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과 석양의 도시] 게임의 규칙

이전 마음의 계절이 ‘여명과 석양의 청춘드라마’라면 이번에는 ‘여명과 석양의 막장드라마’ 판이군요. 야한 대목과 폭력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게임의 규칙

I. 절대 주도권을 잃지 말라

“이번 판은 아무래도 엑토라스의 승리 같습니다.”

새파란 하늘에는 티없이 하얀 구름이 흐르며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햇살은 밝지만 너무 뜨겁지는 않고,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식혀준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하고 음악적인 목소리는 품위에 한 치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달콤한 약속을 품고 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젊은이에게 대답한다. 목소리는 낮지만, 주변에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분명 이올라스에요. 10 듀캣을 걸죠.”

“10 듀캣에다가 입맞춤은 어떻겠습니까?”

어깨 너머로 돌아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지만 냉정하고, 철저히 계산적이다. 아마도 그녀 자신의 눈빛이 그렇듯이.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입맞춤 대신 10 듀캣을 더 걸도록 하죠.”

주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스틸리안느 영애의 입맞춤에 10 듀캣의 가치밖에 없는지는 몰랐는데요.”

듣는 사람들이 웃기 전에 스틸리안느는 빠르게 쏘아붙인다.

“추가 10 듀캣은 니키아스 공의 입맞춤을 피하는 대가랍니다.”

좋은 공연을 본 관객이 박수치듯 주변에 앉은 귀족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못 들은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전해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그의 눈빛에도 웃음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며 스틸리안느는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린다. 궁정 무도회의 춤처럼 정교한 대화에도, 관객의 반응에도, 날씨에도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결국 그날은 이올라스 노타라스의 승리로 끝나고, 니키아스 콤네노스 두카스 안겔루스는 시종을 통해 그녀의 시종에게 10 듀캣과 편지를 전한다. 영애의 안목에 감탄을 표하고, 10 듀캣을 되찾을 내기를 위해 훗날 찾아뵐 수 있겠느냐는 편지 내용을 그녀는 만족스럽게 확인한다.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II. 약점을 보이지 말라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절 보내세요.

선택이라는 말은 때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를 볼 생각에 들뜬 동생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바스티아노스는 모르니까,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애의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영원히 변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나는 눈물과 절망의 눅눅한 냄새가 싫었다. 익사하는 사람처럼 세차게 끌어안는 품이 싫었다.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마주 안지도 않고 스틸리안느는 그 포옹 속에 가만히 서서 맞은편 벽만을 쳐다보았다. 절 보내세요. 이 한 마디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펼쳐나가는 미래를 꿰뚫어보듯.

“아..”

눈을 뜨자 어둠 속이다. 은빛과 청색 달빛이 얼룩진 검은 방안은 조용하다. 가슴은 놀란 새의 날갯짓처럼 세차게 뛴다. 눈가가 왜 젖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섯 살이었던 그날도, 아버지 소식이 왔을 때도, 어머니가 뒤를 따르듯 돌아가셨을 때도 한 번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강하고 따스한 팔이 끌어당겨 꼭 안아주자 가슴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던 새는 조금씩 조용해진다. 아직 졸음에 잠긴 그의 쉰 목소리는 걱정스럽다.

“예… 예.”

스틸리안느는 마치 졸음을 몰아내려는 듯 눈을 비벼서 눈물을 지워버린다. 꿈속 어머니의 눈물이 눈가에 묻어난 것일까. 그 기억에 대한 혐오감에 몸이 떨려온다.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머리를 쓸어넘겨주는 부드러운 손에서는 낙엽 태우는 연기와 박하꽃 냄새가 난다. 그 손을 붙잡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금 물러나서 일어나 앉는다.

“아무래도 그렇죠. 귀족 처녀의 자존심도 버리고 잘생긴 불한당과 놀아나는 악몽을 꾸었답니다.”

“아, 저런.”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누구라도 놀라서 깰 만한 꿈이군요. 그래서 그 불한당은 어떻게 됐습니까?”

“불한당부터 걱정하시네요. 그게 유유상종이라는 건가요?”

익숙한 독설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는다. 오랜 악몽을 몰아내주는 그의 온기 속에서, 내밀하고 너그러운 밤의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에서 잠시 자유로울 수 있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용하고 버릴 남자를 이렇게까지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위험했다.

“그자가 어떻게 하던가요. 이렇게… 손길로 영애를 유혹했습니까?”

발을 만지고 발목을 감싸는 손의 온기에 스틸리안느는 흠칫 떤다.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같이!

“그대를 여신이라고 부르고 숭배하듯 어루만지며 순진한 처녀의 마음을 훔치던가요?”

발등에, 무릎에, 허벅지에 입술이 차례대로 닿자 자제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달빛 속에 마주친 그의 눈에도 열정의 빛이 어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결한 입술을 차지하고…”

그가 와락 끌어안으며 입맞추자 그녀는 기꺼이 입을, 몸을, 영혼을 그에게 연다. 이건 미친 짓이다. 달빛 속의 광기, 미래가 없는 소모적인 불길인 것도 알고 있다. 그는 황제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 다 알고, 다 계산하고 있는데도…

나중에, 나른한 만족감 속에 그와 함께 누워서 그녀는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본다. 잠시나마 조금 다른 꿈을 꾸면서,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며. 가슴을 갉아먹는 공허를 잠시나마 충족받은 채, 부질없는 환상인 것을 알면서, 다 알면서.

III.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

“니키아스, 나…”

목소리는 부서진 유리조각이 되어 목을 찢으며 나온다. 떨리는 약한 목소리가 싫다.

그는 반쯤 열린 문앞에서 멈추어선다. 돌아보지는 않고, 그 작은 자비에 스틸리안느는 감사한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 채, 그녀는 말하려고 입을 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스틸리안느.”

그는 어깨 너머로 천천히, 반쯤 돌아본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등잔빛 속에서 익숙한 얼굴의 뚜렷한 윤곽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여신에게는 흠조차 되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해요.”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 우두커니 앉은 스틸리안느는 멍하니 보기만 한다. 잡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

창밖으로는 푸른 달과 하얀 달이 져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스틸리안느는 그가 말을 듣기도 전에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할말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도, 그 의미가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에 천천히 천천히 스며든다.

마침내 그 지식이 젖어들어 이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다가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문다. 비명을 지를까 두렵다. 밤의 자락을 갈기갈기 찢는 비명을 듣고 모두가 달려온다면, 그때야말로 마지막 긍지마저 내버린 후일 테니.

그가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반역자의 딸이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의 장자와 결혼하는 것은 니키아스가 황제의 신뢰를 잃는 것을 뜻했다. 여러 가문에 결혼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니키아스가 벌써,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죽은 반역자의 딸과 그 여자의 사생아를 위해 그가 왜…

이불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소리없는 긴 비명을 토해낸다. 목표를 위해 이용할 남자였을 뿐인데, 어떤 광기 때문에 이 지경에… 그가 버리고 갔을 수많은 여자들처럼, 문을 닫은 그의 등뒤에 남겨졌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틸리안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노려본다. ‘자신만을 생각해요.’ 단순하고 착각의 여지가 없는 대답.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한… 다른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신에게 인정하면서 그녀는 굴욕감과 분노가 타고 남은 재를 가슴 가득 안고 잿빛 새벽을 맞이한다.

IV.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워라

의사는 실력이 최고이며,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킨다고 했다. 그녀가 시술한 환자들은 이후에도 문제없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모두들 쉬쉬하는,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

“마음을 확실히 정하셨습니까?”

의사의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 앞에서 스틸리안느는 긴 순간 침묵한다. 확실히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은 있지도 않은데 가슴 속의 새는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할 수 있다면 뱃속의 아이도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칠까. 심장과 아이는 모두 그녀의 몸속에 갇혀 있다, 그녀 자신이 그렇듯이. 이 지독한 감옥을 찢어발겨 모두를 풀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듯 그녀는 눈을 꽉 감는다. 잠을 제대로 잔지 너무 오래 되었다…

의사가 조용히 일어서자 의자가 바닥을 가볍게 긁는다. 그 소리가 귀에 크게 울리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하실 수 있는 수술이 아닙니다. 가보십시오.”

마치 누군가 손을 붙잡아서 당긴 것처럼 멈칫멈칫, 부자연스럽게 스틸리안느는 팔을 뻗어 의사를 제지한다. 그리고 누군가 고개를 잡아 움직이듯이 천천히 끄덕인다. 선택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는 막다른 길에 서서. 의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침상 위에 누우십시오.”

자리에 눕자 신분을 숨기려고 얼굴을 가린 너울 너머로 깔끔한 하얀 석회 천장이 보인다. 가만히 누워 심장 소리에 귀기울이며 스틸리안느는 어려서 시골 별장에 새하얗게 내렸던 눈을 떠올린다. 눈밭 한가운데 지독히도 붉었던 선혈의 기억이 눈을 태울 듯 선명하다.

별장 일꾼의 아들은 솔개를 하나 길들여 마당의 닭과 싸움을 붙이고는 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몇 살 위였던 그 아이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녔고, 새들의 싸움을 조마조마하면서도 두근거리며 지켜보곤 했다. 몇 번 쪼이면 물러나는 수탉의 모습을 보기 지루해진 스틸리안느는 홱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평소라면 누나 뒤를 쫓아왔을 바스티안은 들어올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놀란 세바스티아노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스틸리안느는 벌떡 일어나서 마당으로 달렸다. 그리고 눈밭 한가운데 튄 피를 보고 우뚝 섰다…

의사가 들어와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갈색 액체가 든 잔을 건넨다.

“드십시오. 잠이 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겠지. 얼룩진 핏자국만을 남기고.

여덟 살 스틸리안느는 우는 세바스티아노스를 가로막으면서 일꾼의 열두 살짜리 아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팔레오로고스의 후계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 남은 건 동생밖에 없어요, 신이여 부디 자비를-) 당장 말하지 않으면 황궁의 고문실에서 코를 베어내고 눈을 뽑아버린다는 말에, 가뜩이나 얼이 나가있던 소년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누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리질렀다. 누나 하지마! 그게 아냐!

소년이 안고 있던 것이 눈밭에 툭 떨어졌을 때에야 스틸리안느는 눈앞을 가린 핏빛 안개가 걷혔다. 구겨지듯 눈밭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솔개… 도망치지 못하게 한쪽 다리에 묶었던 실이 피가 방울진 깃털에 엉켜 바람에 흔들렸다.

마당에서 제일 큰 수탉도 이겼던 솔개의 시체를 잠시 보다가 스틸리안느는 고개를 돌려 마당을 살폈다. 얼굴에 눈물이 얼룩진 채 얼어붙어 서있는 소년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당 저편에, 까다롭게 꼭꼭거리며 병아리 주변을 맴도는 자그마한 암탉이 눈에 들어왔다. 암탉의 부리와 깃털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잔은 내용물을 길게 쏟으면서 포물선을 그린 끝에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다. 스틸리안느는 너울 너머로 의사를 마주보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더러운 킨다스 마녀.”

목소리가 낯설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 울부짖는 암늑대, 꼭꼭거리는 암탉. 이성이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아주 멀리서 그녀는 생각한다.

“이 일을 누구에게라도 얘기하면 다시는 아무것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해주겠다.”

의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잠시 마주보다가 돌아서서 바닥에 흩어진 잔 조각과 약물을 쳐다본다.

“기물을 파손하실 생각이라면 나가주십시오.”

한쪽 팔로 배를 감싼 채 스틸리안느는 자리에서 비틀 일어난다. 잔을 치우려던 의사는 마치 부축하려는 듯 다가오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러난다. 스틸리안느는 가져왔던 돈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주머니가 풀어지면서 바닥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흩어진다. 의사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밤거리로 나선다.

자신만 생각하라고? 찬바람 속에 허허로운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래주지, 이 후레자식. 네 이야기 같은 건 듣지 않겠어. 너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오직 나만, 그리고 나의…

밤의 도시에서 어두운 미궁을 헤매며, 스틸리안느는 어릴적 시골의 눈밭 위를 걷고 있다. 발밑에는 걸음걸음마다 붉게 물든 눈이 버석거리며 부스러져내린다.

V. 사랑에 빠지지 말라

대리석 벽을 따라 날아오르는 천사들은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남에게는 저렇게 보일까, 스틸리안느는 생각한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마다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이 초월적인 것을 바라보는 그들은 이해할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저들을 만든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차가운 바닥에 혼자 죽어가면서 그는 천사들과 같은 초월을 보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를 오늘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은 신도, 어떤 초월성이나 신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세속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진창을 딛고 이곳까지 왔다. 천사들은 천상의 신성, 태양의 찬란한 빛만을 우러르겠지만 그녀는…
그녀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을 위하여. 구름과 광휘가 아닌 단단한 바닥을 딛고 그녀는 무수한 시선
사이로, 성당을 장식한 천상의 영광 아래 제단으로 걸어간다.

제3 군단의 장교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를 연회에서 만났을 때에 그녀는 그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아 블라스티아가 5년의 결혼생활 끝에 죽었을 때 두 사람 슬하에는 아이가 없었다. 율리아노폴리스 근무지에서 그가 정부로 두었던 여자도 둘이 관계를 지속한 동안에는 아이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와 헤어진 이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아들을 낳았다.

황궁 연회에서 그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추고 미소지으면서 스틸리안느는 그의 전처와 옛 정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와 소문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콘스탄티노스라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걸고 자신을 도박판에 올려놓았다.

사랑을 필요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콘스탄티노스만큼 남자를 뜨겁게 사랑한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줄 남자, 귀대 날짜가 걸려서 서둘러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다른 아이가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남자라면 더욱 좋았다. 그래서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는 그녀에게는 꿈같은 이상형이었다. 그녀를 등뒤로 버려두고 문을 닫던 그 뒷모습의 기억이 아무리 아파도, 달빛 속의 열정이 때로는 못 견디게 그리워도 그것은 죽어버린 꿈일 뿐, 그녀에게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 더 절실하게 그 꿈을 사랑했다.

그 소박하고 강직한 콘스탄티노스가 그녀를 보는 눈길에 열정의 불길이 어린 순간 설레는 마음은 진짜였다. 사슴을 함정으로 몰아가는 사냥꾼의 가슴이 뛰는 흥분이 진짜이듯이. 만난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그가 참지 못하고 청혼했을 때 흘린 눈물도 진짜였다. 사막을 헤매이다 멀리에서 녹지를 발견한 여행자의 안도감만큼 진실한 감정이 있을까.

제단 앞에 무릎꿇기 직전에 스틸리안느는 다시 한 순간 차가운 대리석 천사들에게 눈길이 간다. 무표정하고 엄숙한 환희에 빠진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구애했던 조각가는 여지가 없이 거절당한 후 미친 듯 작업에 몰두했고, 마지막 천사를 완성한 다음날 아침 작업 도구로 손목을 그은 싸늘한 시체를 인부들이 발견했다. (새하얀 대리석 위에 붉게 흐르는 피.) 니키아스가 예술가의 죽음을 낙상으로 무마한 덕분에 성당은 예정대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으면서 그녀는 조각가의 죽음이 잠시 가슴에 남는다. 끝내 모르는 사람이었던 소녀 때문에 재능과 목숨을 내던진 그 무모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 파괴적인 불길을 통과해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하얀 대리석 위에 선명했을 붉은 피의 가르침을 가슴에 단단히 새긴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망칠 힘을 쥐어주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VI. 길을 정했다면 끝까지 걸어라

콘스탄티노스가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자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퍼진다.

“많이 컸구나, 이녀석!”

아리스가 조막만한 손을 내밀어 콘스탄티노스의 코끝을 만지자 그는 웃으며 아이를 던졌다 받고, 스틸리안느는 아리스가 꺄악 웃으며 공중을 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면서도 미소짓는다. 머리에 햇살이 따뜻하고, 정원의 나무에서는 새가 지저귄다. 한여름의 정원에서 아리스가 웃는 세상에는 어둠도, 두려움도 한 점 없다.

“그동안 잘 지냈소?”

옹알거리는 아리스를 꼭 안은 채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팔로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맞춘다. 그 포근한  체온과 넓은 가슴에 안겨 스틸리안느는 그에게 웃어준다.

“그럼요. 율리아노플은 어땠나요?”

“당신과 아리스가 없었지. 보고 싶었소.”

막 대꾸하려는 순간 뒤에서 작은 헛기침이 들린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마님. 나으리를 빨리 뵈어야겠다고 하셔서…”

연기와 박하꽃 향. 잠시 돌아보지 않고 서서 스틸리안느는 태연하고 무심한 표정을 얼굴에 갑옷처럼 두른다. 콘스탄티노스에게 아리스를 받아들고 그녀는 천천히 돌아선다. 남편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손님에게 다가서고 있다.

“니키아스 공.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오시자마자 이렇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콘스탄티노스 경.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도록 하지요. 건강하셨습니까, 스틸리안느 부인?”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린 것은 오랜 감정의 습관일 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헤집어진 옛 상처의 고통 앞에 그녀는 자신을 다잡고, 낯선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아리스를 꼭 끌어안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말씀 나누시지요. 마실 것을 올려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쪽은 아리스 공자인가요? 아주 잘생긴 아드님이군요. 두 분 많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녀는 엷고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 귓전에 울려온다.

“감사합니다, 공. 당신을 꼭 닮았죠, 여보?”

“당신을 더 닮은 것 같은데.”

콘스탄티노스는 웃으며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춘다.

“먼저 들어가보겠소.”

“예.”

그녀는 인사하고 지나쳐가는 니키아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품안의 아들,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 순진무구한 눈빛과 포근한 아기 냄새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녀와 아이를 쳐다볼 자격조차 없는 남자와 그런 남자 앞에서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소리는 등뒤로 멀어져서 사라져간다.

가끔 그녀는 꿈을 꾼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런 꿈. 권력에 가족을 잃고 피눈물 흘린 사람이 어디 그녀뿐일까.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운은 좋았다. 이걸로 끝내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다른 꿈을 꾸고는 한다.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어머니의 눈물, 그녀에게 반갑게 고개 돌리던 아버지. 절 보내세요.

전쟁이나 다름없이 싸워서 얻은 행복에 잠기다가도 순간순간, 스틸리안느는 자신이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린 공허를 채우는 피의 꿈을 꾼다. 평온한 일상의 틈새에서 끝없이, 언제나.

아리스가 배가 고픈 듯 품안에서 칭얼거린다. 조그마한 등을 토닥여주며 스틸리안느는 집으로 돌아선다.

“미안해, 아리스.”

보드라운 머리칼에 입맞추고 그녀는 아들의 귀에 속삭인다.

“엄마를 용서하렴.”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용서를 비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도. 칭얼대는 아리스를 안고 그녀는 조용히 햇살 가득한 정원에 등을 돌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생명을 끌어안고 죽음의 그림자를 끌며, 가슴에는 재와 폐허 가득한 채 삶의 전장 한가운데로.

솔개를 길들여 닭과 싸움붙이는 얘기는 고등학교 때 들은 것인데 계속 기억에 남았었습니다. 이름없는 인물 중 하나는 (스틸리안느는 아랫것들 이름에 관심이 없뜸) 짐작하시겠지만 본편 캠페인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스틸리안느에게 얻어맞았던 소년은 지금도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등장할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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