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2화 외전: 로스로리엘로 가는 길

이오닉스 2화와 시간순서상 동시 진행된 랜돌프 외전입니다. 나머지 일행이 흑마법사와 싸우는 동안 랜돌프가 한 일이죠. 마지막 장면은 2화 3부 시작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로그는 삭풍님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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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아남은 페어리는 열일곱 명이었다. 이 꽃밭이 탄내 자욱하고 연기가 매캐해진 지금, 수십이 있던 자리에는 열일곱이 남아 있었다.
그의 지시대로 모아온 생존 페어리들, 두려움으로 희미해진 색색의 빛과 공황에 흐려진 눈빛, 파스스 떨리는 날개를 보며 랜돌프는
바닥에 흩어진 피투성이, 혹은 검댕이 된 페어리 시체는 억지로 쳐다보지 않았다.

“다 모았어!”

생존 페어리를 모아오라고 윽박지르듯 지시받았던 연녹색 페어리는 그의 앞으로 쪼르르 날아왔다. 불규칙하고 재빠르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그녀는 공포심을 그대로 움직임으로 방출하듯 불안하게 들떠 있었다.

“잘 들어.”

그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음절에 억지로 입 근육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떠난다.”

“어떻게? 어떻게?”

조그마한 얼굴들이 그를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으면…”

랜돌프는 고개를 저으며 양쪽 팔을 엇갈려 가위 표시를 해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포 중에 부르던 이름을 떠올리고 말을 이었다.

“므우루, 만나게 해줄게.”

“므우루?”

“므우루!”

”..어디? ..가..?”

재잘재잘 그들의 말이 빨라지자 띄엄띄엄 들려오는 요정어에 랜돌프는 이를 갈았다. 왜 이 언어를 장난처럼 몇 단어만 배워놓은
것인가. 시간이 있을 때 진지하게 배워놓았더라면… 그는 열심히 생각하며 한 자씩 천천히 말했다.

“같이.. 같이, 나랑. 므우루, 가자.”

“응! 응!”

“므우루!”

”..가, 가!”

페어리 서넛은 그에게 달려들어 손가락이나 머리칼, 옷자락을 붙잡고 끌며 날아갔다. 문제는 다 서로 다른 방향이었지만.

“사람들, 쳐다보면…”

랜디는 눈앞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안 돼.”

“그럼? 숨어?”

그들의 여왕을 만날 생각에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그 똘망똘망한 눈을 피해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널부러진 오크와 페어리 시체
사이에 새장을 보고 그는 생각이 떠올랐다. 페어리 포획용인 저 우리를 이용해 이들을 보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페어리들이
공포에 빠져 이리저리 도망가버리거나 하나씩 잡히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저기.”

그는 개중 제법 큰 새장을 가리켰다.

“들어가, 잠자.”

랜디는 양손을 포개고 그 위에 뺨을 기대서 자는 시늉을 했다.

“깨어나면 므우루, 만난다.”

”..자.. 위험..”

”..도망?”

“므우루?”

그들은 점차 빛이 돌아오는 초롱초롱한 보석빛 눈을 깜박거렸다.

“졸려!”

하얗게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놀라운 속도로 새장 안으로 날아들어가더니 바닥에 누워 자리를 잡았다. 또 하나가 ‘므우루!’를 부르며
쫓아들어가자 순식간에 나머지도 따랐고, 삽시간에 열일곱 중 열여섯 명이 랜돌프가 한 자는 시늉 그대로 포갠 손에 고개를 얹고 그
안에 누웠다. 비좁은 공간 속에서 밀치고 뒤척이다 깔깔거리는 모습을 랜디는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므우루…”

분홍빛으로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그의 얼굴 높이로 날아오르더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만나?”

장미수정처럼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랜돌프는 제기랄, 갑자기 바보같게도 목이 메었다. 그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꼭.”

그는 새끼손가락을 페어리 앞으로 들며 애써 웃어보였다.

“약속!”

페어리는 은은한 분홍빛을 내며 그와 새끼손가락을 번갈아 보다가 그의 새끼손가락 끝을 엄숙하게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쪼르르~ 동료들을 쫓아 그 포개진 색색의 자그만 팔다리와 날개더미 위에 누운 그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더니 새장문을 당겨서
닫았다.

이 생지옥 한가운데서 오직 그를, 그의 약속을 믿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랜돌프는 왠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지막으로 울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10년 전, 집을 떠나왔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이었을 지도 몰랐다.

한쪽 무릎을 꿇고, 페어리들이 놀라도 흩어져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장의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 옆의 땅에 누운 오크 시체가 공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남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가슴이 있는지 비웃듯. 마지막 단말마에 크게 벌어진 입은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잠금쇠는 차가운 종국성을 품고 쉽게도 잠겼다. 마치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고 싶어했던 그 풍경이 지금 내 주위에 펼쳐져 있군.’

그는 타버린 들판과 앙상한 숯이 된 나무들, 깨어진 평화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 혼란스러운 대륙의, 파괴당한 모든 것의 축소판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파괴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먼 길을 돌아오고 별별 어울리지 않는 뻘짓을 해도 결국 그의 자리는
이곳, 겁에 질린 페어리가 든 새장을 들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는 듯이.

‘웃기는 일이야…’

그는 새장을 집어들고 그 무게를, 희미하게 파닥거리며 빛나는 작은 생명들을 가슴에 꾸욱 끌어안았다. 비록 닿는 것은 차가운 쇠일
뿐이었지만.

‘지는 싸움은 안해. 이녀석들만은 반드시 살려간다.’

그 파괴의 현장에 등을 돌리고 그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이 장면의 종국성을, 그 필연성을 끝까지 부인하며.

로스로리엘을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숲의 지리는 점점 낯이 익었다. 옛 본거지를 향해 이동해가며 그는 가끔 킁킁거리며 수풀을
짓밟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오크떼를 멀리서부터 감지하고 숨어야 했다. 한 번은 페어리들이 소리를 내서 들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세
마리를 처리하고는 페어리들에게 엄격하게 주의를 주어야 했다.

‘에미넴숲 안에서 이정도로 긴장해본 건 딱 두 번째로군,’

점점 익숙한 숲을 걸어가며 그는 주위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리폰 라이더가 숲 바닥에 드리우는 그림자, 나무 사이로 녹아드는 엘프
정찰병의 녹색과 갈색 옷을 찾으며.

‘랜돌프 에디우스가 에미넴 숲 안에서 엘프 정찰병을 애타게 찾으며 이동한다고?’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개도 웃을 노릇이군…’

그때 랜돌프는 긴장한 감각의 가장자리에서 오크도, 엘프도 아닌 기척을 읽었다. 오크라기에는 조용했고, 엘프라기에는 시끄러운…

‘설마…?’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바위와 풀섶 사이에 바로 몸을 웅크려 숨었다. 새장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보이자 페어리들 네다섯 명이 역시 입술에 조그마한 손가락을 대며 그를 마주보았다.

랜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기척이 들려오는 방향을 보았다. 무기와 갑옷이 희미하게 쟁그랑거리는 동안 쇠에 반사한 햇빛이
나무그늘에서 한 줄기 비쳤고, 그를 지나쳐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신속하고 신중했다. 멀지 않은 풀섶 위로 누군가의 망토자락이 쉭
스쳐갔다.

서너 명쯤 되는 그들은 골치아프게도 그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움직임에는 뭔가 찾는 것 같은 목적성이 있었다.

“정말로 이쪽이었단 말이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페어리 부스러기가 있다면 들고 튀었을 거야.”

“게다가 오는 길에 오크 시체까지 봤지. 보통은 아닌 놈이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네 번째,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에는 느긋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랜디는 뭔가 낯익은 기분에 머릿속이 근질거렸다.

“내가 놈이었다면 기척을 들은 순간 몸을 숨겼을 거야.”

페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페어리 마을부터 쫓아왔거나, 뭔가 정보를 듣고 추적해 왔다는 것인가.

‘개같은 놈들…’

랜돌프는 쓰게 웃었다.

‘그냥 넘어가긴 틀렸군.’

자칫 이곳에서 계속 로스로리엘로 이동하다가는 사냥꾼들을 그대로 달고 갈 수도 있었다. 엘프놈들이 아주 좋아 자지러지겠지. 그러려고
한다손 쳐도 여기까지 따라붙은 놈들에게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연히 선수를 쳐야 했다. 죽이겠다는 결론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도달한 랜돌프는 가만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바위 너머로는 주변을 수색하는 노예사냥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옷과 무장을 보니 벌이가 시원찮거나 초보였다. 갈 데가
없어서 결국 이 일까지 내몰린, 몇 년 전의 그와 다르지 않은 뜨내기. 그녀석 왼편 다섯 보 거리에서 수색하는 놈은 좀 더 경험이
있거나 누굴 죽여서 빼앗을 만한 실력은 있는지 꽤 괜찮아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랜디의 오른편 십오 보에는 또 다른
가죽 갑옷 입은 사냥꾼이 보였고, 뒤편의 나무 저편에서는 미늘갑옷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러왔다. 어차피 포위상태나 마찬가지인 이상
포위망을 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죽여도 들키고, 안 죽이면 더 늦게 들키는 차이뿐.

바위에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있다가 랜디는 가장 가까운 녀석이 지나가게 기다렸다. 수풀을 헤치며 놈이 지나간 후에 랜디는 빠르게
일어서서 왼편 가죽갑옷의 등짝에 달려들었다.

뒤에서 목을 긋는 단검의 감촉은 충실하고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지는 적을 놓고 그는 핏줄기를 피해 물러났다.

“썅, 뭐야!”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또 다른 가죽갑옷은 이쪽을 돌아보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저.. 저기..”

가죽갑주조차 제대로 못 갖춘 총알받이는 떨리는 손이 칼자루에 한 번 빗나갔다가 두 번째에야 잡고 칼을 뽑았다. 망설임 없이 바로
앞까지 달려가자 수염도 안 났을 정도로 젊은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랜디는 칼을 내지르는 손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단검끝은
초보 사냥꾼의 갈빗대 사이를 정확이 찾아내어 파고들었다. 그 동작에 등이 나무둥치에 몰린 젊은이가 일으키는 경련이 손에 똑똑히
전해왔다. 그 눈에 빛이 꺼지는 동안 뒤에서는 발걸음이 달려오고 있었다. 랜디는 칼을 휙 뽑으며 돌아섰다.

가죽갑옷이 휘두른 대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떻게 더 생각하거나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미늘 갑옷이
육박해왔다. 랜디는 막으려고 단검을 들었지만 약간, 아주 약간의 차이로 차가운 금속은 단검을 벗어나 눈앞에 번득인다 싶더니
완만하게 휜 넓은 날이 어깨에 날카롭게 베어들며 뺨에 뜨거운 핏방울을 뿌렸다.

더 몰리기 전에 랜디는 단검으로 몸앞을 방어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두 사냥꾼과의 거리를 가늠해 공격범위 내로 치고 들어갈
틈을 노리며 그는 처음으로 미늘 갑옷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에 얼굴에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거한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언월도를 내민 채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 붉게 빛나는 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랜디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과 희열은 여자를 안는 것만큼이나 강렬해 거의 고통에 닿는 쾌감이었다.

“제법이구나.”

그는 히죽 웃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고통은 익숙했다. 견뎌내야 살 수 있기에 어려서부터 그렇게 해왔다.

“원랜 서로 얼굴볼 일도 없이 끝났어야 하는데 말이지.”

“간은 제법 크구나.”

미늘을 입은 거한의 묵직하고 거친 목소리에 랜디는 다시 뭔가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눈깜짝할 사이에 둘을…어?”

사내는 순간 놀라더니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랜돌프 에디우스냐? 이게 얼마만이지, 10년?”

그제서야 랜돌프는 이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에도 키는 컸지만 지금만큼 체격이 떡 벌어지지 않고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청년의 모습이 눈앞의 거한에 겹쳤다. 워낙 오래전이었던데다 목소리마저 그때는 덜 걸걸했으니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세월이 흘렀던가?

더크 콘웰은 랜돌프가 처음 노예 장사를 시작했던 때에 같은 사냥꾼 패에 있던 녀석이었다. 이제 자기 패를 이끌고 있고 무장도 제법
갖춘 것을 보면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런 더크를 보며 랜돌프는 순간 기시감 비슷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가지만 달랐더라면
이들이 서로 반대방향에서 마주볼 수도 있었을까.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 나은가. 랜돌프는 순간 든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

“허어. 나를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군.”

콘웰을 만났을 때는 엘프 이터라는 이름이 붙기 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옛친구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그는 콘웰의 두 부하의 피가 묻은 단검을 돌리며 고쳐잡고, 어느 방향으로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채 눈앞의 둘의
아주 작은 동작에까지 신경을 집중했다.

“하.. 이거 반갑다고 포옹이라도 못하는 게 유감이군.”

콘웰은 붉게 얼룩진 언월도의 날을 그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꼭 피로 끝날 필요는 없다, 에디우스.”

그는 자신과 부하를 가리켰다.

“상황은 2대 1, 너는 부상을 당했지.”

콘웰은 언월도를 고쳐잡아 날끝이 하늘로 향하게 하고 한손을 내밀었다.

“옛정을 봐서 이익을 나누고 끝내는 건 어때?”

“내 이름은 기억하면서…”

대비태세를 전혀 풀지 않은 채 랜돌프는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영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로군.”

“이봐… 페어리 날개면 어차피 큰돈인데 꼭 비싸게 굴어야겠나.”

고개를 젓는 콘웰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 계곡 하나에 가득한 페어리 날개 수익조차 못 나누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야?(주:랜돌프 배경 참조)”

“물론이다.”

랜돌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가 이곳까지 온 기묘한 여정을 더크 콘웰 같은 녀석에게 설명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이해시킬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자신조차 이해 못하는 것을… 그저 콘웰이 기대하고 있는 노예사냥꾼으로서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한 몸은 점점 약해질 것이라고 피에 물든 어깨의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그에게 상기시켰다.
콘웰이 시간을 끄는 것은 그 이유도 있으리라.

“그 액수에 지금 것까지 더하면 난 여기를 떠서 본토에 가서도 왕으로 살수 있지.”

“마음에 드는 태도로군!”

콘웰은 짧게 짖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 그러면 이 위기를 타개해 보라고… 엘프 이터.”

더크의 손짓에 가죽 갑주 쪽은 랜돌프가 튀어나왔던 풀섶, 페어리가 든 새장을 향해 달렸다. 동시에 더크는 다가오며 랜디를 향해
언월도를 내리쳤다.

랜돌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단검날로 언월도를 쳐낸 그는 다른 손의 단검을 콘웰에게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어차피 미늘을 입은
상대를 이런 허술한 공격으로 맞히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시 물러나 주어서 찰나라도 시간을 벌면 그만이었다. 계산대로
더크가 주춤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몸을 휙 돌려 가죽 갑주를 쫓아갔다.

수풀로 달려가는 더크의 부하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커져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따라잡히게 되자 놈은 히익.. 숨을 삼키며
몸을 돌려 맞서려 했다.

놈이 검을 들었을 때 랜디는 이미 가볍게 몸을 돌려서 검날을 지나쳐 적의 턱 밑에 양쪽 단검을 교차시키고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아주 짧은 순간, 랜돌프는 상대의 눈빛 속에서 죽음의 예감을 읽었다. 랜돌프는 앞으로 몸을 날리는 기세를 늦추지 않은
채 팔을 크게 벌려 단검을 양쪽으로 흩뿌렸고, 상대는 목이 갈라진 틈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오랜 경험으로 이미
피가 어디로 튈지 알고 있었던 랜돌프는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선혈이 땅에 팍 튀면서 풀을 붉에 물들였다. 새장을 놓아둔 풀섶 안쪽에서는 날개가 부스스스거리고 작은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페어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만, 성가신 날파리들.

랜돌프는 휙 돌아서며 다가오는 더크와 풀섶 사이를 막아섰다.

“이거 고맙군그래.”

언월도를 짚고 천천히 다가오는 콘웰은 쓰러진 부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나도 수익을 나눌 생각은 없었거든.”

“수익도 살아야 의미가 있겠지…?”

랜돌프는 씨익 웃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콘웰은 적의 없이 마주 웃으며 언월도를 두어 번 빙빙 돌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이런 말 안 믿겠지만…”

어깨가 피에 젖어오면서 머리가 어질해졌지만, 몰려오는 것은 불안보다는 오히려 벅찬 즐거움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랜돌프는 이를 드러냈다.

“나는 정말 너희들이 좋아.”

그는 경계하며 더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돈 몇 푼에 목숨거는 걸 보라구. 이게 살아 있다,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랜돌프는 조금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콘웰의 움직임을 탐색했다. 이전에 그들 패가 ‘멀대’라고 불렀던 콘웰은 느리고 견고한 움직임
때문에 재빠르고 가벼운 랜돌프에게 번번히 놀림감이 되기는 했지만, 덩치를 키우고 갑옷을 갖춘 지금 그는 완연히 자신의 특징을
장점으로 살리고 있었다.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짓밟아서라도, 이 먼 땅에까지 와서 오직 살아남으려고 변하고 강해진 그의
모습은 어떤 말보다도 웅변적이었다.

“철학이 있는 녀석인가.”

더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철학대로 살다 죽어야지!”

덩치큰 사내치고 콘웰은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휘둘러오는 언월도의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따라가며 랜디는 자신이 더
빠르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 반대다.”

랜돌프는 언월도의 날을 쉽게 피해 오히려 그 공격범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먹고 싸고 자는 거 이외에 다른걸 신경쓰는 놈들따위…”

물러나며 거리를 유지하려는 더크에게 랜디는 바짝 따라붙으며 단검을 내질렀다. 더크 콘웰이 어중이떠중이 사냥꾼패의 키만 큰 멀대였을
때나 꽤나 실력있는 사냥꾼이 된 지금이나, 놈은 랜돌프의 손안이었다. 아니, 세상에 누구라도 랜돌프 에디우스에게 싸움으로 붙을
놈은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어버리라는 거다!!”

단검은 몇 번 챙챙거리고 불씨를 튀기며 더크의 미늘갑옷에 튕겨나왔다.

“성가신 놈!”

거의 넘어질 뻔하며 무리하게 뒤로 이탈해 거리를 확보한 콘웰은 랜돌프의 단검을 쳐냈다.

“그쯤 해먹었으면 이제 죽어!”

랜돌프를 향해 한 발짝 내딛으며 팔을 넓게 벌려 언월도를 비스듬히 위로 향하게 잡은 그는 몸의 무게와 속도를 실어 랜돌프의 가슴을
향해 정면으로 찔러왔다.

총력을 당한 그 공격 속에 랜돌프는 파고들 틈새가 보였다.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날을 왼손 단검으로 쳐내서 빗나가게 한 그는
오른손의 단검을 앞세우고 더크를 향해 돌진했다. 단검이 어깨에, 근육과 뼈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은 묵직하고 충실했다.

“윽…!”

뒤의 나무에 등이 몰린 더크의 입술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동공이 확장하면서 얼굴에 핏기가 가셨지만, 이 사내가 이
정도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랜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거리에서 끝내지 않으면!’

그는 갑옷 틈을 노리며 왼손 단검으로 더크의 반대편 어깨를 찍었다. 물러날 데가 없이 어깨를 관통당한 상태에서도 더크는 이를
악물며 몸을 틀었고, 단검은 쨍- 파찰음을 내며 갑옷에 맞아 빗겨났다.

“비켜라!”

더크가 묵직한 부츠를 신은 발을 내지르자 랜돌프는 뒤로 휙 몸을 날렸다가 균형을 잡으며 착지했다.

고통과 분노에 창백해진 콘웰은 어깨에 단검을 박은 채 랜디를 마주보고 식식거렸다. 역시 실전경험이 있는 녀석답게 억지로 단검을
빼려 드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제기랄…”

랜돌프는 상대를 마주 노려보다가 웃음지었다.

“판돈을 크게 걸었는데 별로군, 결과가.”

“아무리 자네라 하더라도 늘 이길 수는 없겠지.”

더크가 중얼거렸다.

뭔가 느끼고 랜돌프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더크도 기색을 보니 거의 동시에 감지한 모양이었다. 나무 사이에 부는 바람만큼이나
조용하고 신속하게 다가오는 움직임을.

“쳇… 여기까지인가.”

더크는 언월도를 거두고는 다가오는 기척의 반대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엘프 따위에게 죽지 마라, 에디우스.”

콘웰은 숲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돌아보았다.

“가능하면 이 단검에 이자를 붙여 돌려주고 싶으니까.”

“내 이름은 기억하는데 내가 누군지는 기억 못하는거 같군?”

랜돌프는 미소지었다. 콘웰은 이를 드러내 보이더니 몸을 돌려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망할…’

랜돌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일대 일로 싸워도 승률이 육할이 안 될 놈을 패거리와 함께 만나다니, 운수 한 번
더러운 일이었다.

이미 포착당한 이상 도망치는 것은 힘을 빼는 짓일 뿐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지나간 지금 어깨가 욱신거리면서 피로가 급격히 몰려오고
있었다. 그는 새장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될 대로 되라지. 최소한 페어리들을 안전한 곳까지 도피시키기는 했다. 자신이
안전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풀섶을 뒤흔드는 바람처럼 재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그들은 랜돌프를 포위했다. 하나같이 우아하고 강한 숲의 아들딸, 아름다운 얼굴
뒤에 차가운 분노를 숨긴 그들이.

‘된통 들켰군… 아마 변명해도 안 먹히겠지?’

그는 그들이 무기를 겨누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놈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제기랄, 이래서 들키지 않고 도착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그가 페어리를 빼돌리려고 했다면 북쪽, 에미넴 숲 엘프들의 본거지인 로스로리엘이 아니라 남쪽 알프 연방이나 십자군령으로
빠지는 것이 옳았겠지만, 그가 하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을 거라는 확신은 전혀 없었다. 애써 설명하기도 피곤했다. 목적을 달성한
지금은 그저 쉬고만 싶었다.

“일어서요, 엘프 이터.”

올려다보자 긴 검은 머리를 땋아 머리에 감은 엘프 여인이 그를 향해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얼굴은 차갑고 이지적이었고, 날씬한
몸의 동작은 춤추듯 우아하면서도 잘 훈련받은 절도가 있었다. 부상의 고통과 출혈의 멍한 기분 속에서 랜디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가격을 매기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위험수당 5천 골드, 엘프니까 2만 5천 추가, 젊으니까 4만 추가, 미모로 7만 추가, 품새로
2만 5천 추가,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과 태도 때문에 재훈련 비용으로 1만 2천 감액, 군사훈련을 받았으니 위험부담과
구속·감시 비용으로 10% 할인, 그리고 록윌에서 중개상을 하는 돼지놈 딕 손튼의 배때기에 적당히 칼도 들이대가며 흥정해서
15~20% 인상. 16만 골드인가, 17만 골드인가. 록윌에서의 시장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었다. 이래서 중개상에게 넘기는
바보짓은 그만두고 직접 도시에까지 가서 팔겠다고 수십 번을 다짐했었지만, 결국은 매번 록윌에서 넘기고 숲으로 돌아왔었다.

“무기를 드십시오.”

16만—아마도?—골드짜리 엘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싸우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습니다.”

잠깐, 저 대사는 보통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뜻인데 오히려 무기를 들라고? 검은 눈 뒤에 차갑게 타는 분노를 멍하니 마주보다가
랜디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죽일 수 있게 전투원이 되어달라는 얘기인가. 그는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저
정도 명예감이면 위험부담 할인은 5% 정도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제국에 어떤 바보가 당했다듯 침실에서 칼에
찔려 비명횡사할 놈은 없을 테니.

“나도 여자는 안 죽여.”

지친 목소리는 쉬어서 나왔다.

“그러니 내가 다른놈들을 때려잡고 당신을 잡아다 팔아먹을 수 있게…”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저어보였다.

“뒤로 좀 물러서 주겠나?”

“무기를 들었는지 상관해야 합니까?”

활시위를 당기는 끼긱.. 소리가 났다. 활을 든 궁수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이미 본색을 보인 것 같은데요, 아일리스.”

랜돌프는 단검을 칼집에 꽂고 망토를 벗어 손에 쥐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노예사냥꾼일 수밖에 없다면 철저한 사냥꾼이
되리라. 양심도, 후회도 없는 한 마리 육식동물처럼.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 사냥감에게 죽는다면 운이 다한 것일 뿐, 불평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었다.

“저자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겠지요.”

아일리스라는 여자는 자세를 낮추며 랜돌프를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물러서요.”

“아일리스…!”

동료들은 저지하려고 했지만, 엘프 여인은 한손에는 단검, 다른 손에는 가느다란 검을 뽑아들고 그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작은 이들을 확보해요.”

그녀가 랜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시하자 엘프 두 명이 서둘러 와서 새장을 가져갔다. 랜디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일리스의
지시대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기를 내려놓은 놈도 없었다. 활까지 쏘기 시작하면 버틸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한두 대를
쏘는 동안인데… 어쨌든 일단 걱정해야 할 건 이 당돌한 엘프 여자였다.

“내가 누군지 아는거 같은데…”

다시 아일리스에게 집중하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감히 나와 일대 일로 싸워보겠다는거냐?”

“나는 그대와 같지 않으니까요, 엘프이터여.”

아일리스의 고요한 눈은 그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폈다.

“이렇게 만나기를 고대했습니다. 나의 친우들이 숲에서 끌려간 이래.”

말을 맺기가 무섭게 그녀는 그의 손을 향해 단검을 던졌고, 랜돌프는 재빨리 망토를 쳐들어 막았다. 북.. 하고 망토가 찢어지면서
햇빛이 그 틈으로 비쳐들었지만, 칼날의 속도를 줄여 튕겨낼 수는 있었다.

엘프는 무표정하게 단검을 또 하나 꺼내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망토에 엉킬까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피는 계속
흘러 어깨와 팔에 차갑게 굳어갔고, 기운은 자꾸 빠져갔다.

“눈빛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지.”

그는 이죽거렸다.

“보아하니 내가 출혈로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 셈이냐?”

“그렇다면 아쉬운 일이겠지요.”

말하며 아일리스는 다시 단검을 던졌다.

제기랄, 더 끌 시간이 없었다.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날을 다시 튕겨내고 랜디는 그 자신의 단검을 휘두르며 바로 달려들었다.
아일리스는 왼손의 검을 침착하게 들어 공격을 흘려냈고, 바로 이은 공격은 허리를 숙여 피했다.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헤쳐왔다.. 나는.’

점점 지쳐가는 것을 느끼며 랜디는 빨리 끝내기로 결심했다. 단검을 막아내느라 너덜너덜해진 망토를 놓으면서 그는 엘프가 검을
휘두르는 공격범위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가 허를 찔린 짧은 순간 속에 단검자루로 내리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긴다!!’

강한 타격감과 함께 뼈에 따악.. 맞는 소리가 나면서 아일리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야지! 날카로운 승리감과 짜릿한 흥분이
올라왔다.

그러나 재빨리 물려나려는 순간 랜돌프는 고통에 눈앞이 아찔했다. 내려다보자 아일리스가 든 가느다란 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해져서 헉헉거리며 엘프가 지그시 칼을 비틀자 통증이 눈앞에 하얗게 점멸했다.

멀어지려는 의식을 이를 부서져라 악물어서 붙들고 그는 무릎을 세게 올렸다. 남은 힘을 쥐어짠 무릎차기가 맞기 전에 아일리스는 칼을
빼면서 몸을 돌려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의 피가 검끝에서 흩날리며 춤추듯 움직이는 동작의 궤적을 따라갔다.

이제 5m 정도의 사이를 두고 아일리스는 숨을 헉헉거리며 그를 마주보았다. 갈빗대에 손을 대고 몸을 숙인 모습이, 아까 칼자루에
맞아서 갈빗대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랜디는 옆구리로 피가 뜨뜻하게 흘러내렸다. 고통 때문에 구토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칼을
내리거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일리스 옆의 어린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자 아일리스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활을 내리게 했다.

“일대 일 싸움이었다.”

말은 궁수에게 하는 것일지 몰라도 시선은 랜디를 향하고 있었고, 그는 어질한 와중에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대 일이었다. 인정하지.”

그러나 둘의 싸움은 끝났을지 몰라도 공기중에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적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일리스가 막든 안 막든
금방이라도 공격이 들어올 태세였다. 자꾸 흐려지는 시선으로 둘러보며 랜디는 어느 방향에서 공격이 다가올지 가늠했다.

그 순간 작고 급한 날갯짓이 웅- 하고 공기를 울리더니, 아까 그 분홍빛으로 빛나는 페어리가 그의 앞에 나타나 공중에 뜬 채
막아섰다.

”..줬어! 므우루.. 만나.. 댔어!”

페어리어로 한 말을 랜디보다는 잘 알아들었는지 아일리스의 가느다란 눈썹이 조금 치켜올라갔다. 페어리를 지나 랜디를 보는 시선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더 견딜 수 없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안도감 때문일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고, 앉을 힘조차 없이
그대로 풀 위로 쓰러졌다.

“들것에 싫도록.”

멀어지는 의식 속에 아일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이번엔 진짜 죽을뻔 했나…’

“잘 감시하라.”

‘저 날파리 같은 녀석들이… 구해준… 건가…’

무거운 눈꺼풀을 감기게 내버려두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아마도 괜찮으리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몸으로는 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싸움을, 경계를 잠시 놓아버려도 되었다. 잠시라면. 사무적인 손 여럿이 그를 받쳐올리고 이내 평평한 표면 위에
편히 누워 흔들리는 막연한 인상만을 남기고 그의 의식은 까마득한 어둠에 빠져들었다.

그는 문득 방안에 가득한 햇빛을 인식했다. 눈에 파고드는 햇살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눈을 도로 감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는 시야를 커다랗게 분홍빛으로 차지한 페어리가 눈꺼풀을 억지로 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눈 떴다?” “이제.. 깬..야?” “므우루?”

주변에서는 페어리 목소리들이 종알거렸다.

“저리 가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 쇳소리가 되어 나왔다. 꽤 누워있었던 모양이었다. 성가시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날파리들…”

꺄악! 페어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용어로 한 말이었지만, 언성은 언어를 가리지 않는 법이었다. 페어리들은
자기들끼리 두런거리며 좀 거리를 두고 모여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랜돌프는 그들을 셀 수 있었다. 분홍, 하양,
녹색, 보라, 노랑 색색의 열일곱 개 작은 빛을.

해냈는가. 깨끗하게 붕대를 감아놓은 채 가끔 가볍게 욱신거리는 부상 외에 그가 이렇게 무사히 있고 페어리도 열일곱 모두 괜찮다면
이곳은…

“로스로리엘?”

페어리어로 묻자 작은 요정들은 일제히 재잘거리며 대답했다. 그 속에서 랜돌프는 ‘로스로리엘!’ ‘엘프!’ ‘이뻐!’ ‘므우루!’
하는 말을 분간했다. 이곳은 로스로리엘이 맞고,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로 그는 대충 이해했다.

“므우루?”

그는 다시 물었다.

“만났어?”

“므우루! 므우루!”

그들은 들떠서는 색색의 빛을 흩뿌리며 방안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춤추는 빛무리 사이로 은은한 푸른 빛으로 빛나며
므우루가 방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전에 봤을 때보다 빛은 조금 약했지만, 건강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그를 보고 그녀는 작은 손을
모으며 환하게 웃음지었다.

“일어나셨군요. 아직은 일어나시지 않는 것이 좋아요.”

‘아아.’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다시 푹 누웠다. 신이 난 미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성공했나, 그 떨거지들…’

살아남은 페어리, 그리고 그들의 여왕을 구해낸 것은 그와 그들이 함께 이루어낸 승리였다. 뭐 하나 지킬 것도, 아쉬울 것도 없던
그의 삶에 이런 순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꽃밭 위를 춤추며 날던 므우루와 그녀의 동지들을 떠올렸다. 잔잔한 음악소리에 귀기울이던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맑은 웃음을.

”…미안.”

잠시 침묵하다가 그는 그들의 언어로 말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빨리 못… 갔다. 미안.”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만 있었더라면 이들을 지켜주고 싶었었다. 이들에게는 악귀처럼 살아온 랜돌프마저 믿을 수 있는
순수라는 것이 있었다. 망가지고 다치고 혼탁해지지 않은 한 가지를 남길 수 있다면, 아득바득 살려고 버둥거리며 피에 젖어 살아온
그의 삶마저도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으리라.

그의 말에 므우루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공용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건 우리 잘못이었는 걸요.”

고개를 든 그녀는 묘하게 무표정해지면서 그를 마주보았다.

“이렇게 무사하니 그걸로 되었어요.”

그를 지나 까마득히 먼 곳을 꿰뚫는 므우루의 눈빛에 랜돌프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여전히 그 먼 곳을 보는 눈빛으로 그녀는
말했다.

“무사하니까…”

“너…”

그때 열매를 찾으라며 그들을 보낸 것은 그렇다면 설마… 랜돌프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믿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의 순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말을 잇기 전에 문에서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여자가 하나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일리스는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들더니 자연스럽게 므우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계신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혹시 방해했다면…”

아일리스가 가볍게 목례하고 물러서려고 하자 므우루는 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전혀 아니랍니다. 랜돌프씨 선물인가요?”

“페어리 레이디와 그 친구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

그녀는 랜돌프를 흘깃 쳐다보았다.

“남부 에미넴 숲으로 파견했던 일행이 보냈습니다.”

아일리스는 곱게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므우루의 손짓에 상자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그녀 앞에 와서 뜨더니, 묶은 리본이
스르르 풀어지면서 뚜껑이 열렸다.

므우루가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살짝 들자 상자가 떨어져 내리는 동시에 삐죽삐죽하고 울퉁불퉁한, 게다가 반토막이 난 갈색 열매가
둥실 떠올랐다. 랜돌프는 순간 긴장했지만, 므우루의 부탁으로 찾으러 갔던 저놈의 물건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났던 그 지독한 냄새는
이제 없었다.

“어머…”

므우루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지었다. 아일리스가 어리둥절하게 보는 동안 랜돌프는 피식 웃으며 뒤로 등을 기댔다.

“더럽게도 비싼 열매였어.”

므우루가 이 열매를 찾으러 그들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마법사와 오크떼가 습격했을 때 그들이 페어리 꽃밭에 함께
있었더라면, 그 파괴와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좀전 므우루의 묘한 표정을 떠올리고 그는 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므우루가 손을 저어 아카마카 열매를 방 가운데 있는 탁자에 올려놓자 열일곱 명의 페어리는 웃고 떠들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다가 랜돌프는 아일리스가 다가오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녀가 침대 옆에 와서 서자 그는 페어리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사과할 생각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일리스를 마주보았다.

“나는 그런 놈이 맞으니까. 너는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

아일리스는 그를 무표정하게 보다가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미소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검집을 칼에 씌우고 싸운 것은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될까요.”

“몰라서 물어?”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죽이면 잡아다 팔 수가 없잖아.”

아일리스의 눈빛과 얼굴은 마치 고요한 수면 같았다. 그 이면에 작은 파장이 이는 것처럼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몇 가지 스쳐가더니
그녀는 다시 무표정해졌다.

“얼마였지요?”

“음?”

“저를 잡아다 팔면 얼마가 나왔을지요.”

조용하고 하염없이 깊은 눈빛을 마주보며 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시선을 피해버렸다. 엘프란 다 이런 식이었다. 눈을 마주보다
보면 그 세월과 상념의 깊이에 숨이 막혔다. 잡혀가는 길 내내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어느 엘프 여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좀 보라고 얼굴을 후려쳤던 기억에 그는 그 감각이 선명한 오른손으로 침대보를 꽉 잡았다.

”…최소한 15만 8천 355골드다.”

그는 아카마카 열매와 페어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최소한이야. 중개상에 파는 값이 그러니까 현지에서는 두 배, 세 배다.”

아일리스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엘프 이터.”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당신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녀는 재잘거리며 방안을 날아다니는 페어리들을 눈으로 따랐다.

“그리고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아일리스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일 델 라 쿠데 알라미사. 편히 쉬도록 해요.”

“태양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여…”

경쾌하고 우아하게 걸어가는 엘프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그 뜻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길에 빛을 비추기를.”

“나갔다~~” “나간 거야?” “놀자~” “놀자~”

미처 생각할 새도 없이, 페어리들은 아일리스가 나가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 하나가 어깨의 상처에 돌진하듯 부딪히자 그는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를 죽일 셈이냐!”

그는 파리를 쫓듯 손을 저었다.

“저리 가 이 날파리 놈들아! 나도 좀 쉬자!”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은 또 하루 사신 (死神)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기쁨 때문이리라. 삶이라는 끝없는 투쟁 속에서…
소란스러운 방안에 창밖의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며 구석까지 빛을 환하게 밝혔다.

소감

삭풍님 대신 제가 대리진행했던 외전이었는데, 겁스 룰을 잘 모르다 보니 (정확히는 좀 무서워하죠(..)) 전투 부분도 안 굴리고 대충 했습니다. 제가 인터넷이 미친 듯 끊겨서 결국 마무리는 삭풍님이 해주셨죠. 길지 않은 플레이라 대체로 로그를 따라서 썼는데, 끝에 가서는 살짝씩 편집하고 축약한 대사가 있습니다. 특히 므우루가 일행을 열매 심부름 보낸 이유를 나름 만들어 붙였는데, 여기서는 암시 정도로 처리했습니다.

진행에 딱히 준비한 것은 없었지만 이방인님이 생각해두신 게 있어서 둘이 얘기해서 하니 편했습니다. 재밌게 한 플레이였고, 랜돌프라는 인물의 여러 면모가 드러나서 흥미로웠습니다. 소설 형식을 통해 그 깊이를 더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폭력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페어리를 위한 역설적인 헌신 등 한 인물의 복합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1:1 플레이의 묘미죠.

새로 NPC를 만들어서 RP한 것도 이번 플레이의 재미였습니다. 더크 콘웰은 나중에 본편에서도 삭풍님이 등장시키셨고, 아일리스는 이 플레이 이후에 쓴 안식의 로스로리엘 대목에 로스로리엘 묘사를 대폭 추가하면서 제가 활용했습니다. 콘웰이야 뭐 ‘무자비한 노예사냥꾼 A’로 써먹기 좋은 인물이고, 랜돌프와 지인이기도 하니 더욱 편리하죠. 어찌보면 랜돌프가 될 수 있었던 모습이기도 하고, 사실 성격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 삶의 모습이나 입장은 반대인 점이 역설적입니다.

아일리스는 원래 랜돌프 상대역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아라와 랜돌프 사이의 긴장감이 급부상하면서 좀 밀려난 느낌입니다. 안식의 로스로리엘에 암시를 넣었듯 아스타틴과도 과거에 인연이 있고, 아스타틴 아버지의 먼 친척쯤 될 것 같습니다. 그 뻣뻣한 성격 때문에 이방인님 말씀마따나 놀려먹기 좋아서 다시 등장해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소설판은 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꽤 재밌게 작업했습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은 많이 써보기도 했고, 또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장편과는 달리 쉽고 재밌죠. 결말이 나지 않은 캠페인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과는 달리, 어떻게 끝나는지 아니까 방향성이 확실하기도 하고요. 특히 전투가 두 번 있어서 전투 묘사 연습하기에 좋았고, 쓰기도 재밌더군요.

글 봐주신 천루님 지적대로 왠지 요즘 글은 묘사가 폭주해서 이번에는 좀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래 제가 묘사 그렇게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야 한다는 생각에 좀 열을 올렸던 것 같네요. 이제 어느 정도 기본 묘사를 깔아놓았으니 분량을 적절히 조절해야겠습니다. 4화 본편부터는 전투도 많고 하니 편집과 축약의 미를 더욱 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아일리스의 시세는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계산기까지 두드려가며(..) 열을 올렸는데, 랜디의 과거와 노예사냥꾼으로서의 생활에 구체적인 깊이를 더하는 장치였던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역설정을 하든 인물을 만들든 저는 항상 경제적인 고려를 우선 하는데, 랜돌프와 더크 콘웰도 노예사냥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먹고 살고 유통 구조(..)는 어떤지 생각하니 한결 인물이 구체적으로 잡히더군요. 한편 이종족들도 자신이 노예로 팔리면 얼마나 비싼 몸인지 자기들끼리 농담하면서 가혹한 상황을 유머로 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참가하신 이방인님, 그리고 관전하시고 마무리까지 해주신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분 다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까지 해주셔서 더욱ㅠㅠ 더욱 발전하는 소설로 보답하겠습니다! 비록 느리지만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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