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소개와 감상

누메네라 감상

최근 시간이 되어 누메네라를 여러 번 플레이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중편을 플레이 중이고 어제는 단편 플레이를 해 봤는데, 그동안 느낀 감상 몇 가지입니다.

1. 기이함을 즐겨라
<누메네라>의 핵심 재미는 경이로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을 즐기고 경험하는데 있습니다(경험치 주는 방식에서 그 사상이 잘 나타나 있지요). 누메네라를 짧게 표현하자면 “발굴 탐사 RPG”라고 생각합니다.
아홉 세계의 역사나 사회체계 등은 책의 분량에 비해 느슨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게 의도적인 디자인이라고 봅니다. 자세하게 설명할수록 신비감이 사라지면서 플레이어들이 파고들 영역이 줄어드니까요.
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누메네라의 캠페인 주제는 “세월 속에 잊힌 과거의 신비를 발견해, 그 일부라도 현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현재를 바꿔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누메네라에서도 참고 자료로 소개되어 있지만, 그래서 저는 특히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이 누메네라와 무척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2. 묘사해라, 설명하지 말고(“Show, don’t tell.”)
책에서도 강조되었지만, 누메네라에서는 특히 “Show, don’t tell” 기법이 중요합니다. 어차피 이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상상할 수 있도록 묘사를 풍부하게 해 주세요. 누메네라는 AWE 기반의 RPG만큼이나 묘사가 중요합니다. AWE처럼 묘사 자체가 규칙과 연관이 되어있을 뿐 아니라, “경이로움”을 나타내려면 생생한 묘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 고정 관념 버리기, 특히 사이퍼를 사용할 때는!
누메네라는 플레이어들도 마스터만큼이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특히 플레이어가 상상력을 가장 크게 발휘해야 할 부분은 사이퍼 사용법입니다. 누메네라의 규칙은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에(특히 전투 부분은) 사이퍼 활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플레이 재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사이퍼가 과거 어떻게 사용되었든 지금은 플레이어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서 여러 용도를 개발해 보세요! PC들 손에서 사이퍼가 부족하다면 그건 마스터 책임입니다. 사이퍼는 펑펑 쓰면서 이야기를 만들라고 있는 거니까요.

4. 관련 작품은 꼭 감상하기
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누메네라는 어느 정도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즐길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누메네라는 그냥 단순한 던전 판타지가 아닙니다. “10억 년 후의 우리 세계”를 그린 SF에 더 가깝지요. 물론 그냥 단순하게 즐길 수도 있지만, 참고자료 항목에 있는 것처럼 “최신 기술은 물론, 머나먼 미래에 과학기술이 어떻게 변할지에 관해 전망한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누메네라를 재미있게 플레이하려면 참고 자료에 있는 자료들을 우선 즐기는 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로 소개된 작품들만 즐길 수 있더라도 충분합니다. 누메네라를 샀으면, 무조건 플레이를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소개된 작품 중 몇 가지 정도는 꼭 보세요!

p.s : https://kr.pinterest.com/shaun0737/numenera-places-of-wonder/ 도 무척 참고할 만한 이미지 모음입니다.

출시 예정작 : Worlds in Pe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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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놀이의 출시 예정작, <Worlds in Peril>을 소개합니다!

Worlds in Peril(이하 WiP)는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을 사용하는 슈퍼히어로 RPG입니다. PC들은 슈퍼히어로가 되어 악당과 싸우고, 주변 사람들과 인연을 쌓으면서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합니다.

WiP는 다른 AWE 자매작들처럼 이야기와 규칙을 잘 결합하여 물 흐르듯 이야기를 만들지만, 다른 AWE 자매작들과는 다르게 “플레이북” 중 하나를 선택해 캐릭터를 만드는 대신, 히어로의 “탄생”(어떻게 탄생했는가?)과 “동기”(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를 조합하여 캐릭터를 만듭니다.

WiP가 다른 슈퍼히어로 RPG와 차별화되는 점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파워 : 수많은 리스트 중 몇 가지를 골라 만드는 다른 슈퍼히어로 RPG와는 다르게, WiP는 몇 가지 주요 능력을 만든 다음, 플레이 중 점점 능력의 폭을 넓혀나갑니다.

2. 특히 중요한 인연 : WiP에서는 도시와 경찰, 그리고 히어로 주변의 사람들과의 인연이 무척 중요합니다. WiP에서 캐릭터는 인연 점수를 소비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인연을 불사른 만큼 그 사람과의 관계는 멀어지지만요.

3. 무척 뛰어난 일러스트 : 수많은 슈퍼히어로 RPG 중에서도 WiP의 그림 수준은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절대로,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원작자 카일 시몬즈(Kyle Simons) 씨는 한국어를 배우는 RPG인 <마법사들>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입니다. 던전월드를 한 후 AWE로 슈퍼히어로물을 꼭 해보고 싶어서 WiP를 만드셨다고 하네요. 카일 씨는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다음 달 초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 다행히 카일 씨를 만나 계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WiP는 앞서 발표한 출시 예정작들을 몇 가지 낸 후 출시할 예정이기 때문에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에나 출판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만약 다른 책들을 순조롭게 잘 낼 수 있다면 더 빨라질 수도 있겠지요.

기대해 주세요!

비커밍 : 영웅의 여정, 그리고 치러야 할 희생.

오랫동안 묵혀 놓았던 RPG 중 하나를 읽었습니다.

오늘 읽은 RPG는 영웅이 길을 떠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희생을 치르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비커밍(Becoming : A Game of Heroism and Sacrifice)입니다. 비커밍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네 명이 즐기는 RPG이며(물론 옵션 규칙을 적용해 수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 중 한 명은 영웅이 되고, 다른 세 명은 운명이 되어 영웅의 여정을 가로막습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폴라리스와도 비슷한 면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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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 세 명의 운명이 가련한 영웅을 서로 한 대라도 더 때리려고 아우성치는 게임)

기본적인 게임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게임은 기본적으로 장면별로 나뉩니다. 장면마다 운명들은 돌아가면서 한 명씩 ‘위험의 화신’이 되어 영웅과 직접 겨루고, 나머지 두 명은 ‘유혹자’가 되어 영웅을 돕는 대신 대가를 제안합니다. 위험의 화신은 각 장면의 주요 마스터 역할을 하며, 유혹자는 NPC 중 한 명이 되어 영웅을 유혹합니다.

2. 위험의 화신이 장면을 열고 영웅에게 시련을 던지면, 영웅은 자신이 가진 이점(미덕, 힘, 동료)를 동원해 이에 대항합니다. 위험의 화신은 이미 타락시킨 이점에서 보너스를 받습니다. 유혹자는 기본적으로 위험의 화신을 돕지만, 영웅이 자원 중 하나를 자신에게 바치는 대가로 영웅을 돕겠다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3. 판정은 다이스 풀 방식으로, 판정에 동원한 이점에 따라 주사위를 모아 6 또는 5가 많이 나온 쪽이 이깁니다(먼저 6의 개수를 비교한 다음, 동수일 때 5의 개수를 비교합니다). 판정에서 승리한 측이 나머지 장면을 서술합니다. 영웅이 이기면 자신이 건 이점을 좀 더 강화할 수 있으며, 위험의 화신이 이기면 영웅이 판정에서 건 이점들을 점점 타락시키거나 걸지 않은 이점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유혹자들은 영웅과의 거래에 따른 결과를 받습니다.

4. 게임은 기본적으로 총 아홉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플레이어들은 마지막 장면이 끝난 다음 점수계산을 합니다. 영웅은 자신이 지킨 이점과 강화한 이점마다 일정 점수를 받고, 각 운명은 자신이 빼앗거나 타락시킨 이점마다 점수를 받습니다. 이 중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승리하여 이야기의 결말을 서술합니다.

비커밍에서는 몇 가지 여정을 일종의 플레이 무대처럼 소개하고(물론 만드는 방법도 소개했습니다), 여정 중 하나를 골라 플레이를 하는 방식입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한 편의 영웅담이 만들어지겠지요. 영웅이 여정 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으며 무엇을 희생했는지, 결국에는 여정을 완수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물론 중간에 모든 이점을 빼앗기면 그 시점에서 여정이 끝납니다).

비커밍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영웅의 이야기를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무척 관심이 가는 RPG입니다. 언제 한번 사람들을 모아 플레이해보고 싶네요.

테크누아르(Technoir) – 관계와 관계가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한 편의 진한 누와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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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누아르?

테크누아르는 수십 년 후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기업 간의 그림자 속 전투로 찌들어가는 세계를 그린 사이버펑크 누아르 RPG입니다. PC들은 범죄자, 프리랜서, 용병이 되어 의뢰를 받거나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사건을 해결합니다.

테크누아르의 특징은 관계와 관계를 연결해가면서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 전파(Transmission) 규칙과, 자신이나 상대방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상태(Adjective, 페이트의 상황 면모, 아포칼립스 월드의 태그 같은)를 붙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판정 방식입니다.

이번 테스트 플레이에서는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잘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두었고,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웠습니다. 오늘 플레이에 참석해주신 진유랑 님, 조일식 님, 아이고망했어요 님께 감사드립니다.

 

플레이 내용

오늘 플레이는 궤도 엘리베이터, 일종 “콩나무”를 건설 중인 킬리만자로 산 주위의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롱 웨이셴(진유랑)과 알 그렌(조일식), 디오네 듀클레어(아이고망했어요)는 궤도 엘리베이터 노동자 조합에서 의문의 세력에게 납치된 노조위원장 파이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파이자는 PC들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PC들은 이 일을 맡기로 하고 증거들을 모아나갑니다.

연줄에 캐묻고, 경찰과 기업 전산망에 침투하는 등 정보를 수집하면서 PC들은 기업의 사설 부대가 파이자를 납치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문제는…

1. 파이자는 반-궤도 엘리베이터 테러 조직과 손을 잡고 기업 및 도시 곳곳에 폭탄을 숨겨두었습니다. 기업에서는 노조 내 내부고발자의 밀고로 첩보를 입수해 문제를 조용하게 해결할 목적으로 파이자를 납치했습니다.

2. 더 큰 문제는 이 일을 들쑤시면서 PC들의 신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기업에서는 PC들을 테러리스트 집단이나 반기업 단체의 일원으로 오해할 여지가 무척 컸습니다.

그래서 PC들이 선택한 결과는… 해당 기업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경찰 쪽에 지금까지 파헤친 정보를 넘기고 파이자를 기업의 손에서 빼내 경찰에게 넘기는 대신, 약간의 사례금과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습니다. 노조 쪽에는 이 일에 관해 입 다무는 대신 파이자의 처리를 마음대로 하겠다는 묵인을 받아냅니다.

PC들은 기업 사설 부대와 짧지만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파이자의 신병을 확보해 경찰에 넘겼습니다. 며칠 후 언론에서는 경찰의 신속하고 빠른 대처로 폭탄 테러를 사전에 차단했다는 기사가 나왔고, 테러집단과 협력했던 용의자가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감상

우선 이야기 전파 규칙은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거의 실시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히려 평소처럼 시나리오를 만들었으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무작위 표를 굴려 각종 인물이나 세력, 사건을 나타내는 새로운 관계점을 만들고 이 점을 다른 관계점과 잇는 과정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상태 규칙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마치 페이트에서 상황 면모만으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처음 돌려보는 규칙이라서 그런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경찰들의 눈을 피해 사건 현장으로 침투하는 장면에서, 상대방에게 “이쪽을 못 봄”이라는 상태 대신에 PC 자신에게 “은신”이라는 상태를 걸도록 조언했으면 훨씬 부드럽게 진행되었을 거 같았습니다. 또한, 판정마다 좀 더 맛깔 나는 묘사를 해야 했는데, 이쪽 역시 제가 좀 서투르게 표현을 해서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실, 테크누아르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한 RPG 중 “좋지 않은 사례”입니다. 원래 펀딩 중 약속했던 추가 자료집 중 하나는 결국 나오지 않은 채 중단되었고, 원작자는 더는 지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테크누아르는 이 코어 룰북 하나만으로도 무척 훌륭한 사이버펑크 RPG입니다. 가능하다면 언젠가 한국에도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네요.

 

피아스코: 욕망의 비극, 또는 희극

흔히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이란 곧 지옥이라고도 하지요. 인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기대하고 좌절을 맛보고, 가질 수 없는데 소유하고자 하고,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남이 채워주기를 바라면서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 하나씩은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런 고통을 달래줄 도피처를 찾아 헤맵니다. 돈을 벌면, 성공하면, 날씬해지면, 예뻐지면, 술을 마시면, 네가 나를 사랑하면,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라고, 아니면 잠시 잊을 수는 있을 거라고 되뇌며 비틀거리는 나약한 우리. 그런 인간에게 인간관계란 고문관 없는 고문실이나 다름없습니다.

피아스코 표지fiasco
낭패
a fiasco failure
대실패.
피아스코 (Fiasco: A Game of Powerful Ambition and Poor Impulse Control, 2009 Bully Pulpit Games)는 바로 그런 관계와 욕망이 얽히고 섥히는 놀이입니다. RPG에서 일반적으로 놀이의 시작이자 기본단위는 인물입니다. RPG라는 말 자체가 인물의 역할 (Role)을 맡는 (Playing) 유희 (Game)를 가리키고 있지요. 반면 피아스코의 플레이 준비는 인물이 아닌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A는 설정표를 잠시 보다가, 굴려놓은 주사위 중 3을 골라서 관계 분류 3인 ‘과거’를 자신과 플레이어 B 사이에 설정합니다. 다음 B는 6으로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과거 분류 중 6번인 ‘안 좋은 가족사’를 고릅니다. A와 B는 아직 인물 설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인물은 불미스러운 가족사라는 관계에 얽혀있게 됩니다.

피아스코 설정 단계에서 참가자들은 미리 굴려둔 주사위를 골라서 설정표에 나오는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그 인간관계에 붙는 욕구, 장소와 물건도 마찬가지로 고릅니다. 그 인간관계의 당사자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계의 망을 짜면서 차차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피아스코의 인물은 관계의 망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니까요.
관계에는 욕구, 장소, 물건 중 한 가지가 붙습니다. 플레이어 C는 4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욕구 분류의 4번인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를 고릅니다. 다시 차례가 돌아온 플레이어 A는 역시 4가 나온 주사위를 집어들어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 욕구의 4번인 ‘경찰에게 망신을 줘서 친구들에게’를 고릅니다.
불미스러운 가족사하고 경찰을 망신주는 일이 어떻게 연관이 될까 서로 얘기해보다가, A는 B가 경찰이고 A는 그의 숨은 아들이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다른 플레이어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하지만, 일단 다른 관계와 욕구·장소·물건도 설정해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합니다.
관계와 그에 붙는 부속을 다 설정했으면 그에 맞추어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하고 플레이에 들어갑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자신의 인물이 나오는 장면을 합니다. 이때 참가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장면을 시작하고 다른 참가자들이 성패를 정하거나,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시작하고 자신이 스스로 성패를 정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성공에는 흰 주사위, 실패에는 검은 주사위를 스스로 고르거나 참가자들에게 받으면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관계를 설정한 후에 A는 불량 고등학생 애니, B는 애니의 어머니를 오래전에 버린 경찰관 빌, C는 빌에게 쫓기는 마약 딜러이며 애니의 남자친구인 찰리라고 정합니다.
차례가 돌아온 A는 스스로 장면을 설정하기로 합니다. 새로 산 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과속을 하다 걸린 애니는 단속 경찰관 빌을 알아보고는 친구들 앞에서 빌에게 망신을 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애니는 빌에게 그 나이가 되도록 교통단속이나 한다고 살살 약올리기 시작합니다.
B와 C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성공이라는 표시로 둘이서 하얀 주사위를 골라 A 앞에 놓습니다. B가 맡은 빌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답을 못하다가 애니를 홧김에 체포해버립니다. 애니는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등뒤에 손으로 승리의 V를 그리지요. 애니는 단번에 친구들 사이에 영웅이 됩니다.
장면을 설정하고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참가자의 의지이기에, 놀이 속 인물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맡은 참가자 역시 계산을 하고 눈치보고 견제하는 구도를 이루게 됩니다. 장면과 성패 규칙은 참가자끼리 이야기에 대한 기대심리와 욕구가 다른 그 미묘한 긴장을 이용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점점 치닫는 이야기를 이끌어내지요. 욕구가 서로 엇갈리고, 그 욕구를 위해 서로 이용하는 동안 서술의 양상은 계속해서 어긋나며, 균열은 점점 커집니다. 놀이 속에서나, 그리고 밖에서도.

자기 차례가 돌아온 C는 A와 B에게 장면을 설정해달라고 합니다. 빌이 마약거래 현장에서 찰리를 쫓는 장면은 어떻겠느냐고 A가 제안하고, B도 동의합니다. 마약 거래 현장을 포착한 빌은 찰리를 쫓아 달리고, 찰리는 정신없이 달아납니다. 뒷골목을 따라 쫓기던 찰리는 리볼버 권총 (둘의 관계에 붙은 부속물)을 들어 빌에게 겨누는데…! 성공하고 달아나되 경찰을 쏜 중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붙잡힐 것인가? C는 고민하다가 결국 검은 주사위를 들어보이고, 찰리는 총을 겨누다가 무서워서 쏘지 못한다고 서술합니다. B가 맡은 빌은 달려와서 찰리를 한 방 먹이고는 수갑을 채웁니다.

피아스코에서 주사위는 정말로 용도가 다양한 도구입니다. 위에서 다루었듯 설정과 성패 결정에도 사용하지만, 이야기 완급을 조절하고 결말을 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주사위를 반 소모하면 1막이 끝나고, 남은 주사위를 굴려서 반전 (The Tilt)을 설정표에서 고릅니다. 그리고 2막을 하면서 나머지 주사위를 소모하고, 마침내 결말에 도달합니다.

1막을 끝내고 세 참가자는 반전을 정합니다. A는 2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반전표에서 ‘비극’을 고르고, B는 1이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비극 중 1번인 ‘느닷없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세 사람은 이야기 끝에 찰리가 총기 오발로 경찰을 죽여서 경찰에 대대적으로 쫓기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반전을 몇 개 정하고 잠시 쉬었다가 돌아와 2막을 시작합니다.

2막에 나머지 주사위도 전부 소모했으면 각 참가자 앞에는 흰색과 검은색 주사위가 쌓여 있게 됩니다. 여기서 인물을 해피엔딩으로 이끌고 싶다면 하얀 주사위 혹은 검은 주사위만 있는 것이 최상이며, 두 가지 색이 비등하게 있으면 최악입니다. 결말을 이끌어내려면 하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하고 검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한 다음에 높은 쪽에서 낮은 쪽을 뺍니다. 그 최종 결과가 높을 수록 해피엔딩이고, 0이나 음수이면 배드엔딩입니다. 어차피 8~9쯤은 되어야 그나마 현상유지를 하므로 해피엔딩이 나오기는 확률상 쉽지 않습니다.
2막까지 끝나고 이제 모든 주사위를 소모했습니다. 빌 앞에는 하얀 주사위 3개에 검은 주사위 하나가 있습니다. 하얀 주사위를 굴리자 4 + 2 + 2 = 8이 나오고, 검은 주사위는 1이 나옵니다. 8 – 1 = 7 이고 하얀색이 높으므로 결과는 백7입니다. 애니는 흑14, 찰리는 백3이 나옵니다.
결말표에서 찾아본 결과 흑13이 넘은 애니는 더 좋을 수가 없는 결말이 나오고, 백7인 빌은 실패하고 감옥에 가며, 백3인 찰리는 파멸합니다. 애니는 감옥에서 억만장자의 아들을 만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빌은 찰리의 총기오발을 가장해 동료 경관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가며, 찰리는 빌의 죄가 드러나기 전에 유치장에서 당한 폭행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됩니다.
플레이 중 참가자는 되도록 검은색 혹은 흰색 주사위만 많이 얻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2막에는 자기 장면의 성패 주사위를 스스로 가지지만, 1막 중에는 남에게 주게 되어 있거든요. 즉, 1막에는 한쪽 주사위만 많아지지 않도록 견제당하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가자 사이에 치밀한 거래와 배신이 판을 치기 십상이지요. 2막 들어서는 자기 주사위를 자기가 가지므로 다른 참가자들에게 장면 설정을 부탁하고 한쪽 주사위만 늘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추가할 수 있는 주사위는 2개입니다. 게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설정하므로 사건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겠지요. 결국 피아스코의 타인은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아스코를 한 판 마치고 나면 망가진 인생과 부서진 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과 이상할 정도로 행운이나 불운의 지배를 받는 인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막장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헤어날 수 없는 인연의 끈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공허 속에 허우적거리다 파국을 맞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비쳐주는 거울 아닐까요? 이지러진 것이 거울인지 아니면 자신의 얼굴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주사위

주사위에 운명을 걸어볼까요?

드레스덴 파일 RPG: 힘과 자유의지의 함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드레스덴 파일 RPG (The Dresden Files RPG)는 미국 작가 짐 부처 (Jim Butcher)가 2007년부터 시작해 출판해온 드레스덴 파일 시리즈 (The Dresden Files)를 RPG로 만든 작품입니다. 드레스덴 파일 원작은 마법사이자 탐정인 해리 드레스덴을 주인공으로 해서 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대 도시 판타지/호러입니다. (소설은 이곳에서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저쪽은 개인 블로그라 급 반말이므로 양해를(…))

드레스덴 파일 RPG는 (이하 드레스덴 파일) 원작의 이러한 분위기를 살려서 환상적이고 괴기한 도시 모험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기본은 세기의 혼과 같아서, 빠른 활극이나 면모를 통한 풍부한 인물 표현이 잘 살아있습니다. 여기에 현대 판타지라는 장르에 맞추어 추가한 드레스덴 파일만의 규칙이 플레이에 또 다른 깊이를 더하고 있지요. 세기의 혼은 이미 소개한 바 있으니 여기서는 드레스덴 파일만의 추가 규칙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라면 도시 제작 규칙이 있습니다. RPG는 원작 드레스덴 파일처럼 현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모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원하는 도시를 선택해 재미있는 발상이 나올 만한 위치나 역사적 사건, 인물 들을 조사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요. 플레이의 원천을 실제 시간과 공간에서 뽑아내는 이러한 방식은 현대 판타지라는 지향을 잘 살리고 있다고 봅니다.

도시 정보가 왠만큼 모인 후에는 모든 참여자의 논의를 통해 도시의 중심적인 테마와 위협을 추출합니다. 테마는 도시에 장기적으로 나타난 도시의 성격 (‘정치하는 놈은 다 썩었다’, ‘예쁜 여자가 밤에 혼자 나가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다’), 위협은 최근에 나타난 급박한 상황 (‘어린아이가 사라지는 일이 급속히 늘었다’, ‘도시의 이상기후가 위험수위를 넘었다’ 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테마와 위협을 기반으로 해서 팀은 함께 도시의 세력과 주요 위치, 얼굴을 설정합니다. 세력은 도시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하는가 깨고 싶어하는가, 초자연 세계를 아는가 모르는가 구분합니다. 도시 속의 주요 위치는 인물과 사건이 결집하는 곳, 예를 들어 도시의 영능력자가 잘 가는 카페라든지, 무도가들이 모이는 도장 등 도시의 주요 세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은 도시의 테마와 위협, 위치를 대표하는 일련의 인물이지요. 이렇게 설정한 세력과 인물은 각자 원하는 것이 있고, 이들 목표의 일치와 긴장 속에서 일촉즉발의 갈등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이 갈등선을 건드려 폭발을 일으키는 존재가 바로 주인공 (PC)입니다. 이들은 세기의 혼과 비슷하게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하면서도, 각 인물의 사연과 사람됨을 표현하는 면모나 그만의 재주 (stunt)를 통해 개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판타지라는 장르에 걸맞게 드레스덴 파일에서는 초인적인 속도나 힘, 마력, 예지력 등 초자연적인 이능력을 폭넓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강력한 힘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드레스덴 파일 RPG의 각 인물은 그의 본질을 표현하는 특징이나 속성, 인연, 경험, 능력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중요한 것을 추린 것을 면모라고 하지요. 이러한 면모는 자발적으로 발동해 판정 가산점이나 다른 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예를 들어 ‘재원이 엄마’ 면모를 발동해 재원이를 구하는 판정에 보너스, 재원이네 유치원 학부모와 마주쳐 도움을 받음 등등), 강제로 발동당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체를 숨긴 구미호’ 면모 강제발동으로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함). 면모를 자발적으로 발동하거나 면모 강제 발동에 저항하려면 운명 점수가 들지요. 각 인물은 모험이 시작할 때마다 일정 수의 운명 점수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이것을 갱신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주와 특히 이능력은 이 시작 운명 점수를 깎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7점의 갱신율을 가지고 시작하는 인물에게 초인적 속도 이능력을 추가하려면 갱신율이 2점 깎여 5점이 됩니다. 여기에 요정 마법은 갱신율이 4점 더 깎이는 식으로 강력한 힘일 수록 운명 점수 갱신율을 많이 깎습니다. 초자연적이지 않은 재주, 예를 들어 사람의 마음을 잘 끈다거나 뜀박질을 잘한다거나 하는 능력은 갱신율을 1점씩밖에 깎지 않지요. 이능력이 없는 완전 일반인 (Pure Mortal)은 갱신율에 +2 보너스를 받는다는 것만 보아도 초자연 능력이야말로 갱신율을 깎아먹는 주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갱신율이 0 이하로 떨어진 인물은 주인공일 수 없으며, 진행자가 제어하는 조연이 됩니다.

이것이 드레스덴 파일 RPG의 묘미인 힘과 자유의지의 함수입니다. 마법을 난사하고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잽싸게 움직이는 강한 존재가 도시를 활보하더라도, 이들에게는 뭔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에게는 있지만 거룩한 광휘에 휩싸인 천사에게도, 하수구를 기며 시체를 먹는 식인귀에게도 없는 이것은 자신의 본성 (면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강제발동에 저항하는) 능력, 즉 ‘자유의지’입니다. 이처럼 드레스덴 파일 RPG의 도덕적, 극적 핵에는 강력한 초자연의 힘과 연약한 인간의 충돌, 가장 덧없이 약한 동시에 그 어떤 힘보다 강한 ‘자유’에 대한 고찰이 있습니다.

이 함수 때문에 드레스덴 파일은 강한 이능력자와 아무 이능력이 없는 일반인이 비교적 수월하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재주와 이능력을 쌓아올린 갱신율 1짜리 주인공은 묘사적인 측면, 즉 놀이 속의 가상현실에서는 분명 강하지만, 대신 운명 점수가 부족해서 강제 발동을 많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결과 그 자신의 인간관계나 성격, 능력, 과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기지요. 그러한 능력이 별로 없는 갱신율 7짜리 주인공은 인물 자신의 힘은 약하지만, 운명 점수가 많아서 서사적인 측면, 즉 서술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판정에 밀리면 면모를 발동하고, 성격이나 인간관계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과거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힘이 있다고 무조건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원작 드레스덴 파일의 기본 전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합리성과 과학, 이성의 세계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이나 뱀파이어, 요정처럼 우리보다 강한 초자연적 존재의 실존 앞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현실 속의 우리는, 그리고 드레스덴 파일에 나오는 현대인도 초자연을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 초자연적 존재가 직접 인간을 해치고, 세계를 쥐고 흔드는 음모를 꾸민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러나 만유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을 이렇듯 위협하는 설정을 한 꺼풀 들추어보면 그 밑에는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숨어있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존귀한 이유는 자연을 정복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모두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을 쥔 우리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그 조그맣고 연약한 자유에 있다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마저 바꾸어가며 새로워질 수 있는 그 가능성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이라는 것이 드레스덴 파일에, 그리고 드레스덴 파일 RPG에 맥박치는 주제의식 아닐까요.

이렇듯 드레스덴 파일은 현실의 틈새에 숨은 초현실의 세계, 그 신비와 공포, 그리고 힘과 자유의 역설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무심히 지나치던 일상의 그늘에서 찾아낸 모험 끝에 마침내 마주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이겠지요. 그 마음속 여정을 따라 드레스덴 파일 RPG의 세계로 떠나보면 어떨까요?

RPG? 음주게임? 이야기 놀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요즘 새 RPG를 별로 안 봐서 새로 보는 건 거의 위시송군의 소개로 보는 느낌인데,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건 이미 지난 네이버 TRPG 카페 MT에서 선보여서 꽤 좋은 반응을 얻은 게임이기도 하지요.

원작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 뭔지는 다 아실 겁니다. 뭉크하우젠 남작의 말도 안 되는 허풍 모험담이지요. 게임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그 허풍을 게임으로 재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고 하면 게임을 가리킵니다.

이걸 어떻게 분류할지는 좀 미묘합니다. 일단 RP 요소는 있기는 합니다. 각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하나 설정해서 자신의 인물 입장에서 허풍을 늘어놓는 것이 기본 설정이니까요. 단, RPG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 능력치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규칙은 오직 이야기의 흐름 자체만을 다루지요. 그런 면에서 묘사 요소는 전혀 없이 서사적 규칙만 있는 놀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RPG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 RPG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주사위도, 캐릭터 시트도, 진행자도 없는 이 놀이를 굳이 분류하자면 ‘음주게임’ 내지는 ‘이야기 놀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규칙책 자체가 음주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고, 술을 마시면 훨씬 재미있을 성격의 놀이라는 점에서 음주게임, 그리고 굳이 RPG인가 일종의 보드게임인가 하는 구분을 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노는 놀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겠지요.

놀이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진행자 없이 모든 참가자는 귀족 모험가를 한 명 설정합니다. 인물에 능력치 같은 것은 필요없고, 이름과 작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MT에서는 그냥 본명 내지 닉으로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북한 가서 김정일하고 맞장뜨고 우주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긴 했지만요..ㅡㅡ;;)

다음, 돌아가면서 운을 뗍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공작, 하늘의 별을 따서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구한 얘기를 해주시지요’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실마리가 들어오면 그 참가자는 약 5분경 온갖 허풍과 뻥을 섞어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운을 뗍니다. ‘주교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품 사이에 주교님의 신학서가 있었던 연유를 알려주시지요.’라든지요.

저게 끝이었다면 규칙이랄 게 없으니 놀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 만들어내기였겠지만,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서는 ‘개입’이라는 간단하고도 강력한 규칙이 놀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게 거의 유일한 규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모험가는 모험가 수만큼의 토큰, 최소 5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MT에서는 포커칩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어떤 모험가이든 잘못 알았다며 토큰을 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중인 모험가는 그 이의를 받아들여서 이야기를 고치고 토큰을 받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자신의 토큰까지 얹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험가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이 포기하거나 토큰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할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백작: 아 그래서 지옥의 파수견한테 주려고 달나라 토끼한테 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러 갔는데 말야-(주:실제 해보시면 이게 절대 너무 아스트랄한 게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주 두부제국의 위력을 맛보지 못하신 여러분은 아스트랄이 뭔지 모르십니다..ㅠㅠ)
주교: 어허 이사람~ 주님이 노하실 소리! 달나라 토끼들은 토끼독감 걸려서 이미 죽은 때가 아니었나. (자기 토큰 하나를 백작에게 밀어주며)
백작: 이양반이 술이 과하셨나, 예수님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시네. 토끼들이 타밀플루 맞고 살아난 거 몰라요? (주교 토큰에 자기 토큰을 얹어서 밀어준다)
주교: 예끼, 타밀플루 알레르기 땜에 다 죽었었지! (토큰을 또 하나 얹어서 총 3개를 백작에게 스윽)
백작: 아 맞아, 그랬죠. (토큰 3개를 챙기며) 저도 달나라에 도착해서야 그게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죽은 토끼들이 남긴 떡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바이러스가 들끓는 폐공장으로 들어갔는데..

이 개입 규칙 때문에 각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독주무대가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되며, 가뜩이나 상식을 씹어드신 허풍담은 더더욱 은하계 저편으로 날아갑니다. 덕분에 더 흥이 살면서 참가자들은 웃느라 숨넘어갑니다. 이렇게 모두 함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우러지는 흥겨움은 허풍선이 남작 최고의 묘미입니다. (더욱 공포스럽게도, 하다보면 종종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생기면서 뭔가 말이 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이렇게 모든 모험가가 이야기를 마치면 각 참가자는 자신 외에 누구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정해서 자기 토큰을 그 사람에게 전부 몰아줍니다. 토큰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승자가 되고, 승자는 모두에게 술을 돌린 후 (음주를 적극 권장하는 놀이라고 했었죠) 다음 라운드에는 승자가 오른쪽 사람에게 운을 떼면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허풍선이 남작은 간단하면서도 굉장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즐거운 자리에서 흥을 돋우며 정신없이 웃는 놀이입니다. 위에 소개한 기본 규칙 외에도 책에는 신밧드 변형 규칙,(주:이 변형의 하이라이트라면 ‘모험담 중 잘 되는 일마다 알라를 찬양하되, 잘 안 풀렸을 때 알라 탓으로 돌리면 방에서 쫓겨나고 방문 밖에서는 거대한 몸집의 내시가 기다리고 있다가 목을 베어버린다’) 또 토큰조차 필요없는 어린이용 놀이 ‘우리 삼촌이신 남작은…’도 나옵니다. MT 때에 전부 해봤는데, 기본 규칙이 가장 재미있었고 어린이용 규칙도 시간은 짤막하지만 굉장히 웃으면서 했습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우리가 익숙한 형태의 RPG와는 많이 다르고, 어쩌면 RPG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따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며 즐기는 흥겨운 놀이이기는 하죠. 그런 이야기 놀이는 RPG에서 갈라져나오기는 했지만 전통 RPG의 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들이 어쩌면 RPG라는 취미의 또 다른 지평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말에 동의하시지 않는다면 뭉크하우젠 남작이 코사크 부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 칼을 휘두르며 결투신청을 해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길.

펄프 RPG 세기의 혼: 장르와 범용성, 극과 전략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능력치와 난이도 표현에 숫자 대신 형용사를 사용하는 퍼지 (Fudge) 규칙을 기반으로 면모와 극점수를 추가한 페이트 (FATE)의 발전형으로서, 범용 규칙인 페이트의 펄프 장르용 변형입니다. 기본 배경은 1차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시작하기 전, ‘세기 클럽’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벌이는 모험 중심입니다. 세기 클럽의 모험가들은 악당 수학자 메두셀라 박사, 제트팩을 메고 날아다니는 소련 특수요원 로켓 레드 등 다양한 악당을 상대로 고대 유물 탈취전을 벌이고 거대 로봇과 전투를 벌이는 등 세계를 구해내지요.

펄프 자체는 국내에 아주 낯익은 장르는 아닙니다만, 위에 나온 간단한 소개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양한 장르 문학과 영화, 만화의 요소를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펄프의 특징 중 과학과 활극에 초점을 두면 수퍼히어로물과 SF, 초자연에 초점을 두면 호러와 판타지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장르가 펄프의 파생물입니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국내에 잘 알려진 영화도 ‘펄프’라는 이름과 연관짓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전형적인 펄프물이고요. 이와 같이 펄프는 대중적 장르 작품과 연관이 아주 깊습니다.
일종의 상위 혹은 메타장르, 혹은 기원점인 프로토장르라고 할 수 있는 펄프의 기본 정신은 긴박한 활극과 모험, 서양과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 시대상을 반영하는 지식과 기술에 대한 낙관,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에서 생겨난 미지와 신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각각 나누고 중점을 다르게 하면 위에서 언급했듯 다양한 하위 내지 파생 장르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펄프 RPG를 표방하는 세기의 혼은 펄프를 넘어서는 다양한 장르에 적용할 수 있으며, 펄프 장르를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많은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이 특징은 장르 규칙인 세기의 혼이 역설적으로 범용성을 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기의 혼은 어떤 면에서 펄프 RPG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활극에 특화된 인물 제작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적은 수의 기능이 각각 넓은 분야를 다루므로 (예를 들어 구르기, 곡예, 수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운동신경’ 기능 하나로 통합) 각 인물이 상당히 넓은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싸움을 잘한다고 사회성이 떨어질 이유는 없고, 뛰어난 학자도 필요하면 총 (혹은 채찍!)을 들 수 있지요.
넓은 기능 범위의 단점이라면 기능 선택으로는 인물의 개성이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세기의 혼은 기능의 특화 내지는 특수 활용인 스턴트 규칙으로 개성을 확보하고 획일화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영할 때면 운동신경 판정에 자동으로 +2를 받는 스턴트가 있다면 운동신경 등급이 비슷한 다른 인물과 차별화할 수 있지요. 또한, 춤을 출 때면 운동신경을 예술 기능 대신 활용하는 스턴트가 있어도 마찬가지로 높은 운동신경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특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활극의 중요한 요소인 전술적, 극적 연출에도 세기의 혼은 강한 편입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환경이나 장면의 특징을 ‘면모’로서 조작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연회장에서 모두가 긴장한 상태라면 그 장면에는 ‘모두 긴장했다’ 면모가 있습니다. 이때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해서 위협 기능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술 기능으로 음악이나 춤 등 공연을 해서 긴장한 분위기를 없애고 대신 ‘부드러운 분위기’ 면모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면모로 친화력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지요. 자신이 스스로 판정해서 부여하거나 발견한 면모의 첫 발동은 무료이므로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극점수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무료 발동을 넘길 수도 있으므로 꽤 긴밀한 협력도 할 수 있고요. 이렇게 해서 세기의 혼은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꾸거나 관찰하는 것을 규칙으로 포상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보너스나 페널티가 붙는 것은 거의 모든 RPG에 있는 규칙이지만, 세기의 혼 규칙은 위와 같이 극점수와 면모 발견, 부여, 제거를 매개로 참가자가 환경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직접 다루고 포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가자가 훨씬 능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작하고 이용해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극적이면서 동시에 확고한 규칙상 이점도 있으므로 전술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은 활극적 재미를 더욱 강화합니다.
다음 세기의 혼의 펄프적 특징으로 지식 기능의 활용을 들고 싶습니다. 세기의 혼은 학술과 과학, 공학, 신비학과 같은 지식 기반 기능의 활용도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단순히 어떤 지식을 아는지 판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 판정을 통해 참가자가 새로운 극적 사실을 선언하고, 그 선언에 따라 판정에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림의 부족과 조우했을 때 ‘이 부족은 여자만을 지도자로 뽑으니까 우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하면 결과가 좋을 거에요.’ 하는 같은 선언을 하고 학술을 굴려 성공하면 접선하는 부족에 ‘여성이 지도자인 것을 당연시한다’ 면모를 부여, 일행 중 여성이 대표로 교섭했을 때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이때도 판정을 통해 면모를 부여했으므로 첫 발동은 무료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 돛줄을 자르면 돛이 적을 덮어버릴 거야!’ 하고 선언한 후 과학 굴림에 성공하면 동료가 해당 돛줄을 잘랐을 때 적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판정에 +2를 받습니다. 실패한다면 잘못 판단한 거니까 효과가 없거나 우리편이 돛에 덮여버릴 수도 있겠지요. 공학이라면 ‘저 깜박거리늘 붉은 빛을 쏘면 차단문이 내려와!’ 하는 식으로 선언하고 마찬가지로 판정할 수도 있고요.
지식 판정의 선언 기능 외에도 세기의 혼에는 연구, 기계 제작과 수리 등 학술, 공학, 과학을 활용하는 규칙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신비학은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학술, 과학, 공학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공학으로는 손목에 차는 무전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신비학으로는 같은 제작 규칙을 사용하되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식입니다. 이렇게 과학기술과 신비를 둘다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세기의 혼 규칙은 다분히 펄프적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기의 혼이 펄프적 특징을 잘 반영하는 것은 규칙을 통한 인물 표현의 확보가 아닌가 합니다. 펄프의 원동력이자 펄프적 정신의 표현은 다름아닌 펄프의 영웅들, 강한 개성과 놀라운 지략과 행동력, 교양과 지식이 빛나는 주인공들입니다. 딱히 창의적이거나 새로울 필요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일정한 기존 유형을 잘 활용하면 더 인기가 있지만 어쨌든 그 인물성을 표현할 필요는 있지요.
이러한 인물 표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면모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환경이나 장면 면모처럼 인물에게도 면모가 있는데, 환경이나 장면 면모가 주변 환경의 특징을 표현하듯 면모도 ‘서부 최고의 명사수’라든지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 등 그 인물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점수를 들여 이 면모를 발동하면 해당 판정에 +2를 받을 수 있지요.
위의 예를 계속하자면, 서부 최고의 명사수 면모 당연히 총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예쁜 얼굴에 사족을 못 쓴다면 예쁜 여자 꼬시는 데는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2를 받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점이 인물 자신의 배경이나 특징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면모 발동은 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인물의 배경, 과거, 특징, 내면 등을 플레이 자체에 반영합니다.
면모는 이점뿐만 아니라 약점도 될 수 있습니다. 서부 최대의 명사수에게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나 도전자가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고, 이런 때에 진행자는 면모가 불리하게 (혹은 귀찮게) 드러난 인물의 참가자에게 극점수를 역으로 지급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쁜 얼굴을 보면 사족을 못쓰는 특징도 진행자가 ‘시장 부인이 엄청 미인이야! 가서 꼬시려고 들면 극점수 줄게’ 하는 식으로 불리하게 발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면모가 불리하게 작용해서 극점수를 역으로 받는 것을 강제 발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참가자를 곤란하게 한다기보다는 플레이를 재미있게 유도하는 장치입니다. 극점수가 나온다는 면에서는 전술적인 장치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면모를 통해 등장하는 사건과 갈등은 이점과 마찬가지로 각 인물의 배경과 특징, 사연에서 나오므로 면모 중심 진행은 인물 중심적 전개를 유도하며, 플레이의 극적 재미를 풍요롭게 합니다. 뛰어나면서도 부족한 데가 있는 인물들의 능력과 과거, 갈등에서 나오는 플레이는 참가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진행을 편하게 해주지요.
결국 제가 보는 세기의 혼은 장르 특징에 대한 충실성과 그 장르를 넘어서는 일정한 범용성, 그리고 극적 연출과 전술적 선택이라는, 서로 상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긴장관계에 있는 요소들을 조화시키는 규칙입니다. 그리고 그 긴장을 창의적으로 해소하는 순간 굉장히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죠. 세기의 혼을 플레이하며 그 끝없는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본격 연애 시뮬레이션 ‘얼음깨기’

얼음깨기 (Breaking the Ice)는 에밀리 케어 보스 (Emily Care Boss)의 2인용 RPG로, 두 주인공이 세 번 데이트하는 내용을 플레이한 후 그들이 이루어지는지 정하는 내용입니다.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연애물이죠. Breaking the ice라는 원제 자체도 모르는 사람끼리 어색하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외에도 여기에서는 맥락상 몇 가지 함축적 의미가 있겠지만요.

규칙이 다루는 것은 곧 그 놀이의 대상입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인 얼음깨기에는 연애 외적 요소인 HP나 힘, 심지어는 기능 규칙도 없습니다. 대신 매혹과 공감, 갈등이 있지요. 그 외에 ‘직업: 웹 디자이너’라든지 ‘애완견 뽀삐’ 등 주인공의 특징을 표현하는 키워드도 있지만, 그러한 키워드를 포함해 규칙은 연애라는 주제 하나에 몰려 있습니다.

이렇듯 규칙이 제약적인 점은 취향이나 용도에 따라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바바 히데카즈의 강좌에 나왔듯 배경 세계가 무한한 선택에 의미있는 제약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면, 규칙은 그 선택에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주면서 선택을 추가적으로 제약하는 효과를 냅니다. 그 제약의 정도가 규칙을 만들 때 내리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얼음깨기는 그 제약이 심한 편이어서 딱 두 사람이 세 번의 데이트를 하는 얘기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그런 내용의 플레이를 하고 싶다면 규칙의 제약성은 장점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얼음깨기는 의도하는 용도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규칙이겠죠.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얼음깨기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는 상당히 넓습니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세 번의 만남 동안 겪는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는 형태인 것은 맞지만, 그 틀 내에서 세 ‘데이트’는 철수와 영희가 같이 공부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는 내용일 수도 있고, 두 적대국의 스파이가 임무를 수행하며 총탄과 유혹을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에 시하야님과는 마법사와 전사가 같이 던젼을 탐사하며 연인이 되는 BL물 플레이를 하기도 했죠. 두 주인공의 연애감정을 중심에 놓기만 한다면 거의 어떤 배경의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다는 점이 ‘제약 내의 범용’이라는 역설입니다.

이렇게 연애감정에만 초점을 맞춘 규칙으로 개별 행동의 성공은 어떻게 정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규칙으로는 행동 판정은 하지 않습니다. 즉, 성공하기 원한다면 성공한다고 서술하면 되고 (‘추근대는 깡패들을 단번에 다 때려눕혀요!’), 실패를 원한다면 실패한다고 서술하면 됩니다 (‘깡패들한테 덤비다가 늘씬하게 얻어맞습니다’). 개별 행동의 성공과 실패는 규칙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규칙상 성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패를 가리는 대상이 다를 뿐이죠. 규칙은 행동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가리지 않고, 위에서 설명했듯 이 규칙의 진짜 대상인 연애감정, 즉 매혹과 공감이 증가하고 유지되느냐를 판정합니다. 깡패들을 다 때려눕힐 수도 있고 괜히 덤볐다가 실컷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매혹이나 공감을 얻고 데이트 사이에 매혹을 유지하는지는 자유 서술이 아니라 판정으로 정합니다.

참가자가 원하면 무조건 행동에 성공한다는 것은 묘한 일 같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동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원하면 성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실패를 ‘원하면’ 되니까요. 실패를 원할 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대방 참가자가 실패를 제안할 때, 두 번째는 이미 실패한 주사위를 다시 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말이 되게 얼음깨기 규칙을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얼음깨기는 진행자가 따로 없는 대신 두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능동 참가자 (Active player)와 길잡이 (Guide) 역할을 맡습니다. 능동 참가자는 장면 묘사, 조연 담당 등 주변 환경 서술을 맡는 동시에 자기 주인공을 움직여서 상대방 주인공에게 점수를 따려고 애씁니다. 요리를 해준다든지, 깡패를 때려눕힌다든지, 아름다운 호숫가로 데이트 장소를 잡는다든지 등등.

상대방인 길잡이는 능동 참가자의 서술이 마음에 들면, 혹은 주사위 종류에 따라 조건을 충족했다고 판단하면 주사위를 줍니다. 즉, 능동 참가자가 따려는 ‘점수’를 주사위 형태로 건네주는 것이 길잡이의 역할입니다. 능동 참가자는 길잡이에게 이들 6면체 주사위를 받아서 굴리고, 5 또는 6이 나온 주사위마다 성공입니다. 성공 3개로는 매혹, 4개로는 공감을 하나 올릴 수 있죠.

이와 같이 길잡이가 주사위를 지급하므로 능동 참가자는 길잡이의 마음에 들게 노력해야 하고, 자연히 길잡이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행동에 대해 길잡이의 제안이 있으면 (‘여기서는 깡패들한테 얻어맞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은데?’) 그 결과가 행동 실패라 하더라도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꽤 큽니다. 이것은 전에 얘기했던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중심 판정 (승민님의 더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묘사 중심과 서사 중심) 중, 후자에서 게임 내 현실을 규칙이 아닌 공감으로 정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실패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아닌 ‘원해서 하는 실패’라는 점도 재미있고요.

행동이 실패한다고 서술할 만한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재굴림 규칙입니다. 주사위 종류에 따라서는 실패를 다시 굴릴 수 있는데, 그 조건은 망신을 당한다든지, 위험에 처한다든지, 사이가 나빠진다든지 해서 뭔가 데이트가 잘 안 풀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굴림 규칙을 활용하려고 하면 주인공은 완벽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주인공이 상대와 맺어지기 어려운 사유인 갈등을 서술에 등장시키면 주사위를 더 받는 규칙 역시 주인공의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모습 표현을 포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 참가자가 2~3번씩 차례를 돌려가며 하고 나면 한 번의 데이트가 끝나고, 세 번의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그 동안 유지한 매혹 점수를 모두 굴려서 성공만큼 최종 매혹 점수를 냅니다. 그리고 매혹과 공감 수치를 참조해서 두 주인공이 맺어지는지 보고, 그에 맞게 두 사람이 이후 어떻게 되는지 후일담을 서술합니다.

규칙이 자체 완결적인 이야기에 추진력을 더해주고 진행자가 없다는 점 등 얼음깨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규칙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 중 첫째로 꼽고 싶은 것은 게임적 긴장감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두 참가자 사이에는 ‘얘네를 맺어주자’ 하는 공통된 목적이 있어서, 제 경험상 게임 플레이는 ‘둘이 협력해서 최대한 성공 짜내기’의 연속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주사위 종류마다 한도와 조건이 다르므로 (데이트가 잘 풀릴 때, 잘 안 풀릴 때, 갈등이 나올 때, 공감이 나올 때 등등) 두 참가자가 규칙에 따라 협력하면서 나오는 이야기 자체는 다양하고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얼음깨기 규칙의 진짜 의의일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때로는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더 굴릴 주사위가 없을 때까지 데이트를 질질 끌기도 하는 점은 오히려 이야기의 재미를 해친다고 봅니다. 두 참가자의 이익이 일치하다 보니 (성공을 짜내자!) 데이트를 적당한 데서 끊을 만한 반작용이 얼음깨기에서 시스템상 부족한 점이었다고 봅니다.

두 번째 문제라면 규칙이 좀 복잡하다는 점입니다. 인물 만드는 데까지는 쉬운데, 플레이 절차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매혹 주사위, 보너스 주사위, 재굴림 주사위, 갈등 주사위, 공감 주사위 등등 주사위 종류도 꽤 많고, 보너스와 매혹 중 실패가 재굴림의 한도이며 갈등 주사위는 재굴림에 해당 없고… 어렵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좀 지저분한 느낌이었달까요.

그와 관련해, 규칙에 따르다 보면 데이트의 각 턴이 너무 도식적이기 쉽다는 점도 단점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잘 보이면서 점수를 따다가 (보너스 주사위) 뭔가 계속 잘못되고 (재굴림 주사위 하나씩), 좀 길어지다 보면 (성공이 3개 안 나와! ;ㅁ;) 이 관계에 대한 고민거리가 등장하거나 (갈등 주사위) 두 사람의 공통점이 드러나거나 (공감 주사위) 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 간단한 도식 내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만, 몇 번 하다 보니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같은 디자인상 허점이 있기는 하지만 얼음깨기를 하면서 재미없었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던젼을 헤매는 모험가에서 현대 한국의 남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다뤄본 플레이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고, 여전히 둘이 모여서 가볍게 하기에 괜찮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적당히 밀고 당기는 맛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비해서 너무 다정다감했을지도요. (웃음)

결론적으로 얼음깨기는 중심 소재인 연애에 초점을 맞춘 ‘연애 시뮬레이션’을 통해 게임성과 극적 재미를 연계시키는 흥미로운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부분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지만, 놀이를 통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잘 보여주는 규칙이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비스트 헌터 –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하여 경례!

표지

비스트 헌터 표지

비스트 헌터 (Beast Hunters)는 기본적으로 1:1로 하는 게임으로, 전쟁과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 살아가는 수렵채집 부족 사회의 괴물 사냥꾼인 비스트 헌터가 주인공입니다. 이들 헌터는 괴물 사냥, 부족 간 중재, 상단 약탈 등 다양한 모험을 하며, 괴물을 성공적으로 사냥하면 그 피로 문신을 새겨서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비스트 헌터 판정은 창의성, 자원 관리, 전술성 등 게임적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도전을 시작했을 때 헌터 (참가자)는 우선 도전자 (진행자)에게 자신이 그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지 얘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자가 보기에 해결책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판정 없이 헌터의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헌터의 창의성과 판단력을 포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RPG든 참가자가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을 제시하면 판정 없이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즘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을 돌리면서 생각해보기도 했고,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플레이에 나오는 게임성 얘기를 하면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다만 비스트 헌터가 특이한 점이라면 도전자가 헌터의 창의성을 인정해 판정을 포기하는 것을 자원 관리와 직접 연관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판정 중 헌터의 맞수는 모두 도전자의 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적대 풀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예산 1점을 들여서 +2짜리 능력을 하나 구입, 예산 4를 들여 우선 순위 5를 구입하는 식입니다. 초보 헌터에게 대충 맞설 만한 적수를 만들려면 예산이 4~5점은 들어가는데, 판정에 들어가기 전에 헌터가 제시한 해결을 인정하고 도전자가 포기하면 적수를 구입할 필요 없이 예산을 2점만 들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도전을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밋밋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하면 헌터가 받는 경험치도 줄거든요. 헌터가 제시한 해결책을 도전자가 바로 받아들이고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 헌터가 받는 경험치는 1점입니다. 반면 판정으로 넘어가면 헌터가 도전에서 이겨서 받는 경험치는 적수의 예산 점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8점짜리 적수라면 이겨서 경험치를 8점 받을수 있으므로 헌터가 판정을 해서 위험을 무릅쓸 이익도 충분히 있습니다.

자원 관리는 판정 중에도 계속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명중과 피해 판정 대신 공격 동작을 통해 이점 점수 (AP, Advantage Point)를 축적하며, AP를 소모해야 피해 주사위를 굴릴 수 있습니다. 공격 동작은 신체 도전이라면 상대를 밀어붙인다든지 고지를 점거한다든지 하는 식이고, 사회적 도전이라면 연맹을 맺거나 소문을 퍼뜨리는 식입니다. 따라서 AP를 아주 많이 축적했다가 한꺼번에 지르면 서로 계속 맴돌며 눈치만 보다가 일거에 강력한 공격으로 끝내는 싸움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피해는 경상, 부상, 중상, 무력화, 사망 단계가 있으므로 일격에 끝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공격 동작과 AP도 헌터와 도전자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전술적 선택을 요구합니다. 헌터가 공격 동작을 하면 도전자는 선언의 창의성, 합리성 등을 고려해 일정량의 AP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헌터는 이 AP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주사위를 굴려서 AP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굴리면 자칫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도 AP가 덜 나오거나 아예 AP를 못 받을 수도 있지요. 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AP를 많이 받을 수도 있고요. 따라서 제시하는 AP 양을 보고 어느쪽이 유리할지 저울질하는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판정 중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고 각자 효과가 다르다는 점도 게임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입니다. 공격 동작과 타격 외에도 방어 동작, 능력치 발동, 자원 박탈, 자원 회복, 특수효과 등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이 총 7가지 있고, 같은 유형 내에서도 선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원 박탈과 회복이 흥미로운데, 창이나 방패, 인맥 등 헌터가 사용할 수 있는 외적 요소인 자원을 박탈해서 상대의 이점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창을 멀리 쳐낸다든지, 인맥에 미리 손을 써놓는다든지 하는 경우죠. 이러한 자원은 회복 시도도 할 수 있는 등,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도 다채로운 전술적 선택 여지가 있다는 점이 비스트 헌터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전체 모험의 구조 역시 판정과 연관성이 깊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도전자는 정해진 예산이 있는데, 이 예산 및 단일 도전에 할당할 수 있는 예산의 한도는 모험마다 도전자와 헌터가 함께 정합니다. 예를 들어 예산 20, 한도 5짜리 모험은 비교적 짧고 쉬운 편에 속합니다. 예산을 모두 소모하면 보통 모험은 끝나고, 비스트 헌트 모험이라면 예산을 다 소모했을 때 비스트가 등장합니다. (즉 최종 보스 개념?) 예산과 모험의 이러한 연관성은 긴장감과 완결성이 있는 모험을 진행하는 데 적합해 보입니다.

비스트 헌터 일러스트 (일부)

꺄아 언니~♡

각 비스트는 최소 예산과 한도 요구량이 있어서 일종의 레벨 내지는 HD 개념이 들어간 점도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급 괴물인 헤크트라탄은 최소 예산 20, 한도 5인 모험에 등장할 수 있고, 전설의 최강 괴물인 쿠림은 최소한 예산 250 (!), 한도 10인 모험에만 등장할 수 있습니다. 모험을 통해 비스트 헌터가 강해지면서 예산과 한도를 늘려가며 점점 강한 비스트와 맞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이렇게 보면 알 수 있듯 비스트 헌터는 도전자와 헌터의 경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임입니다. 동시에 도전자의 역할은 헌터를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서로 승부의 재미를 느끼며, 멋진 발상을 유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쟁적 요소를 게임에 국한시키고 감정이나 인간관계와 분리하는 장치로 비스트 헌터에서는 ‘경례’ 규칙을 사용합니다. 서로 오른손 아랫팔을 붙드는 동작으로 ‘경례해 들어가면’ 게임을 시작하거나 재개했다는 뜻이고, 게임을 끝내거나 논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같은 동작으로 ‘경례해 나와야’ 합니다. 경례는 게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신호이며 서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승복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그리고 상호 존중의 표시이기도 하죠.

야성적인 부족 사회 전사들의 모험을 즐기면서 신비하고 위험한 세계 속에서 인물의 기량을 발휘하고 싶다면 비스트 헌터는 꽤 추천할 만한 RPG입니다. 1:1이 기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만 모여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죠. 정정당당하고 한 치 물러섬이 없는 승부를 약속하며 첼’쿠리 부족의 악수를 주고받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비스트 헌터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섰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