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1화 (6):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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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후, 허탈하고 얼굴이 굳은 채로 그들은 페어리 마을로 가는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부탁받은 아카마카 열매는 구하기는
했다, 비록 반으로 쪼개진 채 아사나스의 안장주머니에 처박혀 있었지만. 열매는 따서 집어넣은지 얼마 안 되어 갈라지며 지독한
악취를 내뿜었고, 마법사가 마법으로 바람 같은 것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하프엘프가 그랬듯 다들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건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마법사가 사람 사냥꾼을 돌아보며 물어보아도 사냥꾼 역시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마법사 역시 덩달아
고개를 저으며 한숨지었다. 옆에 하프엘프는 아직 창백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게 장난이라면 이 작은 친구들은 조금 심한것 같군.”

드래고니안의 말에 아라도 완전히 공감했다. 돌아가자마자 므우루에게 항의할 생각이었다. 이런 일에 사람을 끌어내다니, 노스탤지아
놈들! 아사나스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아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꼭 쥐어졌다.

그 순간 쿠구궁! 하는 폭음이 숲을 뒤흔들더니 이내 나무 위로는 연기가 올랐다. 정면, 분명 페어리 마을 방향이었다. 나무들의
어머니여…

빨라진 심장박동에 맞추어 걸음은 어느새 질주가 되어 있었다. 아사나스가 옆에 나란히 달리는 동안 놀란 동료들이 쫓아왔다. 바람을
타고 기묘한 괴성 또한 들려오자 더 지체할 수가 없이 아라는 달리며 그대로 아사나스의 등에 올라타 무릎으로 박차를 가했다.
양옆으로 나무둥치와 풀섶이 무서운 속도로 스쳐갔고, 얼굴을 때려오는 나뭇가지를 피해 그녀는 아사나스의 검은 목 위로 몸을 낮게
숙였다.

마을이 가까워 오면서 공기중에 연기가 짙어졌고, 탄내가 났다. 두 인간이 고함치듯 주고받는 대화가 등뒤로 멀어져갔다. 달리며
아라는 활을 손에 들고 화살을 시위에 매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폭음이 몇 번 더 땅을 뒤흔들었지만, 아사나스는 그럴 때마다 잠깐씩
속도를 늦추어 균형을 잡으면서도 줄기차게 마을로 달려갔다.

나무가 끝나고 아까 전의 꽃밭이 나오자 아사나스는 우뚝 멈춰섰다.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분노인지,
놀라움인지, 둘 다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화사하던 페어리 꽃밭은 전부 불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날개가 뜯긴 페어리 시체가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고, 탄내와 폭약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찔러왔다. 살아남았지만 거의 정신이 나간 듯한 페어리 몇 마리만 ‘므우루’라는 이름 외에는 알 수 없는 말을
울부짖으며 배회했다.

“이럴 수가!”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한 마법사의 탄식이 들렸다. 가뜩이나 핼쓱한 하프엘프는 그저 경악해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노예사냥꾼은 살아남은 페어리에게 달려가 그들의 언어로 뭔가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지옥도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간 아라는 바닥에 페어리보다 훨씬 큰 낯선 시체를 몇 구 발견했다. 땅딸막한 체구와 불끈불끈한 근육,
마지막 단말마에 벌린 입에서 삐져나온 긴 엄니에서 그녀는 세계의 어머니를 살해한 저주받은 족속, 오크를 알아보았다.

지카리공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불탄 들판과 페어리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비늘투성이 얼굴은 한없이 슬퍼보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페어리들과 뭔가 열심히 얘기를 하던 노예사냥꾼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오크 시체 하나를 밟았다. 무력한 분노일 뿐이었다. 너무나도
많이 죽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시체를 밟을까봐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공포와 죽음과 화염의 냄새, 팍팍한 재가 숨쉴 때마다 폐에
몰려들었다. 순간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어둠이 손짓하는 동안 오래 전의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지금 얘기하듯 들려왔다.

저주받은 종족의 딸이 벌레같은 수명을 이어 이곳까지…

“제발… 지금은…”

아라는 숨이 가빠지면서 억지로 의식을 붙들었다.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어질어질했지만, 지금은 정신이 끊어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을 쫓아야 했다. 눈을 꼭 감은 채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을 가까스레 내리눌렀다. 사람 사냥꾼이 페어리들과
나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귀기울이며 잠시 기다리자 가까스레 어둠이 물러가고 의식이 또렷해졌다.

“제기랄… 인간들이다.”

조심조심 눈을 뜨자 연기에 흐릿해진 햇살이 눈을 고통스럽게 찔렀다. 대화를 마쳤는지 랜돌프 에디우스는 일어서며 내뱉듯 말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오크들을 끌고왔다고 하는군. 므우루는 그들에게 끌려간 모양이다.”

“인간…”

옆에서는 아스타틴이 낮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남은 페어리들을 대피시켜야 해.”

노예사냥꾼이 말했다.

“지도자가 없이 이들끼리 그냥 이곳에 방치해두는건 위험하다.”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은, 그냥 두면 다시 이런일이 벌어지겠지.”

지카리공은 손을 저어 주변의 파괴상황을 가리켰다. 날개가 뜯긴 채 죽은 페어리도 있었지만, 온전한 모습의 시체가 불탄 꽃 앞에
누워있는 모습도 보였다.

”.. 페어리들은 근원이 되는 꽃이 다치면 자신도 위험해지지.”

하프엘프 아스타틴이 설명하듯 말했다.

“페어리들을 대피시킨다고 해도..”

“에미넴 숲 남쪽까지 위험하다면 어디로 대피시킨다는 말이냐?”

말하며 아라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이만한 파괴를 저들이 자행해도 전에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미가 되어 딸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저 한몸 살아남아 싸우는 것뿐.

이 싸움은 언제까지인가? 다시 시야의 가장자리가 어두워오자 그녀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자신을 유지하려고 버텼다.

“돼지같은 놈들을 모조리 죽여 비료로 써주겠다.”

에디우스는 이를 드러내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크세노바를 돌아보았다.

“마법사, 마법사!”

크세노바를 보는 그의 시선은 간절했다.

“이들을 우리가 돌아올때까지 숨겨둘수 있는 마법 같은건 없을까?”

“전 그런 쪽에는 약해서…죄송합니다.”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고, 다시 눈꺼풀 뒤의 어둠이 몰려가자 아라는 상황을 생각했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있었고, 아직은 싸울 수 있었으니 지고 짓밟히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근처에 노스탤지아 거점이 있다면 그곳으로 일단 피하는 것도 좋겠지.”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갈 만한 곳이 있는가?”

“멀리 가지 못했을 터, 쫓으면 잡을수 있지 않겠나?”

지카리공의 지적에 아라는 끄덕였다. 천천히 계획의 모습이 머릿속에 잡혀가고 있었다.

“페어리들을 저 자가..”

그녀는 노예사냥꾼을 가리켰다.

”..데려가는 동안, 우리는 패스파인더와 마법사의 도움으로 므우루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과연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요.”

아스타틴의 표정은 냉소적이었다. 사실 아라도 심각한 의문이었지만, 남은 페어리들을 지키면서 므우루를 구하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남은 것은 과연 두 발 짐승을 잡는 저 사냥개, 다사케타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뿐.

“에미넴 숲의 기지라면..”

아스타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스로리엘이로군요. 엘프들의 중심지와 가깝죠. 그들이라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마치 옛 기억을 떠올리듯.

“받아줄 겁니다. 반나절 정도 걸리긴 하죠.”

“너 혼자 데려갈 수 있겠는가, 다사케타?”

아라는 노예사냥꾼을 쏘아보았다. 저 연약한 생명들을 이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에디우스 이자가 페어리들을 위하는 마음은, 그들을 위한 분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데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에미넴 숲 안에서라면 가능하다.”

노예사냥꾼은 당당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아라는 짧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들의 언어를 알고, 필요하다면 지시도 내릴 수 있겠지.”

페어리들 대피에 필요한 것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어쩌면 신뢰도 받을 수 있는 그 능력이었다. 므우루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대피
작전은 힘이 아닌 머리를 쓰는 작업이었다. 페어리와 소통할 수 없는 나머지 동료가 따라가봤자 병력 분산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배신한다면… 페어리들을 위하는 것 같은 마음이 거짓이었다면…”

그녀는 에디우스 앞으로 다가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너를 추적하겠다.”

옆에 선 아사나스가 같이 노예사냥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나를…?”

다사케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비웃음을 띄었다.

“에미넴 숲에서 감히 이 나를 추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것이냐? 웃기는군.”

“평생 편하게 살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마음을 정하니 차라리 편했다. 한 번, 이 일에 대해서는 이 자를 믿으리라. 그리고 그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 작자 아니면
그녀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면 되었다.

”.. 에미넴 숲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당신만은 아니죠.”

아스타틴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지카리공이 그들 사이에 육중한 팔을 밀어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가 아닌 것 같네.”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았다.

“엘프들따위의 감정도, 너의 불신도 신경쓸 가치가 없다.”

노예사냥꾼은 거침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녀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겠어. 네놈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나는 간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아서며 한 말은 경고이며, 약속이었다.

“나는 자네 과거가 어떤지 모르네.”

지카리 쿤 카타가 말했다.

“자네 말이 진심이기를 믿을 수밖에.”

3m짜리 용인이 하는 말은 어쩌면 아라 자신이나 아스타틴의 위협보다 훨씬 강력하리라. 효과가 충분하기를 바라며 아라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패스파인더, 앞장서서 흔적을 쫓도록.”

“서두르죠.”

아스타틴은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흔적을 보니 아직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지카리공께서 뒤를 지켜주시겠습니까.”

아라의 말에 드래고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맡도록 하지.”

그녀는 이번에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가자, 마법사.”

지카리공보다 앞서서 아스타틴의 뒤를 쫓는 그녀의 뒤를 크세노바는 바짝 따랐다.

패스파인더를 쫓아 들판을 떠나기 직전, 아라는 살아남은 페어리를 불러모으는 노예사냥꾼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저자가 배신한다면
그때는 노스탤지아고 뭐고 상관하지 않았다. 손은 어느새 활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너의 배신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사케타.’

어깨에 묵직하고 따뜻한 손이 와닿자 그녀는 지카리공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네만.”

그의 눈빛은 산의 뿌리처럼 깊고 견고하면서도 대지의 품처럼 따뜻하고 인자했다.

“지금은 나아갈 일을 생각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하네.”

그래, 그랬었다. 지금은 할일이 있는 때였고, 다가올지 모르는 일은 그때의 일이었다. 불신과 원한에 걸려넘어져 오늘의 일을
그르치는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아라는 목례해서 감사를 표하고 선두의 패스파인더를 쫓아갔다. 이 지상 위의 지옥을 만든 자들을
쫓아서.

소감

여기서도 축약이 좀 나오는군요. 원본 로그에서는 아카마카 열매를 가져오는 부분은 그냥 RP를 했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회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외에 크세노바가 안힐라스에 도착해서 노스탤지어 지도부를 소개받는 장면도 알쿠알론데 장면 중의 회상으로 축약했지요. 어떤 장면을 그대로 쓰고 어떤 장면을 축약할지는 늘 판단하기 쉽지는 않습니다만, 대체로는 너무 많이 잘라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쓰는 사람으로서 자꾸 편해지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시간 순서대로 쓰는 것이 원칙, 회상 등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사용하는 변칙이지요.

이 장면에서는 아라하고 랜디의 대립이 RP할 당시에도, 소설 쓸 때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입장이 다를 뿐이지 저것들 완전 동종혐오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만… 한편 랜디가 페어리들을 무사히 대피시킨 일에 대한 극적 뒤처리는 본편 중에는 못한 감이 있어서 2화와 3화 사이에 배치한 월광 외전 후속을 이어가면서 처리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카마카 열매를 가져오라고 시킨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삭풍님과 합의를 봤습니다. 헤어진 후 랜디는 어디서 뭘했나(..) 하는 외전에 나옵니다. 그거 소설화는 2화 분량을 한 다음에나 나올 것 같습니다만, 로그는 삭풍님 블로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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