가 왜 손을 잡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수단을 동원한 이유를 묻습니다)

플레이어: “이 아이는 태어나서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까요. 아,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하죠.” (플레이어는 마스터에게 답변하면서 롤플레잉을 보강합니다)

마스터: “알겠습니다. 교섭 판정하세요.”

좋은 롤플레잉은 마스터에게 이야기 흐름을 이어나갈 소재를 제공하는 롤플레잉입니다. 플레이어가 “기계를 멈추기 위해 동력부의 에테르 엔진을 냉각기로 얼려서 날개로 가는 동력을 멈춰요.”라고 선언하면, 마스터는 판정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플레이어가 언급한 목적인 ‘기계를 멈춘다’, 수단인 ‘동력부’ ‘에테르 엔진’ ‘냉각기’, 그리고 수단을 동원한 이유인 ‘날개로 가는 동력을 끊는다’를 이야기 진행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게다가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마스터가 자기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편이 플레이를 하기 훨씬 편합니다. RPG에서 상대방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대화가 어딘가에서 어긋나 버리고, 불만족스러운 플레이로 끝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롤플레잉은 화려한 묘사가 아니라 마스터에게 목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명료한 의사 표시이며, 단순히 권장 수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가 필수로 갖춰야 할 기본 태세입니다.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만한 훌륭한 롤플레잉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목적, 수단, 수단을 동원한 이유) 요소를 갖출 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참석한 전원이 탄성을 지를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롤플레잉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너스를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정리글

롤플레잉 실력의 격차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력 격차에 상관없이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세부적인 정보를 마스터와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자세한 규칙입니다. 하지만 규칙이 지나치게 자세하면 플레이 자체가 힘들고 느려지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모든 부분을 자세한 규칙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규칙은 해당 RPG로 구현하려는 플레이 방향에 집중해야 하며, 그 외 부분은 다른 요소로 롤플레잉 실력의 격차를 메워야 합니다. 저는 이 요소가 ‘캐릭터 행동의 목적’, ‘행동 수단’, ‘행동 수단을 선택한 이유’을 정확하게 전달하는(혹은 끌어내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있는 OSR 작품들.

트위터에서 쓴 이야기이긴 한데, 몇 가지 글을 덧붙여서 다시 써봅니다.

예전에 이야기했지만, OSR은 고전 D&D를 개량해서 새로운 RPG를 만드는 RPG의 한 흐름입니다.

관련 글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OSR RPG의 흐름

RPG펀딧이 분류하는 OSR 운동의 세 가지(+하나 더) 흐름

DC인사이드 TRPG 마이너 갤러리 니컬님 소개글1소개글2

OSR은 오픈 게임 라이센스를 바탕으로 작품과 작품끼리 서로 교류를 하면서 영향을 주고, 이에 영감을 받아 다시 새로운 게임이 만들어지면서 점점 재미있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이점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가장 큰 이유로, OSR이 흥한 가장 큰 장점인 “옛 D&D를 뿌리로 하기 때문에 작품과 작품 사이 호환이 쉽다.” 라는 특징이 우리 나라에서는 발휘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OSR의 원래 목적 중 하나인 “고전 명작 시나리오를 현대풍으로 다시 즐기기”는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히고, 요즘 나온 OSR 작품 사이의 호환이라는 특징도 한꺼번에 OSR 작품들이 번역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OSR 중에서도 규모가 큰 Labyrinth Lord나 Swords & Wizardry, Lamentations of the Flame Princess 같은 건 다른 거 다 포기하고 그 라인만 들여오겠다는 결심 없이는(최소한 저한테는) 번역판이 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외 가볍고 괜찮은 D&D 개량형 판타지 OSR들은 보통 다른 OSR과 겸용해서 사용하거나 기존에 나온 어드벤쳐를 그걸로 즐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OSR 작품들이 많아도 선뜻 번역하기는 어렵네요. 다행히 울타리 너머는 이 작품만으로도 내적인 완결성을 충분히 갖췄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육아 때문에 일이 많이 늦어지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OSR과 연관성은 적지만 그 작품 자체로 충분히 완결성을 갖추고 재미도 있는 OSR 작품 몇 가지를 한국에 더 들여오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 조건에 해당하는 작품 중 제가 재미있게 본 거를 몇 개 소개하겠습니다(꼭 번역하겠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ㅎ):

1. Godbound: 이건 몇번이고 말했지만, 제가 OSR의 혁신으로 드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소개글 링크)

 

2. Wolf-Packs & Winter Snow: 빙하시대 말기 원시인들을 다룬 선사시대 RPG입니다. Lamentations of the Flame Prince에서 파생됐습니다. PC들은 전문가, 사냥꾼, 마법사, 네안데르탈인 등이 되어서 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맹수와 혹독한 날씨에 맞서 싸우고, 동굴을 탐험합니다.

 

3. The Nightmares Underneath: 전성기 이슬람 문명풍의 왕국을 배경으로 한 RPG입니다. PC들은 현실로 침입해 오는 악몽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모험가들입니다. PC들이 탐험하는 던전은 악몽이 실체화된 공간입니다.

 

4. Silent Legions: 샌드박스 호러 RPG입니다. 이 RPG는 직접 러브크래프트풍 신화와 컬트, 괴물을 만드는 각종 틀을 제공합니다. 게다가 D100을 사용하는 호러 RPG의 자료를 차용하는 방법도 제공합니다. 여기에서 제공하는 샌드박스 자료가 워낙 훌륭한지라 반대로 호러 RPG를 사용할 때 자료집으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p.s 그렇다면 “그럼 왜 우리가 굳이 OSR RPG를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는데, 저는 “쉽고 편하다는 장점이 있을 뿐더러, 위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OSR이 아닌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