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건 딱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혼자 있을 때 하고 끝나면 손을 씻도록.
– 로버트 하인라인 (Robert Heinlein)
RPG를 하면서 느끼는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큰 것은 개별적 로망이랄까, 환상이랄까, 마음을 끌어당기는 어떤 원형이나 유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참가 (플레이)를 할 때 만드는 주인공 (PC)은 이 로망의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전담해서 계속 맡는 이상 그 로망에서 벗어나면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렵고요.
그런 의미에서 위 하인라인의 인용구는 RPG에도 적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집필과 달리 독자적인 활동도 아니고 사회적인 놀이인 만큼 타인에게 자신의 꿈과 백일몽을 맡겨야 한다는 점에서 더 용기와 신뢰가 필요하지 않나 해요. RPG 팀이 종종 폐쇄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또 플레이가 잘 안 되면 그걸로 끝나지 않고 감정이 상하기 쉬운 것도 그만큼 깊은 신뢰를 전제하고 자신의 많은 것을 드러내서일지 모릅니다.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펼치었으니
내 꿈을 딛은 그대, 조심해서 딛어주오.
– W.B.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로망이 재미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RPG를 더 재밌게 하려면 자신의, 그리고 타인의 로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이 플레이하고 얘기 나누다 보면 감이 올 수 있고, 또 플레이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떤 것은 싫은지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규칙 역시 자유로운 개별적 표현과 전체적 조화를 지원한다면 더욱 도움이 되겠지요.
개개인의 극적 욕구와 전체적인 조화와 맥락은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습니다. 플레이의 전체적인 모습이 놀이의 결과물이라면 개별 참여자의 극적 욕구는 그 동력이니까요.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이어주는 것이 참여자 사이의 의사소통, 서로 상대의 꿈을 딛고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겠지요. 각자의 로망, 그리고 모두의 놀이를 위해.
보라, 우리는 꿈의 재료일지니
작은 삶은 잠과 함께 끝나는도다.
– 셰익스피어의 ‘폭풍’ 4막 1장 中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 최근 들어서 시트를 작성하는.. 하다못해 간략하게라도 적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단순히 적어놓은 것을 떠나서 ‘플레이어의 성향은 어떠한가,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요소는 무엇인가’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같거든요. (덧붙여서, 제 캐릭들은 천사형이 아닙니둥 ;ㅅ;)
말씀대로 진행자가 그런 로망 파악을 하게 도와주는 게 중요하죠. (알려줘도 신경 안 쓰는 진행자는 하루빨리 버려야(..)) 자신도 자기 로망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면에서 컨셉이라든지, 부각하고 싶은 부분이라든지 적어두면 좋고요.
그리고 천사형이 아니긴 뭘 아녜요! 과학이든 초자연이든 치유의 힘, 상황의 피해자 (타인의 부당한 비난, 오해 등), 동물 친화력, 자기희생 모티프 좋아하시는 거 다 아는데. 오체스님 순정적 취향은 이미 파악했습니다! (처억)
제 로망은 키보다 더 큰 칼을 휘두르는 무인인 것입니다! (응?) 구체적으로는 담요맨 퇴치의 용사라던가 (…)
확실히 “플레이가 잘 안되면 그걸로 끝나지 않고 감정이 상하기 쉽다” 라는 부분이 공감이 되네요. 그런 점에서 테스트 플레이를 해 보고 투표를 한다던가 하는 방식은 좋을 것 같고, 또 제 경우 제가 주도적으로 팀을 짤 때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에 한정해서 모으고 있지요.
위의 “취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로키님은 왠지 어느 정도 관록이 있는 인물로서, 속이 깊고,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능구렁이형 인물을 좋아하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뱀프님은 같이 많이 플레이 안해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지적인 책사형 인물이 로망이 아니신가 해요. 그리고 컨셉상으로는 종종 동양적인 분위기나 배경을 살리는 쪽 같고요. 뱀프님은 머리가 나쁜 캐릭터를 잡기가 좀 어려우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능구렁이형 인물은 특히 진행자로서 조연으로 돌릴 때 꽤 하지만, 제 진짜 노ㅁ.. 아니 로망은 자기 감정과 욕구를 주체 못하고 그 결과를 주변과 세계에 강렬하게 표출하는 인물 같아요. 강한 내적 동기로 움직이기에 선이나 악으로 쉽게 나눌 수 없고, 장점과 단점 모두 극명한… 그리고 인간적 허점이 많은 만큼 실수도 저지르고 잘못도 하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은 아주 인간적인 인물을 좋아하죠.
그 기본 줄기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표현은 비교적 다양해서, 도쿄의 달 때 우메하처럼 내면의 고민과 열정을 감춘 능구렁이형 인물도 있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불량아도 있고, 살짝 맛이 간 외관 아래 나름 충실한 정의관과 진지한 고민을 감춘 양아치 무당(..)도 있었죠. 공통점이라면 말씀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속사정이 많고, 또 하나같이 대가 세다는 점 정도인 듯하네요.
나쁜 악당들을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장작불에 집어넣는 정의로운 히어로가 되고 싶어요!
(반 정도는 사실!)
승한님은 전에 얘기한 것처럼 어떤 이상에 매진한 나머지 도덕적으로 잿빛 지대에 들어서는 인물이 로망인 것 같더군요. 말하자면 인간성과 일상성을 넘어서는 초월성의 표현? 그런 인물에게는 ‘별로 악하지 않고 입장이 다를 뿐인 적’이라든지 ‘충성의 대상에게 드러나는 어두운 일면’ 같은 걸 던져줘서 갈등을 유발하면 재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