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4~6화 (3)&(4): 마법사들, 프리포트의 새벽

마법사들

“거기 다들 스톱스톱~”

쿠라, 혹은 엘리샤가 엘프소녀의 가느다란 목에 칼을 대며 꾹 누르자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지카리는 가슴 깊숙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쿠라 뒤편에 있던 형체들이 흐느적흐느적 걸어나왔다. 생전에는 인간이었던 듯한 그들은 군데군데 부패의 흔적이 드러나는 잿빛 피부에
초점 없는 눈을 한 채 저택 입구에서 부시럭부시럭 몰려나와 쿠라와 소녀 양옆에 포진했다. 그들 뒤를 이어 검은 로브를 입은 키큰
남자가 걸어나와 쿠라의 왼편에 섰다.

“얌전히 죽어주면 제대로 미라로 만들어줄게~”

쿠라의 말에 크세노바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는 건 어때?”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 쪽이 뭔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좀비들이 일제히 발을 질질 끄는 걸음으로, 빠르지는 않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러운 생물, 혹은 사물 (死物)의 벌린 입에서는 그어어어.. 하고 고통인지 적개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라는 활을 앞줄의 좀비에게 겨누고 시위를 놓았다. 진흙이 갈라지는 것 같은 팍 소리를 내며 화살이 몸에 박힌 좀비는 잠시 몸을
떨더니 다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라를 보고 쿠라는 킬킬거렸다.

“역시 깜둥이들은 머리가 안 도나봐?”

“화살은 큰 효과가 없어요!”

크세노바의 외침에 어쩌라는 소리냐는 듯 아라가 보자 그는 말을 이었다.

“로브의 마법사를 먼저!”

끄덕이며 아라가 다시 활을 준비하는 동안 지카리는 이를 악물고 좀비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무게가 실린 육중한 걸음이 땅을 쿵쿵
울렸고, 그는 도끼로 좀비 하나를 내리쳐 둘로 갈라놓았다. 그러는 동안 차가운 표정의 아스타틴은 앞으로 나서며 봉으로 좀비
얼굴을 뭉개놓고 뼈를 부러뜨렸고, 랜돌프의 단검이 쉭쉭- 차갑게 빛나며 좀비 머리와 사지를 공중에 흩날렸다.

갑자기 주변에 붉은 기운이 돌고 공기가 열기로 일렁이더니 크세노바와 아라의 머리 위에 불로 만든 구름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며 점점
커졌다. 불구름은 작은 불씨를 비처럼 내렸다. 불씨는 대부분 가죽갑옷에 부딪혀 파스슥 꺼졌지만, 아라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며 욕을 내뱉었다.

크세노바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그는 불의 비 바깥편에 다시 나타났다. 냉정한 집중력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쿠라를 향해 손을 젓자
그녀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꺄…꺄악!”

쿠라가 쿠당 넘어지는 동시에 불의 구름이 흩어지더니 비도 사라졌다. 소녀는 공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머리나 좀 식혀라.”

크세노바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남자 마법사 쪽이 주문을 마치며 손짓하자 지카리 뒤에 드리운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땅에서 똑바로 일어났다. 그 부자연스러운 형체가
도끼를 휙 내리치는 찰나 돌아본 지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공격을 피했다. 마치 어두운 거울을 들여다본 듯
잿빛과 흑색으로 형상을 갖춘 자신과 마주친 그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는 그림자 지카리의 가슴에 콱 박혔지만, 그림자는
잠시 흔들렸을 뿐 멀쩡하게 물러났다.

그 순간,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좀비들이 가장 가까운 지카리에게 먼저 몰려들었다. 그림자 자신의 공격을 피하다가 지카리는 균형을
잃었고, 그 위로 좀비들이 와글와글 몰려들더니 양팔을 쳐들어 내리치며 가격했다.

“지카리공!”

아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 앞에 있는 아스타틴과 랜돌프에게도 이미 좀비들이 덮쳐오고 있었다. 랜돌프는 몸을
날려 일격에 좀비 하나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또 다른 좀비의 눈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다가오는 누더기투성이의 몸집 작은 여자
좀비에게 아스타틴이 봉을 내리치자 콰득! 하고 갈비뼈가 부서지며 날카롭고 하얀 뼛조각이 잿빛 살점 사이로 드러났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가 적대적으로 우어어 포효하자 아스타틴은 다시 봉을 탁 내리쳐 목을 꺾었다.

”…죽여버리겠어.”

저택 입구 앞에 쿠라가 이제 막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앉는 모습을 그는 차갑게 노려보았다.

로브를 펄럭이는 엘프 마법사들이 일행의 뒤편에 서서 주문을 외우자 좀비 사이에 섬광이 일면서 폭발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좀비들이
숯덩이가 되거나 머리나 팔다리가 날아가면서 충격파에 쓰러졌다. 두 다리가 날아간 좀비 몇이 팔로 몸과 잿빛 내장을 끌고 계속
다가왔지만, 또 다른 섬광이 번쩍하다 사라지자 땅에는 끈끈한 재만 남았다. 아라는 엘프 마법사들을 슬쩍 돌아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 느림보들.”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분수의 물이 공중에 높게 솟구치더니 투명한 여인의 형체가 되었다. 물의 정령이 손을 내리치자 그녀의 손은
파도가 되어 좀비들에게 몰아닥쳤다. 거대한 ‘철썩’ 소리와 함께 일행에게도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그렇게 좀비의 수가 줄어가는 사이 지카리를 덮어버렸던 좀비들이 흔들리더니, 지카리가 그들을 한꺼번에 떨쳐내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 지카리가 도끼를 휘둘러오자 어깨에 어두운 도끼형체가 깊이 박힌 지카리는 순간 굳었다가 고목처럼
쓰러졌다. 동시에 그림자 지카리도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납작해져 땅에 누운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지카리에게 좀비들은 다시
양팔을 내리쳤지만, 타격에 좀비들 자신의 팔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날아가면서도 지카리의 갑옷에 막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연이은 마법과 물리 공격에 좀비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아스타틴이 그들 사이로 달려갔다. 휘둘러오는 팔을 몸을 숙여 피하고 또 다른 공격을 봉으로 막아내며
그는 신음하고 발을 끄는 좀비 무리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저 바보놈이…”

좀비의 찐득찐득한 검은 피와 부스러져 내리는 살점을 단검에서 털어내며 랜돌프는 혀를 차다가, 재빨리 몸을 돌려 새로운 좀비 공격을
단검으로 쳐냈다.

병사들을 처리한 도보기병대가 달려와 좀비들과 교전하면서 전세는 본격적으로 기울었다. 비틀거리며 막 일어서려던 쿠라는 얼굴에
아스타틴의 봉을 정면으로 맞고 쿠당 쓰러졌다.

“아사나스 몫이다.”

그녀에게 내뱉어준 아스타틴은 놀란 엘프 소녀와 눈앞의 좀비떼 사이를 막아서고 피와 살점, 노랗게 썩은 뇌수가 묻은 봉을 쳐들었다.

남자 마법사를 노려보며 화살을 조준하고 있던 아라가 마침내 활시위를 놓는 순간, 엘프 마법사가 주문을 마치며 활을 가리키자 활은
하얗게 지지직거리며 번개 같은 불빛을 내뿜었다. 화살은 그 순백의 전광 (電光)을 끌고 좀비떼 위로 높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마법사의 후드 아래 얼굴에 내리꽂혔다. 파지지직- 빛이 번쩍하더니 마법사는 뒤로 천천히 넘어가 풀썩 길게 누웠다. 후드가 뒤로
날리며 드러난 얼굴은 새까맣게 탄 채 김이 올랐다.

“저런 건 또 처음이로구나.”

아라는 번쩍이는 활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부터는 뒤처리에 불과했다. 엘프들이 무기와 마법으로 좀비를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정원은 차차 조용해져갔다. 마지막 남은 몇
마리는 전사들이 담장 구석에 몰아넣는 동안 마법사들이 화염 주문을 쓰자 살아있는 횃불처럼 타오르더니 이내 숯이 되어 하나씩
쓰러졌다. 몇 안 남은 병사는 마법사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곧 항복했다.

“지카리공!”

지카리에게서 좀비들을 쓸어내고 마법사 몇이 둘러서서 주문을 외우자, 지카리는 조금 정신이 드는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 아라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면목이… 없군…”

지카리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눈빛에는 그 부자연스러운 적과 싸운 공포감의 흔적이 그늘졌다.

“아닙니다. 쉬고 계십시오.”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은 쓰러졌습니다.”

떨리는 얼굴근육을 움직이며 지카리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이는…?”

아라는 저택 입구 쪽을 건너다보았다. 그쪽에서는 엘프 전사 일단이 소녀를 둘러싸고 데려가는 동안 아스타틴과 소녀가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너… 너희들… 이런다고…”

쿠라가 입구의 대리석 기둥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서고 있었다. 엉망이 된 연갈색 머리, 코와 뺨에 주근깨가 가볍게 흩뿌린 갸름한
얼굴이 젖혀진 후드 밑으로 드러났다. 아스타틴에게 맞은 광대뼈는 곧 시퍼렇게 멍이 들려는 듯 어둑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랜돌프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넌 졌다, 미친 마법사 계집.”

그가 이를 드러내고 단검을 빛내며 다가가자 쿠라는 뒷걸음질치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멜코르 상고로드림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랜돌프가 척, 걸음을 옮겨 다시 가까워지자 쿠라는 주저앉은 채 입구 옆의 벽에 더욱 등을 갖다붙였다.

“시… 싫…”

아라가 랜돌프의 뒤편에서 걸어오더니 그를 지나쳐 쿠라에게 향했다.

“이 여자는 내 몫이다.”

아라는 여자 마법사의 로브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더니, 쿠라가 겁에 질려 내는 찍 소리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입술에서 피가 팍 튄 쿠라는 멍해진 눈으로 다크엘프를 마주보았다.

“뭐… 뭐야 깜둥이 주제…”

아라가 목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자 쿠라의 목소리는 ‘큭’ 하고 잦아들었다.

“난 깜둥이라 감정만 앞서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아라는 허리의 스몰소드를 뽑아 쿠라의 목젖에 갖다댔다. 속삭이는 소리는 거의 유혹적으로 달콤했다.

“말을 안 들으면 이대로 죽여버릴지도 모르겠구나.”

“꺄… 꺄악!”

마법사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멜코르 상고로드림은 어디 있지?”

아라는 랜돌프의 질문을 반복했다. 쿠라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고개를 저으려 하자 아라는 그녀의 목을 콱 밀쳐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박았다. 아스타틴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동안 랜돌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말해!”

“시… 싫어…”

쿠라는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간신히 말했다.

“마…말했다간 주…죽어…”

“그래? 그렇다면 지금 죽여주지.”

아라는 입술을 핥았다.

“아라니아카, 그 정도면…”

크세노바가 보다못해 나서자 아라는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쿠라에게 몸을 돌렸다.

“아 그렇지, 그 이전에.”

억센 손에 머리채를 확 휘어잡히자 쿠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붙든 손을 할퀴었다. 아사나스가 엘프 전사들 사이로 걸어나오며 그런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제 부상이 말끔히 나은 듯 가우르의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아라는 그 앞으로 쿠라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갔다.

“이년이다, 아사나스.”

아사나스는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저앉아 떠는 쿠라에게 천천히 다가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얼굴을 들이댈 뿐. 얼굴에 핏기가 가신 쿠라가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그녀의 로브 아랫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라는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말하면 죽는댔지, 쿠라?”

“사… 사… 살…”

흑마법사는 가우르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창백한 입술로 더듬거렸다.

“말하지 않으면 이게 네 죽음의 모습이다.”

아라는 무표정했다. 크세노바는 혀를 차고 앞으로 나섰다.

“마탑 전체보다 멜코르가 더 무서워?”

그는 마치 오늘 점심은 뭐 먹었느냐는 듯 태연히 물었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해봐.”

쿠라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밤의 어둠이 더욱 깊어지면서 저택 정문의 기둥 사이에 불길한 암흑이 스멀거렸다. 그 소름끼치는 기운을 알아챈 사람이 하나 둘씩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데 그 어둠의 중심, 저택 입구에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날 찾으러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라는 그 목소리에 흠칫 굳었다.

“수많은 땅을 넘나들었느냐. 저주받은 종족의 딸아.”

정원에 울리는 남자 목소리는 세련되고 풍부했지만, 그 외형적 특징 외에 ‘사람’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온기나 인격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나락에서 부는 바람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가 부딪쳐 오자 엘프 전사들마저 몸을 떨었다.

저택에 소용돌이치는 어둠은 빛이 없는 공백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빛도 꿰뚫을 수 없을 만큼 짙은 그 순수한 칠흑에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이질감이 있었다. 지카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일어서서는 어두워진 문을 마주보았다.

“네… 네 이놈…”

아라는 이를 악문 채 제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모습… 모습을 드러내거라, 이… 이 겁쟁이놈!”

아라는 활을 잡으며 호통을 치려 했지만,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저택 입구에서 번져나오는 어둠에 마치 삼키운 것 같았다.

“흥분은 금물입니다.”

문을 어리둥절하게 보던 크세노바는 그녀를 말렸다.

“어린아이와 페어리나 죽이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

아라는 얼굴이 공포에 굳은 채 마치 두려움을 쫓으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싸우려면 썩 모습을 드러내거라, 흑마법사.”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공중에 울렸다. 문이 아니라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피부에 불쾌한 압박이 되어 눌러왔고, 공기 중에 죽음과
같은 냉기가 되어 스며들었다. 어둠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엘프 전사들이 무기를 다잡으며 주변을 경계했고, 마법사 하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것이다…”

마침내 웃음을 그치며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 증오… 그 분노… 그 투쟁심…”

말하면서 목소리는 마치 흥분한 듯 고조되었다. 아스타틴은 혐오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余)는 그게 마음에 들어서 너에게 그 구차한 삶을 이을 자비를 주었지.”

마법사의 목소리는 어루만지듯 나지막하고 부드러워졌다.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프라드하나?(주:다크엘프어로 ‘전리품’)”

아라는 말을 분간할 수 없는 분노의 소리를 내지르고는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러다가 크게 휘청인 그녀가 돌아보자 아사나스가 맨
발목을 꼭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피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빨은 쓰지 않고 있었지만, 주인을 올려다보는 노란 눈빛은
이로 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그런 가우르를 마치 울 듯 구겨진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아라는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싫어… 싫어… 죽어버려… 이 개자식…”

잠시의 고요 속에 여러 목소리가 청아하게 영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인연을 매듭짓기는 빠르지, 저주받은 종족의 딸아.”

멜코르 생고로드림의 목소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선물을 남겨놓고 가지.”

엘프 마법사가 주문을 외치는 순간 밝은 빛이 확 번지면서 어둠을 거두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저택 앞에는 거대한 형체가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점차 뚜렷해졌다. 불꽃이 일렁이는 가죽 날개가 펄럭 소리를 내며 밤공기를 휘저었고, 미늘처럼 가장자리가 겹치는
비늘로 뒤덮인 몸은 두 발로 선 도마뱀 비슷하면서 엄청나게 근육질이었다. 발톱이 난 한쪽 손에는 사람 둘의 키를 합친 것만한
대검을 들고, 다른 손에는 거구를 가릴 만한 방패를 든 괴생물의 긴 꼬리는 위협적인 갈고리를 번득거리며 쉭쉭 양옆으로 움직였다.
괴물의 모습이 완전한 실체를 갖추는 것과 맞추어 멜코르의 냉기어린 웃음소리는 차차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이건 또 뭐야?”

랜돌프는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뽑아 경계했다. 엘프 전사들은 즉시 소녀를 둘러서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사퀴엘, 하급악마입니다.”

크세노바는 황금빛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그 말에 아라는 이를 악물었다.

“뭐하는 자이길래 악마를…”

샤퀴엘이 고개를 들어 포효하자 소리에 공기가 진동하면서 뼈까지 소름끼치게 울렸다.

“다들 조심해요!”

아스타틴이 외쳤다.

샤퀴엘은 불덩이같이 타오르는 눈을 번득이며 길다란 입을 쩍 벌려 이빨을 잔뜩 드러내더니 펄럭.. 날아올랐다. 날개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는 지상의 전투원을 향해 똑바로 하강했다. 벼락이 시야에 잔광을 남기며 악마에게 내리꽂혔고, 뜨거운 증기가 강타해오자
다시 그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샤퀴엘은 대검을 내리쳤다. 땅에 주저앉아 떨고 있던 쿠라를 향해.

크세노바가 살짝 손을 젓자 쿠라는 좀전에 크세노바가 그랬듯 모습이 희미해졌다가, 샤퀴엘의 대검이 땅에 우지끈 박힌 바로 옆에 다시
나타났다. 눈이 커다래져서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 아사나스가 그런 그녀 뒤로 소리없이 쫓아갔다.

“이 멍청아, 죽기 싫으면…!”

크세노바의 외침에 샤퀴엘의 불타는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쳇.”

콰직… 소리와 함께 악마는 대검을 땅에서 뽑아냈다. 그런 샤퀴엘과 크세노바 사이를 지카리의 덩치가 막아섰다. 샤퀴엘이 가소롭다는 듯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강풍을 일으켰을 뿐 지카리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지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창과 화살, 마법이 지상의 전사와 마법사에게서 샤퀴엘에게 날아들었다. 크세노바 역시 손을 내밀자 공기가 크게 물결치면서 악마는
비틀거렸다.

아라는 활시위를 귀 뒤로 당겼다가 놓았다. 이번에도 화살이 하얀 빛을 번쩍이며 날아가서 샤퀴엘의 근육질 목에 맞자 전광이 확
번쩍하더니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악마는 다시 한 번 포효하고는 크게 휘청거렸다. 날개의 움직임이 점차 약해지면서 샤퀴엘은
땅에 묵직하게 떨어져내렸고, 추락하는 길에 분수를 들이받아 산산조각냈다. 분수를 거쳐 추락의 속도가 줄어든 샤퀴엘의 거대한 형체는
지카리 위로 쿠당탕 무너져내렸다.

“지카리공!”

아라가 활을 내리며 달려갔지만, 샤퀴엘의 형체는 잠시 붉게 빛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흠… 돌아간 건가.”

크세노바는 말하며 아라와 함께 달려가 지카리를 부축했다.

”…점점 힘든 싸움이 되어가는군…”

지카리는 도끼로 땅을 짚어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아라가 걱정하는 말에 괜찮다고 하는 그의 눈은 지쳐보였다.

분수의 물이 새어나오면서 정원은 재와 진흙, 점액이 뒤섞인 진창이 되었다. 그 위로 아사나스는 쿠라의 목을 물고 질질 끌고왔다.

“크..크세노바!”

마법사는 눈의 초점이 풀린 채 절박하게 재잘거렸다.

“우…우리 알던 사이잖아. 그…그러니까…”

“뭐, 마법사 네가 목숨도 구해주기는 했지.”

아라는 그를 흘깃 보며 말했다. 크세노바는 귀찮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가? 저것이 갱생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아라는 눈빛을 어둑하게 빛내면서 활을 꽉 쥐었다

“아니면 생고로드림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자의반 타의반쯤인 것 같아서 물어보겠는데…”

크세노바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는대로 말해봐.”

“모… 몰라.”

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피했다.

“그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기셨을 거야.”

아라가 위협적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크세노바는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잠시 턱선이 경련하며 그를 노려보던 아라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법사들이 다가와 쿠라를 결박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행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시군요.”

그들이 돌아보자 처음 프리포트에서 그들을 맞아주었던 노스탤지아 요원, 깡마르고 키큰 인간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전 페어리 사건의 주범을 모조리 사로잡으시다니.”

“다 잡지 못했다.”

랜돌프가 저항없이 묶이는 쿠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스승이 남아있지.”

다른 생각을 하는 표정으로 아라가 말을 받았다.

“그쪽이 진짜 문제겠지요.”

크세노바는 끄덕이더니, 쿠라를 연행해가는 마법사들에게 가서 눈과 귀를 가리고 입에 재갈도 물리라고 조언했다.

“집주인은 어떻게 되었지?”

아라가 문득 물었다.

“저택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요원이 말했다.

“마법사들이 하는 말로는 내장이 썩어 죽었다는군요.”

“생전에도 그렇지 않았나?”

아라가 무심히 묻자 요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페어리 녀석들은 바다엘프 배에 무사히 실은 거냐?”

랜돌프의 물음에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아이만 기다리고 있지요.”

그는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소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그때 보고했던 여자… 셀라나 역시 같이 보내야겠다.”

소녀를 보며 아라가 말하자 아스타틴은 흠칫 놀라더니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는 것이…좋겠죠.”

그는 다짐하듯이 말을 이었다.

“셀라나를 위해서도… 당장은 안전할…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는구나, 패스파인더.”

그를 곁눈질하며 아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서 셀라나양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요원이 끼어들었다.

“지금 항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쳐들며 푹 패인 눈을 아스타틴에게 향했다.

“다만, 가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스타틴이 얼굴을 붉히는 사이 아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구나. 아사나스!”

끌려가는 쿠라를 입맛을 다시며 보던 아사나스가 잿빛 어둠 속에 노랗게 빛나는 눈을 그녀에게 돌렸다. 아라는 가우르를 향해
아스타틴을 밀쳤다.

“이 녀석을 항구로 태워가주겠느냐?”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길은 네가 알겠지, 패스파인더.”

아스타틴은 어색하게 아라를 돌아보다가 설레는 기색으로 아사나스의 어깨에 한손을 올리고, 한쪽 다리를 안장에 걸쳤다. 그 순간
아사나스가 확 일어서며 출발하자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아야 했지만.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려면 타는 품새는 좀 고쳐야겠구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프리포트의 새벽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등뒤의 하늘이 잿빛으로 첫 새벽 빛을 밝히고 있었고, 바닷바람이 새벽의 청량함을 품고 불었다. 아직
어두운 서쪽 하늘과 그 아래 절벽을 배경으로 선착장에 선 젊은 여자를 보고 아스타틴은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뭇머뭇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아사나스가 고개로 다리를 부드럽게 밀었다.

출발할 준비를 하며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아스타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셀라나 앞에 섰다. 북적거리는 선창 위에
서있는데도 왠지 이 순간만은 둘만 있는 듯 친밀했다.

“안전한 여행 돼요… 셀라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빛에는 평온한 기쁨과 아쉬움이 함께 섞여들었다. 어쩌면 아쉬움은 그의 착각일까.

“노래… 다음에 다시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가볍게 인사했다.

셀라나는 그의 뒤편으로 눈이 가더니 밝게 미소지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잊지 못할 거에요.”

그의 등뒤로 다가온 아라, 랜돌프, 크세노바와 지카리는 역시 셀라나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와 아스타틴은 서로
자꾸 시선이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아스타틴은 가슴이 확 트이면서 동시에 작게 찌르듯 아파왔다.

“이제 가지요.”

다크엘프 요원이 셀라나에게 선창에 묶은 보트를 가리켜 보였다. 어둑한 절벽을 뒤에 두른 채 앞바다에서 기다리는 배를 향해 엘프
전사들과 다른 요원들이 탄 보트가 하나하나 출발하고 있었다. 엘 라세 쿠다라고 불린 어린 소녀가 주변을 경계하는 전사와 마법사
일단과 함께 탄 보트도 새벽의 어스름 속에 움직여가는 모습이 보였다.

셀라나는 어깨에 두른 얇은 쇼올을 꼭 붙들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잡지 못하고 지켜보다가, 유달리 찬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쳐온 순간 아스타틴은 그녀를 불러세웠다.

“셀라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그는 서둘러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느라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는 올려다보는 그녀와 순간 눈을 마주치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과 놓아주어야 하는 당위 사이에
갇혀, 심장이 몇 번 뛰는 사이 아무 말도 못하다가 아스타틴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지 않겠어요?”

“예…”

셀라나는 시선을 낮추며 미소지었다. 뺨에는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

“꼭… 돌려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그 미소에 담긴 약속에 그는 마침내 팔을 풀 수 있었다. 요원이 보트에 타며 다시 부르자 그녀는 황망히 가서
에스코트를 받으며 보트에 탔다. 다시 돌아보는 셀라나에게 아스타틴은 한 손을 들어보였다. 또 인연을 맺고 또 떠나가는 뒷모습은
익숙한 아픔이었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진짜였다. 그 희망을 위해서라면 그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보트는 아침의 첫 황금 빛이 막 비쳐오는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일행은 말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나중에는 또 얼마나 놀림을 받을까 생각하자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지만, 이 순간은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바다 위로 불어오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프리포트의 아침을 함께 맞이했다.

소감

전투장면이란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쓰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는데, 의미가 있게 쓰려면 어렵죠. 플레이의 재미와 글의 재미 사이에 괴리가 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은 거의 리플레이대로, 중복이나 반복 부분은 줄이고 조금씩 재구성하면서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냥 원본 전투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어서 외부 시점을 사용했고요. 이만큼 일행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했다… 하는 게 극적 의미라면 의미겠는데, 여전히 좀 확신은 없습니다.

‘마법사들’ 꼭지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멜코르 상고로드림의 등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스터 삭풍님도 포스있는 등장이었다고 칭찬해 주셨고, 절대악이라면 절대악이라고 할 수 있는 멜코르의 속성이 드러난 것 같아요. 그러나 과연 실제로 붙으면 그만큼 값을 할 것인가…가 문제로군요. 멜코르가 허망하게 떡실신할 경우 이 부분 글은 차후 수정합니다 (??).

마지막 ‘새벽’ 꼭지는 정서와 심리를 표현하면서도 글을 간결하게 쓰려는 시도였습니다. 아무리 얌전한 남자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음흉해진다는 것이 지론인지라, 원본 로그에서 미묘하게 바꾼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원본: 외투를 얌전히 접어서 셀라나에게 건네준다.
소설본: 외투를 둘러준다는 미명으로 어깨에 팔 한 번 둘러본다!

하는 차이였죠. 물론 저런 건 음흉한 행동은 아니고 신사적인 행동이지만, 너무 좋고 자꾸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꾸 접촉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의도가 음흉해요! (처억) 그래도 역시 개인차는 있는지라 오체스님께 자문을 구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이대로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프리포트 부분이 끝났군요. 여기서부터 일행은 헤루모르, 제국령, 그리고 제국 총독부가 있는 하노버를 누빕니다. 그 다음엔 아직 플레이를 안해서 모르죠, 뭐. 어떻게든 될 거라 믿어요. (룰루랄라)

2 thoughts on “이오닉스 4~6화 (3)&(4): 마법사들, 프리포트의 새벽

    1. 로키

      오 언제 가려나..가 아니라 아 맞다 갔었쥬 (퍽) 로그는 없어도 소설에는 써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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