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캠페인의 신화

대개의 규칙은 보면 긴 캠페인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캠페인이 장기로 갈 것을 전제로 하고 시작하지요. 하지만 저같은 경우는 한번도 몇년에 걸친 장기 캠페인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긴 캠페인의 얘기는 먼나라 이야기로만 느껴지게 되더군요. 아주 긴 캠페인을 해보지 못한데는 몇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ORPG만 해봤다

에바님에 따르면 TRPG는 일단 사람이 물리적으로 모여야 하므로 일단 시작하면 지속성이 길고, 따라서 한번 캠페인을 시작하면 길게 가기가 좀더 쉽다고 합니다. 반면 ORPG는 쉽게 시작하지만 그만큼 쉽게 끝나지요.

2. ORPG는 느리다

시하야님의 추산으로 ORPG는 TRPG 속도의 1/4쯤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TRPG보다 두배의 시간을 들였어도 ORPG는 TRPG의 반 정도의 내용밖에 진행이 안된 것이죠. 이러한 시간 비효율성 때문에 ORPG는 더 빨리 질리고, 긴박감이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3. 바쁘고 자꾸 변하는 생활

요즘에는 다들 시간이 없고 시간 맞춰 모이기가 참 힘들죠. 게다가 수험, 진학, 입대, 취직, 유학, 결혼, 출산, 이사 등등의 이유로 시간은 점점 없어지고 맞는 시간대는 더더욱 없어집니다. 참가자 한두명이 이런 식으로 캠페인에서 빠져도 내용의 연속성이라든지 팀내 역학에 무리가 생기게 되고, 참가자 다수나 진행자를 잃을 경우 계속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OR에도 TR에도 있을 수 있는 문제지만 (오히려 TR에 더 심각할 수도 있죠), OR은 쉽게 깨지고 느리다는 점 때문에 장기 캠페인의 지속성 면에서 심각한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TR에서 주인공들 조우하고 공주 구하고 드래곤 죽일 시간에 OR은 주인공들끼리 주점에서 떠들다가 끝날 수도 있다는 얘기죠. 지속 시간 자체는 비슷해도 어느쪽이 더 장기 캠페인으로 느껴질까요?

4. 싫증, 말다툼, 기타등등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다양한 게임 내외적 요인으로 캠페인은 끝날 수 있습니다. 캠페인이 싫증난 경우도 그중 하나이죠. 제 경험상으로는 대체로 진행자가 캠페인에 싫증을 잘 냅니다. 진행자는 어떤 참가자보다도 캠페인과 규칙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금방 질리기 쉽고, 또 평균적으로 진행자가 다양한 규칙과 발상을 모색하지요. 하지만 재미없는 플레이, 문제있는 진행과 같은 이유로 참가자들도 캠페인에 싫증을 낼 수 있습니다. 팀원들끼리 다투다가 공중분해되기도 하고요.

5. 파토, 파토, 파토.

원인이 무엇이든 그 결과는 파토이고 캠페인의 끝입니다. 따라서 장기 캠페인으로 의도했는데도 금방 끝나버리게 되지요.

6. 그래서?

위와 같은 파토의 요인들을 최한 피하는 것이 장기 캠페인을 하는 비결이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장기 캠페인의 신화를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장기 캠페인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은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3권, 약 1,200쪽) 얼음과 불의 노래 (현재 4권, 3,000쪽 이상)를 읽는 것처럼 많은 시간과 사건을 거치면서 주인공들이 변해가고 그들 주변의 세계 역시 변해가는 것은 상당한 희열입니다. 운이 좋다면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을 웃도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장기 캠페인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 뻔히 보이는데 괜히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흐지부지되는 것보다는 적은 시간과 노력의 투자로 그에 상응하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더 효율이 높다고 봅니다. 그리고 짧은 캠페인이 반드시 장기 캠페인만한 재미가 없다고 단정하기도 힘듭니다. 적어도 분명한 단기 캠페인이 흐지부지 끝나는 장기 캠페인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7. 재미는 처음부터

장기 캠페인이든 단기 캠페인이든 무조건 기억해야 할 문제 같은데, 초보자님과의 대담에서 나왔듯 하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자! 30레벨 되면 드래곤을 잡을테니 1레벨부터 시작해!” 라고 외치는 것은… 뭐, 30레벨까지 가면 좋지만 1레벨에서 끝나면 참으로 허무한 일인 것입니다. 차라리 30레벨부터 시작해 드래곤부터 잡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물론 처음부터 강한 힘 (전투력, 사회적 지위, 경험 등)이 공짜로 주어지면 재미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것은 장기 캠페인의 묘미 중 하나이지요. 주인공을 너무 강하게 시작시키지 않으려면 그들이 마주하는 장애물을 상대적으로 낮추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벌써 3개월째 죽어가고 있는 드래곤의 경련 때문에 일대에 지진이 일어나자 모험가들은 드래곤이 누워있는 미궁 깊숙히 들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드래곤의 숨을 끊어준다든지.

재미를 뒤로 미루는 것은 캠페인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을 때 허탈감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재미는 처음부터! 처음부터 좋은 발상을 다 써버린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더 재미있는 상황들이 마구마구 벌어질테니까요. 캠페인이 갑자기 끝나버렸다고 해도 나중에 회상할때 ‘오크한테 밟히다 끝났어!’보다는 ‘에헴, 그래도 우리가 드래곤은 잡았었지 (비록 드래곤이 죽여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이 좀더 좋은 기억일 테니까요.

8. 단편 혹은 단기 캠페인

단편 혹은 단기 캠페인은 장기 캠페인을 하기 힘들 때 좋은 대안입니다. 장기 캠페인의 웅장한 서사성은 적은 대신 보다 긴장되고 짜임새 있는 모험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진행에 따라서는 서사성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결말을 보기가 더 쉽다는 점에서 중간에 끊어진 장기 캠페인의 불완전성이 없지요.

많은 인디 RPG 같은 경우 짧은 플레이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바로바로 시작하고 빨리 끝낼 수 있는 라이서스, 우슈, 캣, 주인님과 함께 등. 이들 규칙은 장기 캠페인을 지원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있지만, 반면 단기 캠페인에는 더 강하죠. 특히 주인님과 함께 같은 규칙은 처음부터 단기 캠페인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기 플레이를 예정하고 있는 주류 규칙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며, 이러한 규칙들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9. 주기적인 재계약

마치 텔레비전 프로의 시즌처럼 단기 플레이의 연속으로 가는 방법도 가능합니다. 일단 일정한 길이의 단기 플레이를 끝내고 시청률(?)이라든지 배우와 감독 스케쥴 (…) 등을 봐서 또 한 시즌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그대로 종영을 하든지 하는 방법이지요. 어느 쪽이든 이야기가 중간에 뚝 끊어지는 허무함은 없지요.

제가 아는 규칙 중에서는 안방극장 대모험이 이런 방식을 지원합니다. 한 시즌은 5 세션 혹은 9 세션으로 이루어지며, 한 시즌 내에서는 주인공들이 모두 고르게 화면 존재감의 안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5/9 세션이란 TRPG 기준이므로 시하야님의 계산법을 따른다면 OR로는 20/36세션 정도가 된다는 얘기인지라, 저는 세번쯤 시도했지만 한번도 시즌의 끝까지 도달한 적이 없습니..(…)

포도원의 개들 같은 경우 신의 파수견들이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것이 줄거리이므로, 마을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옴니버스식 플레이를 지원합니다. 계속하면 장기 플레이가 되고, 끊으면 단편 내지는 단기 캠페인이 되지요.

제가 아는 캠페인 중에서는 제노님의 언더월드가 시즌 형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비록 주인공은 기와 기 사이 달라져도 공통된 배경 세계와 분위기, 그리고 사건들을 유지하고 있다는 면에서 장기 캠페인의 현실적 어려움을 피하면서도 그 장점을 취하고 있는 성공 사례로 보입니다. (제노님, 경험치는 아직입니…? (퍽))

10. 그래서…

뭐,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제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장기 캠페인의 신화를 버리자는 것이지요. 물론 장기 캠페인을 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플레이의 시작이 장기 캠페인을 예정할 필요는 없으며, 모든 규칙의 선택 기준이 장기 캠페인의 지원 여부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중간에 끝나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장기 캠페인은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뭐, 장기 캠페인의 신화를 비판하는 글 치고는 좀 깁니다만…

8 thoughts on “장기 캠페인의 신화

  1. 아사히라

    확실히 ORPG로 1년이 넘는 긴 캠페인을 같은 멤버로 유지하는거..엄청 힘들죠-_-;

    한명씩 빠져나가고 뉴페이스 받으면 이어나가던 스토리에 약간씩 구멍이 생기고…그런게 탈력요소인것 같습니당.

    Reply
  2. Sihaya

    그러니까… 최저 1/4이고요. 보통때는 그것보다는 좀 빠릅니다만.. (…)
    일단 OR과 TR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으면 장기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 거 같군요. 매체가 다른만큼 내용이나 구성도 바뀌는 겁니다. 전투를 줄이고 대화의 밀도를 높게하고 감정선을 높게 잡으면 얼마든지 같은 기간 내에 비슷한 수준의 스토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단위라 해도..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아서, TR과 OR에 시간 쓰는 게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TR은 잘 안 부서진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환상. 언제나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지 약속을 지키는 건 매체 특성은 상관없어요.. 어차피 집이니까 대충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하니 OR 플레이어가 자꾸 갈리는 겁니다. =_=

    Reply
  3. nefos

    ORPG가 TRPG보다 약속을 지키자는 마음가짐을 가지기 어렵지요. 그리고 ‘친구만나서 놀기위해 밖에 나간다’와 ‘컴퓨터 한다, 온라인 친구를 만난다’에 따른 주위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ORPG 플레이에는 더 큰 제약이 다르다는 점도 한 요건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 서로가 같이 만들어 가고 싶은 플레이가 쉽게 딱 결정이 나고 서로간의 조정이 금방 이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계약하는 시스템에선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플레이어들이 어느정도 숙련자(rpg 경험이 많고, 해당 룰도 어느정도 아는 사람)들 중에서 몇 명씩 골라서나 할 수 있지…초보랑하려면 숙련자측이 일방적으로 양보를 해줘야하는 편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어쨋든 메롱작품 수십개보단 완성작품 한 개가 낫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그리고 소설가도 처음엔 단편을 쓰고 장편으로 넘어가듯 우선은 단기를 완성해보고 점차 장기플레이를 경험하는게 무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Reply
  4. Xenosia

    로키님이 언급하시는 경량룰들은 네포스님이 지적해주신 부분을
    기존룰에 비해서 최소화 하려는 경향이 강한것 같습니다.
    다만 기존룰보다 룰이 상당히 간편한 만큼
    참가자의 숙련도를 요구하는 경우가 생긴다는게 아리러니랄까..
    이건 뭐 대부분의 시스템이 가지는 공통된 사항이긴 하지만요.

    음 그리고 CP는 어제 이야기드린대로 병원 이야기가 끝나면 성장시켜 보죠.
    아, 가불은불가 [뻐억]

    Reply
  5. 로키

    아군// 확실히 그렇지..;ㅁ; 참 기운빠지는 일.

    Sihaya// 아, 그런 거군요. 잘못 알았습..(퍽) 확실히 OR과 TR은 표현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nefos// 흠, 숙련도 문제는 생각을 못했네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행자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감으로써 어느정도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Xenosia// 글쎄요, 간단한 룰이 숙련도가 더 필요한지는 의문이지만 (전 경량룰 다루는데는 자신있지만 겁스엔 영 메롱) 어떤 룰이든 사용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데는 동의합니다.

    가불은 안되는 겁니까? 넘해요! ;ㅁ; (퍽)

    Reply
  6. orches

    오늘도 옳으신 말씀 잘 읽고 가옵니.. (넙죽)
    꼭 장기 캠페인이 아니라, 캠페인 파토라는 것이 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맞물려서 돌아가던 톱니바퀴 중 하나가 위치를 잃고 기우뚱거리는 것이 원인이 되서 다른 부품도 서서히 망가지고, 기계 전체가 고장나듯 말이예요..

    ps – 마음 속 어디선가.. 장기까지는 아니지만.. 플레이 파토의 원인.. 저건 이미 겪은 거잖아!! 라고 외치는 건 분명히 착각일 겁니다(먼산)

    Reply
  7. 아사히라

    간단한 룰이 숙련도가 더 필요하다?

    는 잘 모르겠구요.

    복잡한 룰은 룰에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들을 시스템적으로 많이 지원을 해주기때문에 플레이어가 스스로 룰북을 찾아서 써 있는 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전략적..이라고 해야하나 선택적이라고 해야 하나,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겠죠.

    간단한 룰은 어떤 행동을 떠올렸을때 그 행동은 룰에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닌 기존의 룰을 응용해서 적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그것이 가능할지 안할지 우선 마스터와 타협을 봐야 하고 기존의 빈약한 룰을 어떻게 응용할지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니, 이정도의 차이는 있지 않은가 싶네요.
    (이 상황에서 마스터가 가하는 수정치-보너스/패널티- 에 반발이 있을 수도 있고 가/부 여부에 반발이 있을수도 있고.)

    생각해보니 예전에 했던 얘기군요.

    Reply
  8. 로키

    orches// 예.. 싫증, 말다툼, 시간표 변경, 취향차이 등 파토의 복병은 의외로 많은 곳에 숨어있는 겁니..(먼산)

    아군// 그건 경량룰만의 특징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량룰이 아니어도 마스터의 난이도 설정이라든지 수정치 책정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돼서.

    그리고 생각이 반대인 점이 재밌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경량룰이 더 행동을 폭넓게 지원하는 느낌이 들어. 예를 들어 비경량 룰에는 발차기라든지 문서 연구를 위한 규칙이 따로 있다면, 경량 룰에서는 다른 행동판정과 똑같이 하면 되니까.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