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1화 (5): 잔인한 낙원 에미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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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프는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끼며 나무 사이로 말을 몰았다. 제기랄, 마법 이동은 언제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 뒤집힌
공간과 엉망이 된 시간감각 속에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정상 공간으로 돌아오면 수천 리 떨어진 곳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래도… 돌아오니 좋기는 했다. 로슬로리엘 근처는 이전에 사냥을 하던 터이기도 했으니 익숙한 곳이었다. 완만하게 경사져 올라가는
땅이나 따뜻하게 부서지는 봄 햇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시냇물과 머리 위에 새울음이 모두 익숙했다. 비루한 생활을 유지하려
아둥바둥하던 그 각박함에서 벗어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혼자 지내던 시절의 기억은 가슴아플 정도로 생생했다. 남쪽으로 말을
달려 점점 낯선 땅이 나오면서 그는 말없이 그 시간에 작별을 고했다.

얼빠진 동료들과 함께 말을 (아까 그 정신나간 여자는 주인을 한입에 잘아먹을 수 있는 맹수를 탔지만) 달린지 반나절쯤 되었을까,
그들은 오른편에 바위투성이 계곡을 내려다보는 언덕길을 나란히 지나고 있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안내한, 여자가 아닌 게 아까운
귀엽게 생긴 하프엘프 꼬마가 뭔가 표지나 표식을 알아보았는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탔고, 꼬마가 하는 대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상한 다크엘프 여자는 내릴 필요도 없이 그 검은 맹수를 타고 앞서 내려갔다. 어느새 또 혼이
나갔는지 눈을 감고 흥얼거리는 주인을 태우고 지나가면서 맹수는 랜디에게 마치 경고하는 듯 노란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말이
신경질적으로 히힝거리며 버티자 랜디는 고삐를 세게 당기며 억지로 끌고갔다. 어차피 짐승 다루는 재주 같은 건 없었다. 자꾸
짜증나게 하면 확 죽여버리지 뭐.

계곡 바닥에 내려와 개천을 따라 이동하면서 랜디는 곳곳에 꽃이 눈에 띄었다. 동백과 산거울, 히아신스가 풀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모습에서 그는 이제 페어리 군락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 귀찮은 날파리 녀석들 때문에 이 꼴이 되고도 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젠장.

계곡이 끝나고 다시 땅이 평평해지는 숲으로 개천을 따라가자 멀리서 벌떼 소리와 비슷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다가가면서 점점 커졌다. 저 앞에 낮은 구릉 너머에 날리는 색색의 빛무리가 랜돌프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도착했는가.

“이젠 아예 숨어 있지도 않는군.. 정신나간 녀석들.”

그는 작게 피식 웃었다. 언제 봐도 엉뚱한 녀석들이었다, 페어리는. 위험 같은 건 자각을 못하는 건가.

“원래 이런 겁니까?”

다른 녀석들보다는 그래도 그를 사람같이 대하는 여리여리하니 계집애처럼 생긴 마법사가 물었다. 여러 해 전에 붙잡았었던 엘프도
금발을 저렇게 기른 여자가 하나 있었다. 끌려가는 내내 심장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서럽게 울다가 급기야 그가 안 보는 사이 개천에
뛰어들어 자살해 버린… 그 머리가 물길을 따라 금빛 구름처럼 퍼지던 기억을 떨쳐버리며 랜돌프는 대답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각오해두는게 좋겠지.”

성가시고 멍청한 녀석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입꼬리가 치켜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위험해도
마냥 즐겁기만 한 그들의 웃음은 더러운 세상에 대한 도전인 것만 같았으니까. 바보같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말이다.

“괜찮은 건가…”

마법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묻혀버렸다. 무수한 날갯짓과 수많은 목소리가 재잘거리는 소음 속에서
랜돌프는 그들의 언어로 ‘거인’이라는 말을 연신 들을 수 있었다.

둔덕을 올라가 그 위에 서자 페어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눈앞에 선한 천화의 계곡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숲의
나무들이 경비병처럼 두른 들판에 핀 각양각색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취할 정도로 끼쳐왔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가운데에 무수한 페어리가 뭉쳐있는 모습이었다. 노랑, 흰색,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의 빛무리가 3m 높이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그대로 빛의 탑이었다. 자세히 보니 탑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

서둘러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간 후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요정들이 일제히 떠드는 소리와 수천 개의 날개가 한꺼번에 붕붕거리는
소리가 몰려왔다.

“시끄럽다, 날파리들!”

그는 그들의 언어로 소리질렀다. 시끄럽다는 것은 페어리말을 배우면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배워야 했던 표현이었다. 날파리는
정신건강을 위해서였고.

“말은 하나씩, 하나씩!”

별 효과가 없는 듯 페어리들은 계속 떠들어댔다. ‘용’이라는 말도 들렸고, ‘용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짜증나는 날파리들!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왠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말로만 듣던 드래고니안?”

마법사 녀석이 옆에 와서 서며 말했다. 아, 드래고니안이라면 그 용인족… 랜디는 더 흥미가 동해서 페어리들이 둘러싼 형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 속에서는 비늘이나 가끔 발톱이 보였다.

“용.. 거인.. 인간?”

하는 말을 듣고 용인지, 거인인지, 인간인지 하는 의문이라고 짐작한 랜디는 말했다.

“다. 용, 거인, 인간.”

주변이 갑자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시끄럽게 떠들던 페어리들의 시선은 이제 랜디와 그 일행에게 향했다. 페어리 하나가
빛의 탑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 뒤의 노란 눈도 랜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둘 페어리가 그들에게 날아오면서
드래고니안의 모습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서서히 드러났다. 단단한 비늘이 둘러싼 깜박이지 않는 눈, 비늘로 뒤덮인 얼굴, 머리에서
시작해 목을 따라 내려오는 칼날 같은 긴 돌기, 장대한 체구에 비늘이 햇살에 반짝이며 물결치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근육과, 한 번
휘두르면 뼈 같은 건 우습게 박살낼 수 있을 꼬리… 마음만 먹으면 바위라도 부술 수 있는 힘, 한 번 분노하면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을 자연재앙 같은 위력이 3m 키의 근육과 힘줄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압도적이군…’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랜디는 용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간’ ‘다크엘프’ ‘하프’ 같은 소리를 떠들며 일행 주변을 맴도는
귀찮은 파리떼와 그런 그들에게 이쁘다, 놀자며 잡으려고 폴짝거리는 바보 다크엘프는 어쩔 수 없이 신경쓰였지만.

“당신이 마지막 동료로군요?”

마법사는 손을 내밀며 드래고니안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주변에서 쉴새없이 떠들며 날아다니는 페어리에 눈길을 던지고 그는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좀 그렇지만…여하튼 반갑군요.”

날아다니는 페어리떼를 조용히 바라보던 드래고니안은 새로 도착한 일행을 노란 눈으로 한 번 훑어보더니 마법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용인의 입이 움직이며 날카로운 이빨이 무수히 드러나자 순간 움찔한 랜디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미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들이 명령서에 있던 동료들인가 보군. 반갑네.”

“좀 복잡한 관계 같지만 일단은 동료죠.”

드래고니안은 마법사의 손 정도는 우습게 으스러뜨릴 수 있을 우악스러운 앞발로 가볍게 맞잡았다. 옆에서 페어리들이 뭐라고 계속
조잘거리자 랜디는 요정어가 딸리는 것을 느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질리지도 않는 녀석들이군. 좀 조용히 하지 못하겠어?”

페어리들은 살해당한다느니 어쩌느니 깔깔거리며 흩어졌다. 원래 언성이란 언어를 따지지 않게 마련이다.

“나는 지카리 쿤 카타라고 하네.”

비교적 조용해진 와중에 드래고니안은 사람 머리만한 주먹으로 근육질의 강인한 가슴을 쿵 소리가 나도록 쳤다.

“듣던 대로 독특한 일행이군.”

드래고니안의 눈가가 웃는 듯 주름졌다. 그가 마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쫓겨갔던 페어리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어 다시 조잘대는 동안
랜디는 대체 노스탤지아 놈들은 왜 이곳으로 그들을 부른 것일까 궁금했다. 크세노바와 지카리도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페어리에게서는 제대로 답이 안 나오고 지카리가 받은 명령서도 랜디와 일행이 받은 명령서와 대동소이한 모양이었다.

페어리떼가 ‘축제’ 소리를 연신 해대며 떠들자 랜디는 혹시 거울의 섬에서 여왕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고위 페어리는
다른 종족의 언어도 알고 훨씬 정신도 제대로 박혀있으니 말이 통할 것이다.

“여왕님 어디? 여왕님이.. 노스탤지아..”

‘연락’이라는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랜디는 입 앞에 손을 움직이며 말하는 모습을 만들다가 페어리들을 가리켰다.

“말 안했어?”

그 말에 이카무카가 필요하느니 어떻느니 떠들던 페어리들의 조잘거림에는 이윽고 ‘므우루’와 ‘패달랭이꽃’이라는 말이 자꾸 나왔다.
곁눈으로는 미친 다크엘프가 뭔가 엄청 황송해하며 드래고니안과 악수하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는 비늘투성이에 키가 3m는
돼야 사람처럼 대해주나?

“므우루! 므우루!”

므우루를 외치며 페어리 한 떼가 우우 나무 사이로 몰려가는 동안 어디선과 음악이 들려왔다. 돌아보자 그 엘프 튀기 녀석이 나무
하나에 기대앉아 류트를 조율하고 있었다. 할일없이 몰려다니던 페어리 빛무리가 하나하나 호기심에 겨워 하프엘프를 중심으로 꽃이나
풀잎에 내려앉았고, 어차피 ‘므우루’를 찾으러 몰려간 녀석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으니 랜디도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
구경했다. 다른 일행들도 풀밭에 앉거나 서서 지켜보았다.

조율을 마친 하프엘프는 고개를 들고는 갑자기 관객이 생긴 것에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페어리들은 일제히 ‘해~!’라며 환호성을
울렸다. 랜디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하라는데? 할일도 없는데 들어보자고.”

하프엘프는 여기까지 오면서 랜디에게 던지던 경멸스러운 시선도 잊을 만큼 긴장해 있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잠시 머뭇거리던 하프 녀석이 연주를 시작하자 부드럽고 풍성한 음색이 꽃밭을 감쌌다. 그 속에는 햇살 속에 뛰노는 냇물의
웃음소리가, 잎사귀를 때리는 따뜻한 빗물이, 밤에 읊조리는 외로운 노래가 있었다. 들으면서 랜디는 그가 가장 자유롭던 시절,
하나의 포식동물로서 죽고 죽임의 순환 속에 그저 존재했던 때로 되돌아갔다. 혼자 뛰어들어 목욕하던 달빛이 시원한 강물, 숙소에
몸을 누이면 바람에 춤추던 나무들의 바스락거림, 천화의 계곡에 가득했던 그윽한 꽃향기가 이 순간 그와 함께했다.

어느새 들판의 페어리들은 꽃 위에 자리를 잡고, 혹은 공중에 뜬 채 연주를 듣고 있었다. 몇몇은 음악에 맞춰 빙빙 돌며 그들만의
춤을 추고 있었다. 거대한 드래고니안 지카리도 제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음악에 빠져 있었고, 그의 어깨나 머리에 어느새 와서
앉은 페어리들도 그를 따라하듯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마법사는 작은 미소를 띈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고, 무표정하게 앉은
다크엘프는 눈빛이 가끔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눈을 감고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엘프, 아스타틴이라는 그 꼬마의 표정이었다. 짜증스럽고 사람을 멀리하는 데다
인간이라면 바로 아르릉거리던 저 건방진 꼬마놈은 류트를 잡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입술에 띈 가볍고 슬픈 미소를 띈 채
아무 경계도, 걱정도 없이 음악에 빠져든 그 모습에 랜디는 문득 저 녀석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영원히 동료로서, 혹은 친구로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 그러기에는 가로막힌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음악
속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필요없었다. 그저 귀와 영혼을 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뒤편에서 조용한 날개소리가 웅웅 다가오자 랜디는 몸을 돌렸다. 아까 날아갔던 페어리들을 이끌고 푸르게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날개가.. 하나, 둘, 셋.. 열세 장이었다. 천화의 계곡에서 가장 높은 페어리가 날개가 여덟 장이고 페어리
여왕이 열여섯 장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랜디는 이쪽이 꽤 대단한 페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 튜니카를 날리며 그 고위
페어리—아마도 므우루—가 지나가자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연주하는 아스타틴을 보며 랜디는 그가 연주를 멈출까봐 잠시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므우루와 따르는
페어리들의 조용한 접근은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의 방해도 되지 않았고, 페어리들이 가만히 자리를 비켜주는 가운데
므우루는 음악에 이끌린 듯 아스타틴 앞으로 가서 꽃 하나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마지막 음의 메아리만을 남기고 음악이 천천히 잦아들자 청색으로 빛나는 페어리는 손을 들어 갈채를 보냈고, 다른 페어리들도 박수치며
환호했다. 눈을 뜬 아스타틴은 앞에 모여든 페어리들의 수와 그들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악사님.”

그에게 인사하며 페어리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축제를 이렇게 훌륭한 음악으로 축하해 주셔서.”

“아, 아닙니다..”

아스타틴이 말을 더듬는 동안 므우루는 몸을 돌리며 일행 모두에게 공통어로 말했다.

“모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용의 파편 또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을 뜬 지카리는 므우루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갑네, 작은 친구.”

므우루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 친구와 가족들이 폐를 끼쳤나보군요.”

주변의 페어리들이 그렇다느니 안 끼쳤느니 떠드는 소란 위로 다크엘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될지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축제의 준비죠.”

므우루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떤 준비입니까?”

“곧 있을 4월의 축제는 페어리들에게 가장 큰 축제중 하나랍니다.”

푸른 페어리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살짝 떠올랐다가 도로 내려오며 꽃에 발을 딛었다.

“손님들에게 어려운 것을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퍽이나 한가하시군요, 요정이여.”

다크엘프는 고개를 저었다.

“오크의 활동이 늘었고 에미넴숲을 이미 인간들이 침탈하고 있건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랜디에게 향했다. 재수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축제라니.”

“죄송해요.하지만 불안해서요.”

므우루의 눈썹이 약간 처지자 랜디는 다크엘프에게 새삼 짜증을 느꼈다.

“불안한 분들 치고는 즐거워 보입니다만.”

다크엘프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뾰족하게 굴지 마.”

랜디는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대체 뭘 바라는 것인가, 저 여자는. 다들 저처럼 뻑뻑하게 굴다가 미쳐버리라고?

“저녀석들에게 있어서 축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다. 그런 행사를 앞두고 평소와 달리 뭔가가 느껴졌다면 불안해하는게 당연한
것이다.”

천화의 계곡에서 페어리의 여름 축제를 보았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 웃음과 음악, 춤의 향연에 랜디는 어떤 좋은 술을
마셨을 때보다도 기분좋게 취했었고, 세상에 이런 순수한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었다.

제길, 천화의 계곡이 위험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있던 그 멍청이가 맞군.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랜디를 흘깃 돌아보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더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에미넴 숲에서 아카마카란 열매를 좀 구해다주셨으면 하는 간단한 일입니다.”

“열매..?”

길쭉한 모양새에 가시가 삐죽삐죽하다는 설명에 랜디는 장에서 한 번 만나 술을 마신 늙은 사냥꾼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시가
뾰족한 아카마카 열매는 까기도 어렵고 맛도 지독하게 쓰다고… 별로 축제에 쓸 만한 것이 아닐 텐데?

“그래서 힘센 노스텔지아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해서 요청했답니다.”

므우루는 손을 모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열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크엘프가 묻자 숲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크엘프는 돌아서며 아사나스라는 맹수를 불렀지만,
랜디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아카마카를 어디에 쓰실 생각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무척 쓴 열매다. 도저히 먹을수는 없지.”

“그…그랬죠.그래도 구해다 주시면 좋겠네요.”

페어리는 말을 더듬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확실히 그게 축제에 필요한게 맞겠지?”

“물론이랍니다.”

므우루는 올려다보며 열심히 말했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하는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더 따지기도 전에
지카리의 웅웅 울리면서 살짝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은 이런 일도 좋겠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니 시키지 않았겠나?”

“아 역시 든든하시네요 파편의 일족께선.”

므우루는 도망치듯 지카리의 견고한 몸집 뒤에 숨어버렸다.

“부탁드려요, 꼭.”

드래고니안이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땅이 가볍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노력할거네.”

일어선 그는 웃으며 므우루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속이는 게 있다면 잃게 될 것도 걱정해야 될거야.”

푸른 페어리는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무엇을 감추는지는 몰라도 랜디는 그런 그녀가 불쌍했다. 3m짜리
도마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속이 타는 경험일 것이다.

“가시지요.”

다크엘프 여자는 일어선 드래고니안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숲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멈추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거기 사람 사냥꾼은 안 와도 좋다. 등뒤를 걱정하는 것은 질색이니.”

웃기고 자빠졌네. 미친 계집이 맹수를 끌고 숲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랜돌프는 땅에 침을 뱉었다. 뒤에서는 페어리들이 ‘실패’니
‘두목’ 같은 말을 떠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죽도록 고생할지도 모르겠군…”

도대체 이 날파리들과는 무슨 악연인지. 그는 목을 우둑우둑 풀며 동료들과 함께 숲속으로 향했다.

소감

쓸 때 원래의 로그에서 가장 변형과 축약이 많았던 부분으로 기억합니다. 역시 RPG와 소설은 꽤나 다른 매체이니 때로는 과감한 변경도 필요하겠지요. 여기서는 주로 대사 순서를 바꾸고 일부 생략하는 수준이었지만, 아스타틴의 연주 부분은 원본 로그와 많이 다르게 가공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화에도 벌벌 떨다가 이번 분량을 거치면서 각색하기가 좀 편해졌던 것 같군요. 소설 쓰면서 지금까지 제일 많이 가공했던 건 그 연주 장면이랑 재촬영 분량 중 아시타와 아스타틴의 메타포노비아 도착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자는 기본 사건은 같았으니 변형이라기보다는 장면 시점을 바꾸고 정보를 추가한 것에 가깝지만요.

이 장면에는 랜디의 시점을 많이 활용하고 인물에 대한 제 생각도 집어넣어서 이상하지 않은가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방인님이 생각하시는 랜디와 비슷하다는 말씀에 안심했습니다. 노예사냥꾼 출신이며 한 번도 그 점을 뉘우친 적이 없는 랜돌프는 도덕적으로나 사회통념상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라서 시점을 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크게 어렵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같다’라는 사실은 랜디에 대해 가장 불편한 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범죄의 성격이 워낙 거식하다 보니 강간은 차원이 다른 악이라고 (외부 사이트, 영문) 생각해고 싶은 경향도 있습니다만, 실은 노예상이나 강간범이라고 해서 다 공감이 불가능한 사이코패스는 아닐 테니까요. 소수의 병적 인격장애자를 제외하면 결국 악이나 범죄란 대부분 상상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누구든지 조금 비겁해지고 양심의 가책을 조금 외면하면 저지를 수도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의 작품일 것입니다. 편의나 이익, 욕망 앞에서 원칙을 잃지 않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누구든지 환경에 휩쓸려 악을 저지를 수 있지요. 대개의 악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르기에 결코 먼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 랜디 같은 인물의 교훈이라면 교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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