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2화 (1):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지난주 플레이한 이오닉스 2화입니다. 첫 부분인 ‘마법사의 표식’은 짧기도 하고 서로 내용이 바로 이어지므로 그냥 앞에 붙여서 같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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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표식

동굴 벽을 따라 걸어놓은 횃불이 눈에 연기를 날리면서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발밑에는 더러운 천조각과 썩은내가 나는 고기, 어느
생물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긴 뼈가 채였다. 발끝이 우그러진 채 버려진 갑옷 조각에 닿아 큰 소리를 내려는 찰나 아스타틴은
조마조마하게 발을 빼서 비교적 물건이 없는 데다가 다시 딛었다. 여기저기서 주워온 (혹은 훔쳐온) 듯 짝이 맞지 않는 탁자와 의자
등 잡다한 가구를 조심조심 돌아가야 했다.

이 잡다한 쓰레기에 뒤섞여 벽에는 보랏빛 휘장이 쭉 걸려 있었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걸어둔 횃불 외에 가끔 가구나 바위, 동굴의
자연적 선반 위에 켜둔 촛불은 휘장마다 가득 수놓은 무늬를 비추었다. 무늬는 그림도, 적어도 아스타틴이 아는 어떤 언어의 문자도
아니었고 추상이나 기하학 문양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어딘가 기분이 나빠졌다.

동굴은 천장은 그닥 높지 않았지만 예닐곱 명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너비였으므로1) 그들은 거의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조금 앞선 채 크세노바가 한 발짝쯤 뒤에서 그의 오른편으로 따라왔고, 니아는 크세노바의 머리카락 끝을 한 움큼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쫓아왔다. 다시 그 오른편에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고 있는 지카리 쿤 카타의 조심스럽지만
하나하나 보폭이 큰 걸음은 돌바닥에 깊고 낮은, 소리없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아스타틴의 앞편으로 조금 나선 크세노바는 벽에 붙어서서 휘장을 조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흠, 이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침묵을 깨며 동굴의 공기를 흔들었다. 뭔가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는 멈춰서서 휘장 하나를 살피며 밀빛
눈썹을 찌푸렸다.

“흑마법사들의 표시 같은데요.”

“흑마법사…?”

아스타틴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어차피 인간 마법사들이란 안힐라스 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고 사람을 잡아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따로 흑마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단 말인가.

“인간 마법사들은 다 같은 거 아닌가요?”

“멜코르 상고로드림, 인체실험을 자행하던 악질입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크세노바는 조용히 말했다. 인체 실험… 그 말은 뭔가 불길한 울림을 만들며 어둑한 공간에 울렸다. 아스타틴은
갑자기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보통 악마의 힘을 빌리죠.”

일행의 발걸음이 동굴 안에 울리면서 그들은 점점 깊이 들어갔다. 통로가 약간씩 좁아지면서 발걸음은 더욱 울렸다.

“이들 문양은 그자의 표식입니다. 안힐라스로 도망쳤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횃불을 설치한 구간이 거의 끝나가면서 깊어가는 어둠 속, 앞서가는 크세노바의 목소리는 마치 말하는 사람 없이 허공에서 나오는
듯 그림자 속에서 울려나왔다.

“그 강력한 마법사가 죽었다거나 원혼이 본토에 남아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보다는 도망쳤다는 설이 신뢰성이 있었죠.”

거의 완전한 어둠 속에 그들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쓰레기는 더 발에 채이지 않았고, 균형을 잡으려고 벽을 만지자
휘장의 부드럽고 묘하게 차가운 감촉이 손에 와닿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손을 떼었다. 인체실험… 어쩌면 다른 인간
마법사보다 심한 마법사도 있기는 있는 걸까. 일단 크세노바는 특별히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는 또 모를 일이었지만.

몇 걸음 더 옮기자 앞에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누군가 언성을 높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빛 속에 니아가 휘장을 한 손으로
쓸며 크세노바를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크세노바가 조용히 멈춰서며 말했다.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군.”

앞에서 들려오는 고함은 역정이 나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니아가 살금살금 빛이 비쳐오는 통로 끝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도 소리죽여 그녀를 쫓아갔다.

”..이 …새끼들아! 뒤를 밟혔다고?!”

빛이 흘러나오는 곳까지 닿기도 전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내용은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통로가 살짝 꺾이는 지점 너머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오크들의 거친 억양과는 전혀 달랐고, 언어는 공통어였다. 니아는 벽을 감싸안듯 몸을 붙인 채 꺾인 통로 너머를
빼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녀 옆에 몸을 붙이며 머리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네놈들은 대가리가 처 비었나! 박치기하는데만 머리를 쓰지말고 좀 생각을 하는데 쓰란 말이다!”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갈색 로브를 입은 사내였다. 그 앞에는 오크가 10여 마리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오크들의 시선은 그들을 비스듬히 벗어나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해진 아스타틴은
숨을 죽이며 더욱 벽에 바짝 붙었다.

“이대로서야 스승님께 바칠 선물이…에에이!!!”

스승님… 이곳에는 멜코르 상고로드림의 문양… 마법사 로브를 입은 사내…

직감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아스타틴은 속이 차가워졌다. 그 흑마법사의 제자도 하나하나 그렇게 강력하다면 멜코 상고로드림의
흔적들은 그저 우연이기를 빌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원래 가져가려고 했던 날개뿐만 아니라 진귀한 패달랭이꽃 급의 페어리까지 구해서 스승님의 총애를 듬뿍 받나 했더니 네놈들이
뒷처리를!!”

단번에 거의 숨도 안 쉬고 소리지른 말에 아스타틴은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뱃속의 차가운 감촉은 점점 뜨거운 분노가
되어갔다. 역시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페어리 날개를 가져오고 므우루를 납치한 것은 이 일당이었다. 폭발로 크게 구덩이가
패인 채 불타는 페어리 꽃밭을 생각하자 두려움은 더 설 자리가 없었다.

“제길 이럴줄 알았으면 쿠라 놈이랑 헤어지는게 아닌데!”

마법사가 분에 못이겨 옆에 의자를 걷어차자 의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천천히 돌아보며 니아는 그에게 윙크하더니
조심스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가 상황을 동료들에게 전할 테니 아스타틴은 조금 더 엿듣기로 했다.

제풀에 지쳐 식식거리던 마법사가 홱 돌아보자 아스타틴은 움찔하며 통로쪽으로 움츠러들었다. 갸름하고 마른 얼굴에 마법사의 눈빛은
차갑고 밝았다.

“가만…왜 추적자들을 잡으러 보낸 놈들이 소식이 없지?”

아스타틴이 동굴 입구에 널부러져 있을 시체들을 떠올리는 동안 흑마법사는 오크 두 마리를 가리켰다.

“너하고 너! 가서 확인해봐라.”

뭐라고 킁킁거리며 오크 둘이 칼과 창을 집어들고 아스타틴이 있는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마법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방 가운데 탁자에 있는 수정구로 향했다.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그 말에 귀기울이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만…혹시 일이 잘못될때를 대비해…지원을 요청해야지…제길 빚을 지곤 싶지 않지만…”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과 금속 부딪는 소리가 철컥철컥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쯤 달려가서 일행과
합류할까 생각하는 순간, 오크 두 마리가 통로가 꺾인 데를 돌아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스타틴과 떡하니 마주친 오크들은 순간 멍청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한 마리가 엄니가 비져나온 입을 벌렸다.

“Rakuna dasha!”

아스타틴을 뚫어져라 보던 나머지 하나도 생각난 듯 그 고함에 호응했다.

“Rakuna!”

두 오크의 고함과 그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쫓기듯 아스타틴은 동료들을 향해 통로를 달려내려갔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통로를 가득 차지한 채 돌진하는, 몸에 단 뼈를 덜그덕거리며 우뢰처럼 고함을 지르는 거대한
형체가… 마치 그 분노에 응답하듯 달리는 궤적에 맞추어 벽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깔려버린다. 살해당한다. 죽는다. 순간 그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오크의 노성이—혹은 공포의 비명이?—들려오자
눈앞이 맑아졌다. 아, 지카리! 지카리가 오크를 위협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멈춰선 동안 지카리는 마치 먹이를 내려다보는
포식자 같았지만 아마도 눈인사인 시선을 보내며 그대로 땅을 쿵쿵쿵 울리며 지나갔다. 지카리를 보고 좀전의 자신만큼이나 멍해진
오크들을 돌아서서 마주보며 아스타틴은 봉을 잡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니아와 크세노바, 아시타를 죽인 다크엘프이며 불신해 마지않는
인간이지만, 이 순간은 그의 등뒤에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는 그들을 향하여.

생과 사가 엇갈리는 이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죽이겠다!!”

아무 걱정없이 마음껏 소리를 질러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작은 사람, 특히 아이가 겁을 먹거나 심지어 정신을 잃을까 생각할 필요
없이 명치 밑바닥에서부터 소리를 질러대자 가슴이 어딘가 후련했다. 달려가며 도끼날을 벽에 긁는 파찰음도, 주라-크탄(주:카레발리나 섬 남부 해안에 서식하는 용호랑이) 뼈갑옷이 흔들리며 부딪는 소리도
그의 고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프엘프 청년이 그를 보고 멈춰서자 지카리는 눈빛으로 살짝 목례를 보내며 달려갔다.

그 기세에 오크들은 얼어붙은 듯 멈춰섰지만,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와 발걸음이 더 들리더니 더 많은 오크가 통로로 우르르
달려나왔다.어림잡아 열 마리는 넘는 그들 앞에 지카리는 떠억 버티며 멈춰섰다. 동공이 확장한 채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그들의 공포의
냄새가 얼굴에 끼쳐왔다. 두려움에서 태어난 공격성으로,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그들은 위협적인 괴성을 질러댔다.

“Kataga! Kataga!”

조금 조용해지면서 앞의 몇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비켜주자, 방패를 든 놈 몇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지카리와 그 너머의 동료들을
노려보며 그들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와봐와봐~ 오는 놈부터 죽여줄게요~”

뒤에서는 아까부터 좀 이상한 아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돌아보자 그녀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지카리는 다짐하듯 덧붙이며 도끼를 쳐들었다. 오크들이 지카리의 존재와 아라의 위협에 잠시 주춤하는 것을 보고 그는 순간 어깨가
가벼워졌다. 짓이겨지는 뼈와 살과 피 속에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멍청이 놈들아! 뭐하고 있는거냐!”

성마르게 소리지르며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통로 끝에 나타났다.

“해치워!”

“당신이 대장인가?”

지카리가 언성을 높이며 통로에 목소리가 울리자 마법사는 움찔했다.

“여기있는 모두… 잃을 필요가 없는 목숨이다.”

필요 없이, 더 큰 균형에 대한 생각 없이 어찌 목숨을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분노에, 쾌락에 겨워서 취하기에는 생명은,
그리고 생명을 위한 죽고 죽임은 너무나 무거웠다. 죽어가던 아내의 마지막 말은 그 뜻이 아니었을까 그는 생각했다. ‘고마워…’
속삭이며 죽어가던 그녀의 마음은.

“돌려놔야 할 것을 돌려놓고 떠나라.”

그는 마법사를 도끼로 가리키며 낮게 웅웅거렸다. 그래, 어쩌면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일지도 몰랐다. 점점 더 폭력과 죽음으로
젖어드는 안힐라스에서는 공허한 이상주의일지도. 그러나 아무리 허무하다 해도 노력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에르-하라의 기억이,
그녀의 죽음이 그에게 남아있는 동안은. 따라서 그가 호흡하는 한…

“하, 리자드맨이 말도 하는 줄은 몰랐군?”

마법사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없겠지. 죽어라!”

마치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뒤에서 마법사 크세노바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쳤고, 빛이 순간적으로 통로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오크 대부분이 눈을 감싸며 울부짖는 모습에 지카리는 가슴이 쓰려왔다.

결국은…

쉭- 빠르고 예리한 움직임이 그의 옆을 스쳐갔다. 앞에 있던 방패 든 오크가 얼굴에 화살을 박은 채 뒤로 넘어갔다.

다시 이 무의미한 피인가. 다시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인가. 다시…

슬픔과 분노를 넘어 그와 언제나 함께하는 내면의 광기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지카리는 눈을 똑바로 떴다. 되도록 빨리, 희생 없이
끝내야 했다. 에르-하라, 동반자여, 사랑이여, 부디 나를…

도끼를 왼손으로 옮기며 그는 서두르지 않고 바로 앞의, 눈을 가리고 괴성을 지르는 오크에게 손을 뻗었다. 갈고리발톱이 난 손이
목을 움켜잡자 오크는 소리지르는 것조차 잊은 듯 굳었다. 아주 조금, 조금만 손을 조이면 지푸라기처럼 간단히 꺾을 수 있을 목뼈가
손에 잡혔다. 전투와 폭력과 고통의 소음들이 귀에 가득 몰려오는 기묘한 합창에 붙잡힌 오크가 두려움에 찬 괴성을 더하는 동안
지카리는 천천히 그를 들어올렸다.

통로 끝에서는 마법사가 집중하며 주문을 외우다가, 크세노바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끄어억 비명을 지르고 벌벌 떨며 쓰러졌다.
그자의 비명도, 공포에 바지 앞춤이 젖어오는 오크도 감각이 전해오는 정보일 뿐 중요하지 않았다. 지카리는 들어올린 손안의 무게를
앞으로 세차게 던졌다. 앞에 통로를 메운 오크들이 내던진 오크에 깔려 우당탕탕 쓰러지는 것을 그는 감정 없이 지켜보았다. 혼전
중에 가끔 그렇듯 세상이 느려졌다. 크세노바가 아까 걸은 가속 주문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있었다. 고통에 찬 비명, 둔탁한 타격음과 뼈가 나뭇가지처럼 부러지는 소리가 하나하나 그에게 부딪쳐 왔다.
지카리는 통로 끝에 쓰러진 흑마법사를 노려보며 달려갔지만, 혼란에 빠진 오크들이 앞에 걸리적거리며 가로막았다. 눈을 비비며
뭐라고 말하는 오크에 걸리고, 쓰러진 다른 오크에게 발이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지카리는 울부짖었다. 어째서 매번 멈출 수가
없는가? 어째서 이렇게도 무력한가? 에르-하라, 어째서?

두 마리 오크가 두려움에서 태어난 분노에 겨워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무의미한 감정, 무의미한 폭력. 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카리는 허공을 차갑게 갈라오는 날을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비켜라!!”

다시 달리는 그의 앞을 오크 세 마리가 가로막았지만, 그가 그 중 가운데놈에게 세게 부딪치자 오크는 소리도 못 지르고 옆으로
날려갔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더 버틸 수 없다는 듯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돌아보자
그의 뒤편에 있던 오크들도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만한 승리는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손에 무의미한 피를 묻히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봐도
그를 향해 걸어오는 동료들은 모두 무사했다.

‘에르-하라…’

큰 승리가, 싸움과 피 없이 이기는 싸움이 아직 손에 닿지 않는다면 이런 순간이라도 소중하게 품어 안으리라. 머리나 몸에서 화살이
튀어나온 채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오크의 시체가 발에 걸리적거렸고, 패주하는 오크 하나는 부러진 다리를 끌고 작게 낑낑거리며
동료들을 열심히 쫓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뒤처리뿐.

지카리는 통로 끝으로 걸어가 그곳에 쓰러진 마법사의 목에 도끼날을 갖다댔다.

“끄으… 네… 네놈… 들…”

눈을 가늘게 뜬 흑마법사가 그를 올려다보며 더듬거렸다. 경련하면서 혀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손발을 묶고 입을 막으면 아무것도 못할 겁니다.”

뒤에서 발걸음이 다가오면서 크세노바가 말했다.

“대화를 하고 싶다.”

지카리는 말에 차가운 확신을 담아 흑마법사에게 말했다. 그의 살생에 의미가 있었는지, 그가 살아감과 죽임의 순환을 더럽혔는지 알고
싶었다. 심증은 있었지만, 무지 속의 확신은 눈이 먼 채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장로들은, 그리고 에르-하라는 그에게
가르쳤었다.

“대화아? 죽이면 되잖아!”

아라가 칼을 뽑으며 그의 앞으로 폴짝 나서자 빛이 칼날 위로 차갑게 흘렀다.

“니아가 금방 할게!”

“므우루를 찾아야죠.”

크세노바가 팔을 붙잡자 아라—혹은 니아?—는 깔깔 웃더니 그의 손에서 가볍게 벗어났다. 그녀는 흑마법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넘어서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자가 아까 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조용해진 사이에 아스타틴이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원군…?”

그 말만으로 지카리는 다시 지치는 기분이었다. 다시 의미없는 살육인가. 그러다면 그가 말한 원군이 오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통로가 꺾이는 곳, 쓰러진 흑마법사 바로 안쪽에는 예의 그 휘장 몇으로 벽을 장식하고 탁자와 의자 등 가구를 비교적 제대로 갖춘
방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수정구 옆에서 조롱를 집어들더니 니아는 짤짤 흔들었다.

“여깄어 여기!”

그녀는 크세노바를 향해 즐겁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크세노바는 흑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차갑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채, 그저 무표정하게 묻는 크세노바를 보며 지카리는 젊은 인간 마법사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예사로울 수 있는 저 표정은 사냥꾼이 사냥을 하고 직조공이 천을 짜듯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 그 자체였다.
다만 조금 더 심각하고 위험한 사냥이기에 청년의 평소 반짝이던 눈빛에서 웃음기를 앗아갔을 뿐.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냥꾼은
위험하고, 또한 신성했다. 지카리는 그런 인간 젊은이를 유심히 살폈다.

“잠깐! 사…살려줘!”

조금씩 몸에 움직임이 돌아오면서 흑마법사는 무력한 방어동작으로 한 손을 들어보였다.

“나…난 그냥 스승님이 시키는대로…그…그러니까-”

“스승? 누구?”

여전히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크세노바는 흑마법사의 말을 끊었다. 흑마법사는 이제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질러댔다.

“오…오크들이 전부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했다고!”

“거짓~말~ 니가 명령했잖아.”

흑마법사가 주충주춤 엉덩이를 끌며 일행에게서 물러나는 동안 니아는 손에 든 조롱을 들여다보며 걸어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조롱에서는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카리는 도끼를 흑마법사의 목에 더욱 바싹 갖다댔다.

“움직이지 마라.”

“거짓말쟁이 아이는 죽어야 하는데…”

니아는 구슬픈 표정으로 허리춤에 꽂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줘 제발!”

마법사는 이제 손을 맞대고 싹싹 빌었다.

“뭐든지 다 할게!”

지카리는 대답없이 도끼날을 그의 목에다 댔다. 흑마법사는 목소리가 으으.. 하는 공포에 질린 신음으로 잦아들면서 눈만 돌려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 그 문양은 멜코 상고로드림이라는 흑마법사의 것이라고 했죠?”

아스타틴이 크세노바를 쳐다보자 젊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 정도는 될 수 있겠지요.”

그는 다시 아무 감정이 없기에 오히려 두려운 눈빛을 바닥에 스멀거리고 있는 흑마법사에게 향했다.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스… 스승님? 글쎄… 누구더라…”

마법사가 허얘진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우는 동안 지카리는 곁눈으로 아라—혹은 니아—가 조롱에서 푸르게 빛나는
작은 형체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까 보았을 때보다 한결 빛이 희미해진 므우루는 니아의 손안에 의식 없이 추욱 늘어졌다.

“어서 대답하는게 좋을 거다.”

목소리에 점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들며 지카리는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지금 화가 많이 나려고 하니까.”

아직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점점 확신이 들었다. 이자가 한 일에는 생명의 신성한 필요라고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이 멀어
달리는 것일까? 이것은 광포에 문을 열어주는 분노인가?

“모른다니 별 수 없군요.”

여전히 그 무서울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크세노바는 지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흑마법사가 움찔하면서 그자는 지카리의
도끼날에 스스로 목을 벨 뻔했다.

“잠깐잠깐! 말할게! 말한다고!”

흑마법사는 손을 내저으려는 모양이었지만, 몸이 너무 굳어서 손바닥을 아주 약간 들어보일 뿐이었다.

“멜…멜코르…멜코르 상고로드림이시란 분….”

구석에서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들리자 지카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처입은 어린 생명이 내는 소리… 의식이 없는
므우루를 안고 이제 도저히 아라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니아가 울고 있었다. 아무 수치심이나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대로 얼굴을 구긴 채, 마치 어린아이처럼.

“샤나 아픈가봐… 정신차려 샤나, 응? 엄마 있으니까…”

지카리는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니아의 복잡하게 엉킨 정신 속에 ‘샤나’나 ‘엄마’가 누군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슬픔에 빠진
생명체가 위안을 갈구하는 소리란 누구나 다 비슷했다.

“스…스승님?”

그 목소리에 지카리는 다시 흑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스승님. 제…제가 실수한 건 아니…그러니까…”

그자는 어느새 언색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곳에 없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 역력한 그 눈치에 지카리는 목
뒤의 비늘이 곤두섰다.

“요..용서를 제발!”

공포로 동공이 확장해서 눈이 새까매진 채 흑마법사는 이제 허공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스…스승님! 제발 자비를…!”

흑마법사가 목의 도끼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몸을 뒤틀자 지카리는 그자의 머리가 잘려나가기 전에 서둘러 도끼를 떼었다. 공중에
차가운 기운이 지나가며 뼈갑옷이 희미하게 덜컥거렸다. 이제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의식도 하지 않는 듯한 흑마법사를 아스타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지카리는 한 발짝 물러나 도끼를 챙기고, 혼자 일행과 떨어져 있는 니아를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끄으… 끄아아!”

그 순간 마법사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절규를 내질렀다. 동굴 안이 급속도로 추워지면서 공중에 악의어린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쭈뼛한 그 차가움에 원치 않는데도 시선이 흑마법사에게 내려가자 그자가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마구 뒤트는 모습이 보였다.

“Satis superque…(주:라틴어, 아니, 고제국의 언어[…]로 ‘충분하고도 넘치는구나’)”

그 초자연적 공포 속에 크세노바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낮았다. 그의 차분한 표정, 침착한 목소리는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처럼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이 있었다. 지카리는 저도 모르게 보호를 구하듯 젊은 마법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Ne plus ultra.(주:고제국어로 ‘더 이상은 없다’)”

크세노바가 손을 들었다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수평으로 움직이자 손의 궤적에는 분명히 하얀 빛이 따랐고, 공기 중에 무언가가
변했다. 차가운 존재감, 공기를 진동시키던 속삭임이 희미해져 마침내 사라지자 몸이 뒤틀리던 흑마법사는 갑자기 늘어지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휴…”

크세노바의 작은 한숨이 침묵을 깼다. 그는 마치 식사가 잘못 오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위험한 자가 적이 된 것 같군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단지 ‘위험하다’는 표현에는 묘하게 만족을 못하고 있는데 니아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성큼성큼?
흑마법사에게서 고개를 들어서 보자 그녀는 얼굴이 차갑게 굳은 채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니아—혹은 아라?—는 므우루를 옆의 아스타틴에게 떠넘기듯 밀치고는 흑마법사 앞에까지 와서 쓰러진 형체를 발로 쿡쿡 찔렀다.

“뭐지, 이 자는?”

꿈틀거리는 마법사는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정신을 차리지도 않았다. 아라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의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법사는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직였고,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에서는 약하게 숨이 새어나왔다.

“흑마법사라는 자들은… 전부 이러한가요…?”

아스타틴이 두 손에 므우루를 조심스럽게 감싼 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는 말에 문장부호를 붙이듯 아라는 손을 뒤로 젖히더니
흑마법사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짝! 소리가 크게 울리고, 마법사는 입안에 고인 피를 커헉 뱉어내며 주춤주춤 눈을 떴다.

“스승에게 버림받은 일회용 도제랄까요.”

아스타틴과 지카리가 잠시 얼어붙은 동안 크세노바는 벽에 건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

다크엘프는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흑마법사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말했다.

“이젠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

챙… 그녀가 칼을 뽑자 지카리는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여 그녀와 마법사 사이에 팔을 밀어넣었다. 아무리 동료라 해도 필요없는
살생을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거의 동시에 크세노바가 그녀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아뇨, 아직입니다.”

젊은 마법사는 한 손을 들었다. 정중히 말리는 동작이기는 했지만, 언제든 주문의 손동작이 될 수도 있으리라.

“기억을 복구하는 마법도 있으니까요.”

마법사와 지카리를 번갈아 보며 아라는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표정이 변하지 않고 칼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렇다면 데리고 가자.”

아라가 마법사의 머리칼을 잡은 손을 놓자 마법사는 얼굴이 지카리의 팔에 스쳤다가 퍽! 하고 돌투성이 바닥에 박혔다. 옆의 땅에서
아무 천조각이나 집어들어서—묻은 얼룩은 오크 피 같았다—그녀는 흑마법사의 고개를 우악스럽게 돌린 후 살짝 벌어진 입에
쑤셔넣었다.

“페어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지체할 수는 없다.”

“아까 저놈이 페어리들에게 빼앗은 마법석은 어떻게 하죠?”

므우루를 안은 채 아스타틴은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안쪽을 한 번 조사해봐야겠습니다.”

말하고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크세노바를 아라는 흘깃 돌아보았다.

“빨리 하도록.”

“서둘러서 나가는 것이 좋겠죠.”

아스타틴이 맞장구쳤다.

“아까도 말했지만 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으니 곧 들이닥칠 테고요.”

크세노바가 뒤편에 입구를 찾았는지 들어가는 동안 아라는 지카리에게 밧줄을 얻어 마법사의 손발을 꽁꽁 묶었고, 지카리는 배낭을 멘 뒤
밧줄로 잘 포장한 마법사를 어깨에 걸쳤다.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는 마법사가 사라진
문으로 향했다.

“마무리가 되었으니 떠나…”

문간에 잠시 멈추었다가 이제야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크세노바의 머리를 넘어 안쪽 방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지카리의 걸음은 멈추어
있었다. 이 안쪽 방에는 바깥 동굴처럼 오크가 버린 잡다한 쓰레기가 흩어져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저분하게
흩어진 수정구나 유리병, 펜과 책 같은 도구들도 크게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업대에 수북히 쌓아놓은 피투성이 페어리 날개, 그리고 큰 유리 용기 속 액체에 담아놓은 여러 종족의 시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친구들이 즐겁게 재잘거리며 저 날개로 웅웅웅 날아다니던 기억에, 유리병 속에 소리없는 비명에 입을 벌린 채
내장이 배 밖으로 끄집어내어진 페어리의 모습에 배에서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것은 구토감일까, 분노일까. 내면의 광기가 다시 창백하고
차가운 손을 저어보였지만, 그는 그 유혹을 외면하며 버텼다.

“마법사, 언제까지나 거기서…”

날카롭게 말하며 들어오던 아라도 흠칫 멈춰섰다. 뒤늦게서야, 마치 나쁜 꿈을 꾸는 기분으로 지카리는 벽에 묶인 채 울부짖는
오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이 잿빛으로 변색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정상 같지 않았다. 아마도 좀비화한 결과? 곁눈으로 실험실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스타틴이 보였다. 끔찍한 광경을 감추듯 그가 끌어안은 므우루는 날개만 아주 희미하게 저으며
꺼질 듯 희미한 푸른 빛을 냈다.

아라가 뭔가 중얼거리며 비틀 나가는 동안 지카리는 어깨에 멘 인간 흑마법사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웠다.

“이자가 이렇게 한 것일까?”

크세노바에게 묻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쉬어서 나왔다.

“그건 차후에 알아봐야겠지만…”

젊은 마법사는 반대쪽 벽의 좀비 오크에게 손을 저었다.

“일단 이것들부터 좀 치워주시렵니까?”

지카리는 망설이며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을 마주보았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그때 아라의 부름에 응답했는지 그녀의 포식자 친구, 사냥꾼의 혼을 한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뛰어들어왔다. 아라는 아무렇게나
버려진—그들의 신성한 죽음을 마치 쓰레기처럼 그렇게—피묻은 페어리 날개를 천조각에 꼼꼼히 싸서 아사나스의 안장주머니에 넣었다.
줄지은 오크 좀비를 사냥꾼이 노란 눈으로 노려보는 동안 아라는 활에 화살을 매겨 하나씩 쏘았다. 크어어.. 하며 늘어지는 그들을
보며 지카리는 망설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저 부자연스러운 ‘생명’을 끊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저런 생명이라도 삶의
고리 안에 있는가. 세상은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에게 내놓곤 했다.

“흑마법사도 잡았고… 대충 해결된 거 아닌가요.”

그와 생각이 비슷한 듯 젊은 하프엘프 친구가 아라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혼자 뭔가 중얼거리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핑- 화살이
날았고, 또 다른 좀비가 부패해서 미적미적 흐르는 피를 쏟으며 늘어졌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서랍을 열고 선반을 뒤지며 크세노바가 정신이 팔린 투로 대답했다.

”’저런 걸’ 생물로 봐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세노바가 계속 마법사의 악몽 같은 연구실을 뒤지는 동안 아라는 칼을 들고 좀비들에게 다가가 화살을 회수했다. 잿빛으로 부패한
장기가 묻어나오며 썩은내가 진동하자 작은 코를 찡그리며 그녀는 화살촉을 그들이 입은 누더기 옷에 대충 닦았다. 그 냄새에 지카리는
다시 분노인지 구토인지 모를 느낌이 치솟으면서 어깨에 멘 마법사를 들썩여 단단히 잡았다.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이게 너의 짓이라면, 깨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에르-하라, 그의 아내라면 이런 상황에 분노하지 않고 지혜와 인도의 말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리라. 그에게는 그럴 지혜가 없었다.
지카리는 갑자기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녀가 그리웠다.

마법사가 서류나 물품 몇 가지를 대충 챙기는 동안 갑자기 사냥꾼, 가우르가 밖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아라의 옷깃을 입으로
잡아당기자 그녀는 역시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아, 이런.”

하프엘프는 므우루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카리는 흑마법사의 무게를 고쳐잡았다.

“아직인가, 마법사?”

“나가죠.”

마법사만이 차분한 채 손을 젓자 한쪽 쓰레기더미에 불길이 일었다. 빠르게 퍼지는 불길에 머리와 로브가 흔들리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가자.”

앞서가는 아라는 시위에 다시 화살을 매겼고, 아스타틴이 그녀를 바싹 쫓아나갔다.

“부디 명복을…”

크세노바는 말하며 점점 불길이 오르는 실험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매캐한 공기에 기침하며 마법사는 서둘러 나갔다.

흑마법사를 지고 나오다가 지카리는 한 번 돌아보았다. 만족을 모르는 진홍의 포식자가 마법 도구를, 책을, 그리고 다른 슬프고
잔혹한 유물들을 집어삼키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그는 말없는 기도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잠시 나쁜 기억처럼 그를 쫓아오던 불길과
연기는 먹을 것이 없어지자 곧 주춤했고, 지카리는 그 불구덩이를 등뒤에 두고 나왔다. 이미 머리에 새긴 기억을 지울 것은 전투의,
광기의 불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슴 한 구석을 짓눌렀다.

소감

지카리 시점을 처음으로 했다가 지카리라는 인물의 원동력이랄까, 동기를 잘 못 잡아서 많이 헤맸습니다. 무랑님하고 많이 얘기하면서 마침내 인물의 실마리가 잡히니 신이 나더군요. 저는 지카리의 인물 방향을 무심히 겉으로 드러나는 ‘연민’으로 잡았었는데, ‘살생의 신성함’이라는 좀 엉뚱할 수도 있는 방향으로 잡으니 덜 전형적이고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지적 주시고 상담해주신 무랑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 크세노바의 마법사적인 면모라든지 위협적인 점을 표현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플레이 로그 때부터 그랬지만 아라-크세노바 대 지카리-아스타틴의 매파와 비둘기파(?)의 전선 형성도 흥미로웠고요. 그 외에 아스타틴이 동료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역시 위험은 사람을 가깝게 묶어준다는 반증인 겁니다. 삭풍님께서도 캠페인을 통해 동료애나 전우애를 표현하고 싶다고 하시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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