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들

소년H님의 시카고 2007 캠페인에서 사용할 뱀파이어 사라 화이트 호스에 대해 쓴 글입니다. 원래 할 일 있을 때면 노는 창의력은 끝이 없습..(…) 외설적인 표현이 꽤 나오고 내용도 무거우니 등급은 영화로 치면 아마 19금이나 최소한 고등학생 관람 불가일 겁니다. 외설적인 내용이 싫거나 나이가 안 되는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사라의 배경을 잠깐 설명하면 19세기 말 운디드 니 학살에서 죽어가던 중 포옹당한 라코타 태생 여자로, 지금은 비공식적으로 포타와토미 소속이며 (뱀파이어에게 부족을 포함해 공식적 소속이 있을 리 없으니) 부족에서 운영하는 시카고 외곽의 피스 앤 플렌티 카지노 책임자입니다.

[#M_외설 경보!|외설은 안 봐!|
거짓말들

아이가 발길질을 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잘 안다. 사라 화이트 호스는 이성적인 여자이며, 100년도 더 전에 죽은 아이가, 그것도 죽은 몸 안에 살아 움직일 수 없다는 정도는 인지하니까. 그런데도 뇌화학 작용의 이상이나 뉴런의 잘못된 신호, 정신적 피로, 그리움과 슬픔의 힘을 통해 아이가 발길질을 하고 있다.

막연한 배고픔을 느끼며 그녀는 부풀지 않은 배를 문지른다. 이제 땡기는 음식은 그때와는 사뭇 다르지만 허기만은 같다. 아기가 발길질을 하는 그 느낌이 같듯. 허기진 채 자리에 누우면 먹을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추운 밤에도 아이는 몸 안에서 움직이며 아직 살아 있다고, 잘 먹지는 못해도 건강하게 살아서 태어날 날을 기다린다고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몸의 기억은 정신의 기억보다 강하다. 얼어붙은 땅에서 시체 사이에서 깨어나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배고픔과 아이의 발길질 같은 기억은 부자연스러운 죽음과 세월을 넘어 남는다. 묘하게도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사라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니까 그 역시 언젠가 그녀의 몸을 거쳐갔을 텐데. 2천 년 전 중동 여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하얀 피부와 파란 눈을 한 마리아도 아닌데 어째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

하긴, 아이와는 달리 남자가 몇 달간이나 그녀 안에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지. 그녀는 혼자 웃는다. 아이를 가진 기분이나 긴 굶주림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니 몸의 끈질긴 기억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을 뿐이다.

그래서 사라는 혼자 앉은 채 거짓말을 지어낸다. 형체 없는 어둠은 눈앞에 그림을 그렸다가 다시 흩어지고, 그 속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생겼다 사라진다. 어쩌면 음식 배급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백인 병사에게 몸을 맡겼을지도 모른다. 머리에는 먹을 것 생각만 가득한 채, 오직 먹기 위해 차가운 땅 위에서 억지로 쾌락에 겨운 신음을 흘렸을까. 그래서 다급하고 무의미한 밤의 기억은 배고픔의 기억에 묻혔을지도. 배고픔을 한층 심하게 하는 임신만 아니었으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텐데. 뭐, 강보는 이불에서 벌인 도박에 지면 주는 위로상이라던가. 파우와우에서 들은 우스갯소리.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아니면 아는 남자아이에게 베푼 선심 같은 것이었을까. 매끄럽고 어린 얼굴의 소년, 말도 손도 더듬다가 결국 일을 치르기도 전에 그녀의 다리 위에 쏟아버린 그 미숙함이 왠지 사랑스러워 웃음을 터뜨리며 꼭 안아주었을까. 거칠 것 없는 평원에 부는 바람은 시원하고, 달빛은 유달리 밝았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남편이 있었을까? 자기 몫의 배급을 아내에게 주면서 점점 야위어간 말이 없던 사람, 밤에 둘러주는 팔은 예전에 비하면 앙상하긴 해도, 한없이 춥기만 한 무너진 세상에서 유일한 온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몸이 축나서 병으로 쓰러지면서도 사라에게 옮을까 봐 곁에 못 오게 했을지도. 울부짖는 그녀를 친척들이 붙잡아서 결국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다시 수용소를 옮기면서 제대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 이 이야기는 마음에 든다.

그녀의 아이에게는 무덤이 없다. 한겨울의 땅은 꽁꽁 얼어서 팔 수가 없었고, 안고 눈물 흘릴 자그마한 시체조차 없었으니까. 다리 사이에서 닦아내야 했던 굳은 피와 찐득찐득한 덩어리들이 남았을 뿐. 들어갈 무덤이 없는 아이에게는 나온 근원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끝이 없다면 시작이라도, 마치 거꾸로 된 무덤처럼. 그렇게 되면 그 조그만 유령 발이 태를 걷어차는 일은 그만둘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거짓을 말하면 그것이 아이의 진실이 될까. 얼마나 많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살기도 전에 죽어버린 아이에게 이유를, 근거를, 결론을.

아이가 다시 발길질을 한다.

어둠 속에 전화가 울린다. 한참 쳐다보다가 사라는 나른한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든다.

“화이트 호스입니다.”

침착하고 직업적인 목소리, 그리고 긴 침묵. 전화기가 귀에 쏟아내는 이야기를, 삶의 길턱에서 생기고 또 넘어가는 위기를 듣고,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종합하며 그녀는 다른 쪽 귀로 방안의, 마음의 침묵에 귀기울인다.

“바로 가지요.”

가는 길에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일어선다. 이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음식은 100여 년 전과는 사뭇 다르지만, 여전히 배는 고프다. 몸의 지긋지긋한 기억은 배가 고프지 않던 때의 기억을 허락하지 않는다. 책임진 삶의 무게와 모습도 이제는 달라졌지만 죽은 몸이 키울 수 있는 만큼의 생명, 지킬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이 남았듯이.

문을 닫고 나간 그녀 뒤로 어둠은 형체 없는 이야기들을 속삭이며 조용히 움직이다가, 마침내 잠잠해져 긴 침묵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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