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의 비효율성?

요즘에는 RPG는 꽤나 노력이 드는 취미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시작만 하려고 해도 최소한 규칙을 익히고 인물을 만들어야 하고, 일단 시작하면 실제로 플레이에 나가고 참가 혹은 진행 (특히 진행)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말이지요. 물론 잘 되면 그만큼 돌아오는 것도 많지만, 좋은 결과를 내려면 추가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노력도 듭니다.

RPG가 소수 취미인 것도 이전에 종종 지적이 있었듯 이러한 비용 투자가 작용하겠지요. 그런 시간과 노력 비용을 정당화할 만큼 결과물의 효용을 높게 느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니까요.

느끼는 결과물의 효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RPG와 다른 놀이의 상대적 효율성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전투의 게임적 재미가 가장 크다면 그쪽은 대개 컴퓨터 (콘솔 포함) 게임이 더 효율적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할 것 없이 컴퓨터가 모든 것을 자동으로 처리해 주고, 점점 휘황해지는 그래픽과 음악도 있으니까요.

단순히 친구끼리 같이 웃고 떠드는 재미가 가장 크다면 이 목적에도 훨씬 효율적인 활동은 많이 있습니다. 수다를 떨고 논다든지,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을 한다든지. 역시 노력은 덜 들면서 사교적 즐거움이라는 효용은 제공하지요. 보드게임과 카드게임은 사교의 즐거움과 함께 머리를 쓰는 재미도 제공하고요.

잘 만든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 RPG에서 느끼는 최대의 재미라고 한다면 이 분야에서도 RPG는 반드시 가장 효율적인 활동은 아닙니다. 일단 비용 면에서는 위에 얘기한 다양한 노력이 들어가고, 또 효용 면에서도 RPG인은 대개 전문 작가가 아닌 만큼 책, 컴퓨터 게임, 영화만큼 개연성이 있고 이야기가 재미있지는 않은 일이 많습니다.

개인적 창의성을 발산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RPG에서 느끼는 최고의 재미라고 한다면 소설을 쓰는 것이 RPG보다 효율적이겠지요. 규칙을 익히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조율하고,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에 플레이를 하는 노력이 들지 않으니까요.

결국 위의 재미 중 어느 한 가지, 혹은 한두 가지만에 효용을 느끼는 사람은 RPG라는 활동이 비효율적이라고 느끼고 RPG에서 빠져나가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RPG의 비용이 효용에 비해 너무 크다고 느끼지 않고 RPG를 하는 인구는 어떤 효용을 찾는 것일까요? 즉, RPG라는 활동이 다른 활동에 비해 우위가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위에서 열거한 재미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인물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면서 게임적 재미도 느낄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 노력이나 역량에 따라서는 상당히 수준이 있는 결과물도 낼 수 있을 테고요.

이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따로 없기에 RPG는 그 외견적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효용을 모두 즐기려면 다른 놀이에 비해 노력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제작자가 이미 만들어놓은 시나리오나 그래픽은 컴퓨터 게임을 편하게 하지만 그만큼 제약 또한 되니까요.

한편으로는 이러한 재미를 한꺼번에 즐길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기에 RPG는 소수 취미라는 생각도 듭니다. RPG가 제공할 수 있는 재미 중 어느 한두 가지만 즐기려면 다른 활동을 즐기는 게 더 효율적인 만큼, 굳이 이런 ‘비효율적인’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재미를 한꺼번에 즐기려는 소수뿐이겠지요.

그래서 RPG는 그 속성상 노력이 안 들기도, 그리고 그다지 대중적인 취미가 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장 종합적인 놀이라는 바로 그 강점 때문에.

4 thoughts on “RPG의 비효율성?

  1. 무스카

    한 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전체는 그 부속물들의 합 이상이다’ 던가요. 모든 게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대상을 단순한 구성물들의 합집합으로 보면 뭔가를 빠뜨리는 거라고 봅니다. 구성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특성 또한 고려해야겠지요.

    전 종합적이라서 RPG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RPG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느낌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게임을 붙잡고 있습니다. WoW가 주는 전투적 재미때문에 WoW를 하기도 하지만, RPG에서의 전투는 또 사뭇 다릅니다. 그래선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서플리먼트를 파고, 사소한 내용 하나때문에 싸우고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전 소설을 쓰고, 읽기도 즐기지만, 줄거리가 개연성이 없고 때로는 완전히 맛이 가 있을지라도, RPG를 할 때, 그리고 끝난 후 리플레이를 읽을 때는 재밌다고 느낍니다. 저와 플레이했던 사람들 또한 각자의 기호성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나, RPG는 RPG대로 따로 좋아했습니다.

    요약하자면, RPG는 분명 종합적인 게임이고, 그에 따른 다양한 기호의 사람을 만족시켜줄 수 있으나, RPG 자체가 가지는 매력 또한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교향곡을 듣는 사람이 각각의 악기 소리 모두가 마음에 들어서 듣는 게 아니듯이, 이들 요소가 만들어내는 화음에 끌리는 사람이 더 많지 않나 싶습니다.

    조금만 더 발전시키자면, 굳이 많은 취미를 즐기는 습성이 없더라도, 즉 저 중 하나나 두 개에 대해서만 기호성을 즐기는 사람도, 충분히 RPG에 매혹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 중에서 간접적이나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할 일도 없고(군인입니다), 언젠가는 로키님과 생각을 나눠보고도 싶어서 이렇게 좋은 글에 첨언해봅니다. 얹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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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언짢다뇨..+_+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 전체가 이루어내는 상승작용도 포함하니까요, 무스카님처럼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요. 다만, 그 전체적 어우러짐에서 나오는 더 큰 재미 역시 효용과 비용 계산 (무의식적이라 해도)의 대상이기는 하겠죠. 그래서 RPG의 그 종합적 재미라는 효용을 꽤 크게 느끼지 않으면 RPG는 여전히 비효율적인 활동이고, 그래서 RPG는 소수 취미가 아닌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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