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2화 (2): 안식의 로스로리엘

“아슬아슬했군요.”

하프엘프 청년이 말했다. 오크 한 떼가 동굴에 닥쳐드는 모습을 그들은 나무 사이로 멀리 지켜보았다.

“잘했다, 아사나스.”

아라는 오크들을 지켜보며 가우르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녀석은 노란 눈을 가늘게 뜨며 좋아했다.

“수고했어… 아사나스.”

가우르를 돌아보며 하프엘프 청년은 웃었다. ‘아사나스’라고 부르기 전의 공간에는 다른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을 제때 피해오고 사건을 거의 일단락지은 지카리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는 웃으며 아라의 짐승 친구를 돌아보았다.

“맹수같지 않군.”

야생동물의 혼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녀석은 야생의 마음과 충직한 친구의 본능을 둘다 갖추고 있었다. 제때 경고해준
짐승에게 감사하며 지카리는 손을 내밀었다.

“전 주인이 잘 가르친 모양… 아 저, 지카리공…!”

사냥꾼이 검은 털을 바싹 세우며 으르릉거리자 지카리는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조심하십시오.”

아라가 뒤늦게 덧붙였다.

“맹수가 맞군…”

지카리는 어색해진 손으로 목을 쓸었다. 지카리공이 너그러워서 그렇지 앞으로는 상대를 가리고 덤비라고 아라가 타이르자 맹수는
봐줬다는 듯 아라를 보고 좋다고 가릉거렸다. 확실히 충직한 동물이기는 했다… 한 사람에게만.

“일단 움직이죠? 좀 안전한 곳까지.”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던 크세노바가 다가왔다.

“페어리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아라는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우리도 로스로리엘 본부로 돌아가면 되겠지.”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안내하겠는가, 패스파인더.”

역시 뭔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따스한 표정으로 가우르를 보던 하프엘프 청년은 이내 평소의 냉정한 얼굴이 되며 말했다.

”…그러지요.”

그의 표정이 이내 더 싸늘해졌다.

“아마 지금쯤 그 사냥꾼도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착했을테니까요.”

그 남자 얘기에 잠시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분위기인 것일까, 지카리는 몹시 궁금해졌다.

“므우루의 상태는 어떤가?”

아스타틴은 그 보자기 비슷한 옷을 접어 만든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후 소리없이 누워있는 므우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꽃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무사한 것 같아요.”

그는 지카리가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대놓은 흑마법사를 싸늘한 경멸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스승에게 희귀한 종을 바친다고 들떠있었으니.”

“엘프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서두르자.”

그런 므우루를 보는 아라의 눈빛에는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데가 있었다.

“동족과 함께 있으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예…”

그 말을 믿고싶은 듯 간절한 눈빛으로 아스타틴은 끄덕였다. 아라가 걸음을 옮기자 지카리는 흑마법사를 집어들어 어깨에 걸쳤고, 나무
사이로 조용히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의 수도 로스로리엘을 향하여.

마침내 오크들이 흔적을 쫓아왔는지 로스로리엘 오십 리쯤 밖에서 따라잡힐 뻔하자 크세노바는 지친 몸을 추스리며 주문을 준비했지만,
그리폰을 탄 기수들이 나무 위로 조용히 나타나는 광경에 오크들은 감히 더 다가오지 못하고 도망쳤다. 몇몇 기수들이 그들을
역추적하는 동안 두 기수의 비호 하에 그들은 무사히 로스로리엘로 진입했다.

로스로리엘은 마법과 기술, 예술성으로 쌓아올린 알쿠알론데와는 또 달랐다. 나무 사이 길로 개천에 접근하자 목각 그리폰이 나무 다리
앞에 웅크려 그들을 맞아주었다. 다리 난간에는 숲의 온갖 생물을 부조로 새긴 솜씨가 섬세했다. 다리 반대편에 웅크린 똑같은
그리폰을 지나치자 어느새 평생 처음 보는 거목들이 성큼 다가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오래된 떡갈나무의 다섯 배는 가볍게
넘을, 상상도 못한 규모의 거대한 가지와 무수한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속삭임은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이었다. 머리 위의 그리폰
기수는 인사하듯 두어 번 돌더니 외곽으로 이탈했다.

“미친 엘프놈들.”

옆에서 나비… 아니 아사나스를 타고 가는 아라가 중얼거렸다. 한 번 그리폰을 올려다본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크세노바는 갑자기 그녀가 몹시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자작나무와 너도밤나무의 행렬이 끝나고 로스로리엘의 거탑 같은 나무 아래 선
지금, 주변의 꽃이 만발한 풀밭 어디에도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는 나무들의 거대한 가지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 나뭇가지로 엮은 천막이나 작고 정교한 목조 집이 눈에 띌 뿐.

로스로리엘은 높은 곳을 싫어하는 이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늘 속에서, 햇살과 그림자가 아롱진 땅 위를 걸어 가장 가까운 나무에 다가가자 약 5m 위의 가장 낮은
가지에 뭔가 갑작스레 움직인다 싶더니, 두 명의 엘프가 땅에 가볍게 착지하며 그들 앞에 섰다. 녹색과 갈색 튜닉과 바지, 망토
차림의 두 남자 엘프는 그들에게 목례했다.

“로스로리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자들이여.”

긴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겨서 땋고 아라 것보다 한결 긴 활을 멘 남자 엘프가 말했다. 어깨와 가슴, 팔에 가죽으로 댄 경갑주
말고는 갑옷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아르노스, 이쪽은 저의 형제 테르반입니다. 페어리들의 일로 오셨는지요?”

“그들은 무사히 도착했는가?”

아라가 급히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르노스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와 많이 닮은 테르반이 대답했다. 갈색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채 윗부분만 묶어서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한 그는 투창을 하나 들고 등에 세 개를 더 메고 있었다.

“인간… 대원, 랜돌프 에디우스가 생존한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착했습니다.”

아르노스도 테르반도 랜돌프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그래서 크세노바는 그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이 더 신뢰가
갔다. 아라는 묘하게도 오히려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옆에서 아스타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저, 여기…”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말했다. 아르노스와 테르반을 보는 그는 묘하게 기가 죽은 채 조심스레 옷주름에서 므우루를 꺼냈다. 아스타틴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읽기 어려운 감정이 스쳤지만, 기운없이 축 처진 므우루와 그녀의 희미한 빛에 눈이 가자 그들은 대번 심각해졌다.

“페어리 마을을 습격한 자가 납치했던 고위 페어리다.”

아라가 말했다.

“치료가 필요하다. 그녀를 도울 사람이 있는가?”

아르노스가 휙 몸을 돌려 꼭 새울음 같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동안 테르반은 아스타틴에게 다가섰다. 그가 므우루에게 손을 뻗자
아스타틴은 방어적으로 움찔… 뒤로 물러섰다.

“아 저기, 이쪽에 흑마법사도 하나 있습니다만.”

크세노바는 일행의 뒤편에 묵묵히 선 지카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지카리가 어깨에 멘 형체를 곁눈질하고 아르노스가 다시 휘파람을
불자 날카롭고 긴장한 새의 비명이 하늘을 향해 울렸다.

이후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법사와 치유사를 포함한 엘프들과 수염이 하얗게 센 드워프 하나가 몰려와 지카리가 내려놓은
흑마법사를 둘러싼 후, 드워프가 은으로 만든 것 같은 사슬을 붙잡고 주문을 중얼거리자 수족갑이 저절로 열리며 사슬은 흑마법사를
향해 스물스물 움직였다. 아르노스가 짧은 칼을 꺼내 마법사의 포박을 끊자 사슬은 드워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마법사에게
기어가더니 수갑과 족갑을 철컥 채웠다. 한편 테르반에게는 므우루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아스타틴은 여자 치유사 하나가 부드럽게
설득하자 마침내 그녀가 내미는 꽃향기가 나는 천 위에 페어리를 부드럽게 눕혔다.

므우루를 데려가는 치유사와 흑마법사를 연행하는 이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간 후에 테르반과 아르노스와 같은 차림을 한 여자
엘프가 나무에서 내려와 걸어왔다. 아르노스는 그녀를 보더니 눈쌀을 찌푸렸다.

“너는 휴식하라고 명령받았을 텐데, 아일리스?”

검은 머리를 땋아서 머리에 단단히 감아둔, 선이 가는 젊은 엘프 여인은 태연히 말했다.

“로스로리엘 안에서 걸어다니는 것보다 편한 휴식이 있을 리가 없잖아.”

평소에는 유연하면서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것 같은 그녀는 조금 창백한 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일행에게 인사했다.

“아일리스입니다. 숙소로 안내해 드리지요.”

그녀는 문득 갈빗대에 손을 대고 이를 악물었다. 금새 회복하고 아일리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푸스스스… 조금씩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로스로리엘의 거목이 저녁 바람에 바스락거렸다. 바람은 신록과 꽃의 내음을 가득 싣고 왔다.
나무를 몇 그루 지나 계단이 줄기를 돌아 빙빙 올라가는 나무를 향해 아일리스가 그들을 이끄는 동안 크세노바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부상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치유 마법이라도…”

그녀는 돌아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마법사님. 힘을 아끼시지요.”

괜한 말을 했나. 마치 부상을 들킨 것이 개인적인 실패인 것처럼 아일리스는 입매가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비켜서서 계단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금방입니다. 가시지요.”

크세노바 뒤편으로는 주변을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는 아스타틴이 올라왔고, 그들의 뒤에 지카리가 계단에 오르자 계단은 걸음마다 위태하게
삐걱거렸다. 크세노바는 만약을 위해 공중부양 주문을 떠올려 보았다.

지카리가 삐걱거리는 뒤편을 불안하게 돌아보자 아직 올라오지 않는 아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땅에서 자겠다.”

아사나스 위에 앉은 채 아라는 반쯤 넋이 나가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애원조가 섞여들었다.

“천막이라든지…”

“지상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아일리스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일단 올라가시면 숙소는 넓답니다. 정 불안하시면 제 손을 잡고…”

아라는 그 말에 움찔했다. 뒤에서 아스타틴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아라가 기억할 지도 모르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 같았다.

“아니다. 음, 아사나스…”

아라가 층계를 힐끔 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아일리스가 갑자기 강하게 말했다.

“바라트!(주:다크엘프어로 ‘가라!’)”

그 소리에 가우르는 마치 누가 엉덩이를 친 듯이 후다닥 층계를 달려올랐고, 아라는 화들짝 놀라 고삐를 있는 힘을 다해 붙들었다.
아사나스가 이내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올라오는 동안 크세노바부터 시작해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일리스가 아라의 뒤를 이어 따라오는
동안 아라가 가우르의 등에 앉아 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녀의 언어로 욕설 같았다.

“괜찮은가?”

지카리가 걱정스레 묻자 아라는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상에서 6미터나 올라왔을까, 두 개의 나뭇가지 사이에 지은 나무집이 보이자 아일리스가 뒤에서 말했다.

“여러분의 숙소입니다. 그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둥근 1층짜리 나무집은 넓은 창 너머로 정갈한 침실이 보였다. 두 개의 나뭇가지에 어른 손목만한 줄을
여러 겹 묶어 고정한 큰 발판에 역시 굵은 줄, 그리고 깎아서 서로 맞물린 나무판으로 세운 집은 거의 지상이나 진배없이 견고해
보였다.

조각해서 장식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으로 탁자와 편한 의자를 배치한 둥근 응접실, 출입문 반대편 벽에는 벽의 둥근 곡선을 따라
낸 큰 창이 보였다. 창밖에는 멀리 왼편과 오른편에 거목 한 그루씩과 그 너머에 넓은 하늘, 그리고 로스로리엘 남쪽의 숲이 가득
펼쳐졌다. 대여섯 걸음쯤 되는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창 양옆으로, 그리고 출입문 양옆으로 난 문이 네 개 보였다. 아까 본
침실들로 통하는 문이리라. 출입문에서 응접실로 가는 통로와 창이 들어있는 우묵한 벽감은 그렇다면 침실 벽 사이의 공간일 것이라고
크세노바는 짐작했다.

“와아…”

그의 뒤로 들어온 아스타틴이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동안 지카리가 들어서자 바닥은 다시 크게 삐걱거렸지만 다행히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 뒤로 가우르의 발걸음이 부드럽게 바닥에 닿아왔다.

돌아보니 아라는 잠시 얼어붙어서 저 밑 창밖에 물결치는 숲을 내려다보더니 허겁지겁 가우르의 등에서 내려 출입문 왼편의 침실, 그러니까
나무에 바로 면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의 큰 창을 무슨 괴물처럼 돌아본 그녀는 창문이 쫓아오기라도 할 듯 문을 쾅!
닫았다. 아사나스가 헷갈리는 표정을 한 채 문을 커다란 앞발로 긁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이 가우르 곁으로 가서 목을 쓰다듬어주었다.

“숙소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일리스가 문으로 들어섰다.

“아 예… 멋지군요.”

크세노바는 창에 대고 손짓했다. 반대의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은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뭐.

“이곳에서 휴식하십시오.”

갈빗대를 조심하는 기색으로 아일리스는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보고를 준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일리스.”

그녀도 휴식을 취할지 크세노바는 좀 걱정이었지만, 얘기했다가는 괜히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아일리스가 문을 닫고 나간 후 그녀의 발걸음은 들릴락말락 조용히 멀어지더니 금새 사라졌다. 다시 응접실로 나오자, 아라의 방문
앞에서 아사나스와 놀던 아스타틴은 아일리스가 나간 출입문을 보더니 작게 찌푸렸다.

“아일리스…”

“아는 사람인가?”

제일 큰 의자에 삐그덕… 앉은 지카리가 웅웅거리며 말했다.

“어쩌면요. 낯이 익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라가 응접실로 성큼성큼 나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내다보고 그녀는 창백해지면서 방에 도로
들어가려다가,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굳은 채 바닥에 앉았다. 이내 그녀는 가우르 뒤로 돌아가 창문과 자신 사이에
아사나스를 둔 채 창을 노려보았다.

방안에 조금씩 어둠이 내리는 동안 일행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치지는 않았는지 서로 묻기도 하고, 전투에서 위험했던
순간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법사의 지옥도 같은 실험실 기억이 떠오르자 그들은 침묵에 빠졌다.

“군락지가 페어리들이 다시 살 수 있는 곳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겠어요.”

마침내 아스타틴이 아사나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을이 붉게 내린 숲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은 잔잔하고 슬펐다.

“보고하라지만 사실 우리도 모르는 것이 더 많군.”

아사나스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아라는 창 반대편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는 대로 보고하면 되겠지요.”

아스타틴이 대꾸했다.

“정보를 듣고 골라내는 것은 위에서 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의 말에는 희미하게 뼈가 있었지만, 말다툼을 하기에는 피곤해 보였다. 그것은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Redivivus.(주:고제국어로 ‘되살아나다’)”

집중하며 양손을 펼치자 푸른 빛이 떠오르며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마법을 많이 썼을 때 특유의 그 등골이 쑤시는 피로가 조금씩
녹아 없어지자 좀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바닥에 기듯 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흑마법사 도제가 문득 떠올랐다. 그자는
그렇게까지 거물은 아니었지만, 주문을 외울 여유가 있었더라면 일행이 지금처럼 멀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자가 그 정도라면…

“저 흑마법사의 스승이 걱정이로군요.”

지카리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자 의자 밑에 바닥이 삐걱거렸다.

“자네는 뭔가 짐작가는… 점이 있나 보군.”

“제국에서 죄를 지어서 도망친 자입니다. 악명이 자자하죠.”

악명이 말 그대로 이름의 힘을 가리킨다면, 그 이름만으로도 마법사가 모인 자리 분위기가 싸해지는 멜코르 생고로드림만한 악명도
없으리라. 크세노바는 돌아가면 스승이 자는 동안 수염을 무슨 색으로 물들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죄라면?”

“마탑에서 쫒겨난 사령마법사가 무슨 죄를 지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자신도 잊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금지된 생체 실험, 계약마에게 바친 각종 희생, 피해자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던 악몽의
실험실. 그 생각만으로도 부드럽게 어둠이 내리는 숲의 정경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좀 축소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내도록 하자. 이미 오늘 하루 마법사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본 사람들이었다.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여기로 도망쳐왔을 줄은…”

다 알면서 이리로 보냈단 말이지, 영감님. 무지개빛 턱수염을 한 스승을 떠올리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안힐라스는 본토에서 너희 종족 중 최악이 건너오는 곳인 모양이로군.”

아라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창을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 개중에는 나은 것 같다만.”

그녀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나름 칭찬이리라고 크세노바는 생각했다.

“아마도요.”

가우르가 기지개를 켜며 입을 크게 벌리자 크세노바는 뫵수의 눈치를 보며 살짝 떨어져 앉았다.

“기회의 땅이라는 소문의 실상이 이런 식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첫날부터 신고식 하나는 호되게 치렀다고 생각하며 그는 피곤한 눈을 비볐다.

“대륙에서 막 건너왔다면…”

아스타틴이 말했다.

“소문의 반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 셈이지만요.”

“그 말대로… 더 겪게 되겠지.”

얼굴에 붉은 석양빛이 비친 채 아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회의 땅이 어떤 곳인지.”

그녀가 무심히 가우르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쓸어주자 맹수가 가르릉거렸다.

“인간에게는 기회의 땅일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고향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남쪽 숲보다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 나날이 알아볼 수가 없어지는구나…”

그말에 아스타틴이 가슴에 늘 달고 다니는 브로치를 어루만지자 한 줄기 노을이 브로치의 은빛 표면에 빛났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억 속에만 그리워하는 그 기분을 크세노바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이는 차라리 떠나버린 걸까… 가슴이
답답해왔다.

“지카리공께도 궁금하였습니다만…”

아라는 드래고니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녁바람에 쏴아아… 나뭇잎이 움직이면서 바닥과 그 밑의 거대한 나뭇가지가 끼익… 움직이자 그녀는 잠시 얼었다가,
바람이 잦아들자 말을 이었다.

“무슨 연유로 이 남쪽으로 내려오셨는지 물어도 될지요?”

드래고니언이 고개를 돌리자 단단한 비늘이 가시처럼 두른 그의 눈과 콧구멍만 난 코, 이가 날카로운 긴 입이 석양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전설 속 드래곤을 닮은 그림자를.

“우리는 원래 수가 많지 않네.”

낮게 울리면서 동시에 희미하게 쉬익거리는 특유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래서 대부분이 내려오긴 했지만 보기 힘든 걸지도 모르지.”

“대부분이요?”

아라는 조금 눈이 커졌고, 크세노바도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드래고니언을 더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는 스승의 수염을
물들이는 건 면제해주는 것을 고려했다.

“많은 수가 내려왔지.”

지카리가 끄덕였다.

“더 이상 지켜 볼수 없다는 뜻이 있었네. 인간의 행동을 처음에는 조화를 찾기 위해 벌이는 소음 정도로 생각했지만…”

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새로운 문명, 아니 세계를 만난 과도기일 뿐이니 금방 가라앉으며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그 과도기가 10년 20년 길어지는 동안 본토의 관심은 차차 수그러들었고, 이것이 세력의 균형이라면 그 균형은 꽤나 가혹하고
불안정했다. 탄내가 매캐한 페어리 꽃밭과 흑마법사의 실험실이 떠오르자 크세노바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이런 슬픈 일이 또 벌어지지 않게 하는게 우리들의 목적이랄 수 있지.”

드래고니언은 석양이 식어가며 어둠으로 잦아드는 숲을 내다보았다.

“나의 목적은 조금 다르지만, 그건 개인적인 일이네.”

그는 날카롭게 줄지은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둠 속에서 아라의 목소리에는 뭔가 취약한 것이 있었다. 단단한 갑옷 사이 부지불식간에 내보이는 부드러운 속살처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화를 찾기 위해서네.”

지카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안 된다면…”

방안에는 가우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침묵이 흘렀다.

“자네들, 드워프 맥주가 끝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예?”

허를 찔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라가 말을 이었다.

”…좋은 술이지요.”

“내가 맛본 바로는…”

지카리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들었다.

“드워프들의 맥주라는건 안힐라스의 희망이라고 할 만하더군.”

고되게, 하지만 힘차게 노동한 하루의 끝에 친구들과 마주앉는다. 그들의 목소리와 웃음과 기분좋은
욕설이 맥주에 황금빛으로 녹아든다. 고개를 젖히면 그 포말이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 가슴을 덥힌다. 그 장면이 갑자기 너무나
생생해서 크세노바는 왠지 목이 말라졌다.

”…그런 물건이 있는데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네.”

지카리가 익살스럽게 말을 맺었다.

“농담도…”

웃으면서도 크세노바는 드래고니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고 무거운 이곳이기에 그는 그런 희망을 맛보고 싶었다.
벌컥벌컥 마셔보고 싶었다.

“마법사도 언젠가 마셔봐야겠군.”

아라마저도 좀 느긋한 목소리였다.

“드워프 맥주를 못 마시면 안힐라스에 여행했다고 할 수 없으니.”

“안그래도 그래볼 참이라죠. 마탑에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러고 보니 그의 맥주 환상은 술마실 시간도 없을 정도로 고생을 시킨 스승 때문에 생긴 것일지 모른다. 역시 그양반 수염은
체크무늬로 물들이는 게 어떨까.

“음, 자네도 희망을 느끼게 될 거네.”

드래고니언은 무릎을 가볍게 치며 긁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자네같은 인간들이기도 하지.”

어느새 밖에서는 하나둘 등잔을 밝혀 숲에 작은 빛무리를 만들었다. 하늘에는 화답하듯 하나하나 별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이 파괴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네.”

하늘과 땅의 별빛 속에서 드래고니언은 눈을 희미하게 빛내며 그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파괴를 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지 않습니까.”

아라가 말했다.

“그런 자들의 힘이 더 강하고요.”

“나는 파괴하려고 하는 힘이 더 강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지카리는 깜박이지 않는 눈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사실은 지키려는 힘이 더 강하지만, 그것은 조금 느리고 눈에 잘 안 보일 뿐이라고 말이야.”

아스타틴이 말없이 일어나서 창가의 등잔을 찾아 밝히자, 조그마한 불씨는 금방 커지며 방안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크세노바는 따스한 금빛이
고인 아늑한 응접실을 눈을 깜박이며 둘러보았다.

“그렇게 믿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지카리는 다시 웃었고, 아사나스는 잠결에 가릉거렸다. 드래고니안이 손을 뻗어 아라의 어깨를 두들겨 주자 묵직한 소리가 크세노바가
앉은 데까지 들려왔다. 왠만하면 지카리가 어깨를 두들길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람을 타고 맑은 노래의 선율이 들려오자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밖의 거목은 수많은 등잔불을 품은 채 저녁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처음에 누군가 혼자 부르던 노래는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가 합류해 어느새 수많은 선율이 서로 섞이고 녹아들어 그의 위로 맑은 물처럼 흘러갔다. 저녁별을 반기는 엘프들의 노래에 귀기울이며 크세노바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희망이라는 꿈을 꾸었다.

숙소에서 이틀을 쉰 후, 아침에 전령이 명령사항을 전달하러 온다는 통보를 받은 일행은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눌 뿐 분위기는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남향 창에서 비쳐드는 햇빛에다가 아스타틴의 제안대로 침실 문까지 모두 열어서 둥근 방은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집 바로 위의 가지에서는 엠린 새가 즐겁게 노래했다. 곧 떠날 곳이었지만 그래서 지난 이틀은 더없이
소중했다.

곧 이곳에서도 떠나가겠지. 아스타틴은 편안한 일행과 평화로운 정경을 둘러보았다. 노스탤지아가 생기기 전,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 잠깐 머물렀던 로스로리엘보다 지금의 로스로리엘은 한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루하루 인간들의 침탈에 거의
무방비로 사람이 사라지고, 전투에 지고, 점령당한 땅에서 난민이 밀려오는 와중에 아무도 혼혈의 고아에게 신경을 쓸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기에 그는 텔루르가 탐탁치 않아해도 노스탤지아에 가세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장에 뭔가 어른거리자 그는 햇살이 어디에 반사되나 생각하며 올려보았다. 다만 색이… 분홍색? 그리고 이내 흰색, 노란색,
초록색, 파랑색의 빛무리가 천장에 급격하게 생겨났다. 탁자 앞에 앉아 책을 보던 크세노바와 바닥에 앉아 뭔가 이야기하던 지카리와
아라, 그리고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 속에 등을 대고 누워 졸던 아사나스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그 빛무리로부터 하나하나 뭔가 떨어져 내렸다. 올려다보는 얼굴을 향해 묵직한 것이 날아오자 아스타틴은 급히 얼굴을 가리며
옆으로 피했다. 아사나스는 화들짝 놀라 탁자 밑으로 숨었고, 아사나스 때문에 이번에는 크세노바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벽에 몸을
붙였다.

와르르르- 사과, 들국화, 석류, 토끼풀 화환, 망고, 온갖 꽃과 과일이 쏟아져내리는 와중에 아스타틴은 떨어져내리는
야생화 목걸이를 졸지에 목에 걸게 되었고, 아라는 과일에 머리를 맞자 그가 어려서 텔루르를 따라서 했다가 엉덩이를 맞았던 다크엘프
욕설을 내뱉었다. 지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다가 옆에 떨어지는 과일 하나를 잡아 냄새를 맡았다.

물건의 폭포가 잠시 잦아들자 아사나스는 탁자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눈앞에 오렌지 하나가 툭 떨어지자 캬옹! 하며 도로 숨었다.

”…이건?”

여전히 벽에 붙은 크세노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마치 대답하듯 출입문으로 페어리들이 우르르 날아들었다. 웅웅웅… 색색의 빛을
햇살 속으로 흩뿌리며 그들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선물이야!”

“선물이야!”

“물선이야!”

“물선이 아니고 선물이야 이 바보~”

선물인지 물선인지 잠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자기들끼리 페어리어로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을 지카리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보았다.
아사나스는 조심조심 탁자 밑에서 나오더니,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페어리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눈으로 따랐다.

“므우루는 어떤가?”

아라가 묻자 페어리 하나가 공통어로 대답했다.

“므우루 구해줘서 고마워~”

고마워~ 하는 즐거운 목소리들의 합창이 방안에 울렸다. 창에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돌아보자 응접실 창밖에서도 페어리들이 맴돌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하하…”

가슴 밑바닥에 따뜻하게 고이며 솟구치는 온기는 입을 벌리자 웃음이 되어 나왔다. 웃으면서도 아스타틴은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텔루르, 그의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함께 가슴아파하고 함께 달리고 함께 싸워서 마침내 이루어낸 이
작은 기적에… 이런 순간에 더욱 아스타틴은 엄마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과거 이상으로 미래가, 내일이 가져오는 그
모든 놀라운 가능성에 대한 목마름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속에 날개를 저었다.

“알다론 여러분 계십니ㄲ… 아.”

엘프 여인 하나, 아마도 그들이 기다리던 전령이 숙소에 들어오다가 이 광경에 놀라며 멈추어섰다. 발목까지 꽃과 과일에 파묻혀서
꽃목걸이를 하고, 정신없이 떠들어대며 붕붕 날아다니는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 아스타틴은 그녀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고 더 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작은 개선을 축하하는 그 유쾌한 소란 속에 햇살은 눈이 부셨고, 해처럼 노란 새가 날아오르는 창밖으로 하늘은 드높이 푸르렀다.

소감

로스로리엘은 역시나 반지의 제왕의 로스로리엔에서 이미지를 많이 따왔습니다. 안힐라스는 특히 작명은 중간계에서 바로 따온 게 많은 세계죠. 알쿠알론데나 엘윙,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 등등. 그래서 새로운 작명을 할 때도 엘프 작명은 신다린 사전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다크엘프어는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산스크리트를 약간씩 비튼 게 대부분이죠.

2화는 거의 쉬어가는 화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원래 플레이의 주인공 간 대화도 그랬고, 또 플레이에는 나오기 어려웠던 NPC나 로스로리엘 묘사도 그렇고 안힐라스의 모습이라든지 상황을 드러내보고 싶었습니다. 안힐라스가 완전히 인간들에게 넘어간다면 무엇을 잃어버릴지, 현재 상황에 대한 안힐라스 주민들의 생각이라든지 말이죠.

아스타틴의 회상을 통한 로스로리엘의 과거와 현재 대비는 수단 내전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What Is the What 오디오북을 듣다가 떠오른 것입니다. 주인공 발렌티노 아차크 뎅이 어렸을 때 살던 마을 주민이 정부편 아랍 민병대에 학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가 초토화된 후 혼자 도망쳐 난민이 되고 (여기까진 그야말로 판타지적인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인지라 주인공이 나중에 돌아와서 마왕–혹은 알-바쉬르 대통령–에게 복수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후 에디오피아와 케냐의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여정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작중 발렌티노는 SPLA (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수단민족해방군 정도?)의 세력에 따라 탈출 경험이 얼마나 달랐는지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200여명의 다른 소년과 함께 에디오피아로 도망칠 때 도보로 여행하고 가다가 다른 소년이 사자에 잡아먹히기도 했는데, 이후 출발한 다른 소년 난민 무리는 SPLA 유조선을 타고 에디오피아로 갔다는 대조가 극명했죠. 애당초 발렌티노와 다른 소년들을 에디오피아로 인솔한 사람이 교사 출신인 젊은 SPLA 협력자기도 했고요. 결국 수단 정부가 총을 쥐어준 아랍 부족들에게 학살당하던 이들을 그나마 살린 것이 정부에 대항해 총을 들고, 조직하고, 계획하고, 난민을 탈출시킨 반군의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SPLA가 절대선이라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SPLA도 소년병이라든지 부패, 군벌화 등 문제가 많은 조직이죠. 저는 마찬가지로 노스탤지아가 절대선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어떤 강한 조직 (수단 정부, 안힐라스에 진출한 열강 등)이 조직적으로 다른 집단을 학살하고 땅에서 몰아내고 노예화하는 말살 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반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당연하겠죠. 무장 없이는 안정도, 자유도 없을 테니까요. 어찌보면 모든 악의 근원은 군사력의 큰 불균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노스탤지아는, 그리고 불의한 정부에 대한 반군은 그런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바로잡는 존재라는 면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