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인물이란?

로키: “서로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서 밤늦게까지 얘기하면서 놀곤 했어요.”
로키: 쟈네이딘은 그립다는듯 미소짓는군요.
로키: “나이트 로어틸리아도 그런 친구가 있으셨나요?”
로어틸리아: “…아뇨.”
– 공화국의 그림자 18화

가공의 인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근사한 외모, 뛰어난 능력, 흥미로운 과거… 모두 매력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저런 것만으로는 그 인물에게 확 몰입하기는 좀 부족하더군요. 그냥 뭐, ‘멋지네’ 하고 끝.

제가 정말로 어떤 인물에게 마구 끌리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 인물이 ‘인간’으로 와닿는 순간입니다. 불완전하고, 잘못도 하고, 고민하는 인간적 틈새를 엿보는 순간 허구 속의 인물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춘 하나의 개체로 다가오죠.

이러한 인간적 허점은 제가 RPG에서 ‘성인형 인물’과 ‘소년형 인물’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성인형 인물 (성인용 인물 아님)은 능력은 뛰어나다 해도 실수도 하고 고민도 하는 등 인간적 모습을 보이므로 쉽게 극적 상황의 중심이 되고, 그를 중심으로 한 인간 관계와 서사도 풍부해집니다. 참가자가 이런 인물을 하면 진행자로서는 신명이 나죠.

반면 소년형 인물은 언제나 옳아야 하며, 잘못 생각하거나, 패배하거나, 인간적 허점을 보이는 데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정확히는 그 인물을 다루는 사람이 방어적으로 되지만요.) ‘나의 완벽함에 모두 감탄해줘! (제발!)’이라는 기반에서 그다지 깊이 있는 극적 내용이 나오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소년형 인물을 극적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력도 덜하고요.

성인형 인물과 소년형 인물은 다루는 사람의 연령이라기보다는 태도의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짐작하실 수 있듯 대체적인 연령 분포를 보이기는 합니다. 물론 개인차가 큰 부분이라 섣부른 일반화는 금물이지만요. 또한, 극적인 플레이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소년형 인물은 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성인형 인물이 품은 고뇌와 인간적 허점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어떤 플레이를 원하느냐 하는 지향에 크게 좌우되겠죠.

또한, 인간적 고뇌가 인물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지나치면 매력은커녕 짜증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소년형 인물과는 또 다른 이유에서 곤란한 ‘소녀형’ 인물이죠.(주:소녀형 인물 논의는 대화 중에 동환님이 얘기하신 부분에 많이 의존합니다.) 이 역시 성별이나 나이와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는데, 고민과 감정에 빠져든 나머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물을 말합니다.

성인형 인물의 매력은 인간적 고민과 허점에 있다고 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심금을 울리는 점은 성공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삶에 문제는 있고, 그러한 잘못된 것을 어떻게든, 설령 방향이 잘못되었다 해도 바로잡으려는 몸부림은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니까요. 그러한 노력을 통해 성인형 인물은 극적인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소녀형 인물은 그 심적 고통과 복잡한 문제들이 곧 인물의 우주가 되며, 빠져나오기는커녕 그 괴로움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교자 컴플렉스는 이 유형을 매력적이라기보다는 공포스럽게 만듭니다. 인물의 주관적인 감정을 절대시한 나머지 다른 참여자의 재미를 해치는 선택을 하는 것도 소녀형 인물을 잡은 참여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특징입니다.

‘인물’이라고 했지만 사실 성인형, 소년형, 소녀형 인물은 인물 자체의 유형이라기보다는 그 인물을 조종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성숙한 극적 감각을 갖춘 참여자라면 일견 소년형 혹은 소녀형인 인물을 ‘혼자 잘났다고 떠드는 독불장군’이라든지 ‘자기 감정 속에서만 허우적거리는 어린애’ 하는 멋진 성인형 인물로 얼마든지 탈바꿈시킬 수 있죠. 반면 그런 성숙함이 부족한 참여자는 인물의 그러한 단점을 단점으로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매력적인 인물의 구체적인 성격, 특징, 과거 등등은 무한히 다양합니다만, 그 다양성 속에서 제가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이들이 이렇듯 인간적 허점과 고민, 그리고 정체되지 않는 역동성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성인형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성숙한 극적 재미에 입체적인 인물은 필수죠. RPG의 인물들은 좀 더 많이 실수하고, 고민하고, 허점을 보여도 좋지 않을까요. 극적 깊이가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8 thoughts on “매력적인 인물이란?

  1. 소년H

    사실 성인용, 아니 성인형 인물을 다루는 플레이어는 허점을 내보내지 않는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인물의 허점이란 것 역시 ‘자신이 가지고 놀 것’으로 보냐 안 보냐의 문제랄까요. (그러니 성인형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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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결국은 인물을 얼마나 폭넓게 파악하고 표현하느냐의 문제죠. 인물의 깊이하고 직결된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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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방인

    저 같은경우 양념반 후라이드반 식으로 소년형 반 성인형 반… 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각해둔 캐릭터 이미지에서 ‘망가지거나 고민하거나 실패해도 되는’ 부분이 있고, ‘적어도 이 부분만은 양보할수 없다!’ 라고 미리 혼자 못을 박아둔 이미지같은게 있기도 하죠(…)
    전자의 경우 어떤 상황이 발생해 어떤 바보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걸 즐기며 재미있게 플레이를 하는 한편, 절대로 무너지지 말아야할 이미지가 무너졌다거나, 절대로 죽지 말아야 할 관련 NPC가 진짜 납득할수 없는 방법으로 허망하게 죽어 자빠지거나 한다면 더이상 의욕을 못 느끼고 그냥 ㅈㅈ 치고 손털고 일어나는 그런 멍청한짓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 PC에 부분 감정이입 한다고 할수 있을려나요(…)
    이거 쓰고보니 바보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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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뭐 ‘인간적 허점을 보인다’는 것과 ‘무능하고 찌질하다’는 서로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인물의 능력이 뛰어난 것 자체는 멋지죠. 거기에 옥의 티 식으로 인간적 고민과 허점이 있으면 정말 열광하게 된다는 얘기일 뿐. 아를란처럼 가끔 뭘 잘하면 티의 옥이 되어버리는 수준은 주인공에게는 곤란한 일이죠.

      주인공의 그 ‘옥’이 살아나는 꼴을 절대 못 보고 막 무능하게 만들면서 즐기는 진행자도 분명히 있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바로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악성 소년형 진행자라고 봅니다. 글에서 진행자와 참가자를 포괄한 ‘참여자’라는 용어를 쓴 것도 그래서이죠. 주인공의 능력과 색채가 살아나는 데 대해 묘하게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경쟁감이랄까 느끼면서 견제하는 유형이 제가 생각하는 소년형 진행자입니다. (진행자와 참가자를 가리지 않고 소년형 참여자는 전반적으로 샘이 많고 경쟁적인 특징을 보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사람들 보면 아끼는 조연은 확연히 소년형..(..)

      어쨌든 당연히 성인형 인물에게도 중심 이미지랄까,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있지요. 직접 얘기하신 적은 없지만 배경이나 시트에서 보인 신호로 추정하자면 자락스의 ‘옥’은 강한 전투력과 포스력, ‘티’는 다크포스와 루바트 오르가나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판정에서 져도 잘 살려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4화에서 자락스와 센의 대련이겠죠. 전투력이 중심인 자락스가 기술자인 센에게 라이트세이버로 지는 상황이었지만 그걸 ‘다크포스를 쓰면 이길 수 있었다’ 하는 식으로 끌어가서 자락스가 무능해지는 대신 그가 중요한 내적 갈등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비슷한 이유로 저는 명중 판정을 싫어합니다..(..) 좀 느슨한 판정이면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서술할 에누리가 있는데, 명중 판정에서 실패하면 ‘영웅적이고 뛰어난’ 인물의 ‘영웅적인’ 헛손질밖에 나오는 서술이 없거든요. 결국 실패하면 꼴만 우스워진다는 점에서 당연히 판정 실패보다 성공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고, 판정에 실패해서 재미없어질 여지가 있다면 판정을 안하니만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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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sdee

    소년형/성인형/소녀형 이라… 이해도 쉽고 멋진 표현이네요^^;

    음. 좀 사족인지 모르겠지만… NPC는 좀더 단순한 편도 좋지 않나 라는 생각도 요즘 해요. NPC 설정에 종종 버닝하곤 했는데, 플레이어들이 관심이 없다면 NPC의 고뇌 같은 걸 부각시키려는 건 무의미하단 걸 깨달았습니다. (-_-); 예전에도 이야기하셨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PC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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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감사합니다. ^^ 예, 확실히 자세한 조연 설정은 참가자 흥미 없이는 무의미하죠. 하지만, 주인공 배경에 나온 조연이라면 참가자 흥미가 급상승한다는 게 꽁수이기도 합니..(..) 주인공과 관련이 깊으면 그 조연을 부각시키는 건 (지나치지만 않으면) 주인공을 더욱 주인공답게 만들어주니까요.

      그 외에 대개의 조연은 말씀대로 좀 단순하고 전형성이 있어도 좋은 것 같습니다. 깊이있는 배경과 설정, 갈등은 주인공과 몇몇 조연으로 한정하고요. 강조점이 너무 많으면 아무것도 강조하는 효과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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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괴인

    RPG에 대한 접근 방법의 차이가 결국 인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또다른 현실을 살고,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새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는 보통 성인형 인물을, ‘이 구리구리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밝고 꺄삐한 환타지를 즐기고 싶다’는 욕구는 소년형이나 소녀형 인물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닌지.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건 이 다양한 인물들을 모두 한 배경세계와 이야기 속에 아울러서 캠페인을 무사히 진행시키고 엔딩을 보는 것이겠지요. 그 다음은 맞는 사람들, 맞는 캐릭터들끼리만 어울려 게임을 즐기는 것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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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맞는 맘씀입니다.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취향이 충돌하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겠지요. 취향 차이를 한창 통감할 때 쓴 글이라 그때의 흔적이 아무래도 남아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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