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RPG를 하는가

예전에 썼던 우리들의 미래에 RPG는 있는가라는 글의 후속편이 되겠군요.

정신없이 바쁜 요즘, 그때 그 글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금 자신에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런 때이기 때문에 더욱 나의 미래에 RPG는 있다’입니다.

취미생활이 있는 게 왜 좋은지 하는 일반론을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한가지만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편협하고 단조로워지기 쉽고, 적당한 기분전환은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해주죠. 저도 지금이야 하루하루가 즐겁지만 나중에는 지치고 지겨워질지도 모르고, 그런 때 공부와 경력 말고도 생각할 게 있다는 점은 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줄 것입니다. 주중에 힘든 와중에도 주말의 RPG 타임(..)을 생각하면 즐겁고 설레는데 지금 와서 포기할 수 있을리가요.

취미생활의 일반적인 혜택 외에도 RPG라는 놀이 특유의 이점도 꽤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회적인 취미라는 점. 독서나 가끔은 CRPG 역시 즐기는 여가이지만 (MMORPG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RPG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취미는 그 자체로 좋은 점이 많다고 봅니다. 실제로 여기 와서 너무 힘들었던 처음 1년간, 온라인상으로라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배경을 얘기하자면 미국에서 80년대 정도까지 꽤 세를 모았던 단체 중에 BADD (Bothered About Dungeons & Dragons)라는 데가 있었죠. D&D는 악마숭배와 범죄행위, 청소년 자살을 유발하는 사회악이라는 것이 BADD의 주장이었습니다. 전성기에는 극우 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경찰과 교육계도 줄줄이 낚여서 RPG 탄압에 한몫했지만, BADD와 그 지지자들이 제시한 ‘증거’라는 것이 모순과 오류, 거짓투성이인 등 전체 주장이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BADD에서 자랑스럽게 제시했던 자료 중 하나는 당연히도 D&D가 원인이 됐다고 하는 청소년 자살 통계였죠. 이 자살들이 D&D가 원인이었다는 근거는 전혀 없었다는 점은 둘째치고, 웃겼던 점은 이렇게 뻥튀기시켜도 BADD에서 제시한 소위 D&D 청소년 자살율은 전체 청소년 자살율보다 훨씬 낮았다는 점입니다.

사실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죠. 가장 자살의 위험이 큰 청소년은 친구가 없는 경우인데, 정기적으로 D&D나 다른 RPG를 하는 아이들은 이미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BADD의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보여주는 한편 사회적 놀이의 효용을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RPG에는 또 사회 훈련의 요소도 많이 들어갑니다. 예전에 다챗에 플레이어의 실력이란?(외부 링크)이라는 글을 썼을 때, 다른 분의 댓글에 ‘RPG를 잘하는 사람은 뭐든지 잘한다’는 식의 답을 단 적이 있죠.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전 이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RPG를 제대로 하려면 시간약속 지키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 자기 주장 펼치기, 교섭, 경청, 사회적 뉘앙스 파악 (이른바 ‘눈치 깔기’), 사람보는 눈, 시간 관리, 대인관계의 갈등 해소 능력 등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니까요.

RPG에서 위와 같은 것들을 잘한다고 실제 사회에서도 잘한다는 보장은 없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상관관계가 꽤 있습니다. 실력있는 RPG인은 진공상태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닐테고, 저부터도 RPG를 하면서 위와 같은 기술들, 특히 시간약속 지키는 게 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딴거 다 필요없고, 저는 RPG가 재밌기 때문에 RPG를 하고 있으며, 재미가 있고 시간이 허용하는 한 계속할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할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남는 시간에 제가 방에 틀어박혀 변태가학 비디오를 보든(..) RPG를 하든 그건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것이 (아마도?) 판단능력 있는 성인으로서 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하는 스스로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선순위는 있으니까 상황에 따라 RPG 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RPG는 제게 실생활보다는 우선순위가 낮아도 대개의 다른 여가보다는 우선순위가 높기 때문에, RPG를 하기 위해 텔레비젼 보는 시간이나 웹서핑할 시간은 줄일 수 있습니다. 사실 바쁘다 바쁘다 해도 잘 보면 쓸데없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꽤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결국에는 우선순위 정립의 문제이죠.

‘나의 미래에 RPG는 있는가?’ 현재까지 저의 답은 한마디로 ‘당연하지! (버럭)’입니다. 바쁘면서도 신나는 요즘 생활이 그 때문에 더욱 행복하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3 thoughts on “어째서 RPG를 하는가

  1. ddowan

    저의 경우의 문제라면 ‘다른 할 일이 있지만 그것들을 안하고 RPG를 한다’ 일겁니다. 약간 현실 도피적인 의미가 강하지요. 할 일 다하고 놀면 누가 뭐라 그런답니까~~ 당당하게 RPG를 해야 겠습니다. 물론 아직은 근거없이 당당하긴 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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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과연..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자기 할 일에 충실한 건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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