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의 놀이 속 권력

진행자(GM)가 게임 밖에서 가진 권력에 대한 CBM님의 글을 보고 놀이 속 진행자의 권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RPG를 하다 보면 진행자는 다른 참가자보다 훨씬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죠. 어떻게 보면 이야기를 진행하고 세계를 돌리는 진행자의 역할 성격상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만큼 큰 권한은 또한 남용되기도 쉽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나치게 강한 적을 내보내서 주인공을 몰살시키는 것이겠지요. 물론 그랬다가는 참가자들의 원성도 심하고, 보통 진행자가 스스로 자제하기 마련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주 극단적인 경우는 피한다고 해도 진행자가 주인공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참가자들을 쉽게 무력하게 만듭니다. 이른바 ‘학대당한 플레이어 증상’을 종종 보게 되는데, 자기 주인공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것이 두려워 참가자들이 몸을 사리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적극적인 선택이나 발상을 했다가 진행자의 철퇴가 내릴까봐 주어진 길, 보이는 길만 쫓아가는 것이지요. 참가자가 제어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인해 주인공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위험을 저울질하는 신중한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아예 피하는 무행동을 유도합니다. (자녀양육에도 비유할 수 있겠죠. 어떤 경우에 벌을 받고 어떤 경우에 괜찮은지 기준이 확실하면 그건 교육이지만, 기준이 없이 부모 기분대로라면 학대인 것과 비슷한 원리.)

또한 이야기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거나 판정 결과를 바꾸는 극점수 규칙 역시 많은 경우 진행자의 권력 증대를 유도합니다. 극점수를 부여하는 권한이 진행자에게 있는데다 대개의 경우 진행자의 극점수는 무한대이거나 참가자보다 훨씬 많은데 반해 참가자의 극점수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참가자의 적극성을 유도해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인 극점수는 오히려 참가자들의 무력감을 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기존 규칙책에서는 이와 같이 진행자의 권력이 크고 참가자들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진행자가 원하는 것, 진행자와 참가자의 관계가 놀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쉽고, 참가자들의 욕구와 선택, 참가자들 상호간의 관계는 덜 중요해지기 쉽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강조하자면 진행자가 세계와 그 구성원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규칙을 해석하는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이러한 권한은 놀이의 진행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니까요. 진행자 없는 놀이에 대한 많은 시도가 있지만 여전히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 분담은 역할놀이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 사람이 많은 권한을 가짐으로써 세계는 보다 일관성을 가지게 되고 규칙해석은 보다 빨라지니까요. 진행자가 가진 권한은 놀이를 더 재미있게 합니다. 문제는 이 권한이 참가자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참가자를 주변인으로 만들기 또한 쉽다는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진행자가 가진 권한의 긍정적인 부분을 유지하면서도 참가자를 놀이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의 산실인 인디 규칙책들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규칙들은 많은 경우 놀이를 해본 경험과 고민에서 우러나온 것들이고, 따라서 기존 규칙 사용자들에게도 시사해주는 점이 많거든요. 그런 면에서 배울 점이 많은 규칙책을 몇가지 들어보겠습니다.

과거의 그늘 홈페이지(영문) | 소개글

‘과거의 그늘’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진행자의 뜻대로 다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다치는 것은 참가자들이 원할 때 뿐입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다치거나 죽는 위험이 생기려면 ‘본때 보이기’라는 규칙을 사용해야 하는데 본때 보이기 선언은 참가자만 가능하거든요. 진행자는 본때 보이기를 선언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참가자들의 심적 부담은 엄청나게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한’ 주인공은 안전하니까요. 실연의 절망에 몸부림치며 무력해지는 일도(심적 피해), 화살에 꿰여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일도(신체적 피해) 없을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그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더이상 참가자들은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진행자의 철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이 다치는 일은 아예 없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피해를 입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즉 참가자가 본때 보이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주인공의 행동은 영구적인 효과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없는 단역은 본때를 보이지 않고 죽일 수 있지만, 이름이 있는 주요인물은 본때를 보이지 않는 한 죽이거나 영구적으로 파멸시킬 수가 없습니다. 즉 참가자에게 이득과 위험을 저울질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늘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많은 팀에서도 볼 수 있는 암묵적인 합의이지만, 규칙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확실한 안전장치라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안정성 위에서 참가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죠. 자기 주인공의 운명에 대한 최소한의 제어권을 가지고…

과거의 그늘은 극점수 규칙도 특이한데, 극점수를 부여하는 주체는 진행자가 아닌 참가자입니다. 즉, 놀이를 시작할 때마다 각 참가자는 스스로는 사용할 수 없고 다른 참가자에게 줄 수만 있는 극주사위를 받지요. 그리고 다른 참가자의 연기가 멋졌다든지, 다른 주인공의 이 행동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든지 하는 때가 있으면 그 극주사위를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기존 극점수 규칙에서는 진행자의 취향, 진행자와 참가자의 관계가 중요했다면 과거의 그늘에서는 참가자들의 취향과 참가자간의 관계가 그 중요성을 대체하는 것이지요. 이 또한 참가자들을 놀이의 중심으로 이끌어내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홈페이지(영문) | 실제 플레이

가상의 TV 드라마를 만드는 규칙 안방극장 대모험은 아예 부상 규칙 자체가 없습니다. 물론 실패는 할 수 있는데 이게 재밌는 점이, 진행자(여기선 PD)가 판정의 난이도만큼 ‘예산’을 소모한다는 사실입니다. 겁스나 D&D로 비유하자면 적이나 함정을 만드는데 한정된 점수가 주어진 것과 비슷하달까요. 참가자들에게 어려운 도전을 제공하는 것은 진행자 마음이지만 그만큼 유한한 자원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판정의 남용은 훨씬 제한됩니다.

과거의 그늘과 비슷하게 안방극장 대모험에서도 극점수(팬레터)는 참가자끼리 주고받습니다. 예산과 팬레터 사이에는 흥미로운 상호관계가 있지만, 얘기가 길어지니 넘어가도록 하죠.

이와 같이 진행자의 권력을 제한해서 참가자에게 보다 적극적이고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그런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주인공의 부상과 죽음을 진행자의 자의에 맡기지 않는 것. 위에서 말했듯이 참가자의 위축을 막는 효과가 큰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이 본때 보이기와 비슷한 규칙이든 난이도의 제한이든 적 능력치의 제한이든 간에 참가자에게 ‘몸을 사릴’ 이유를 너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대개의 경우는 부상과 죽음을 참가자가 예상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상황에 맡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무 보호수단 없이 용암으로 뛰어들면 다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전혀 구분의 근거가 안 보이는 두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보물, 오른쪽으로 가면 전원 몰살이라는 식의 경우가 많은 게 문제입니다.

두번째, 극점수 규칙의 참가자 중심적 활용. 사실 제가 보기에 진행자에게는 극점수 규칙이 필요없습니다. 극이나 극점수란 주인공이 주인공답기 위한 것, 그리고 참가자를 놀이의 적극적인 주체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극점수는 참가자끼리 주고받거나 진행자의 취향과는 별개로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진행자의 취향에 따라 극점수처럼 중요한 자원이 움직이는 것은 진행자를 더더욱 놀이의 중심으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마지막으로 저를 포함한 모든 역할놀이 진행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놀이의 주체는 참가자이지 진행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행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놀이의 무게 중심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진행자에게 쏠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이 참가자 쪽에 비중을 두어야 진정 모두 함께 즐기는 역할놀이가 된다는 것이지요. 역할놀이의 의의는 ‘참여’이지 ‘구경’이 아니니까요. 진행자는 참여를 넘어 주도 쪽으로 가기가 쉬운 반면 참가자는 소극성을 넘어 구경꾼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참가자의 적극성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진행자가 권한을 갖되 권력은 제한받는 것은 그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7 thoughts on “진행자의 놀이 속 권력

  1. Tealeaf

    좋은 글 보고갑니다.
    이미 수동성에 물든 플레이어를 바꾸는 것이 너무 힘들더군요.
    너무 능동적인 캐릭터에게 압박만 주는 마스터도 많구요.
    기존의 RPG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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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르티온

    예, 확실히 요즘 플레이어들은 너무 진행자에게 기대는 성향이 많더군요.뭐, D&D 시리즈가 확실히 RPG계에서는 보편화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만… (머엉)확실히, 진행자가 요즈음 참가자의 생사를 쥐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어질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단, 진행자에게는 케릭터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자신의 마음데로, 플롯이 짜여진 그 대로 해야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케릭터 자체에 대한 책임이 전체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도 말씀하셨다 시피, RPG를 하는 사람 중 하나니깐요.이 문제는 진행자의 역활을 룰 적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진행자와 참여자가 모두 100% 참여를하는 플레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에 키가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이러한 환경을 장려하는 룰을 사용한 다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만, 그 이전에 서로간에 “플레이어와 마스터” 로써 각자를 ‘신뢰’ 할 수 있는 가를 알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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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르티온

    그렇기에 RPG계가 전체적으로 자신이 아는 서클 안에서 팀들이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구요….다만, 저도 이 상태에서 이 취미가 대중화가 된다면, 진행자를 상위권의 엘리트로 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두려워 지기는 합니다.-_-; ‘진행자’가 플레이의 ‘주선자’ 혹은 ‘리더’ 격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입니다.P.S. 홈페이지는 아직까지 다운이십니까? -…P.S.2 …드디어 귀차니즘을 뚫고 링크 납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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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CBMaster

    대공감하는 글입니다. (‘학대당한 플레이어 증상’ 에서 몸을 움찔;;)

    개인적으로 플레이 내에서의 주도권은 무엇보다 ‘정보’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정보를 가진 것은 진행자이고, 정보가 얼마나, 어떻게 주인공에게 전달되느냐가 플레이의 주도권을 좌우합니다. 대체로 진행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정보가 필요보다 더 적게 주인공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너무 많은 정보가 전달되면 주인공들은 갈 곳을 잃거나 (원래 없던 주도권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또는 제멋대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 이 ‘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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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로키

    Tealeaf// 아무래도 적극적인 참가자는 진행자 입장에서 ‘관리’가 좀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준비된 길에서 벗어나면 버벅거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전 준비따윈 안합..(퍽퍽) 수동성에 물든 참가자를 바꾸는 것, 힘들죠. 저는 그 답을 규칙에서 찾고 싶지만, 다른 길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묘// 어허허..(…)아르티온// 주인공에 대한 책임은 진행자가 아닌 각 참가자가 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책임을 질 수 있는 도구를 빼앗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가자 적극성 확보의 첫걸음이라고 봅니다. CBMaster// 예, 정보도 정말 중요한 문제죠.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권력의 일환입니다. 정보를 쥔 사람은 그만큼 판단의 근거와 자료가 충분하고, 더 확고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더 큰 문제는 전통 역할놀이에서는 생리적으로 그 정보가 100% 진행자에게’만’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들이 정말 이 세계(또는 지역, 또는 도시)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계관에 대해 무지한 게 그 대표적인 경우죠. 참가자가 진행자와 함께 세계관 설정에 참여한다거나 독자적인 서술권을 어느정도 가지고 정보를 만들게 하는 시도가 그런 면에서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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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orches

    오랜만입니다, 로키님. 로키님의 글은 생각할 것이 많더군요. 위의 분과 마찬가지로 학대당하는 플레이어에서 잠시 경직했습니다. 어느 정도 마스터께 권력이 있어야 하나, 지나치게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적당히 균형이 맞는 것이 이상적인 모범답안이겠지요..

    추신 – 모두가 즐거운 플레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고도 힘든 주제입니다. 마스터는 어느 길을 원하고 계속 밀고 가시는데, 정작 플레이어인 제가 ‘어느 것이 마스터가 원하시는 방향’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빙빙 도는 것 같은, 그리고 어느 정도가 ‘다른 팀원에게 폐라든지 끼치지 않고 서로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적정선’인지 모르겠고, 타이밍(타자가 느린 탓이 크겠지요..)도 맞추기 힘들며.. 들이는 공이나 노력을 제대로 보답받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랍니다. 플레이어로써의 입장과 마스터로써의 입장은 다르겠지, 좀 더 노력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드는지도요. 오알이 여러모로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지친 몸을 이끌고 두근거리면서.. 컴퓨터 앞에 앉게 되는군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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