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안 데 블레사

“형제를 쳐죽일 때 카인은 인간이었음을 기억하라.”
-Road of Humanity, a Sourcebook for Dark Ages: Vampire

포옹의 공포, 고통의 극단이 차라리 환희에 닿았던 시간들이 할퀴고 지나간 후 그의 기억은 완전치 않다. 하지만 동생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한 날, 한 시, 한 태, 낮과 밤처럼 달랐던 쌍둥이가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와 똑같은 붉은 머리, 하늘처럼 파랗던 눈을 깜박이던 우윳빛 창백한 아기… 알레호가 낮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까마귀 날개 머리칼과 기름진 흙처럼 검은 피부, 부정한 비밀을 간직한 검은 심연의 눈이 마치 죄악의 인처럼 선명했던 아기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밤이었다. 사악한 이교도 정복자, 무어인의 얼굴. 낮과 밤. 선과 악. 그것이 시작이었다.

쌍둥이 중 형, 밤처럼 검은 바스티안을 보는 아버지의 눈은 수많은 책망을 담고 있었다. 마치 알레호의 계승권을 빼앗으려 일부러 그의 발뒤꿈치를 잡으며 먼저 태어났다는 듯. 마치 그의 아내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도록 바스티안이 획책한 듯. 다시 기독교의 땅이 되어가는 이 땅을 빼앗아 이교도들에게 돌려주기라도 할 듯. 소년은 아버지의 눈빛이 무슨 죄를 묻는지 몰랐고, 따라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두 형제가 태어난지 며칠만에 살해당했던 어머니는 알 수 있었을까. 빈 방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무어 여인의 초상화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의 집에 자신이 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의 강요대로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올 뿐, 어느 한쪽이 먼저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말 한 마디로 그의 동생은 그의 형이 되었고,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고, 그는 아무데도 설 곳이 없었기에 영지를 떠나 성전(聖戰)에 뛰어들었다. 이교도들에게서 기독교의 땅을 되찾기 위하여… 태어났다는 죄, 그의 원죄를 씻으려고.

전쟁은 그를 검은 물살에 휩쓸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끌어내렸고, 그의 눈과 귀와 코와 폐로 밀고 들어왔다. 살려고 시체 밑에 숨으며, 옷과 신발과 무구가 없어 시체를 털면서, 약속했던 보급이 오지 않자 굶다 못해 가축을 빼앗으며… 전쟁이 그의 피에 검게 흐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여자도 노인도 아이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사실을 자랑할 수 있었다. 피가 끓으면 강제로 욕망을 채우고 배가 고프면 사람 고기를 구우며 동료들과 웃을 수 있었다. 세상은 미쳐서 돌아갔고, 그는 속죄하는 기사도 아니었고 인간도 아니었다. 어떤 야수도 전쟁의 꼭두각시처럼 잔혹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나는 전투의 광기가 썰물처럼 빠진 후 자비로운 손이 주워들은 사금파리. 작은 수도원에서 부상을 입은채 깨어난 청년, 이교도처럼 생기고 기독교도라고 말하는 부상자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수도원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 심연의 부정한 어둠 속에서 그는 죽음을 빼앗겼다. 어둠의 천사들이 그를 지옥의 관문에서 끌어내어 내던지고, 어머니의 초상화가 피눈물을 흘렸다. 저주받은 피로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채우는 동안 죽은 몸에 갇힌 영혼은 절규했다. 태어난 것은 또 한 번 그에게 죄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햇빛이 자기 몸을 태운다는 발견은 크나큰 유혹이었다. 그러나 자살자의 영혼은 저주받는다. 그가 저지르고 당한 모든 일 후에도 지옥에 대한 공포에서만은 벗어날 수 없었고, 전쟁이 남긴 광기어린 격정의 소용돌이도 죽은 자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죽어서야 알 수 있었다. 저주받은 후에야 저주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다시 그 지하실로 내려가 수많은 쥐의 목을 부러뜨리고 피를 빨아내며 그는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그의 속죄를 속죄하리라. 처음으로 진정 기사가 되어 도난당한 죽음을 되찾으리라. 약자와 정의를 위해 수많은 위험 앞에 자신을 내던지다 소멸한다면 그것은 자살은 아닐 것이다. 카인의 아들들은 천상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미친 현자의 속삭임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의 속죄가 충분하고 그의 뉘우침이 진실하다면, 그렇다면…

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아 얼굴에 피칠을 한 채 쥐의 피로 포식하는 바스티안 데 블레사의 시체는 지옥의 두려움에 진저리친다.

“결국 모든 뉘우침의 근원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Road of Humanity


글룸님의 Dark Ages: Vampire 캠페인 주인공인 바스티안 데 블레사 배경을 쓰다가 이 지경이 되었군요. (…) WoD 쪽을 해보는 건 처름이고, 특히 제가 뱀파이어 쪽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아는 분들은 아실.. 이 계기로 제 생각이 바뀔지 궁금하네요. 글에 두어 번 나오는 성경 속 내용에 대한 암시를 눈치채신 분이 있나 모르겠는.. (아마 많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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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바스티안 데 블레사

    1. 로키

      진중하다기보다는 내용이 별로 없어서 양념을 쳤달까요오..(먼산) WoD는 처음이라 재밌게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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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rches

    새로운 룰에 도전하시는 거군요! 즐거운 플레이가 되셨으면 좋겠군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시는 로키님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저도 그 모습을 본받아서 낮설다고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좋아하도록 노력하겠습니,, (퍼억)

    사족- 바스티안.. 배경을 보니까 십자군전쟁 때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처음에는 카인과 아벨이 모티브같다.. 라고 생각했다가요.’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로 시작되는.. 야곱과 에서이야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진실은 로키님만 아시는 거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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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orches// 감사합니다~^^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왠지 몸둘바를 모르겠습.. <- 기우님 말씀대로 바스티안은 레콘키스타가 십자군으로 선포되었을 때의 인물입니다. 모티프는.. 일단 WoD에서 모든 뱀파이어의 시조는 카인이므로 어떻게 보면 카인과 아벨 모티프이기도 하죠. 또 한편으로는 차남이 장자의 권리를 받았다는 점에서 말씀대로 야곱과 에서 모티프이기도 하고요. (쌍둥이 형제의 발뒤꿈치를 잡는다는 이미지는 역시 그쪽에서..) 내쳐지는 장남과 상속하는 차남 면에서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와도 닿아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서자였다는 점에서 장자라기엔 좀 뭣할 수도 있겠지만요. 여러모로 성경은 참 써먹기 좋은 소재입니..(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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