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3화 (2): 제임스의 집

광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길이 급격히 좁아지고 갈라지면서 생겨난 복잡한 골목길을 몇 번 돌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골목 옆쪽
벽을 이룬 집의 나무문을 사내가 두드리고 뭔가 중얼거리자 문이 끼익.. 열렸다.

“들어오시죠.”

남자가 손짓하자 랜돌프는 주변을 경계하며 슥 들어갔고, 나머지 일행도 따라들어갔다.

안의 집은 작은 창에 휘장을 쳐놓아서 어둑했고, 밖에 비해 차가운 공기에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지막한 천장에 별로 크지
않은 방 가운데에는 탁자와 의자가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 벽의 먼 구석에는 문간과 그 너머에 어디론가
이어지는 그늘진 통로가 눈에 띄었다. 통로에서는 희미하게 불쾌한 냄새가 섞인 찬바람이 불며 방안의 공기를 미약하게 저었다.

“일단 여러분.”

일행 뒤로 따라들어와 문을 닫으며 요원이 말했다.

“이 도시에서 노예가 어떻느니 하는 애기는 최대한 자제해주십시오.”

“주의하지.”

랜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곳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사내는 말을 흐렸다. 아라는 금방 도망이라도 칠 듯 팔짱을 끼고 문앞에 서서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사내는 입을 얇게 다물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여러분의 목숨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너희 노스탤지아야말로 어째서 이런 일들을 묵과하는 것이지?”

억눌렀던 것이 터져나오듯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하는 아라의 눈이 차가운 빛을 냈다.

“진정 안힐라스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라면 어떻게 저들을 외면할 수가 있는가.”

“제기랄, 손댈 힘이 없으니까. 그걸 말로 해야 하나?”

랜돌프는 답답한 숨을 짧게 내뱉었다.

“한 놈 두 놈 끌려가는 노예들을 구조하는 건 좋다고 치자.”

그는 성큼성큼 의자 하나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럴 때마다 요원이 한둘씩 죽어나가면 노스탤지어로서는 참 수지맞는 장사겠군그래.”

“너야 아무렇지도 않겠지.”

아라는 내뱉듯 말했다.

“노예 첩의 생활이 괜찮다고 표현할 수 있는 놈이라면.”

랜돌프를 보며 그녀는 이를 드러냈다.

“아니, 바로 그들을 전문적으로 팔아넘기던 너라면.”

랜돌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 그 엘프 소녀에 대해서는…”

요원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저희들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끌려온 건지, 어떤 신원의 아이인지 저희도 궁금해하고 있죠.”

요원이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자 지카리와 크세노바가 가서 앉는 동안 아라는 출입문 오른쪽 벽에 기대선 채 팔짱을 꼈다.

“저희는 그 아이가 도시밖으로 이송될 때를 노릴 겁니다.”

사내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저희들의 일이겠죠. 여러분은 따로 임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행을 보는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흑마법사다.”

무릎에 다른쪽 발목을 올리면서 랜돌프는 이를 갈았다.

“그 개새끼가 여기 있는 게 확실한가?”

그말에 남자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제가 들어야 할 것 이상이로군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나무바닥을 드륵.. 긁었다.

“책임자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방 구석의 통로로 걸어들어가 사라졌다. 이내 발걸음이 살짝 울리며 멀어져갔다.

“정보를 분산하는군. 좋은 생각이다.”

벽에 기대어선 아라는 허리에서 짧고 날씬한 칼을 뽑아 돌리면서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야 누구 한 명이 끌려가서 고문당해도 피해가 제한적이니.”

랜돌프는 단검을 뽑으며 통로 옆의 벽에 몸을 붙였다. 그런 그에게 아라는 흘깃 시선을 던졌다.

“저놈이 뭘 데리고 올지 알 수가 없어.”

랜돌프는 통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선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

그 말에 아라는 랜돌프를 곁눈으로 보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침묵 속에서 지카리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여태까지 가봤던 곳 중에 가장 불쾌한 곳이군…”

아라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인간 도시에는 아마도 처음이시겠지요.”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간들의 도시가 이렇지는 않길 바라네.”

“적어도 안힐라스에서는 좀 무리일 것 같군요.”

크세노바가 한숨을 쉬었다.

“이곳보다 정돈된 곳이라고 덜하지는 않습니다.”

아라도 덧붙였다.

“동쪽에 뉴 임페리얼은…”

무심코 말하다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통로를 따라 발걸음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허허허, 이거 손님들이 벌써 오셨군요.”

호탕한 웃음소리가 통로에 울리더니 인간 남자 하나가 방안으로 걸어나왔다. 중키에 넉넉한 체구인 그는 벗겨진 머리에 눈가에는
웃음자국인 듯 주름이 지고 주먹코 밑에는 두터운 입술이 싱글벙글 웃음짓고 있었다. 둥근 배는 입은 앞치마를 밀어내며 불룩 나와있었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마치 요리하다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앞치마에 묻은 선혈은 무슨 요리인지 심각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라는 칼을 느슨하게 쥔 채 그를 흥미롭게 보았다.

“으음…?”

크세노바의 시선에 앞치마 입은 남자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거 실례. 취미생활을 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는 자신의 배를 철썩 쳐 뱃살을 튕겼다.

“고기라도 손질하시던 모양입니다?”

크세노바가 묻자 뚱뚱한 남자는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기죠. 물론 살아있는 사람고기긴 합니다만.”

그말에 랜돌프는 눈을 치켜뜨며 단검을 쳐들었다. 막 악수하려고 장갑을 벗으며 크세노바에게 다가가던 사람고기 요리사는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고 양손을 쳐들며 움츠러들었다.

“걱정마라, 다사케타.”

아라는 재밌다는 듯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손안에 칼을 돌렸다.

“네 고기는 아무도 안 먹을 테니.”

“설마 농담이시겠죠.”

질린 표정으로 랜돌프를 보며 크세노바가 말했다.

“어허허, 좀 진정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다 같은 편인데.”

뚱뚱한 남자는 애써 웃어보였다. 벗겨진 머리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장난은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어둑한 조명 속에 랜돌프가 씨익 웃자 그의 이빨과 눈 흰자가 희번득거렸다.

“목이 날아가고 싶진 않겠지. 나에겐 별 의미 없지만 당신에겐 소중한 물건일 것 아닌가?”

“바쁜 게 아니라면 복식 좀 차리고 다니시죠.”

크세노바는 남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저런 양반에게 칼 맞으면 어디가서 하소연이라도 하겠습니까.”

“허허허…”

그 말에 중년의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사냥개에게 죽었다가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지.”

벽에 기댄 아라가 맞장구쳤다.
크세노바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일 이야기나 하죠.”

랜돌프는 피식 웃으며 칼을 집어넣고 의자로 걸어가더니, 다리를 크게 벌린 채 의자에서 반쯤 흘러내린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전 제임스입니다.”

남자는 랜돌프를 불안하게 흘끔거리며 웃었다.

“경황중이라 죄송하게 되었군요.”

그가 앞치마를 옆의 벽에 튀어나온 못에 걸자 묻은 피가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다시 통로에서 조용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사람이 또 하나 걸어나왔다. 칠흑처럼 유난히 검은 피부에 흰 머리, 뾰족하고 긴 귀와 마르면서 강인한 체격의 여인은 통로 문간에서 날카롭고 묵묵한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같은 다크엘프를 보고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지만, 여인은 그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라가 입을 열자 흐르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그 흐름이 가끔 거친 파열음에 끊어지는 말이 나왔다. 다크엘프는 그녀의 말에 쳐다는
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서 둘을 번갈아 보다가 제임스가 말했다.

“이쪽은 콰…켈….뭐였더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 친구 말을 못합니다, 아가씨.”

아라의 의아한 시선에 그는 부연했다.

“오래전에 충격을 받을만한 일이 있어서 말을 잃었다더군요.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만. 허허..”

제임스가 의자에 주저앉자 의자는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갑자기 그는 머리를 탁 쳤다.

“아 그래. 이름이 켈냐였지!”

그 이름에 아라는 시선이 바로 여인에게 못박혔다. 손에서 힘이 풀렸는지 들고 있던 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켈냐…”

랜돌프가 한쪽 눈썹을 꿈틀하는 사이 제임스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허허?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라는 켈냐라는 여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다시 그 파열음과 부드러운 흐름이 교차하는 언어로 말을 걸었다. 켈냐는 무심한 시선이
잠시 아라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외면했다. 살짝 목례한 아라는 다시 벽에 기대며 일행을 마주했다. 제임스는 헛기침을 하며 크세노바를
돌아보았다.

“감동의 재회가 원래 이런 겁니까?”

“감동도 주변환경이 받쳐줘야 그림이 나오죠.”

크세노바는 한심하다는 듯 제임스의 피묻은 장갑과 옷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마법사 말대로 일 얘기를 하자꾸나.”

아라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켈냐는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돌아서서 다시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고,
아라는 일부러 통로에 눈길을 주지 않고 명령하듯 말했다.

“사람 고기 정육은 다 했다면 흑마법사 이야기를 하도록.”

“아, 그렇죠. 흑마법사 얘기 말입니까.”

제임스는 손을 깍지껴 넉넉한 배 위에 얹으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저희도 상부에서 얘기를 듣기 전에는 단순히 소문으로 치부했던 정도라 그게…”

그는 벗겨진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전문을 받은 뒤에 그제서야 그 소문들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단 사실을 알았죠, 흠흠.”

“뭐라도 좋다.”

랜돌프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그 개새끼에 관한 이야기라면 뜬구름잡는 작은 소문이어도 좋아.”

“경망떨지 말거라.”

아라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조사한 결과는 어떠한가?”

제임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혀서 칼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칼날을 어루만지면서 그를 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자가 이 도시에 있는가?”

“저희쪽도 손이 부족해 조사는 많이 못했지만, 그 자라면 그 그…”

“멜코 생고로드림.”

아라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아 그랬지, 그랬소. 멜코르 상고로드림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면…”

제임스는 아라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모르겠소.”

“뭐?”

아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도시에 있다는 풍문이 맞긴 한가?”

랜디가 캐물었다.

“흑마법사들이 있다는건 신빙성 높은 얘기요.”

제임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노예들이 정기적으로 어디론가 팔려가 소식이 끊긴다거나, 로브 입은 자들이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소문이 있소.”

“그렇다면 그의 제자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라는 손에 든 검에 시선을 떨구었다.

“됐다. 그럼 잡을수 있어.”

랜돌프는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앉았다.

“어디 있는지도 특정해낼 수 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툭 던지듯 물었다.

“아는 노예상인 있나?”

“노예상인은 아니지만 유명인사 한 명…”

제임스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당장 코앞의 ‘아는’ 노예상인이 하나 있는데 어디로 하시겠소?”

“둘다 얘기하거라.”

아라가 말했다.

“선택은 우리가 하지.”

“그럼 일단 따라오시오.”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은 현재진행형으로 정보를 캐내고 있던 중이었으니 말이오.”

“설마…”

제임스가 피묻은 앞치마를 집어드는 것을 보며 아라는 눈쌀을 찌푸렸다.

“말했잖소.”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코앞에 ‘아는’ 노예상인이 있다고 말이오.”

“노예상인… 그렇다면 조금은 낫다만.”

그러나 아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제임스가 앞치마를 집어들고 통로 안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랜돌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나서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라갔고, 크세노바와 지카리가 뒤를 따랐다. 몇 발짝 들어가 제임스는 방에서 흘러드는 약한 빛에 의지해
벽감에 세워둔 초에 불을 켠 후 촛대째 집어들고 앞장섰다.

촛불빛에 흔들리는 통로는 들어갈 수록 더욱 춥고 습해졌고, 곰팡이와 쥐, 그리고 그 이상으로 뭔가 불길한 냄새가 났다. 제임스가
문득 멈춰서며 걸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그가 높이 쳐든 촛불과 은은히 빛나며 내려가는 그의 대머리에 의지해 일행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일렬로 천천히 내려갔다.

거의 내려와 눈앞에 묵직한 떡갈나무 문이 어둑한 조명 속에 드러난 순간, 정면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공기를 갈랐다. 문 때문에
소리는 귀를 막고 듣는 듯 작았지만 그 완전하고 통제 없는 공포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라는 축축한 벽에 손을 대며 흠칫
멈춰섰고, 그녀의 뒤로 따라오던 크세노바도 멈춰야 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제임스는 촛대를 다른 벽감에 얹어놓더니 휘파람을 불며 피묻은 앞치마를 걸쳤다. 아라 뒤편에서 크세노바는 축축한
지하실을 둘러보며 청소세탁 주문이라도 배울 걸 그랬다고 중얼거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아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나왔다.

“저런 치들은 돈만 몇 푼 쥐어주어도 입을 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물론 그렇기도 하오만…”

제임스는 태연히 장갑을 당겨 고정시켰다.

“가끔 도를 넘는 인간말종들은 손을 봐줘야 하지 않겠소.”

아라가 딱히 대답을 못하는 동안 제임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습기에 경첩이 녹슬었는지 문이 불평하듯 신음하며 열리자 피비린내가
통로에까지 확 끼쳐왔다. 벽에 타닥거리는 횃불빛 속에 문 반대편 벽에는 상처가 몇 개인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짓무른 상처와 선혈과
피딱지 투성이인, 평범한 체격에 둥근 얼굴의 남자가 반라 상태로 십자형 틀에 묶여 있었다. 기절한 듯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그의 한쪽 다리는 부러진 듯 기묘한 각도로 꺾였고, 힘겨운 숨소리는 액체가 걸리는 듯 그륵거리며 방안에 울렸다. 그 앞에는 끝이
붉게 빛나는 인두를 든 켈냐가 서있었다. 그녀 옆에는 화로에 달군 석탄이 창을 맞은 짐승처럼 인두 두어 개를 꽂은 채 벌겋게 무딘
빛을 품었다.

랜돌프는 길게 휘파람을 불더니 제임스를 따라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먹음직하게 요리되고 있는 걸?”

”…이 도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 만하군요.”

희미한 조명 속에 크세노바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아라를 지나 감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뒤에 지카리가 돌처럼 굳어있는
동안 아라는 크게 부릅뜬 눈을 그 광경에서 떼지 못했다.

제임스가 바닥에서 물동이를 하나 들어 포로의 얼굴에 확 끼얹자 그는 간신히 눈꺼풀만 움찔거렸다.

“어이 친구.”

제임스가 그런 포로의 뺨을 장갑낀 손으로 툭툭 치자 그는 눈을 퍼뜩 뜨며 놀랐다. 절박한 시선은 감방을 한 번 둘러보고 다시
체념에 잠겼다.

“이분들이 흑마법사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게 있는데 말이야.”

제임스는 장갑낀 손의 손마디를 두둑거렸다.

“자네 그쪽에도 납품한 적이 있지?”

“으으으…”

남자는 피투성이로 뭉개진 얼굴에 눈만 희번득거리며 피투성이 입을 열었다.

“흐마법사… 모라…”

“모른다고?”

제임스가 부드럽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퍼뜩 놀라더니 고개를 마구 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냈다. 이윽고 그 속에서
‘로브! 로브!’ 하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로브를 입었다고?”

서두르는 기색 없는 제임스의 말에 남자는 살았다는 듯 끄덕이며 간신히 진정했다.

“여자… 로브…”

포로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거애거… 거… 거래하자고…”

제임스가 달래고 협박해가며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는 한참 걸렸지만, 로브 입은 여자가 제안해온 거래대로 정기적으로 항구 근처의
창고에 노예들을 갖다놓으면 다음날 노예는 없고 대금만 남아있더라는 얘기를 마침내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랜돌프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납품받을 리가 없겠지.”

그는 문간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들어온 노예들 가운데서도 페어리들이 있었다. 그 창고…”

그는 바깥쪽으로 턱짓을 했다.

“오늘도 체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같은 업자인지 어떻게 아느냐.”

포로를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 있는 아라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음 아뇨. 일리가 있습니다. 흑마법사니까요.”

크세노바가 말했다.

“어떻게든 페어리들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가 잠시 뭔가 중얼거리자 공중에 희미하게 빛나는 기하학적 문양이 나타났다.

“이걸 본 적이 있습니까?”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문양을 보다가 노예상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얼굴을 들이댔다.

“어디서 봤냐?”

노예상이 뭐라고 더듬거리자 제임스는 무심히 주먹을 날렸고, 노예상은 고개가 휙 돌아가면서 공중에 핏방울을 날렸다. 아라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봤냐니까 이 친구가…”

포로가 쉴새없이 더듬더듬, 횡설수설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 로브 입은 여자의 손등에서 문양을 보았다고 했다.

“으음… 도제인가.”

크세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한쪽 팔을 넉넉한 배에 가로질러 얹은 채 다른 손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는 건 어떻소?”

“칼로 데 로씨?”

문간에 서서 아라가 되물었다.

“이 도시의 유명한 양반이지. 노스텔지아 소속은 아니오만…”

제임스는 턱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손짓했다.

“우리가 노예 구출하는 데 가끔씩 도움을 주는 고마운 양반이오.”

그는 양쪽 팔을 배 위에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왕초나 다름없으니 흑마법사들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원한다면 만남을 주선해 주겠소만.”

“칼로 데 로씨라고?”

랜돌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거기 갔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별로 가고싶지 않군.”

“만나보는 게 좋겠구나.”

랜돌프를 흘깃 보고 아라는 엷게 미소지었다.

“제기랄… 그놈에게 걸려서 횡사한 노예사냥꾼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다는 풍문이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너야 괜찮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유능하니.”

아라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역시 겁이 나는 것이냐?”

“뭐 소문일 뿐이긴 하지.”

랜돌프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도 실제로 보거나, 그놈에게 당한 자를 만나본 적은 없어.”

노예상에게 창고번호와 납기일을 알아낸 제임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몸을 돌렸다.

“다음 납기일은 5일 후라고 하는군. 창고번호는 적어주겠소.”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마법사를 수소문하면서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자.”

나머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후 그녀는 돌아섰다.

“나는 나가야겠다. 이 냄새는 짜증이 나는구나.”

아라는 지카리가 비켜주는 틈새로 빠져나가더니 벽감의 촛대를 건드리지 않고 층계를 올라갔다. 표정 없이 방안을 한 번 보고는
지카리도 돌아서서 그녀를 따랐다.

“그럼 나머지도 부탁합니다, 제임스.”

다시 정신을 잃은 듯한 노예상을 불편하게 보고 크세노바는 벽감의 촛대를 들고 올라갔다. 랜돌프는 씩 웃고는 촛불빛을 따라갔다.
뒤로는 다크엘프 여인 켈냐가 문을 밀어 닫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횃불과 석탄의 붉은 빛이 사라졌다.

지상의 방은 통로에 비해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아라는 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지카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살짝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버텨주었다.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라는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지카리공.”

”…이곳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네.”

지카리는 탁자 위에 깍지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아라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피곤하게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 제임스라는 자도 우리가 쫓는 자와 다를 바는 없지 않겠는가?”

“유쾌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작자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달래듯 말했다. 그때 통로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크세노바와 랜돌프가 들어왔다.

“웃기는군.”

랜돌프는 툭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서 의자를 조금 물렸다. 크세노바는 그런 둘을 보고
한숨을 쉬며 남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럼 노스탤지어랑 인간놈들은 다를게 뭐지?”

지카리가 그런 랜돌프를 흥미롭게 보는 동안 랜돌프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사엔 옳고 그름이 없어. 각자의 입장이 있을 뿐이지.”

노예사냥꾼은 단검을 슥 꺼내 날을 따라 빛이 흐르도록 기울였다.

“노스탤지어는 옳고, 인간놈들은 틀리다는거냐? 난 그렇게 생각 안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지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은 정의의 사도니 옳은편에 서있다느니…”

단검날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시 보다가 랜돌프는 칼을 집어넣었다.

“그런 생각인 거 같은데 그거 웃긴다고.”

“그러면 너는?”

지카리가 미소짓는 동안 아라는 받아쳤다.

“나? 나는 살기 위해 움직인다. 간단하잖아?”

의자를 뒤로 까딱 젖히며 랜돌프는 삐딱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놈들은 그게 깨지면 아무것도 못해.”

“그렇다면 페어리의 작은 목숨을 위해 열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라는 왼손을 느슨하게 주먹쥐어 탁자에 얹고 오른팔은 의자 팔걸이에 걸친 채 그런 랜돌프를 쏘아보았다.

“페어리를 위하는 것은 너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랜돌프는 젖혔던 의자 앞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아라는 바로 말을 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엘프 여자들을 납치해서 강간하고 팔아넘겼다고 할 테냐?”

탁자에 얹은 그녀의 왼손은 점점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이전에는 늘 굶었느냐, 다사케타?”

“아니. 뭐 뒷골목에서 썩은음식을 가지고 죽고 죽이고 했지만…”

뭔가 떨쳐버리듯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럭저럭 살아갈 수야 있었지.”

“결국 너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 것 아니느냐.”

“그렇다. 그래서?”

랜돌프는 피식 웃었다.

“그러므로, 너같은 놈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짓은 안할 테니 우리에게 설교하지도 말거라.”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반쯤 일어섰다.

“노예는 노예답게 입 다물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아라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아니면 죽거나.”

두 사람이 똑바로 마주보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랜돌프가 입을 열었다.

“난 노스탤지어 놈들이 마음에 들어.”

아라와 시선을 맞춘 채 그는 히죽 웃음지었다.

“점점 더 그렇군.”

아라는 음식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의자를 거칠게 밀치며 일어섰다. 문 옆의 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가 기대서는 동안 지카리가 말했다.

“랜돌프.”

“왜?”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네.”

지카리의 눈빛은 슬프면서도 따뜻했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저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일은 막으려고 할 뿐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랜돌프는 표정 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자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네. 옳고 그름이나 이유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래, 비슷하지.”

랜돌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옳네 그르네 까불지 말고 날 막고 싶으면 힘으로 찍어눌러보라는 거다.”

그는 지카리보다도 방 건너편에 있는 아라에게 말하듯 언성을 높였다. 아라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 팔짱을 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통로에서 가벼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제임스가 아닌 켈냐가 방으로 나오더니 종이쪽지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세 남자는 일제히
쪽지를 들여다보았지만, 지카리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났고 랜돌프는 대충 훑어보고는 뒤로 등을 털썩 기댔다. 크세노바는
쪽지를 보며 말했다.

“제임스씨의 손님은 이번에 페어리 거래는 안하는 모양이지만, 거래하는 곳 정보는 있군요.”

그는 가늘고 흰 손을 뻗어 다른 종이를 들추었다.

“이쪽은 칼로 데 로씨에게 주는 소개장입니다.”

“그러면 시장에 나가보자꾸나.”

아라는 벽에서 떨어져서 바로 섰다.

“마법사도 있으니 마정석 재료를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크세노바를 무표정하게 보았다.

“뭐 저 혼자 만들수도 없는 거긴 하지만..”

크세노바는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보는 것도 좋겠죠.”

“움직여볼까 그럼…”

랜돌프가 포식자의 느긋한 우아함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조용히 있던 켈냐가 움직여 문가의 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는 그런 그녀를
궁금하게, 조금은 경계하며 보았다.

아라 앞에 선 켈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아라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었다. 아라는 놀라서 잠시 굳었다가 그들의 모국어로
안쓰럽게 뭔가 말하며 켈냐를 일으키려 했다. 켈냐는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내 아라의 손에 쥐어주고는 일어서서 정중히
목례했다. 멍해진 아라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켈냐는 다시 통로를 따라 사라져 있었다.

“먼저 가보거라.”

아라는 손에 쥔 목걸이를 내려다보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동료들이 나가는 동안 그녀는 목걸이에 소중하게 입맞추고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추었다. 그녀가 탁자에 앉아 빈 종이와 깃털펜을 집어드는 모습을 돌아보고 랜돌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등뒤로 문을 닫았다.

소감

이 부분은 플레이 중에 프리포트라는 도시의 분위기, 그리고 이 싸움 속의 부조리하고 역설적인 상황이 잘 드러난 대목이었죠. 고문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이 하나하나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 랜디와 아라는 싸우는 척(?) 하면서 서로 꼬시는 것 같은 인상이(..) 이방인님하고 논의한 결과 이런 암시는 나중에 둘의 관계를 통해 살려보기로 했죠. 아라 입장에서는 이 도시에 온 이래 내내 어쩔 줄 모르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일거에 정리가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갈등은 있겠지만요.

인물 표현을 묘사를 통해 해보려고 나름 외부 관찰자 시점을 사용했는데, 이 관찰자는 인간 언어만 알고 다크엘프어는 모르는 모양입니다. 약간 전지적인 느낌도 있는 등 애매한 시점이었지만 표현하려는 바는 그럭저럭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 졸린 관계로(..) 나머지는 내일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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