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과 석양의 도시] 기다림의 땅

추석을 맞아 쉬는 대신 올리는 추석 특집…도 아니고 뭘까요. 어쨌든 전부터 구상했던 것을 올려둡니다.

기다림의 땅은 조용한 곳이다. 해나 달 없이 가끔 구름만 지나가는 하늘에 은은한 빛이 어리는 이곳은 영원한 어스름의 땅, 시간마저 멈춰서서 기다리는 곳이다. 이곳에 머물러서 기다리고 지켜보는 이들은 서두르거나 다급해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언젠가는 기다림의 땅을 지나가기에.

작은 꽃들이 색색의 별처럼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정원에 노인 하나와 청년 하나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희고 검은 정사각형이 번갈아 무늬를 이루고 있고, 칸 위에는 흑단과 상아로 왕관, 말, 성벽 등의 모양을 깎은 검고 흰 놀이말이 늘어서 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청년은 성벽 모양을 한 하얀 말을 술 달린 터번 모양을 한 검은 말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칸에 내려놓는다.

“‘샤’입니다, 어르신. 아무래도 이번 판은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맞구먼. 좋은 솜씨야.”

흑단 놀이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터번을 쓴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한 판 더 하는 것은 어떤가?”

“그러지요.”

청년은 정중히 미소짓고 이번에는 흰 게임말을 노인 앞에, 검은 말은 자신 앞에 배열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노인은 게임 탁자 옆의 홈에 넣어놓았던 희고 검은 말들을 꺼내다가 판 위에 놓는다. 둘이서 말을 배열하는 동안 시간이 없는 땅에는 고요의 순간이 흐른다.

“그래, 자네는 누구를 기다리길래 남았는가?”

다시 군대처럼 정렬해 마주보는 두 진영을 넘어 노인은 청년을 평온하게 바라본다.

“부인이나 자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머리까지 근육으로 된 바보 녀석과 그 바보에게 홀딱 빠진 제 동생을 기다립니다.”

잠시 손으로 턱을 괴며 웃던 청년은 이내 먼 곳을 보는 눈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부인과 자식이라…”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덮어버리기라도 할 듯 질문을 노인에게 되돌린다.

“어르신께서는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역시 가족분들입니까?”

“여염집에서는 가족이라고 하겠지. 우리가 가족인지 나는 의문이 있지만 말일세.”

노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최소한 나를 죽인 아들 녀석들을 윽박지르기라도 하고 마지막 길을 떠나야지 않겠는가.”

“우리는 둘다 전쟁을 막으려다가 죽었군요.”

청년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눈빛은 가라앉아 있다.

“그럼으로써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지. 흔한 이야기야.”

놀이판을 사이에 두고 두 사내는 서로 완전한 이해심을 담아 마주본다. 국가라는 거대한 놀이판 너머로 마주보며 수많은 생명과 운명의 무게를 졌던 사람들의 동질감으로. 그리고 아직 그 무게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에 아직 이 경계의 땅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이해하며…

풀밭이 발걸음에 바스락거리자 노인과 청년은 돌아본다. 표정이 없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다가와 청년의 다리에 기대자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네를 잘 따르는 것 같더군. 아는 아이였나?”

“제 조카입니다.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하고 이리로 왔죠.”

아이를 내려다보는 청년의 미소에는 아픔이 스쳐간다.

“부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군요.”

노인은 작게 한숨을 쉰다.

“오래 기다릴지도 모르겠군.”

“오래 기다리기를 바라야겠지요.”

청년이 해도 달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아이는 그의 곁을 떠나 정원을 가로질러 혼자 달려간다.

“시간은 많으니 말이네.”

조그만 발걸음이 탁탁탁 멀어지는 동안 노인과 청년은 다시 놀이판을 사이에 두고 집중한다. 반드시 다가올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을 잊은 채 숨죽인 조용한 땅에서.

해리 포터 7권이나 어스시 시리즈에 나오는 사후세계 분위기에 일부 영향을 받은 설정입니다. 기다림의 땅에서는 아무도 이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원래 누구였는지는 캠페인을 아시는 분들은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곳인 만큼 모습은 인식하기 나름이고, 조금 바꿔서 보면 도살장 냄새에 피투성이로 앉은 시체, 태아가 땅에 꼬물거리는 호러일지도요(…)

6 thoughts on “[여명과 석양의 도시] 기다림의 땅

  1. orches

    마수드 1세랑 니키아스.. 그리고 소 니키아스. 기다리고 있는 거군요 ;ㅅ; 카림이랑 오붓하게 손 잡고 저기 걸어들어 가면, 자애롭게 어서오라고 안아주기보다는 왜 벌써 왔냐고 버럭 화내며 뻥 차실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잔잔하다는 느낌과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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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인연과 감정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게 추석과의 간접적 연관성일지도요. 역시 아버님의 화내는 얼굴을 보지 않으려면 되도록 오래사는 게 최고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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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방인

    이번주에는 회사에서 하이서울 마라톤에 참가를 강요해서 거기 끌려갈거 같군요(…)
    중요한 시기인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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