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4~6화 (2): 싸운다는 의미

“싸울 의사가 없는 것들은 도망쳐라. 휘말리기 싫다면.”

“아…”

돌발적인 행동에 아스타틴은 놀라서 아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드레스 차림으로 정원의 조명을 한몸에 받으며 적들과 마주선 그녀는 한
치도 거리낌이 없이 당당했다. 그녀에게 겹치는 또 다른 전사의 모습, 인정하기 싫은데도 마치…

‘텔루르…’

“꺄아아아아악!”

“경비! 경비!”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철문으로 몰려갔다. 그들이 서로 부딪히고 걸려넘어지는 와중에 로시오는 크게 뜬 눈을 희번득거리며 경비를
불렀고, 변장한 연회객과 정원 외곽의 경비들이 무기를 뽑으며 사방에서 다가왔다. 아라가 조명탄을 당기자 정원 혼란 위로 붉은색과
금빛의 불꽃이 높이 솟았다. 마치 환희의 기념처럼, 걷잡을 수 없는 축제의 시작처럼. 담장 밖에서는 마치 화답하듯, 신속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 프리포트의 건물 사이에 메아리치며 가까워왔다.

“후우…”

크세노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팡이에서 리본과 방울을 떼어냈다.

“기습치고는 너무 정직하지 않습니까.”

아라는 대답하지 않고 아사나스의 안장 주머니에 고정했던 일행의 무기를 던져주었다. 지카리의 도끼와 랜돌프의 단검이 주인을
찾아갔고, 아스타틴의 봉 역시 턱 하고 품에 안겨왔다. 크세노바가 눈을 감으며 뭔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아라는 쇼올을 던져버리더니
안장 주머니에서 가죽 갑옷 상의를 꺼내 드레스 위에 걸치고 여밈끈을 대충 당겨 묶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옷의
무릎께에서 치마를 부욱 잘라내서 호리호리한 검은 다리와 청록색 준보석이 반짝이는 은빛 샌달 신은 발을 드러냈다.

단상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는 악사들을 쫓아 단상 위의 경비들이 로시오의 지휘 하에 소녀를 서둘러 저택으로 끌고갔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랜돌프는 양손에 단검을 뽑아들고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고, 아스타틴은 한숨을 내쉬며 준비자세를 취했다. 크세노바가 주문을 마치고 손바닥을 병사들에게 향하자 순간 고막에 팍 압박이
오더니, 병사 한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자신이 느낀
압력은 여파였을 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크세노바는 언제나처럼 그저 평온한 표정이었다.

병사들의 비명이 잦아들기도 전에 철문이 쾅! 열리면서 절도있고 신속한 발걸음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도보 기병대 앞으로! 앞으로!”

청아하고 우렁찬 엘프 목소리가 금속성의 경쾌한 걸음과 함께 울려퍼졌다.

“엘프의 적들에게 죽음을! 죽음을!”

두렵고 우미한 엘프 도보기병대는 정원의 환한 불빛에 희게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마치 한 사람인양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병사들을 빠르게 포위하며 무기를 뽑았다.

병사들이 새로운 적에게 돌아서며 혼란에 빠진 동안 아라는 아사나스의 등에 재빨리 올라타더니, 크세노바의 주문으로 포위망에 생긴
틈을 향해 돌진했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며 그 앞을 서둘러 막아서는 모습을 보고 지카리는 도끼를 내려놓고 옆의 거대한
탁자를 붙들었다. 그의 팔 근육이 불끈 솟자 탁자가 그의 팔에 붙잡힌 채 육중하게 떠올랐다. 그가 무릎을 굽혔다가 팔을 쭉 뻗자
탁자는 훙-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 위로 날아가 병사들에게 내리꽂혔다. 병사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흩어지는 동안 탁자는 귀가
아픈 파열음을 내며 산산히 부서졌고, 그 혼란 사이로 아라는 가우르의 목 위로 낮게 몸을 숙인 채 저택 입구로 달렸다.

다크엘프가 포위망을 막 빠져나가려는 찰나, 공기가 미묘하게 변하면서 저택 앞의 공기가 아지랑이가 핀 듯 일그러졌다. 순간 저택
앞쪽이 밝아오고 살짝 주변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거대한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아라와 아사나스에게 육박해왔다. 아스타틴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루테리.. 아사나스!!”

바로 코앞으로 날아드는 불덩이에 아라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아사나스는, 눈도 못 뜨고 아스타틴의 손가락에서 우유를 할짝할짝
핥아먹던 루테리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바로 굴려 불덩이를 피한 가우르는 주인 위에 납작 엎드려 몸을 덮었다. 바로 그
순간 불덩이는 아사나스 뒤편, 병사들 사이에 내려앉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팔로 눈을 가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도 순간의 잔광이 눈꺼풀 뒤에 하얗게 불탔다. 폭발의 굉음에 발밑의 땅이 흔들리자
아스타틴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몸에 끼쳐오면서 비명이 귀를 찌르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아사나스!’

팔을 내리며 정면을 보자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고, 몸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는 병사가 이내 엘프 기병의 칼에
꿰뚫려 쓰러졌다. 그리고 루테리온, 아사나스는…

매캐한 연기가 걷히면서 아라가 다크엘프 욕설을 중얼거리고 일어나앉았다. 그녀의 앞에 주인을 보호하듯 웅크린 검은
형체의 등은 어긋난 안장 밑에 화상을 입어 짓무른 살에 피와 그을린 털이 엉겨 뭉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스타틴은 속이
뒤집히면서 눈앞이 어질거렸다. 텔루르가 그렇게 떠나갔는데… 루테리온…!

“잘했다.”

아직 상처를 못 본 아라는 가우르의 목을 툭툭 쳐주고 한쪽 무릎을 세우며 일어설 채비를 했다. 아사나스는 크르르릉.. 울부짖으며
일어나지 못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에서 아라는 그의 등에 난 상처를 보고는 천천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흥건한 피와
짓무른 살점이 묻어있을 손을 생각하고 아스타틴은 몸부림이 쳐졌다.

날카로운 여자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이거 재밌네!”

쿠라의 목소리는 이제 아스타틴에게 낯설지 않았다. 엘프소녀를 앞에 잡아세운 채 저택 현관 앞에 선 그 검은 로브 입을 모습을 보고
천천히 피어오르는 증오의 불길도 낯익었다.

“마탑…! 올 줄 알았어!”

쿠라는 반가운 친구가 오기라도 한양 크세노바를 보고 떠들어댔다.

“마탑의 마법사 나으리가 다 오고 말이야. 안녕 크세노바!”

“음? 절 알고 있습니까?”

졸지에 주목받은 크세노바는 자신을 가리켰다.

“어머, 섭섭하네.”

쿠라는 짐짓 손으로 설레발을 쳤다.

“엘리샤라면 기억이 나?”

그녀의 뒤에는 불길한 그림자가 스멀스멀 움직였다. 크세노바는 병사의 불탄 시체를 지나 숯덩이가 된 탁자의 잔해를 밟고 쿠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몇 걸음 더 걷다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났어. 네가 왜 거기 서있는 거냐?”

“멜코르님이 날 받아주셨지~”

쿠라는 깔깔거렸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해줘야 돼?”

“그 양반 오지랖 한 번 넓구만.”

크세노바는 한숨을 쉬었다.

아스타틴은 천천히 아사나스 곁으로 걸어갔다. 달려드는 병사 둘이 랜돌프의 단검에 거의 동시에 쓰러지는 모습도 멀기만 했다.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의 도제나 정원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투, 그 어느것도 상관 없었다. 아사나스가 아파하고 있다는,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남았을 뿐.

“아사…나스.”

그는 가우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상처를 피해 옆구리에 손을 얹자 헐떡헐떡 빠른 호흡이 손에 와닿았다. 아사나스의 확장한 동공과
가슴 깊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분명 상당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지카리가 걸어와 아라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구르는 와중에 한쪽 신이 벗겨진 아라는 다른쪽 신발도 벗어던지고 맨발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크엘프어로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 있거라, 아사나스.”

아사나스를 부드럽게 부르던 목소리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난 저 계집을 죽이고 오마.”

할딱이는 아사나스의 목을 쓸어주고 상처를 살피면서 아스타틴은 그들이, 지카리와 아라와 랜돌프가 크세노바를 따라 저택 정문에
다가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프 전사들이 인간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이제 흑마법사 도제에게 갈 길이 열렸다. 다시 싸움을
위해, 텔루르와 아시타를 앗아가고 아사나스까지 데려갈 뻔한 그 폭력의 진창에.

갑자기 너무나 피곤했다. 죽고 죽이는 저 소용돌이에 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아사나스 곁에서 쓰다듬어주고, 약을 만들어 상처에
붙여주고, 류트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텔루르와 함께 떠돌던 시절처럼 그렇게 서로 상대의 존재를 호흡하며 그 평화에 침잠하고
싶었다.

“제가 치료하지요.”

로브를 걸친 엘프 마법사가 달려와 아사나스를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순간 아스타틴은 싫다고 소리지르며
이 낯선 사람을 밀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이 일었다. 오랜 애정과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의 날실과 씨실로 짠 우리만의 공간에
침범하지 말라고, 바깥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끌고 들어오지 말라고 그렇게….

그러나 아사나스의 눈을 본 아스타틴은 통증에 할딱이는 가우르가 아라를 따르는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주인에 대한 걱정이 아닌,
곁에서 싸울 수 없는 안타까움을. 흑마법사 쿠라 앞에 붙들린 조그만 소녀의 모습이, 그 앞에 맞선 동료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들만의 공간, 그들만의 평화는 이미 없었다. 전쟁으로 격동하는 안힐라스에 그런 평화는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을 지 모른다.
모순일 지는 몰라도 싸우지 않고는 평화도 없었고, 아무도 지킬 수도 없었다. 그렇게 텔루르가 죽지 않았던가. 그래서
노스탤지아에 들어온 것 아니던가.

아사나스의 머리를 쓸어주고 천천히 일어선 아스타틴은 아사나스를 치료하는 마법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저택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원치 않아도 치러야만 하는 그의 싸움을 향해.

소감

도보 기병대가 대체 뭔가 해서 삭풍님께 여쭤보았는데, 보병은 보병인데 무지 빨라서 도보 기병대 (foot cavalry)라는 이름이 붙었던 미국 남북전쟁 때의 부대에서 따왔다고 하시더군요. 잭슨 휘하의 남부군에 있었다는 게 살짝 불길하긴 하지만 뭐 넘어가죠(?). 워낙 신출귀몰했던 이 부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나고는 해서 북군을 크게 혼란시켰다고 하네요.

이 장면에는 이것저것 나오지만, 결국 핵심은 아스타틴의 결심 대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표현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물의 감정선과 심경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를 짜보고 싶었어요. 결국 누구든 싸움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데, 초반에 죽은 안습맨 아시타가 싸우는 이유가 대륙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면 아스타틴은 소중하고 가까운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런 애착 대상이 아사나스 하나가 남은 것 같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일행과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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