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그림자] 풀섶에 숨은 뱀

40화 곁가지입니다. 처음 생각한 건 정황상 앞뒤가 안 맞는 데가 있어서 동환님과 얘기해 조절했습니다.

한낮의 하늘 아래 거리는 한산했다. 탐문을 핑계로 스승 몰래 술이라도 마실 곳을 기웃거려봐도 근처에는 캔티나 하나 제대로 없었다. 지독히도 재미없는 행성이라고 생각하며 아를란은 천천히 광장에서 멀어져갔다.

궤도 통관에서 보았던 여자가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굴이 후드 그늘에 반쯤 가렸는데도 낯익던 턱선,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며 생긋 웃어주던 입술. 그저 닮은 사람일 거라고, 착각일 거라고 해도 스승과 두 나이트는 그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가슴이 아프도록 뛰는 것을 느끼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볐다.

‘미친 놈.’

거리가 꺾어진 곳을 도는 순간 정면의 그늘진 문간으로 들어서는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에 잠시 빛나다가 그늘 속으로 멀어지는 갈색 머리도.

나이트 로어틸리아라고 부르려다가 그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나이트 로어틸리아는 그가 떠나온 광장 부근에 있었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 포스 기척은 없었다. 그가 아는 포스 사용자 중 가장 완벽하게 기척을 죽일 수 있는 사람. 갑자기 입안이 바작바작 말라왔다.

돌아보았지만 광장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한산한 거리… 갑자기 이 도시에, 이 행성에 혼자인 것만 같았다.

컴링크로 연락만 하면 된다. 워낙 한적해서 언성을 한껏 높이면 닿을지도 모른다. 필리스… 다쓰 세리트가 맞다면 쓸데없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어디도 없었다. 그저 나이트들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기는 동안 건물의 모습은 점점 크게 다가왔다. 그는 검은 입처럼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햇살에서 벗어난
순간 실내의 그늘이 피부에 서늘하게 와닿았다. 높은 창문으로 비쳐드는 빛줄기 속에 걸음을 멈춘 채 그는 머뭇머뭇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여기 있어도, 없어도 이곳에 혼자 올 이유는 없었다.

“왔어?”

돌아서며 동시에 라이트세이버를 켜는 동작은 거의 본능이었다. 깊은 그늘 속의 층계참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귓가에 심장박동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감정은 없다, 평온이 있을 뿐. 손이 떨리면서 세이버의 빔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백만 년쯤 전에 스승을 카론에서
찌르려 했던 생각이 났다. 이 여자가 약속한 복수의 기회를 향해 뛰어들던 때에.

이 여자 말고는 우주에 의미라는 것을 찾을 수 없던 때에.

그녀가 느긋하게 일어나 층계를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 감정이 두려워서 그는 마치 공격을 막아내듯 세이버를 내밀었다.

“그… 그만. 멈추십시오.”

떨리는 목소리가 잦아든 후에도 다쓰 세리트는 보란 듯이 서너 발짝 더 다가와 라이트세이버 빔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빔에 거의 닿다시피 한 하얀 목에서 그는 주춤주춤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래? 난 지금 포스도 못 쓰잖아.”

사실이었다. 포스를 개방하면 나이트들이 알아차릴 테고, 그녀가 그 틈에 아를란 자신을 살해하고 도망친다 해도 언제까지나 세
나이트를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도 그녀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했다. 다쓰 세리트에 대한 그의 취약함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갑자기 한 발짝 다가서자 아를란은 세이버
빔이 목에 파고들기 직전에 숨죽인 욕설을 내뱉으며 라이트세이버를 끄려다가 그만 놓쳤다. 바닥에 라이트세이버가 챙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는 동안 다쓰 세리트는 방금 목이 잘릴 뻔한 것은 상관도 하지 않고 태연히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햇살 속에
먼지 입자가 금빛으로 춤추었다.

“오랜만이야, 아를란.”

어째서, 이렇게 많은 것이 변한 후에도 뺨에
와닿는 그 손의 감촉이 아주 오래 떠나있다가 집에 돌아온 기분일 수 있을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짓을 해왔는지
사무치도록 알면서도 어떻게 그리움에 목이 메일 수가… 그는 한 순간 눈을 감고 그 숨막히도록 감미로운 고통에 빠져들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아 내리면서 아를란은 손이 떨려왔다.

“예, 당신이 나를 속여서 죽이려고 한 이후로 말이죠… 다쓰 세리트.”

“내가 널 속여? 언제?”

눈이 동그래지며 갸웃거리는 얼굴을 보며 아를란은 갑자기 붙들고 입맞추고 싶다는 충동에서 벗어나려고 손목을 데인 듯 놓았다. 감정은 없다, 평온이 있을 뿐. 제다이의 법도는 이 순간은 묘하게도 공허했다.

“스승… 다쓰 프리아트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날 함정으로 내몬 걸 부정할 생각입니까?”

“내가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언제 성공을 보장한다고 했던가?”

그가 멍해져서 쳐다보는 동안 다쓰 세리트는 웃음기로 눈이 반짝였다.

“맹세코 너에게 거짓말한 적은 없어.”

“그렇겠죠. 거짓말 안해도 알아서 속아주니까.”

아를란은 쓰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세상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 이후로 죽을 곳, 아니 자신을
파괴할 곳을 찾아헤매지 않던 때가 있었던가. 제다이가 되고서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던 그 끝없는 분노.

그런데도 이렇게 그녀와 만난 순간 정말 벗어났는지 자신이 없었다. 불길에 달려드는 건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그리고 이보다 밝고 아름다운 불길을 또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겁니까.”

거친 질문은 반쯤은 애원과도 같았다. 나도 제다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모든 것을 벗어나서 내일이라는 걸 기대할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왜 당신이 여기에. 이것이 꿈이라면 눈 뜬 시간은 다시 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이게 그저 꿈이라면 그녀가 없는
생시를 견뎌낼 수 있을까.

“간단해. 너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유지.”

필리스의 대답은 차분하고 조용했다.

“…예?”

“마스터 티로칸. 내 사랑하는 동생 로어틸리아의 스승.”

아를란은 갑자기 귀를 막고 싶어졌다. 지금 얘기를 들으면 돌이킬 수 없으리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머뭇거리며 저지하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동안 그녀가 하는 말이 하나하나 의식에 파고들었다.

“나이트 티로칸이 타투인에 있는 작은 사막 마을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우리 부모가… 우리가 태어난 마을이 몰살당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숨이 막혀오며 아를란은 비틀거렸다. 피가 흥건한 바닥에 발이 미끄러졌을 때처럼. 옆집 아주머니의 시체에 걸려 넘어졌을 때처럼 세상이 위도 아래도 없이 미쳐있었다.

“알다시피 그는 지금 마스터 티로칸이고… 내 동생을 거두어서 가르쳤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를.”

“어째서…!”

어째서 제다이 공의회가 그런 일을 묻어버렸는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어째서 우주는 이렇게도 빌어먹을
곳인지… 떠오르는 수십 가지 중 어느 질문, 혹은 원망을 말해야 할까. 포스력을 쓰고 있지 않은 그녀에게서 거짓의 기색을
읽어내기는 쉬웠다. 그런데도 시스 로드의 지금 말에는 어떤 거짓도 없었다.

“순식간에 다크 포스? 재밌네, 이제는 무려 제다이 파다완 아니었어?”


말에 그는 가까스레 포스를 다잡았다. 분노는 증오로, 증오는 고통으로. 피비린내와 입안에 재와 먼지의 맛, 눈과 목을 찌르던
매운 연기는 지울 수 없이 그의 하루하루를 기묘한 광기로 몰아갔었다. 그렇게 그에게 지옥은 죽음의 망각이 아닌 삶의 기억이었다.

그녀…도?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에게 빙긋 웃어보이며 다쓰 세리트는 발돋움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그때 너에게 ‘기회’를 줬어. 네 기분을 아니까.”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열린 문간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잠시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오후의 정적에 귀기울였다. 허리를 굽혀 라이트세이버를 집어들고 문을 나서자 환하고 한가한 주변이 새삼 낯설었다.

다쓰 세리트가 갔을 광장 반대 방향은 쳐다보지 않은 채 그는 거리가 꺾어지는 곳을 돌아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를 찾으러 온
나이트 로어틸리아와 마주쳤을 때도 반응 없이 조용히 목례했다. 조금 있으면 필리스가 한 말의 의미가 다시 부딪쳐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의 정신은 고요했다. 마치 이 거리처럼.

잠시 건물 지붕을 시선으로 살피다 걸음을 옮기는 나이트 로어틸리아를 아를란은 말 없이 따랐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건물과 담벼락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8 thoughts on “[공화국의 그림자] 풀섶에 숨은 뱀

    1. 로키

      속내는 진지하면서도 개그 캐릭터라는 게 아를란의 비극..(..) 지금 여러모로 상당히 찔리고 있으니 (그때 피나를 그냥 보내줘서 다쓰 쟈르넥이 쫓아온 일이라든가) 아마 슬슬 안절부절 못하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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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ishsong

    아를란이 했어야 하는 올바른 행동.

    1. 시스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2. 벤다!
    3. 누군지 확인한다.
    4. 그다음에 더 벨지 말지 망설인다.

    이랬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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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아를란과 피나의 능력 차이 때문에 가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시나리오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분! 흑백 논리주의자! 냉혈한! (찰싹찰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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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Wishsong

      저 상황에서 “얼씨구나 보스 몹이구나(썩둑)” 이렇게 벤 다음에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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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몹도 몹 나름이죠, 본인의 옛 애인이고 PC의 혈육인데! 이분이 몬스터즈 덴에 빠지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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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카스트

    시스에 대처하는 우리의 예의바른 자세

    1. 시스를 발견한다
    2. 벤다!
    3. 누군지 확인한다
    4. 슬픔에 빠진다
    5. 눈물을 흘리며 확인사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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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여 역시? (..) 이제 문제는 그렇게 대처하지 못한 제다이를 어떻게 하느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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