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에게 도움되는 것 (1) – 단편

진행자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가끔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배울 자세만 되어 있다면 사실상 어디서든지 배울 수 있는 것이 진행 기술이기 때문에 ‘진행자에게 도움되는 것’이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넓은 범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용감히(?) 제 경험상 이러이러한 것들이 도움되더라 하는 얘기를 해보고 싶군요.

링월드로 유명한 공상과학 작가 래리 나이븐 (Larry Nive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작가는 단편을 쓰면서 배운다. 계속해서 단편을 써라. 돈이 되는 건 소설이지만, 단편을 계속 써야 글이 날렵하고 예리하게 유지된다.

진행과 문학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이 말의 기본 원리는 진행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장기 캠페인의 신화라는 글에서 다루었듯 대개 규칙이나 RPG인의 기대치는 장기 캠페인을 상정하고 있지만, 장기 캠페인을 기본으로 잡고 있다고 해도 단편을 진행함으로써 진행 기술을 다듬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단편은 시간과 완급의 감각을 길러줍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이야기를 완결지어야 한다는 단편의 특성상 진행이 늘어지지 않는지, 시간 활용이 비효율적이지 않은지 자신의 진행을 돌아볼 계기가 되죠. 시간적 제약 때문에 지루한 부분은 과감히 뛰어넘는다거나, 간단하게 요약한다거나, 장면을 적절히 끊는다거나, 참가자가 헤매고 있으면 바로잡아준다거나 하는 판단이 특히 중요해집니다.

이러한 완급 조절과 시간활용 기술은 당연히 장기 캠페인의 재미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긴박감과 같은 분위기 연출은 완급과 장면 맺고 끊는 기술에 많이 좌우되고, 아무리 잘 짜인 내용도 진행이 늘어지면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불행히도 이것은 이론적으로 시간이 무제한인, 혹은 최소한 시간적 여유가 많은 장기 캠페인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편의 제약 속에서 기르기 좋은 기술이기도 하지요.

또한, 단편은 구성력에도 도움이 됩니다. 전형적인 장기 캠페인의 재미가 웅장한 규모에 있다면 전형적인 단편의 재미는 긴장감 있고 기발한 구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은 일정한 시간 내에 모든 이야기의 요소를 매듭짓고 정리하는 연습을 하는데 아주 좋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장기 캠페인에서 이번 세션 내에 매듭짓지 못한 것은 다음 세션에 해도 된다면, 단편에서는 다음 세션이란 없으니까요.

장기 캠페인과 단편의 구성은 물론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장기 캠페인 역시 짧은 이야기 단위의 연속인 경우가 많습니다. 단편 혹은 단기 캠페인의 연속과 구분되는 특징이라면 그 이야기 단위들 사이의 연속성이겠지만, 단편에서 익힌 구성력은 장기 캠페인에도 그대로 적용할 여지가 많은 것입니다. 장기 캠페인을 위해 추가할 부분이라면 그 이야기를 딱 끊는 것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의 여지를 열어 놓고, 몇 가지 줄기를 계속해서 끌고 가는 정도겠죠.

이와 관련해서 단편을 진행하는 것은 규모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단편에서는 이야기 규모가 크면 정해진 시간 내에 완결을 볼 수 없으니 (배경은 규모가 크다 해도 플레이에서 다루는 건 그 작은 일부밖에는 될 수 없죠) 적절하게 플레이의 규모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이 잘 발달하면 장기 캠페인을 할 때도 대책 없이 규모를 키우는 현상을 피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단편은 또한 장기 캠페인보다 시작하기가 쉽다는 점에서 장기 캠페인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진행 경험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저도 한동안 캠페인 없이 단편만 연속적으로 하던 때가 있었죠. 진행은 사실 하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인지라, 시작하는데 부담이 비교적 적은 단편은 진행 경험을 쌓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학습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단편은 현재 캠페인을 진행 중인 진행자에게도 기분전환이 되어 줍니다. 위에서 다룬 것과 같은 시간적 제약과 그로 말미암은 도전은 현재 진행 중인 캠페인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써 권태와 지루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말로 단편의 가장 중요한 혜택이 아닌가 합니다. 진행자 자신이 지겨워서야 캠페인이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진행자가 갑자기 이상한 단편 하자고 조르면 참가자들은 이해하고 협력해줘야 하는 겁니..(퍽)

단편은 분명히 장기 캠페인처럼 인물과 이야기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그 변동을 지켜보는 재미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는 게 없는 단발적인 재미뿐이라고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좋은 단편은 좋은 장기 캠페인 못지않게 긴 여운을 남기며, 진행자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긴장감 있고 날카로운 진행, 번득이는 구성, 새로운 시도와 자극은 단편의 재미이기도 하고 어떤 캠페인에든 적용되는 진행자의 미덕이기도 하니까요.

2 thoughts on “진행자에게 도움되는 것 (1) – 단편

  1. nefos

    장편을 한번도 써보지 못한 사람은 장편을 쓰기 힘들겠지만, 단편도 써보지 않은 사람이 장편 쓰는 것보다는 낫겠죠. 1회플, 단기플(2~4회) 정도가 단편에 속하겠네요.
    단편은 팀원의 모집기간, 캐릭터메이킹기간, 플레이사전 논의기간이 플레이시간에 비해 너무 많이 차지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대신 이런 단점들이 시간맞추기 유리한 팀원모집, 다양한 캐릭터의 경험, 사전논의의 중요성 살리기 등의 장점으로 바뀔 수 있는거 같습니다.
    즉플은 사정상 단편이 될텐데, 단편과 즉플을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거 같습니다.

    Reply
    1. 로키

      예, 확실히 그런 문제는 있을 수 있죠. 논의가 원활하면 쉽고 빠르게 되지만, 다들 발을 끌고 눈치보는 때면 정말 답답해지는 게 즉플 준비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말씀대로 단편하고 즉플은 구분되는 개념이니까 기존 캠페인 인물들을 가지고 외전을 돌리는 것도 단편인 등 여러가지 극복 방법이 있어 보입니다. 진행자가 시나리오와 인물을 미리 준비해서 참가자들에게 인물을 나눠주는 것도 한 방법일 테고요.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