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피에나에 대한 바람, 혹은 욕심

도서출판 초여명에서 겁스용 배경책인 GURPS 실피에나의 출간을 발표하면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저같은 경우 약 2년 전에 국산 d20 규칙인 천명 카라를 예약구매했다가 개발중지 때문에 결국 환불받은 일도 있고 해서 말이죠. D20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예약구매까지 할 정도로 국산 RPG 개발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실피에나에 대해 초여명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도 기대를 고조시키는데 한몫 하고 있습니다. 초점을 가진 자유도, 내지는 제약된 자유도는 제가 보기에는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이라고 여겨집니다. 절대적인 자유도는 대개의 경우 무의미하며, 적절한 제약이야말로 창의성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장 쓸만한 배경 세계들은 그냥 넣고 싶은 걸 아무거나 넣은 배경보다는 아무리 방대해도 그 중심에는 어떤 한가지 주제의식, 혹은 발상이 있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마음에 드는 점은 실피에나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갈등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치물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얘기일 수밖에 없죠. 정치적 갈등이야말로 가장 포괄적인 갈등이기도 한 것이, 치밀한 도덕적 고민이라든지 신나게 치고받는 쌈질, 연인들의 밀고당기는 사랑싸움, 긴박감 넘치는 수사, 말이 비수처럼 날아다니는 외교의 장, 이권을 건 치사한 뒷치기, 전쟁의 참혹함 등등 온갖 종류의 모험과 갈등에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여러모로 기대되는 겁스 실피에나에 추가적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선, 규칙과 설정의 분리. 실피에나 캠페인을 돌려보고 싶지만 겁스를 사용할 생각은 없으므로 가급적이면 규칙은 책 뒷편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책의 대부분은 규칙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순수 설정이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내용을 찾기 위해 필요없는 내용을 많이 뛰어넘어야 하는 건 불편하니까요.

이와 관련해 추가적으로, 겁스 규칙상의 내용을 다른 규칙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잡이도 있으면 더욱 유용할 것입니다. 뭐 꼭 책 자체에서 할 필요는 없고 블로그라든지 다른 방법도 많겠죠. 특히 실피에나에 추가되는 규칙 같은 경우는 어떤 의도로 만든 것인지, 기본 판정과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되어 있는지 디자인 노트 같은 곳에 설명이 있으면 다른 규칙으로 전환하는데도, 또 진행자가 규칙을 고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 설정 자체에 대한 것이지만 권력기반에 대한 부분도 빠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경제력, 혈통, 연맹, 종교 등등. 특히 경제력은 쉽게 도외시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치적 갈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실피에나에서는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엄청나게 자세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계에서 돈과 힘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 짐작은 할 수 있을만큼요. 같은 맥락에서 경제 체제와 경제활동에 대한 정보는 개괄적으로만 있어도 설정을 더욱 풍부하고 진정성 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인간관계의 부각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혼자 생각이긴 하지만 정치적 성격이 짙은 실피에나의 설정은 여성들에게도 매력 요소가 아닐까 하는데, 인간관계는 정치적 갈등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갈등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특히 많은 경우 여성이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거의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백작과 혁명군 지도자가 죽마고우이자 전우였으며 한 여자와 삼각관계에 있다는 식의 멜로드라마를 반드시 바라는 건 아니고 (그런 건 진행자가 만들어 붙이면 됩니..퍽), 설정 속의 인물들 사이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망이 세계 속의 사건과 갈등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볼만한 근거가 있으면 캠페인을 꾸미는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특히 캠페인북으로서의 성격을 생각하면 인물과 조직 관계도가 있어도 도움이 될지도요.

이상과 같이 국내 RPG계에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GURPS 실피에나에 대한 저의 바람, 혹은 욕심을 적어보았습니다. 뭐 개발 진척이 얼마나 됐는지도 잘 모르겠고 반드시 반영해달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점도 생각하면 더욱 멋진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나름 떠오른 것들이랄까요. 가뜩이나 시간에 쫓기고 있을 개발자분들에게 부담을 더해드리려는 의도는 아닌 겁니..<-

실피에나 정말 기대되는군요. (벌써 그 소리만 몇번째냐) 이번 방학때 귀국하면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6 thoughts on “실피에나에 대한 바람, 혹은 욕심

  1. Xenosia

    방금 축하글 남기고 왔습..
    오늘 서점에서 조금 재밌는 프랙탈 개념을 보고 왔는데
    쬐끔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 저 내일 근로자의 날이라서 과정 휴강입..음하하[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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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배경 세계와 프랙탈의 연관성이라.. 재밌겠는걸요. 왠지 중학교때 본 쥬라기 공원의 추억이(?)

      참, 2만 힛트 이벤트에 아무래도(..?) 당첨되신듯 한데 뭐 할지 나중에 MSN에서 얘기해 보죠. 아마 제가 공사가 덜 망한(..) 2~3주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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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orches

    시험도 다 끝나고 오랜만에 들린 orches입니다~ 아.. 들어오자마자 이런 멋진 걸 포기할 생각입니까? 자, 동감하시는 동지 여러분 발간되는 순간 지르는 겁니다! 하고 외치시는 걸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로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온다면 굉장히 매력적인 세계관이어서.. 얼마든지 애정 쪽쪽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 [퍽]

    여담으로 현실에서는 로키님께서 말씀하신 ‘백작과 혁명군 지도자가 죽마고우이자 전우였으며 한 여자와 삼각관계에 있다는 식의 멜로드라마’ 보다 더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기막힌 사연이라든지.. 갈등이 많으니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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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기대되긴 하지만 뭐 얼마나 좋을지는 나와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 (흥) 서명된 한정판이라든지 나온다면 기다리지 않고 살 용의가 있긴 합니다만..(퍽)

      예, 원래 현실이 더 기가 막히죠. 그렇다 해도 현실과는 달리 허구에는 개연성이 필요한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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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행인1

    바램이 아니라 바람이 맞습니다. 바램은 ‘ㅣ’ 역행동화로, 국어 문법에 어긋나는 동화현상입니다. 바라다의 어간 바라 +명사형 종결어미 ‘ㅁ’이 붙어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는 그냥 눈팅만 하는데, 로키님은 번역도 하시는 분이셔서, 댓글을 남깁니다. 무례하다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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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감사합니다~^^ ‘바람’인지 ‘바램’인지 긴가민가하다가 그냥 평소 쓰던 쪽으로 했는데, 그게 잘못된 거였네요. 하나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틀린 것 있으면 지적해 주시고, 눈팅 외에도 기분나면 댓글 남겨주십..(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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