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3화 (1): 프리포트 도착

3월 21일에 한 3화 플레이입니다. (와 많이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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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포트로 가는 길은 척박한 검은 풍경이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가끔 거친 풀과 키작은 나무,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작은 짐승과
새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땅을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지루한 곳이군.”

사냥꾼 랜돌프 에디우스는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겼다.

“당신네들 하는 식으로 한번에 이동해버리면 안 되나?”

아라가 코웃음을 치는 동안 크세노바가 말했다.

“프리포트로 그렇게 갔다가는 눈에 너무 띄겠지요. 에미넴 남쪽까지는 그래도 이동하지 않았습니까.”

“순간이동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때는 좀 아쉽긴 하군요.”

혼잣말처럼 말하던 아스타틴은 황량한 풍경을 돌아보다가 왼편의 나지막한 언덕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쪽입니다.”

“또 방향을 바꾸는 건가?”

그를 따르면서도 랜돌프는 눈쌀을 찌푸렸다.

“정말 헤매지 않겠어?”

“오는 방향을 위장해야 하니까요.”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주변을 확인했다.

“프리포트는 저쪽입니다.”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검고 황량한 풍경 중 별반 달라보이지도 않는 방향을 가리켰다.

“길찾는 머리가 대단하군.”

지카리는 감탄한 목소리였다.

“난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네.”

아스타틴은 미소짓지는 않았지만, 지카리를 잠시 돌아보는 눈빛에는 감사가 담겨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스타틴의 인도를 따라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는, 가볍게 난 수레바퀴 자국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스타틴이 의도적으로 인적이 없는 곳에서 길에 접어든 듯 근 한 시간 동안 사람 그림자도 못 보고 걸어가는 동안 길의
흔적은 더욱 뚜렷해졌다. 수레바퀴 자국은 더 깊어졌고, 사람과 짐승의 최근 흔적도 슬슬 보였다.

길을 구획지으려고 깔아놓은 거친 돌이나 조잡한 표지판이 눈에 띌 때쯤 드디어 다른 여행자들이 보였다. 노새가 끄는 수레에 냄비와
옷가지 등 잡동사니를 가득 실은 상인이 그들 뒤에서 나타나 따라잡더니 앞으로 멀어져갔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용병인 듯한 거친
사내들이 갈림길에서 진입해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걸어갔다.

노스탤지아 일행을 흘깃 쳐다본 용병들이 본 것은 유달리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 약간 예쁘장한 금발 청년, 피부가 검은 무표정한
여자와 한 명은 거칠고 사나운 인상, 다른 하나는 여자처럼 여리여리한 두 젊은 남자였다.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약간의
관심을 표시했지만, 일행의 무장상태와 랜돌프가 단검에 무심히 손을 얹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들개 같은 놈들이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랜돌프가 낮게 말했다.

“약점을 보이는 상대가 아니면 덤비지 않아.”

그의 눈빛은 불쾌하기는커녕 즐거워 보였다. 히죽 웃는 웃음에는 애정마저 어렸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바닷가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대충 쌓은 석축으로 둘러놓은 도시는 돌이나
나무, 벽돌 건물과 작은 움막들이 아무 법칙이나 구조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채 성벽에까지 닿았고, 도시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벽을 넘어 주변의 판자집과 천막촌으로 무질서하게 퍼져나갔다. 앞바다라고 할 만한 것은 배가 두세 척 나란히 드나들 만한 틈새만
남기고 앞을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과 해안 사이의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이 앞바다에는 범선부터 보트까지 각양각색의 배들이 발디딜 틈
없이 서로 붙어 웅크려 있었다. 항구에는 움직이 활발했고, 도시의 길과 건물에도 사람과 탈것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인간들의 도시인가…”

그런 프리포트를 내려다보는 아라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고 말했다.

“가죠.”

아스타틴을 따라 일행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과 수레가 계속 오가는 길에 저 앞에서 수레가 다가오자 일행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다가 수레의 내용물이 눈에 들어자 지카리는 눈에 띄게 흠칫 놀랐다. 서로, 그리고 수레 바닥에 묶인 채 묵묵히
수레 발밑만 내려다보는 드워프와 엘프들은 일행이 얼어서 지켜보는 동안 덜컹덜컹 흔들리며 지나갔다.

“보고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지카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인간들이라는 게 그렇죠.”

아스타틴은 멀어져가는 수레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아라는 굳고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언덕을 척척 걸어내려갔다. 이윽고 길이
북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그는 일행에게 돌아섰다.

“여기서부터는 찾아가실 수 있겠죠?”

그는 등뒤에 멀리 보이는 프리포트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가 다른 길로 접어들자 지카리가 불렀다.

“아스타틴.”

아스타틴이 멈추며 돌아보자 지카리는 말을 이었다.

“조심하게. 내일 보세나.”

“예.”

아스타틴은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행에게 인사하고 그는 북쪽 길로 혼자 향했다. 나머지 일행은 다시 프리포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프리포트에 가까워지면서 주변의 광경은 더욱 비참해졌다. 마침내 검문소 앞에 줄을 섰을 때 주변에는 어디에나 노예를 볼 수 있었다.
서로 목이 묶인 채 일렬로 서서 끌려가는 엘프와 엘프 혼혈의 행렬, 페어리가 여럿씩 든 조롱을 쌓아놓은 수레, 말에 묶여 끌려온
기색이 역력한, 지쳐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드워프… 그들의 탄식과 비명이 공중을 메웠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의 눈빛이었다. 완전히 포기한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공허한 시선은 지울 수 없는 잔상이 되어 눈에, 가슴에
남았다.

아무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아라가 갑자기 움직이며 활에 손을 뻗었다. 랜돌프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탁 쳐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자 그는 이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움직이게 되더라도 나중이다.”

아라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깨가 격한 호흡에 잠시 들썩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확 돌아서며 주변의 모습을 외면했다.

“일이 우선이죠.”

주변의 광경을 아프게 보고 있던 크세노바가 달래듯 말하자, 아라는 여전히 돌아선 채 대답했다.

“우리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임무? 웃기네.”

랜돌프는 양옆으로 목을 투둑투둑 풀었다.

“난 저녀석들을 빼내야겠어.”

그의 시선은 페어리 조롱이 가득 든 수레에 향했다.

“옛 동업자들에게 칼을 들다니, 재미있구나.”

아라마저 그 말에는 돌아보았다.

“아니면 갑자기 인도주의자가 되었다는 핑계로 배신할 생각이냐?”

“동업자…? 난 혼자 움직였다, 언제나.”

랜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난 하고싶은 대로 움직인다.”

“여기서 지금?”

짧게 깎은 머리털 때문에 사각턱이 돋보이는 머리를 돌려 지카리가 랜돌프를 바라보자 굵은 목에 힘줄이 섰다. 인간 모습일 때도
여전한 연녹색 눈을 빛내는 지카리에게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움직이는게 무리라는 뜻이었지. 도시에 들어가고 나면 바로 움직일 거다.”

크세노바가 지카리와 랜돌프를 불안하게 보는 동안 줄은 터벅터벅 움직여 그들은 석벽의 입구를 지키는 초소 앞에 섰다. 검문소를
지키는 남자들은 서로 갑옷이나 무기, 심지어는 옷도 제각기 달랐고, 심지어는 한 사람이 입은 갑옷도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구한 듯
짝이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가슴에는 모두 주황색 바탕에 검은 절벽 위에 앉은 바다새의 윤곽을 그린 문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같은 소속이라는 표시라고는 없었다.

머리에 잘 맞지 않는 투구를 눌러쓴 남자가 초소 앞에 건성으로 서있다가 그들이 다가오자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외지인 냄새가 물씬 나는디, 다들 어디서 오셨수?”

“노예 사냥꾼이다.”

랜돌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아라는 이를 악무느라 턱이 떨렸다.

“도망친 노예를 뒤쫓고 있다.”

그 목소리에 다른 경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처음에 말한 경비의 어깨 너머로 랜돌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음…잠깐, 어디서 많이 봤는데…”

랜돌프는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유연한 경계를 유지한 채 경비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경비는 손뼉을
쳤다.

“오오! 그 유명한 엘프사냥꾼이시로구만!”

“나를 아시오?”

랜돌프는 미세하게 앞으로 옮겼던 무게중심을 뒤로 편안하게 기대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노예시장에 와본 적이 있나보지?”

“이거 오랜만이군! 반갑소,”

경비가 동료 뒤에서 나와 악수를 청하자 랜돌프는 가볍게 맞잡았다. 그런 그를 지카리는 살짝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면 데리고 온 건 노예…가 아니구만.”

경비는 아마 습관적인 듯 아라에게 음흉한 웃음을 짓고는 랜돌프와 일행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통행세만 내고 들어가보쇼.”

경비병이 다음 사람에게 손짓을 해 줄을 움직이는 동안 랜돌프는 동전 몇 닢을 다른 경비에게 떨구어주고 동행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를 따라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성문을 통과해 프리포트의 북적거리는 거리에 오가는 인파와 수레, 짐승의 행렬에 섞여들었다.

“알고 보니 유명했군요.”

크세노바가 별 감정 없이 말했다.

”…노예사냥꾼인 줄은 몰랐군.”

랜돌프를 보는 지카리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범죄집단 내에서나 그렇지. 경비병이 얼굴 알아보는건 처음이야.”

랜돌프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곳이야, 여기는?”

“지금은 노예사냥꾼이 아니길 바라네.”

지카리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하며 랜돌프를 지나쳐 걸어갔다. 인간 모습일 때도 유달리 키가 큰 그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랜디를
완전히 덮었다.

“호랑이는 줄무늬를 못 바꾸는 법이죠.”

아라는 랜돌프를 쳐다보지 않고 지카리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호랑이나 그렇죠. 인간은 염색이든 뭐든… 그나저나…”

크세노바는 프리포트의 복잡하게 꼬인 거리를 혼란스럽게 살폈다. 간격이나 넓이가 들쑥날쑥한 골목과 거리는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방향이 이리저리 구부러졌고, 원래 하나였던 길이 둘로 갈라지는 등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거리를 여섯 번 지나 우물이 있는 광장터라니, 이런 곳에서 이걸 접선책이라고 알려준 건가.”

“좀 웃기게 만들긴 했어도 아주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로군.”

거리를 몇 번 눈으로 살핀 랜돌프는 크세노바와는 달리 기준점을 찾아낸 듯 건물 사이로 여기저기 꼬이는 길의 몇 군데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나머지 셋에게 짧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6개의 거리라고 했지?”

“정말 이름대로 제멋대로인 도시로군요.”

척척 걸음을 옮기는 랜돌프를 따라가며 크세노바가 말했다. 지카리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가는 동안 일행은 사슬에 묶여
멍하니 길가에 선 채 서너 상인의 열띤 흥정의 대상이 된 드워프들을 지나쳤고, 옆에는 빼빼 마른 몸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쓰레기를 돌아가면서 아라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도시인데도 정글 냄새가 나는군.”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는 랜돌프의 입술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난 왠지 이 도시가 마음에 드는데?”

“참으로 어울리는구나.”

아라는 주먹을 꽉 쥐면서 눈을 감더니 깊이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뜨자 눈빛은 좀 더 냉정해져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고 턱은 긴장해 있었다.

“웃어라. 그리고 기뻐해. 이런 도시라면 정말로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거다.”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고 랜디는 씩 웃었다.

“다 죽여버려도 모조리 나쁜놈이니 이거보다 좋은게 어디있냐 말이다.”

그 말에 아라는 즐거움 없이 웃음을 지어 고른 이를 드러냈고, 크세노바는 수긍하는 기색으로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러지 않길 바라네.”

지카리가 타이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야.”

거리가 넓어지면서 그들은 탁 트인 공간으로 나왔다. 사방에는 큰 저택에서 움막까지 건물이 하늘의 가장자리에 들쭉날쭉한 윤곽을
그렸고, 서로 짝이 안 맞는 포장석을 대충 깔아놓은 땅 위에는 좌판과 수레를 펼쳐놓고 상인들이 냄비에서 음식과 무기까지 안 파는
것이 없었다. 그 혼잡 한가운데 돌로 주변을 쌓아놓고 도르레에 두레박을 매단 우물이 보였다.

“여기다.”

랜돌프가 말하는데 광장 저쪽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나무 단상 앞에 사람이 우글우글 몰려있는 곳에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전류처럼
흘렀다.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말하면서 크세노바가 이끌리듯 다가가자 랜돌프도 그의 뒤를 따랐다.

“노래꾼인가?”

누가 단상 위에 서서 뭔가 열심히 말하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모습을 보고 랜돌프가 중얼거렸다. 인파를 헤치고 다가가면서
단상에 선 남자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자자! 이번에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상품을 소개합니다!”

단상에 가까워오면서 남자의 발치에 자그마한 형체가 보였다. 사슬이 짤랑거리면서 햇살에 빛났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려 그 희귀하다는…”

상인의 발치에 주저앉은 아이가 눈에 들어오자 아라는 눈이 커지면서 순간 숨을 멈추었다.

“엘프 소녀!!”

몰려든 인파는 그 말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함성을, 승리감과 욕망과 기대감의 뜨거운 열기를 프리포트의 하늘로 올려보냈다.
발목에 사슬을 찬 채 상인의 발치에 무릎 꿇은 소녀는 인간 기준으로는 12, 13세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아이처럼 가늘고 여린
몸에는 여인의 곡선이 갓 피어나기 시작했고, 멍하고 창백한 얼굴은 의욕이나 희망 같은 것이 남아있었더라면 겁에 질려있었을 것이다.

“비싸게 팔리겠군.”

시끄러운 와중에 랜돌프는 팔짱을 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잘 알겠구나.”

무표정하게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아라는 중얼거렸다. 옆에서 지카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인파의 머리를 넘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려 놀랍게도 처녀!”

그 열기에 대고 상인은 침까지 튀겨가며 열심히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니라면 책임지고 사후보상까지 해드립니다!”

“만약 저 아이가 팔려가면 어떻게 될까…?”

주변을 두른 소음의 벽 속에서 지카리는 혼잣말하듯 나지막히 물었다. 소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라는 작게 몸을 떨었다.

“비싸게 샀으니 아마 죽여버리거나 노역을 시키진 않을 거다.”

랜돌프는 단상과 관중을 냉정한 시선으로 경계하며 대답했다.

“자 그럼 2천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상인의 말에 대번에 누군가가 손을 들며 외쳤다.

“6천!”

그 말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서 아라는 뭔가 누르고 또 누르듯 이를 악물며 단상을 노려보다가 순간
동공이 확장하더니 눈빛이 변했다. 작은 미소를 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단상 위의 소녀를 보고는 손을 들며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샤나!”

높은 목소리에 랜돌프는 눈을 부릅뜨며 시선을 돌렸다. 크세노바가 헉.. 숨을 들이키는 동안 지카리도 아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샤나! 샤나 여기봐!”

즐겁게 손을 흔들면서 아라는 단상을 향해 일파를 밀치고 사람 사이로 빠져나갔다.

“지카리! 잡아!”

랜돌프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카리는 급히 팔을 뻗었지만 미처 닿기 전에 아라는 벌써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카리는
따라가려는 듯 걸음을 옮겼지만, 아라가 쉽게 헤치고 지나간 군중은 그의 덩치에는 무리였다.

그 순간 군중 중 한 명이 움직이더니 아라를 뒤에서 붙잡아서 입을 막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아라는 발버둥을 쳤지만, 주변의 소란
와중에 별로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 랜돌프와 지카리, 크세노바는 사람 사이를 헤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라를 붙잡은
남자가 몇 발짝 걸음을 옮겨 한켠의 벽에 몸을 붙이는 동안 지카리의 넓은 등짝이 그들을 군중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었다. 크세노바는
아라와 단상 사이를 막아서며 그녀의 시야를 차단했다.

“당신인가?”

랜돌프는 목소리를 낮추며 날카롭게 물었다. 사내는 아라의 머리 위로 그들을 마주보았다. 마른 몸에 움푹 들어간 예리한 눈,
두드러지는 매부리코와 광대뼈가 눈에 띄는 그는 입을 열었다.

“까마귀입니다. 여러분은?”

“비둘기다.”

사내가 몸에 긴장을 푸는 동안 아라는 흠칫 놀라더니 눈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남자의 손을 잡아내리며 몸을
떼자 그는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지카리가 그런 그녀를 미심쩍게 보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여러분이 올 거라곤 들었지만, 바로 행동에 나서주실 줄은 몰랐군요.”

그는 아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상 위의 소녀를 흘깃 보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잠깐.”

지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아이가 팔려가면 어떻게 되는가?”

“첩이 될 거다.”

랜돌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카리는 그런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비싸게 산 물건은 막 다루지 않는 법이지.”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노예에 비해서 살기는 괜찮을 거다. 움직여.”

“괜찮다…라.”

아라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먼 곳을 보는 시선이 되면서 쓰게 웃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좋지 않습니다.”

예리한 눈빛의 사내는 주변을 살폈다.

“따라오시죠.”

사내가 인파를 헤치며 단상에서 멀어지고 랜돌프가 그를 따라가는 동안 지카리는 엘프 소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라는 그런 그에게
낮게 말했다.

“가십시다, 지카리공. 저들이 뭔가 계획이 있는 듯도 합니다.”

“우선은… 가지.”

소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겁게 걸음을 옮기자 아라는 단상에 일부러 등을 돌리고 도망치듯
걸어갔고, 크세노바는 뭔가 털어버리듯 고개를 젓고 그녀를 따랐다.

소감

지난 2화의 상당부분이 그랬듯 3화 첫 부분도 삭풍님의 짧은 서술을 자세하게 풀어쓴 예입니다. 3화에는 이런 완전 창작은 첫부분 빼고는 얼마 없지만요. 주인공들의 대사와 행동을 다 만들어야 해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별다른 지적은 없어서 일단은 인물 표현이 괜찮은 걸로 보고 공개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화는 프리포트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플레이 때부터 삭풍님이 무질서하고 비정한 분위기를 잘 잡아주셨고, 그걸 조금 더 확장하기만 하니 글이 나오더군요. 배경 자체가 인물처럼 개성이 뚜렷한 느낌이라 마음에 듭니다. 대강의 큰 줄기는 제가 설정한 곳이기도 해서 더 정이 가는 걸지도요. 프리포트는 여러모로 별일이 다(..) 생길 만한 곳이고, 실제로도 앞으로 보시면 (혹은 로그를 보시면) 알겠지만 별일이 다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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