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꼬리도마뱀의 처녀생식에 대한 상상

주의: 이 글은 채찍꼬리도마뱀 암컷의 교미행위, 인간 여성의 동성애 등 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이런 내용이 불편하신 분은 백 버튼을 상큼하게 눌러주시길.

애니멀 플래닛에서 나온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이야기인데, 채찍꼬리 도마뱀의 일부 종 (예를 들어 뉴 멕시코 채찍꼬리도마뱀)에는 수컷이 없다고 합니다. 암컷밖에 없는 이 종의 생식은 처녀생식으로, 새끼는 모두 그 어미의 유전적 복사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유전자의 혼합은 없지만 생식에는 여전히 교미행위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채찍꼬리 도마뱀은 둘씩 짝지은 다음 서로 번갈아가며 상대방 위에 올라타서 마치 암수교미와 비슷한 동작을 해야 배란이 된다고 합니다. 채찍꼬리도마뱀의 이러한 특이한 습성은 아마 암수교미로 번식이 이루어지던 때의 잔재로 보인다는군요. (많은 고양이과 동물들도 교미행위 자체를 통해 배란이 되기 때문에 인공수정이 잘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에 대입한다면 이는 처녀생식하는 레즈비언들로만 이루어진 사회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건 SF 소재로 꽤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그렇잖아도 남자를 만드는 Y 염색체의 유전 정보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약 천만년 후에는 Y 염색체 (그리고 인간 남자)가 사라진다는 이론도 있던데, 그때도 인류가 존재한다면 뭔가 다른 생식 방법 혹은 영원히 살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사라지겠지요.

이런 식으로 생식 방법이 달라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달라질지 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사회가 진짜 더 평화롭고 수용적일지는 차치하고라도 성과 번식의 완전한 분리가 문화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리고 클론 생식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자아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다를지… 어쩌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아개념이 자기 어머니와 그 위의 어머니, 또 그 위의 어머니.. 하는 식으로 먼 과거까지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먼 미래까지 자신은 살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르죠. 처녀생식이 시작된 시점으로부터 개체들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으므로 외부인에 대해서는 극도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상당히 보수적인 사회일지도…

유성생식과 달리 클론생식은 유전적 변화에 의한 환경적응의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이 사회는 급격한 환경변화나 유전병이 있을 때는 다른 활로를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유성생식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 방법에 대한 저항이 너무 크다면 두 난자의 유전정보를 합치는 SF적(..) 번식을 택할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어머니와 다르게 생긴 자식이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일 것입니다. 특히 자아의 영속성을 (유성 생식하는 사회 이상으로) 생식에서 찾는 경우 영아 살해 같은 어두운 면도 나타날듯 하네요.

르귄 할머니의 ‘어둠의 왼손’이나 ‘세그리 행성 보고서’에서처럼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이렇게도 근본적인 사회적 차이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 SF의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레즈비언들의 행성’은 역시 언젠가 등장시켜보고픈 내용인 겁니..(퍽)

2 thoughts on “채찍꼬리도마뱀의 처녀생식에 대한 상상

  1. 물고기군

    레즈비언 행성…은 아니지만 비스므리한 배경의, SIMOUN이란 제목의 SF 에니메이션이 있긴합니다(사실상 환타지에 가깝다고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아니, 성별을 결정하는 의식은 다분히 환타지…).

    처녀생식으로만 유지되던 종족이, 갑자기 SF번식법(…)으로 인해 체외 유전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상황은… 정말 멋지네요(^^b).

    처녀생식으로만 번식한다면 개인=독자종족이란 사고방식도 있을법 할 것이고(채찍꼬리 도마뱀같은 경우가 아닌이상 교류의 필요성도 없어질테니), 그런 일이 대대로 전해진다면 ‘우리종족=인류’란 사고방식도 사라져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종족끼리’에서도 사소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것인가, 대화와 생활은 어떤 식으로 될지 매우 흥미진진한데요^^;

    그걸 주제로 한편의 SF 소설을 쓰던가, RPG 켐페인으로 편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기말을 피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인류’의 캐릭터끼리 어쩔 수 없이 교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이라든가(PC들 간의 갈등이 주가 될듯?), 게다가 그것을(자신들도 제대로 납득치 못할 이 상황을) 서로가 ‘자기 인류’에게 알려야만 한다거나(NPC와 PC와의 갈등이 주가 될듯?) ‘이종교배’로 태어난 ‘신종족’이 불러오는 갈등이라던가…

    그나저나 로키님의 상상력은 정말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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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각 개체가 하나의 종족으로 인식된다면 사회 자체가 어떻게 유지될지, 흥미로운 문제네요. 역시 ‘동족’과 ‘자아’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는 사람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번식에 섹스가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의 강력한 성욕은 그대로일 것 같아서, 성욕과 사회성이라는 끈 때문에라도 서로를 같은 종족으로 생각할 것 같지만요.

      사실 이 ‘채찍꼬리도마뱀’ 얘기는 처녀생식이라는 점 말고는 어슐라 르귄의 ‘세그리 행성 보고서’와 매우 비슷한 점이 많은 설정이기도 합니다. 그쪽은 유성생식이긴 하지만 남자들은 일반사회에서 격리되어 있고 실제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여자들이므로 그쪽도 사실상 레즈비언의 행성이었죠. (남자는 임신하고 싶을 때만 찾아가는 존재이니)

      다만 채찍꼬리도마뱀 여성들의 행성은 그러한 사회적 원죄의 그림자나 성 때문에 억압받는 계층이 없으며, 남녀간의 갈등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원론적 구분과 투쟁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사회일지도요. 따라서 도덕관이라든지 종교관도 사뭇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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