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규칙이란 없다

가끔 보면 규칙과 관련해서 ‘현실성’이란 말이 꽤 자주 나오는데 놀라게 됩니다. 어떤어떤 규칙은 현실적인 게 장점이라든가, 아니면 현실성을 위해 이러이러한 수정규칙을 사용하겠다든지 말이죠. 이러한 논의들은 중요한 사실을 한가지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이란 놀이 속 현실을 만들어가는 수단이라는 것을 말이죠.

예를 들어 봅시다. D&D의 HP 규칙 같은 경우 부상을 심하게 입어도 별다른 영향이 없이 싸우다가 생명력이 점점 깎여 어느 순간 갑자기 쓰러지는 ‘현실’을 구현하고 있죠. 이게 실제 싸움의 현실과 다르다고 비판받아야 할까요? 제가 보기엔 전혀요. 왠만해서는 실력이 비슷한 상대의 공격 한방에 불의로 기절하거나 즉사하지 않는다는 놀이 속 가상현실 때문에 D&D 전투는 그만큼 긴박하며, 자신의 남은 HP와 상대의 실력을 비교해서 보다 전술적인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실제 전투의 끔찍한 혼돈과 비참함에서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전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죠. 규칙을 통해 만들어지는 놀이 속 가상현실이 규칙이 지향하는 재미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실제 현실이 어떤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펜드래건 RPG의 기사들은 열정 규칙에 의해 사랑하는 귀부인의 명예를 위해 싸울 때, 충성하는 군주를 위해 목숨바칠 때, 평생의 우정을 맹세한 친구를 지킬 때 초인적인 힘을 냅니다. 그게 실제 현실과 부합하는지는 모호한 문제죠. 실세계의 현실은 복잡다단하니까요. 하지만 강한 열정에 의해 가히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사들의 얘기는 맬로리나 드 트롸이의 작품처럼 펜드래건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아더왕 전설의 현실이고, 또 꽤나 매력적인 허구이기도 하죠. 역시 놀이가 지향하는 재미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실제 현실에 충실하느냐는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너무나 광범위하고 때로 상호모순되기 때문에 RPG 규칙으로 완전히 표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실제세계의 현실은 살아가는 것이지 규칙 몇줄로 정립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나마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광범위하고 혼란스런 현실의 일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 취사선택 자체도 놀이 속 가상현실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하나의 결정입니다.

이와 같이 규칙이 놀이 속의 현실을 형성한다는 주장은 단순히 이론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놀이와 관련해서 몇가지 중요한 이점이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현실성이라는 핑계를 없앱니다. 진행자가 자의적으로 규칙을 수정하거나 참가자들이 납득할 수 없는 판정을 하면서 ‘이게 현실적이니까’라고 반대의견을 묵살할 여지는 없어지는 것이지요. 오히려 진행자가 들어야 할 이유는 ‘이게 내가 원하는 현실이니까’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 가상현실을 이 놀이 속에서 원하는지, 그 새로운 현실이 어떤 식으로 놀이를 더 재밌게만드는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의적인 진행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게 진행자의 결정이 아닌 현실성의 강제라는 핑계는 대기 힘들 것입니다. 규칙은 현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또하나, 규칙을 만들든 아니면 수정규칙을 만들든 어떻게 하면 규칙을 사용해서 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재미에 부합하는 현실을 만들지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건 현실적이지 않은데…’ 하는 압박에 시달리는 대신 놀이가 더 재밌기 위해서는 어떤 가상현실이 즐거울까 생각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주인공이 자기 이상과 성격에 충실할수록 강해지는 가상현실 (과거의 그늘), 주인공의 신념이나 감정, 과거에 의해 극적인 사건이 생기면 그만큼 운명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가상현실 (페이트), 데이트중 곤란하거나 창피스런 일이 일어나면서 오히려 상대와 정이 드는 가상현실 (얼음깨기) 등등.

또 특정 장르를 구현하는 현실을 규칙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협물에서 주먹이 총보다 강하다든가, 의리를 이득보다 우선하면 더 세진다거나, 소녀변신물에서 노출도가 심할수록 방어도는 좋다든가, 하렘물에서 남자가 별볼일 없을수록 뇌쇄적인 여자들이 많이 꼬인다든가, 거대로봇물에서 뽀대나게 생긴 로봇일수록 전투력도 좋다든가 하는 다양한 가상현실들을 생각할 수 있겠죠. 이 모든 것은어떤 행동을 장려하고 어떤 행동을 억제할 것인가 하는 규칙의 근원적인 문제와도 닿아 있습니다. 무협물에서 총보다는 비무장격투기를 사용하도록 유도한다든가, 거대로봇물에서 가능하면 멋지게 생긴 로봇을 만들도록 유도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 예겠죠.

이와 같이 규칙으로 놀이 속 가상현실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규칙을 만드는 사람에게 상당한 자유를 부여합니다. 거의 RPG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묘미에 좀더 빠져보면 어떨까요. 규칙으로 구현하는 ‘현실성’이라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목표보다는 자신에게 더욱 재밌는 놀이 속 가상현실을 위하여.

4 thoughts on “현실적인 규칙이란 없다

    1. 로키

      그 부분만 합의가 되면 서로 다른 현실 개념을 가지고 무엇이 ‘현실적’인지 논쟁을 벌이는 대신 ‘어떤 현실’을 만들고 싶은지 욕구를 조화시킬 준비가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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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LAMMA

    간만에 좋을 글을 봤군요.
    돌이켜보면 현실성이 떨어져서 재미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자신이 원하는 현실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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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리고 어떤 현실을 원하는지 서로 대화해서 이해하고 합의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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