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 내 합의의 범위에 대한 생각

오늘 길드타운 플레이를 한 후 플레이 내 전개에 대한 합의는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깡패들과 전투에서 져서 회장님을 만나러 가자는 식으로 의논을 한 후 약간 빡빡한 전투가 있었는데, 전투의 결과까지 정해놓고 하는 건 참가자의 선택을 의미없게 해서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아사히라군의 이의가 있었죠.

그에 대한 논의 끝에 제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참가자가 주인공(PC)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범위는 합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RP를 통해 하는 게 괜찮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에 글을 썼던 서술권 문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명시적 합의는 서술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이며, 전통적 RPG 규칙에서 참가자의 서술권 범위는 주인공의 행동에 그치니까요.

예를 들어 불량배들이 골목에서 몰려나와 주인공 일행을 둘러싼다는 것은 겁스에서 참가자가 자기 직접 서술권 범위 내에서 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주인공이 아닌 조연 (NPC)의 행동이나 위치 등은 진행자의 서술권 내에 있으니까요. 따라서, 불량배가 습격하는 장면 같은 것은 제안, 논의 등 명시적 합의 과정이 없이 참가자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합의로 정하기에 적합합니다. 참가자의 로망을 살릴 만한 상황을 만들기에도 진행자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좋고요.

반면, 불량배들과 전투를 시작한 후 그 전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참가자가 규칙에 따라 주인공을 움직여 결정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주인공의 행동, 전술적 선택 등에 따라 전투 결과는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참가자가 주인공을 통해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술권 범위 내에서는 합의의 중요성이 덜하고,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서는 오히려 재미를 해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과를 정하지 않고 RP와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편이 긴장감과 의외성도 더 있을 테고요.

초기 상황까지만 같이 생각하고 그 이후는 RP로 하는 것은 여러 취향의 RPG인이 함께 어울리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역할극
대한 글에서 다루었듯 전개를 정해놓고 그에 맞춰서 RP하는 것을 선호하는 취향도 있고, 아사히라군처럼 진행자가 무엇을 내놓을지
모르고 시작해서 서로 맞부딪치며 나오는 우연과 의외성을 좋아하는 취향도 있지요. 전자쪽 취향일 수록 합의가 중요해지고,
후자에 가까울 수록 합의 없이 RP로 말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하면서도 그 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서술권 분배 없는 규칙에서 극적 욕구를 조화하면서도 참가자의 선택과 상황의 의외성을 살리는 하나의 타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9 thoughts on “플레이 내 합의의 범위에 대한 생각

  1. Wishsong

    나도 합의는 초기 설정까지만 생각하고 그 다음은 주사위운과 RP와 분위기에 맞춰 가야 한다고 믿고 있어. 미리 만들어진 결과에 맞춰 나가는 건 분명히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RPG에 있어서 ‘규칙’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버린다고 생각돼. 룰의 존재의의 중 하나가 “불확실한 상황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거기에서 불확실성이라는 걸 제거하면 룰에 의거한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지 않는가… 하는 게 내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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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그렇지, 차라리 결과를 합의한 후 규칙을 배제하고 역할극처럼 한다면 몰라도, 결과를 합의했는데도 규칙을 사용하는 건 좀 눈가리고 아웅인 듯. 결과는 잠정적이고 그렇게 안 돼도 상관없다고 합의하고 규칙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길드타운 플레이 때 우리가 그랬듯 그 결과에서 벗어나는 데는 부담이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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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sdee

    전통적인 마스터/플레이어 구도에서는, “참가자가 주인공을 통해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술권 범위”가 늘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는게 문제인 것 같아요.

    마스터는 얼마든지 “도저히 이기지 못할 승부”나 “쉽게 이길 승부”를 꾸밀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전투의 결과는.. 플레이어가 어떻게 전술을 쓰느냐 보다, 얼마만큼의 적이 나오느냐에 좌우되는게 아닐까란 생각도 듭니다. 극점수 같은 규칙이 없다면, 플레이어의 전술로 승패를 가름하는 건 쉽지 않은 듯도… 아마 승부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만 의미가 있겠죠.

    이렇게 보면, 아예 “전투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선택이 차라리 의미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 선택 역시도 상황에 많이 좌우되고요. 도저히 저항불가능한 상황을 내놓아버릴 수도 있으니…

    여하튼, 참가자의 의미있는 선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게 대전제일 듯 싶네요. 마스터의 독단을 막기 위한 ‘합의’라고 해도, 그 ‘합의’ 때문에 플레이 내에서 선택이 무의미해지면 곤란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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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원칙적으로 참가자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술권 범위인데 진행자의 무리한 진행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대체로 진행자가 이리저리 길을 막는 게 보이는 정도) 그것은 참가자 선택의 의미라는, 말씀하신 대전제를 침해한 것이겠지요. 그건 더 이상 규칙이나 플레이 내 합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진행자가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진행자 규율 내지는 서술 분산형 규칙을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플레이에 대한 기대와 욕구의 조화 문제로 넘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합의를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합의가 반드시 진짜 합의는 아니라는 점 같아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몰라서, 혹은 반대하기 미안해서 남들 의견에 그냥 따라가는 일도 많고요. 그걸 좀 더 끌어내는 방식으로 서술권 규율 규칙을 선호하기는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역시 욕구와 기대 문제겠지요. 그게 RPG의 진짜 어려움인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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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불타는도넛

    어차피 결과가 지는것으로로 합의되어 있었다면 전투행위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싸웠고 졌습니다. 안타깝네요, 데헷.’ 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실제로 저 그대로의 서술을 권장하는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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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Asdee

    생각해보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어떤 식으로 싸움이 진행되어 어떻게 패배에 이르는가…를 그려내기 위해 진행해볼 수도 있을 거 같네요. 그 과정에서 취하는 행동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가 반영된다면 더욱 의미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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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카나사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흥미로운 주제가 나와서 갑자기 튀어나와 보았습니다; 현재 저희 팀도 합의형 플레이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저희 팀에서는 내용을 진행하는 씬과 전투씬이 상당히 나뉘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각 씬별로 주역이 되는 캐릭터가 있고 그 캐릭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씬이 진행되고 그 과정에 전투는 거의 개입되지 않아요. 내용적으로 전투가 들어간다고 해도 플레이어의 서술연출로 지나가는 경우도 꽤 있고요. 대신 다른 씬들이 도는 것 처럼 전투를 위한 씬이 할당되어 있다는 느낌이지요. 따라서 합의는 위의 장면형 씬들에만 적용되고 전투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더군요. 이건 저희 팀의 스타일이라기 보다도 일본쪽의 룰들이 씬별로 내용을 진행할 것을 보조해 주고 있는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도쿄노바 같은 경우는 씬 플레이어가 지정되면 그 플레이어가 어떤 씬을 연출할것인지를 정하기도 하고요…합의는 룰외의 영역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의외로 룰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서 놀란 부분이기도 합니다.(쓰다 보니 본제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 듯 싶군요;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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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반갑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규칙의 영향은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연출이나 서술 같은 부분에 닿아 있는 규칙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고요. 합의하고 규칙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는 더 생각해 보고 싶은 흥미로운 문제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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