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4~6화 (1): 연회장에서

백만 년만에(..) 다음편 올라갑니다. 해당 플레이 분량은 4화에서 6화의 총 3세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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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은 프리포트에 보기 드문 당당한 건물이었다. 온기를 구하는 걸인처럼 함께 웅크린 빈민촌의 판자집이나 맵시없고 실용적인 가게와
창고가 대부분인 도시 한가운데 하얀 돌로 지은 3층짜리 저택은 마치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돋보였다. 연회를 맞아 정원에 밝힌
등불이 저택의 하얀 전경에 따스하게 비추었다.

정원을 높게 둘러친 담장에 드나드는 철문 앞에는 초저녁부터 무수히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멈춰서서 색색의 의상을 갖춰입은 남녀를
내려놓고 멀어져갔다. 깃털을 바스락거리는 새 의상, 모조 왕관과 드레스와 홀의 여왕 옷, 심지어 뾰족한 귀와 활을 갖춘 엘프
의상까지 상상력을 총동원한 손님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어두워지는 거리에까지 부드럽게 퍼졌다. 누더기 차림으로 거리를 서성이는
꼬마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던졌지만, 대문 앞의 무장경비가 힐긋 쳐다보자 감히 다가가지는 못했다.

또 다른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서더니 안에 탄 사람들이 내렸다. 우선 내린 청년은 금빛 방울이 달린 보라색 모자 밑에 긴 금발을
묶고, 소매 폭이 넓은 짧은 자켓에 셔츠와 풍성한 바지를 받쳐입은 차림 때문에 뭔가 어릿광대 느낌이 났다. 손에 든 지팡이에는
모자와 같은 방울장식을 달고 넓은 보랏빛 리본을 묶어놓고 있었다. 이어서 내린 젊은 남자는 깃털이 달린 모자에 튜닉과 호스
차림이었고, 손에 든 류트가 음유시인 차림을 완성해 주었다. 음유시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여자는 검은 피부 때문에 드레스의
바닷빛 연청록색과 옷단의 은빛이 더욱 돋보였다. 깊이 파인 옷은 무슨 의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연하고 탄탄한 몸매를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은 톡톡히 했다. 그들은 잠시 함께 서서 저택을 보다가 천천히 철문으로 다가갔다.

프리포트의 실질적인 보스, 칼로 데 로씨는 땅딸막한 몸집에 별 특징 없는 얼굴을 한 사내였다. 그러나 페어리를 탈출시킬 배를
조달하고 흑마법사를 유인하는 계획을 도와주는 조건을 제시하는 그의 표정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예전부터 성가시던 자가 있습니다. 아마딤 로시오라는 이름이지요.”

가슴에 백합 문양을 단 부하가 커피를 앞에 내려놓는 동안 데 로씨는 말했다.

“이번에 진귀한 수집품을 손에 넣었다고 좋아하더군요.”

그는 잔에 설탕을 타고는 작은 숟가락으로 갈색 커피를 저었다.

“오늘 연회를 열어 널리 자랑한다고 합니다만…”

커피를 맛본 데 로씨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눈앞에서 물건을 털린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 수집품이란… 설마.”

커피를 건드리지 않은 채 랜돌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 엘프 소녀입니까?”

“이거 상당한 전문가이신가 봅니다.”

잔을 내려놓으며 칼로 데 로씨는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 로씨가 보내준 초대장을 대문 경비에게 보이며 아스타틴은 순간 조마조마했지만, 경비는 초대장은 슥 보더니 지루한 기색으로 그들을 통과시켰다. 일행은 정원의 불빛과 웃음소리 속으로 들어섰다. 정원 한가운데서는 거대한 조각 분수가
뿜어내는 물이 환한 등잔빛을 반사했고, 분수와 저택 정문 사이에 세운 단상 위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다. 가는 길 한켠에서
광대 하나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주변을 순간 대낮같이 밝혔고, 정원에 우거진 나무 사이에는 은은하게 피리와 하프 음악이 맴돌았다.

아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불빛이 환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남자 손님들의 음흉한 시선에 굳으며 창백해졌던 그녀는 몸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인 반투명한 은청색 쇼올을 끌어올리며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눈빛을 여기저기 던졌다. 에스코트하느라 맞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고, 아라는 그런 그를 조금 놀란 표정으로 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을 순간적으로 마주잡는 그녀의 손은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절박했다.

웃으며 이야기하던 손님 중 몇몇이 저택의 정문을 가리키자 시선이 하나하나 그쪽으로 향했다. 손이나 부채로 입을 가린 속삭임이
웅성거리는 목소리 위로 사락거렸다.

체구가 떡 벌어진 중년의 남자가 밝은 조명에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튜닉을 실크 셔츠 위에 차려입고 여유있게 정문에서 걸어나왔다.
아스타틴은 칼로 데 로씨가 보여준 초상화에 나온 아마딤 로시오를 알아볼 수 있었다. 로시오 뒤에 사슬에 묶인 채 병사들에게
끌려나오는 소녀를 보고 손님들 사이로 오오- 탄성이 터져나왔다.

“저기로구나…”

아스타틴 옆에서 아라는 악문 잇새로 작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아스타틴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 꽉 잡았다. 그러는 동안 로시오는
소녀와 경비들을 이끌고 단상 위로 올랐다. 악단이 곡을 끝마친 침묵 속에서 로시오는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조촐한 연회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집주인은 큰 덩치에 걸맞게 목소리도 우렁찼다.

“이 로시오, 여러분들을 이렇게 초대할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프리포트 공동체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업을 해온 한
시민으로서 저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도시의 기둥들이신 여러분을 이렇게 뵙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기회를 만든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거들먹거리는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아스타틴은 눈을 돌려 엘프소녀와 경비상태를 살폈다. 창백하고 무력한 채 눈을 내리뜬
소녀는 네 명의 경비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원의 그늘 여기저기에도 무장한 형체가 보였다. 손님도 한 명 이상이 경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로시오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자 아스타틴은 그에게 다시 주의를 돌렸다. 로시오는 몸을 반쯤 돌려 등뒤의 소녀에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손짓했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녀는 흠칫했다. 얼마나 긴장하고 겁먹고 있었으면 그럴까 생각하자 아스타틴은 가슴에 천천히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좀처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품이고 값도 저같은 변변찮은 장사치에게는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이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적은 대가일 뿐이었지요. 이 로시오, 갓 피어나는 초여름과 같은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여러분께 선보임으로써 이 도시를
이끌어오신 노고를 치하하고자 합니다.”

아스타틴은 입안으로 작게 엘프어 욕설을 중얼거렸다. 로시오의 말과 손님들의 환호성에 담긴 의도를 소녀의 어린애처럼 가느다란
팔다리와 겁에 질린 조그만 얼굴에 대치하는 순간 아스타틴은 잘 다듬은 풀밭에 토해버리고 싶어졌다. 애를 두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름다움이라면 적어도…

일행과 합류했다가 낮에 숙소에서 마주쳤던 하프엘프 여자를 불현듯 떠올리고 그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학대의 흔적이
역력한 멍들고 여윈 얼굴에 왜 그렇게 가슴이 덜컹했을까. 가혹한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한 그 불안한
상황에서도 그녀, 셀라나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맑았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의지, 포기하지 않는 그
힘에… 류트 연주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가 혼자 지었던 미소를 떠올리자 그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이곳, 허영과 숨은 폭력의 장소
한가운데서도 무게중심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존경하는 손님 여러분,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로시오는 인사를 하고 단상 위에서 물러났다. 소녀가 경비들의 감시 속에 단상 위 의자에 앉혀지는 동안 악단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로시오는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손님 몇 명에게 둘러싸였다. 그가 가끔 껄껄 웃는 소리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크세노바는 하인이 들고 지나가는 쟁반에서 술잔을 하나 집어들고 짐짓 태연하게 로시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스타틴도 그에게
맞추어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내려다보더니 있던 자리에 남아 주변 동정과 소녀의 감시상태를 살폈다.

어느새 인파 사이로 사라진 로시오를 찾아 크세노바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모습이 경비나 손님의 주의를 끌지
않나 관찰하며 아스타틴은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 취한 듯한 젊은 여자가 짝짝이 눈이 요정 같다며 비틀 몸을 기대오는 것을 적당히
넘기고 다시 둘러보자 크세노바가 정원 산책로 옆의 정원수에 몸을 숨기고 정원 구석의 정자를 감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자의 깊은
그늘 속에 로시오의 금빛 옷이 반사하는 빛이 그가 연신 허리를 숙이는 동작에 따라 언뜻언뜻 보였다.

아스타틴은 눈쌀을 찌푸렸다. 로시오가 굽신거리는 대상은 어둠 속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원 중앙의 밝은 조명을 떠나온
눈이 익숙해지면서 로시오 앞에 선 두 형체, 밤의 그늘보다도 한결 어두운 검정 로브를 알아채고 아스타틴은 차가운 손가락이 가슴을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타틴이 다가가는 사이 크세노바는 그 화려한 외모와 옷 때문에 눈에 띄었는지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리 어디서 본 적 없느냐며
말을 걸었다. 크세노바는 접대용인 것이 역력한 웃음을 만면에 띄며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손님들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동안
크세노바는 아스타틴에게 정자 방향으로 눈짓을 보냈고, 아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원수 사이로 소리없이 걸음을 옮겼다.

“노스… 분명 모습을…”

가까워지면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아스타틴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정자에 더 가까운 정원수에 몸을 붙였다. 조금만 더…

“어르신도 기뻐하…”

저택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움직임에 아스타틴은 심장이 얼어붙었다. 늦은 듯 제복에 단추를 채우며 정원 구석을 서둘러 가로질러가는
급사가 그를 눈치채기 직전에 아스타틴은 정원수의 저택 반대편 이면으로 몸을 옮겼고, 급사의 움직임과 소리가 시선을 끌 것이라는
도박을 걸고 급사가 지나가는 순간을 타 거의 뛰듯 정자 바로 앞의 정원수로 가서 등을 붙였다.

“어르신께서 엘프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시다니 영광입니다.”

역시 눈치채이지 않은 듯, 급사가 지나가는 동안 잠시 말을 멈추었던 로시오의 목소리를 이제 가까운 거리에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아니, 서두를 것 없다.”

검은 후드 밑에서 청량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어차피 노스텔지아 놈들을 꼬여내려고 연 연회니 일을 마무리한 다음이라도 늦지 않지.”

아스타틴은 숨을 삼켰다. 어찌보면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계략이 또 다른 계략의 일부가 되어 서로 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그 거대한 움직임을 일부 엿본 것만으로 순간 현기증이 났다.

“네 사병들은 지금 잘 대기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네.”

여자 흑마법사의 말에 로시오는 더욱 조아렸다.

“지금 연회객 중에 드문드문 섞여서 놈들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습죠.”

역시 손님 중에도… 아스타틴은 슬쩍슬쩍 정원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사병들이 공격해올 것 같은 위기감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아직까지는 평온해 보였다. 크세노바는 아까 말을 건 손님들과 걸음을 옮기며 정원수와 정자에서 떼어놓고 있었다.

“좋아. 나 쿠라의 이름을 걸고…”

쿠라!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로스로리엘에서 추포한 그 흑마법사가 말했던 이름… 그렇다면 이 여자 역시 흑마법사 멜코르의
도제였다.

“일이 성공한다면 스승님께서 크게 만족스러워하실 거라고 보장하지.”

여자의 목소리에는 만족스러운 가르릉 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쳐들어 로시오를 마주보자 후드 밑으로 하얀 턱과 코끝이
보였다. 예예하고 굽신거리는 로시오를 내려다보며 쿠라는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녀석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그것들’을 좀 데려다 놓긴 했지만…”

그녀는 살짝 깔깔거렸다.

“뭐 모자라면 더 죽이면 되겠지.”

차갑고 가벼운 말투에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쳐왔다. 로시오도 그런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때 쿠라 옆의 키큰 로브 쪽이 뭐라고 중얼중얼 말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턱을 매만졌다.

“흐음…”

혹시 들킨 것인가? 아스타틴은 바싹 긴장하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그래서 그 엘프 계집아이 말인데…”

쿠라가 로시오에게 말했다.

“정확히 뭐라고?”

“엘 라세 쿠다던가… 예 뭐 잘 모르겠지만 꽤 귀해보입니다요.”

로시오는 두 손을 비볐다.

“아직 고년이 말을 잘 안하려고 해서 더는 모르겠습니다만…”

‘엘 라세 쿠다…?’

아스타틴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게 뭐지…’

이후 로시오와 두 마법사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최대한 기다리라’거나 ‘한 번에..’ 같은 말을 주고받은 후에 로브입은 둘은
저택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아스타틴 역시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한 후 정원수 사이로 빠져나가 정원 중앙으로 돌아갔다.
짐짓 느긋하게 걸어가 크세노바와 합류하자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손님들과의 대화를 끝냈고, 둘은 함께 아라가 있던 단상 앞쪽으로
향했다.

손님들 사이로 아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아스타틴은 아차 했다. 아라를 혼자 두고가는 것이 아니었다. 추근대는 남자 세 명
사이에서 아라는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듯 어깨선이 잔뜩 굳어있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남자가 털을 두른 망토를 땅에 질질
끌고 모조 왕관은 벗겨질 듯 기우뚱한 채 다가서자 아라는 마치 칼자루를 잡으려는 듯 허리에 손을 뻗었다.

아스타틴과 크세노바는 동시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아라가 분노에 눈을 번득이며 막 입을 여는 순간 남자의 뒤로 다가온 갑옷입은
형체가 그의 어깨에 묵직하게 손을 얹었다. 호기롭게 주먹을 쥐며 돌아선 남자는 시선이 상대의 가슴께에 멈추었다가, 한참 위에서야
투구쓴 머리가 눈에 들어오자 술이 확 깨는 기색이었다. 갑옷 의상을 입은 남자 옆으로 적색과 백색의 화려하고 재빠른 형체가 나서며
다른 두 취객에게 말횄다.

“이만 좀 꺼지지? 험한 꼴 보기 전에.”

남자 하나는 그 말에 욱했다가, 동료의 저지를 받고 갑옷입은 남자의 덩치를 흘깃 보더니 짐짓 식식거리며 물러났다. 붉은색과 하얀색
바둑판 무늬의 꼭 맞는 튜닉을 입은 채 한쪽은 붉고 한쪽은 흰 타이즈를 신고, 머리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모자를 쓴 광대 차림의
랜돌프 에디우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바보놈들.”

“물건은 무사히 옮겼느냐?”

아라는 흘러내리려는 쇼올을 당기며 그에게 낮게 물었다. 그런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이 상황이 상당히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비록 그녀에게 그 말을 꺼냈다가는 얻어맞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었지만.

“어이, 좀 반갑게 굴라고.”

랜돌프가 그녀에게 몸을 숙이자 아라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간신히 억제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연회에서 심각하게 무게잡는 거 수상해. 좀 웃지그래?”

아라는 쇼올을 꼭 잡은 채 노예사냥꾼을 노려보았다. 아라가 당황하고 놀라는 것을 그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스타틴은 순간
화가 치밀어 한 발짝 다가섰지만, 먼저 지카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은 무사히 끝났네.”

그가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열자 인간 모습의 얼굴 윗부분과 연녹색 눈이 드러났다. 페어리를 칼로 데 로씨에게 무사히 인계했다는
얘기에 아스타틴은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문제는 데 로씨를 믿을 만한가였지만, 노예장사를 싫어하기로 악명 (혹은
명성)이 높으며 노스탤지아 협력자이기도 한 그를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에서 만난 친구에게 인사하는 서글서글한 태도로 지카리는 말을 이었다.

“더불어 좋은 소식이 있네.”

“그 윗대가리들이…”

랜돌프는 빙글빙글 웃으며 마치 정말 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듯 정원 위의 하늘에 대고 눈짓을 했다.

“지원군을 결국 보내줄 모양이다.”

그 말에 아스타틴은 눈이 크게 떠지면서 동시에 가슴이 확 가벼워졌다. 노스탤지아 남서부 지역 책임자 소나무 로크와 마법 통신으로
지원군 문제로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그는 아직도 생생했다. (마법 통신의 성격상 드워프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신 머릿속에 울려댔으니
더욱…) 랜돌프의 오만불손함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아라의 집요한 설득에 다소 흔들렸던 로크가 결국 지휘부와 상의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낸 모양이었다.

“뭔가 우리 빽이 대단하다고 그러던데… 알게 뭐냐.”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 지카리의 나지막한 보고에 따르면 엘프 전술예비병력인 도보기병대와 마법사들이 프리포트에 막
도착했으며, 바다요정 함대가 프리포트 외해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주변 건물을 장악해 놓았다더군. 신호만 올리면 들이닥친다고 했다.”

랜돌프는 웃으면서, 아까부터 들고 있던 짧은 봉을 다른 손 손바닥에 탁탁 쳤다.

“저 꼬맹이 일이 좀 커진 모양이야.”

그는 봉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단상을 힐긋 보았다.

“바다요정 놈들은 애만 구하고 바로 빠지겠다는 모양이더군.”

“엘프답구나.”

아라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엘 라세 쿠다…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아스타틴은 좀전의 로시오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소중한 아이인 모양이네.”

지카리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틴은 개인적으로 아이라서 소중한 정도를 떠난 문제이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지카리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어차피 드래고니안의 관념으로는 모든 아이가 소중할 텐데, 그런 그에게 계급이나 차등의 개념을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무슨 짓을 해서든 구해내랍신다.”

랜돌프는 이를 히죽 드러냈다.

“무슨 짓을 해도 자유라니 오히려 환영이지만 말야.”

“나 역시…”

지카리는 단상 위의 소녀를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에 눈가가 주름졌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할일을 찾은 것 같네.”

“쉽지는 않을 거에요.”

아스타틴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대비해 준비도 한 모양이고요.”

그는 재빨리 로시오와 마법사들의 대화를 요약해 들려주었다.

“그렇느냐…”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함정이라고 가정하고 들어오는 것이 옳았겠지.”

아라는 연회장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단상과 그 위의 소녀를 보았다.

“준비는 끝났구나.”

아라가 말했다. 아스타틴은 그녀의 눈빛에서 냉정한 결의를, 차가운 살의를 읽고 조금 불안해졌다.

“기다려서 뭔가 나아질 것이 있느냐?

“연회를 즐기는 척하면서 좀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말했다. 지켜보면서 경비가 몇이나 있는지, 손님으로 위장한 병사의 전력은 어떤지 파악할 수도 있었다. 굳이
일찍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죽음과 폭력이 검게 소용돌이치는 광기 속에 다시 빠져들고 싶지 않은데. 노스탤지아에 들어온 이상
싸움은 당연한 현실인 것을 알면서도, 텔루르가 죽은 절망에 모든 이성과 제어를 잃고 살인을 저지른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라는 그를 똑바로 보더니 이내 말없이 묵살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가 랜돌프의 손안에서 봉을 잡아채자 노예사냥꾼은 욕설을
내뱉었고 주변 손님들이 이상하게 돌아보았지만, 이미 다크엘프는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아사나스!”

그녀의 날카로운 휘파람이 공기를 갈라놓자 모두 일제히 돌아보았고, 경비와 위장 연회객 몇몇이 다가섰다.

그 순간 들려온 크르렁.. 울부짖는 소리에 손님의 대부분은 얼어붙었지만, 아스타틴은 반가움에 기분이 환해지면서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차올랐다. 밤에서 잘라낸 더 깊은 그림자의 한 조각처럼 그의 오랜 친구, 그 우아하고 치명적인 사냥꾼은 저택 지붕에서
뛰어내려 담벼락 위에 내려서더니 몸을 날려 정원에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만한 상황이었지만,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순간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어쩌면 집주인이 준비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여러분…”

아라의 목소리는 저택 정면과 담장에 울렸했다. 얼어붙어 지켜보는 손님 사이로 아사나스가 유유히 다가와서 옆에 서는 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싸울 의사가 없는 것들은 도망쳐라.”

그녀는 랜돌프에게 빼앗은 신호탄을 양손으로 잡고 당길 준비를 했다.

“휘말리기 싫다면.”

소감

로그를 보면 아시겠지만 노스탤지아와의 논쟁이나 칼로 데 로씨와의 면담은 사실 4화 전체를 차지했는데, 소설판에서는 짧은 회상 대목으로 줄여서 끼워넣었습니다. 너무 줄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귀찮았..(퍽) 플레이하기 재밌는 것과 쓰고 읽기 재밌는 건 또 다른 문제인지라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는데, 역시 큰 갈등이 없는 두 장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요약과 회상 처리했습니다.

인물 중 많이 가공한 건 역시 아스타틴이었죠. 감정선을 좀 더 뚜렷하게 잡아보고 행동 좀 추가, 그리고 시점활용을 통해 심리묘사를 많이 추가했습니다. 오체스님도 괜찮다고 하셔서 그대로 공개 들어갑니다. 랜돌프는 원래 등장이 없었는데 정보전달 목적으로 우겨넣었습니다. 나중에는 도로 뺄까도 했는데 등장 부분이 재미있어서 결국 끝까지 유지했죠. 그 외에 가장무도회 하는 김에 의상 묘사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옷이나 생활상 묘사는 사실 좀 더 자주 하고 싶은 부분인데, 머릿속에 그리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아서 대충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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