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1화 (7)~(8): 추적, 동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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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하프엘프는 마치 오크들이 눈앞에서 달리고 있는양 망설임 없이 흔적을 따라갔다. 젖은 흙에 발자국 하나, 꺾인 나뭇가지에 걸린
천조각을 유심히 살피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쫓아가는 그의 실력은 따라가는 일행에게도 신뢰를 주었다. 그는 오히려 흔적이 너무
뚜렷해서 유인책이 아닐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면 신중할 수 있을 뿐
쫓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질이 잡힌 어려움이기도 했다. 아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쪽 산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향해 두어 시간쯤 걸었을까, 가는 길이 점점 오르막길이 되면서 그들은 나무와 풀섶이 빽빽한 작은 산의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턱쯤 와서 아스타틴이 멈추어서자 그의 시선을 쫓은 아라는 150m쯤 위에 인공 구조물을
발견했다. 작은 동굴을 2m 정도 높이의 조잡한 나무 울타리로 대충 두른 중간중간에 나무로 대충 기초를 쌓고 작대기와 가죽으로
위를 가린, 초소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성한 것들이 세 개 있었다. 초소마다 오크가 둘씩 들어가 있었지만, 아직 일행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흔적은 저곳으로 이어지네요.”

아스타틴은 동굴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는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신호한 후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어 나무와 덤불에 몸을 감추며
울타리에 다가갔다. 그런 그를 기다리며 아라는 초소를 어떻게 통과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최소한 바로 주변은 시야를 확보할 생각을
했는지 울타리에서 20m 거리까지는 나무나 큰 풀섶이 없었다. 숲 가장자리에서 울타리 문까지는 오크들이 다닌 흔적인 듯 풀이 얼마
없는 길이 보였다. 문 외에 딱히 들어갈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몸을 숨길 장애물이 없는 저 구간을 어떻게 눈에 띄지
않고 건너느냐, 그리고 일단 건너면 어떻게 들어가느냐. 정 방법이 없다면 그냥 정면돌파할 수도 있었지만, 안에 적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저쪽이 고지를 점거한 상황에서 왠만하면 피하고 싶은 선택이었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다. 마법사가 뭔가 쓸 만한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서 아라는 조용히
아스타틴이 상황을 보고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비탈을 되돌아 내려오는 아스타틴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간간히 보였다. 꽤 가까이 올 때까지 몰랐던 것을 보면 몸을 감추는
데는 익숙한 모양이었다. 일행이 모인 곳에 바싹 다가온 아스타틴은 작게 얘기해도 들리도록 손짓으로 그들을 불러모았다.

“저것들이 바보라서 다행이군요.”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초소에 있는 놈들은 자고 있어요.”

“잔다고?”

지카리가 확인하자 아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쩌면 울타리나 초소 꼴을 봤을 때부터
짐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돌아들어갈 곳은 있습니까?”

마법사 크세노바가 묻자 아스타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진 않았어요. 좀 더 들어가봐야…”

“가자.”

아라는 돌아서서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저것들이 자는 것이 사실이라면 들어가기는 의외로 쉬울지도 몰랐다.

“잠을 깨우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가죠.”

아스타틴이 말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까지 가서 울타리와 초소를 내다보았다. 역시 초소의 오크들은 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정말 함정은 아닐까?
하지만 어차피 함정이라 하더라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울타리를 통과하는 방법은 문을 통하거나 넘어가는 것밖에 없어보였다. 아니면 땅이라도 파야겠지만, 그럴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문은 울타리 전체와 마찬가지로 조잡해 보이기는 해도 굳게 닫혀 있었고, 밖에서 열려면 완력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오크들이 깨어나겠지.

“마법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마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좀 어렵겠지만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저 녀석들이 그걸 보고 있느냐겠죠.”

그는 지카리의 덩치를 한 번 훑어보고 덧붙였다.

“힘도 좀 들긴 하겠군요.”

“혹 안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아스타틴이 지카리에게 묻자 지카리는 울타리 쪽을 건너보더니 나무 밑에서 벗어나 천천히,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며 아라는
혹시 들킬까봐 가슴을 졸였지만, 다행히도 눈치를 챈 기색은 없었다. 물론 유인책이 아니라는 가정이었지만. 이윽고 다른 일행들이
따라가는 것을 보고 아라도 천천히 숲에서 걸어나와 울타리로 다가갔다. 적에게 보이는 위치로 나오자 갑자기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무엇 하나라도 잘못되면 이곳에서 그냥 죽을 수도 있었다. 아라는 그 두려움을 소중히 받아들여 품었다.
삶이 칼날 위에 한없이 위태로운 이 순간의 비할 데 없는 선명함을.

“깨어있는 녀석들이 조금 있네만…”

드래고니안은 돌아보지 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타리 너머에서는 거친 목소리로 전혀 모르겠는 말을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

속삭이는 소리가 살짝 쉭쉭거리며 지카리공은 조용히 덧붙였다.

“뚫고 들어갑니까?”

크세노바가 묻자 지카리공이 반문했다.

“다른 방법이 있나?”

“잠이라도 재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하며 아라니아카는 오크들이 잠들어 널부러진 초소를 흘깃 보았다. 활로 영원한 잠을 재워주고 싶었지만, 깨어있는 놈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가는 나머지를 깨우고 지원군을 부를지도 몰랐다.

“지카리공.”

조용히 부르자 지카리는 그녀를 돌아보며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둘이 깨어 있네.”

둘… 하나인 것만은 못했지만 해볼 만했다. 아직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갑자기 공격이 들어가면 대응을 못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둘을 한꺼번에 죽이면..”

드래고니안의 연녹색 눈이 그녀가 잡은 활을 향했다.

“할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그녀는 한 번 끄덕였다.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배운 대로 심호흡을 해서 손이 떨리지 않도록 심장박동을 가라앉히고 아라는 말했다.

“들어올려 주시겠습니까?”

드래고니안에 대해 들은 전설이 사실이라면, 또 그의 팔과 어깨에 불거진 힘줄과 근육을 보아도 아라를 어렵잖게 들어올릴 수
있으리라. 또 활을 쏠 만큼 흔들림 없이 받쳐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카리는 망설이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라는 마치 그가 자세를 낮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키가 커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깨에 타게.”

드래곤의 사절을 마치 계단에 오르듯 탄다는 점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목례하고 그의 무릎을 밟고
올라가 어깨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돌아보자 마법사는 손짓하며 뭔가 중얼거렸다. 공간이 잠시 일그러진다 싶더니 갑자기 세상이 느려졌다. 숲에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뒤에서 지켜보는 동료들도 마치 물 속에서 움직이듯 형편없이 느렸다. 그러나 마법사가 손을 내리는 속도는 정상이었다.
지카리가 그녀를 태운 채 일어나는 속도도 마찬가지.

땅이 멀어지자 아라는 순간 눈을 꼭 잡으며 지카리공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아, 높은 곳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엘프
그 미친 것들처럼 날짐승을 타고 하늘을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땅이 저 밑에 멀어지자 밑에 받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떨어져버릴 것이라는 오랜 공포감이 몰려왔다.

이윽고 그녀는 억지로 눈을 뜨고 느려진 세상을 내다보았다. 넓은 범위를 느리게 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 아마 그녀와 지카리가
빨라지는 주문을 걸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손을 진정시키고, 드래고니안의 비늘투성이 어깨를 잡은 손을 억지로
풀며 허리춤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냈다. 지카리공은 신기한 듯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마법인가? 썩 유쾌하진 않지만..”

크세노바는 뒤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효과는 1분 정도입니다.”

1분이면 충분했다. 잡동사니와 음식찌꺼기가 지저분하게 흩어진 안쪽 마당 가운데 한놈은 웃통을 벗고, 또 하나는 갑옷을 벗고 옷만
입은 채 치고받고 싸우는 두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울타리에 비스듬히 향하고 있는 반나신의 오크를 노려보며 시위에 화살을
매기고 아라는 긴 숨을 내쉬며 시위를 당겼다. 아마 주문의 영향권 밖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 같으리라. 호흡을 멈추고 그녀는
시위를 놓았다. 1m쯤 날아가고는 갑자기 느려진 화살의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따를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화살은 그녀가 노린 오른편 오크를 비껴갈 뻔했지만, 놈은 결정적인 순간에 동료에게 달려들다가 화살에 스스로 몸을
던진 꼴이 되었다. 맨가슴을 관통당한 오크는 뚝 걸음을 멈추더니 그윽..거리며 아주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투욱..
소리는 늘어지면서 낮았고, 땅에 닿자 먼지가 느릿느릿 피어올랐다. 상대방 오크는 어안이 벙벙해서 멈춰섰다.

“Gurash?”

다시 운에 기댈 수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 편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아라는 이번에는 한 호흡 동안 정지하며 남은 오크
쪽을 겨누었다. 오크가 돌아서기 시작했을 때 시위를 놓자 화살은 등으로 천천히 파고들어갔다. 놈이 등을 둥글게 꺾으며 고개를
젖히고 소리없는 절규에 누런 이 가득한 입을 크게 벌리는 동안 화살은 가슴으로 뚫고 나오며 공중에 핏방울을 흩뿌렸다.

아라는 지카리의 어깨에서 울타리 너머로 몸을 날렸다. 다른 오크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빨리 안에서 문을 열어야 했다. 뒤에서
크세노바가 급하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다시 세상의 속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떨어지는 것은 싫었지만 땅이 가까워오자 안심이 되었다.
막 착지하려는 찰나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지면서 잠깐 기다려 지금은 아직

동굴 앞에서

폴짝 데굴데굴~ 니아 착지! 10점 만점에 10점이네.
왜 10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똑똑한 니아 과자 받아요~ 으흠, 뭔가 문을 열어야 했지? 아라는 내가 바보인 줄 알지만~
니아는 사실 똑.똑.해. 정말루 정말로. 문 열어야 하는 거 알거든? 살금살금 하는 것도 알고. 옆에 오크 아저씨들은 계속 자네.
자, 목에 바람구멍을 뚫어줄게요. 자, 아저씨도. 그렇게 하면 어울리죠? 나 왔다고 일어나지 마요, 편하게 편하게 있어요.

영차영차. 빗장을 들면 문이 열리겠지. 자 조용조용, 죽은 아저씨들이 못 듣게. 지카리군같아가 문을 여는 동안 니아는 나머지
아저씨들도 재웁니다. 경비 서다 자면 안 돼요! 떼찌! 푸욱. 떼찌! 푸욱. 아, 이제 초소가 피투성이가 됐네. 다 아저씨들
때문이야. 피가 너무 많으니까, 꼭 피로 채운 주머니 같잖아. 또 찔러도 또 나오네? 와, 정말 많다. 니아가 좀 비워줄게요.
이제 시원하죠?

폴짝폴짝, 랄라랄라. 못생긴 오크 아찌 또 죽여줄까요? 예, 죽여주세요! 어머, 예의바르기도 해라. 어, 아저씨는 왜 깼어요. 더
자요, 네? 자, 이렇게 가슴에 칼을 박아주면 잠이 잘 오죠?

내려가니까 지카리군같아가 뿔났나봐요. 그럴 필요까지 있나? 있어? 있어? 재밌는데 지카리군도 해요~ 얼굴이 끈적끈적. 니아는
고양이세수 할 거에요! 니아아아옹 냐옹. 지카리군같아는 쳐다보지도 않네.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죽이니까 싫어? 죽이지 않고
사는 게 있어? 나에게는 선인 것이 다른 어떤 존재에게 악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선이자 악인 그 위대한 게임의 모든 것을
긍정하지 않고 당신이 자연의 사자라고 할 수 있어? 없어? 있..어?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예쁜아이? 알았어, 더 안 죽일게. 어차피 더 죽일 게 없어, 히잉. 내 화살이나 돌려줘요. 필요하단
말야. 죽일 게 나오면. 더 더 더.. 화살촉이 상한 것 같아. 다시 죽여버리고 싶네. 아저씨들 잠깐 살아나지 않을래요?

어? 목소리다! 다들 숨바꼭질 하네! 니아도 끼워줘요. 잘 숨을게요, 정말로! 술래 온다! 이쁜머리가 이번에는 좀 힘들대. 정말?
우릴 찾기 전에 우와아~ 잡아버리면 되잖아. 어, 술래가 화났어. 화나기 전에 말 좀 걸어주지. 따돌렸다고 이제 놀자고
쫓아오잖아. 나비 왔어? 니아 손 좀 닦을게. 슥슥. 니아는 똑똑한 아이야.

온다온다, 뛰어와! 오크다! 이쁜아이가 붕붕붕 퍼억-! 아프겠다. 또 있어! 여기 오크 가족 사나보다. 엄마 아빠 아기 오크.
오크 세 마리가 한 동굴 있어 아빠 오크 엄마 오크 아기 오크~

어, 조용하라고요 지카리군같아? 나 소리냈었나? 미안미안~ 조용할게요. 쉬잇. 어, 손가락에 피 있다. 빨가면 사과 사아과는
맛있어 먹어봐? 먹어봐? 할짝 우에엑! 퉤퉤. 오늘의 교훈, 아빠오크피는 먹지 맙시다. 하지만 아직 엄마오크 아기오크건 못
먹어봤으니까, 맛있을지도 몰라! 덥지도 차지도 않고 따악 맞으면 되겠지? 따악 다 맞아볼래요?

퉁! 어, 공기가 흔들려. 저 오크는 왜 떨어? 추워? 무서워? 난 항상 무서운 걸. 아라 그 멍청한 미친 계집이 나한테 다
버려버렸어, 그 많은 목소리와 두려움들을. 이 안은 조용하지 않아. 조용하지… 않아… 무서워.

키라키라키라키라.. 술래가 또 온다. 지카리군같아가 그래, 강! 행! 할 수밖에 없대. 강행! 강행! 죽이자! 오크아저씨들 영원히
안 무섭게 해줄까요? 춥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게?

쿵쿵쿵쿵 쿵쿵쿵쿵. 죽으려고 달려온다. 심장이 죽으려고 뛰어. 지카리군같아가 도끼를 들어요. 와아, 산이 움직여. 폭풍우가,
해일이 앞을 막았어. 콰앙! 콰앙! 산과 번개와 바다가 내리치면 무거울 거야, 그치? 눈물날 만큼 아플 거야. 혼자 갇혀버린 어둠
속에서 울부짖을 만큼, 아파 아파 아파…

눈 감으래. 눈 감으래! 깜짝 선물 줄 거야? 언제 뜨면 돼? 언제 언제?

눈 감아도 세상이 번쩍여요. 하늘이 갈라졌어요. 오크가 아야 해요. 어어? 눈이 아야했나봐. 히히. 하하하하하. 안아프게
해줄게요. 눈 아야 고쳐줄게요. 니아가 침 바르면 다 나아~ 아니면 화살침 한 대 콰악! 놔주면. 죽으면 다 낫잖아, 응? 그래도
되죠?

아빠 오크는 피투성이…

산이 무너져내려요. 산사태가 포효하며 달려가서 오크들을 삼켜요. 크아아아아.. 우직. 철퍽. 퍼억. 어? 오크가 둘이다. 위만
있는 오크 하나, 아래만 있는 오크 하나. 위만 있는 오크 얼굴은 놀란 것 같네요. 놀랐지, 응, 놀랐지? 용용용용 용의 조각이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지? 자기는 파리 하나 못 죽일 것처럼 성인군자연하던 저 위선자한테 한 방 맞았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본원적인 공포에 심장이 벌렁벌렁하면서 눈물까지 찔끔 났지? 응? 내가 그러니까. 내가 그러니까!

엄마 오크는 죽었어…

피융 피융- 나는 정의의 니아시다. 어엇? 배를 붙잡고 쓰러지네요. 배아파? 아프다고 내장을 꺼내면 못써. 그럼 죽잖아~ 히히.
죽는대! 죽는데!

덥썩! 나비가 나가신다. 우적우적. 맛있쪄 나비? 와작! 꿀꺽. 잘도 먹네 이쁘기도 해라~ 음식 뺏지 말라고 아앙 물고선 눈
굴리는 것좀 봐. 걱정마요 나비~ 천천히 먹어요. 아무도 안 뺏으니까.

붕붕붕 우웅우웅. 이쁜아이가 작대기를 돌리니까 바람이 나네요. 이쁜머리가 손을 요렇~게 하니까 공기가 오크를 벌벌벌 때려요. 착한
아이는 사이좋게 놀아야지! 자, 이렇게. 피융. 이번엔 목이 갈라졌네. 쿠웅쿠웅. 지카리군같아가 오크를 가루로 빻아요.

아기 오크는 너무 아파요…

이제 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없어, 없어.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면 죽여줄게요, 안 아프게. 나비가 퉷퉷 머리카락을 뱉네요. 피도
맛없고 털도 맛없나봐.

이제는 조용해요. 내가 가지고 싶은 그런 고요가 이곳에는 가득해요. 살점이랑 뼛조각이 흩어진 이 피투성이 진흙 위에 그냥 누워서 이
평화에 묻히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그건 정상이 아니니까.

용의 파편 아저씨는 이제 슬퍼 보이네요. 다른 인연으로 만나자고, 그때는 죽고 죽이지 말자고. 만나긴 어떻게 만나? 죽었는데.
죽였는데. 이제는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어요. 깨어나면 슬퍼서 엉엉 울지도 몰라요.

샤나야…

아야! 아야! 아파요.

아파요…

내가 미쳤다고, 이쁜아이? 안타깝다고요, 지카리군같아? 내가 미쳐? 미친 건 아라야. 아라! 견딜 수가 없어서 날 어둠으로 내쫓은
그 미친년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어. 난? 그녀가 참을 수 없는 모든 걸 끌어안고 언제까지 혼자 걸어가? 샤나,
엄마는 어떡해?

놀 사람만 있으면 이 안은 조금은 조용해져요. 니아는 똑똑하니까, 미치지 않았으니까 위험하고 중요한 일도 할 수 있어. 므우루를
찾자. 므우루! 므우루! 가자 이쁜머리, 이랴!

동굴이 휘잉~ 한숨을 쉬어요. 외롭고 차갑고 더러운 이 바람을 따라가면 그 끝에 내 안의 목소리들을, 하 많은 아픔을 잠재울 것이
있을까요. 견딜 수 없는 것을 마침내 견디게 될까요.

“가시죠.”

가요, 이쁜머리. 내려가요. 너와 나와 모두의 영혼에 있는 그 동굴보다 한결 자비로운 저 어둠 속으로. 아아, 내려가요. 저곳은
조용할지도 모르니까.

기묘한 일행, 대륙을 가로지르며 길고 긴 하루를 보낸 다섯은 땅에 널부러진 시체를 지나 동굴에 발을 들여놓는다. 불신과 불안,
불확실성 속에 토끼굴의 문턱을 넘은 그들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이다.

소감

이것으로 안힐라스 1기 캠페인 1화: 기나긴 하루의 기나긴 소설화가 끝났습니다. 나중에는 랜돌프 외전까지 있지만 그쪽은 먼저 본편부터 하고 써야겠군요. 1화 (7)과 (8)은 분량도 그렇고, 시점상 짝을 이루기도 해서 함께 올렸습니다. 추적자로서 아스타틴의 능력이 드러난 점이 마음에 들었고, 아라의 궁술, 크세노바의 마법, 지카리의 힘 등 일행의 장기가 전반적으로 잘 나타난 대목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대목의 플레이는 전술적으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해가서 즐거웠었죠. 활 쏘는 거나 시간마법의 효과 묘사 등이 신경쓰이면서도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투는 누구 시점으로 할까 좀 고민하다가 결국 니아로 낙착을 봤습니다. 쓰기 귀찮아서 자포자기한 걸지도(..) 모르지만 니아는 일행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또 궁수로서 멀리서 전투를 조망할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해서 시점인물로 가장 적합하기는 했습니다. 게다가 한 번쯤은 이 인물의 머릿속을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자주 들여다보는 건 정신건강에 바람직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의식의 흐름밖에는 이 인물의 시점을 활용할 길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해봤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정보전달 면에서는 좀 명확성이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그런 점도 이 기법의 재미겠지요.

겉으로는 마냥 헤헤거리는 니아가 내면은 의외로 어둡다고 무랑님이나 오체스님이 말씀하신 것도 기억에 남네요. 사실 저도 좀 의외였습니다만,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니아라는 인물은 원래 인격인 아라가 노예생활과 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서 생겼습니다. 아라가 추방한 감성과 충동성, 상처와 취약점의 혼합인 니아는 이성 없이 감성만 있는 불완전한 파편이고, 아라 역시 분노 외에는 감성이 별로 안 남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상처를 회복하거나 제대로 성장하고 변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아라에 대한 니아의 원망은 근거가 있습니다.(주:물론 이 설정은 다중인격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는 별개입니다. 다중인격 자체가 북미 외에는 거의 기록이 없는, 진위 자체가 논란이 있는 병이기도 하고요.) 그런 아라가 상처입은 자신을 직면하고 극복해야 그녀의 존재는 완전해지고 회복도 하겠지요. 그건 니아에게는 개체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온전한 삶의 재개이겠고요.

결국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외면의 이야기와 내면의 이야기가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겉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사건의 나열일 뿐이지만, 인물이 변하는 그 내면의 여행이 함께한다면 사건은 의미가 생기고 이야기가 되지요. (이론적 기반이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 생각일 뿐) 그래서 동굴은 물리적 동굴이지만 동시에 존재에 난 구멍이며 마음의 어둠이기도 하고, 일상의 공간에서 혼돈으로 가는 토끼굴의 입구이기도 합니다. 그 너머에서 우리의 일행이 어떤 이상한 나라를 지나 결국 자신의 핵으로 돌아올지 저는 그들의 동행으로서, 그리고 서기로서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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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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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에 대하여 >>

3 thoughts on “이오닉스 1화 (7)~(8): 추적, 동굴 앞에서

    1. 로키

      일행의 듬직한 어른이랄까요 ㅋㅋ 대미지 나오는 거 보면 아주 가슴이 떨리더라고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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