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외전 – 어떤 작별

오체스님과 진행한, 아스타틴아라의 첫 만남을 다룬 외전입니다. 전에 오체스님과 얘기해서 정한 추가설정 부분을 기반으로 한 역할극이죠. 함께 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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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대지에서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세계수의 재라고 하는 발밑의 고운 흙이 바람에 먼지처럼 날렸고, 오늘은 하늘마저 엷은 회색이었다. 북쪽으로는 불타버린 세계수의 잔해가 잿빛 하늘에 거대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저곳이다.”

아시타는 세계수의 잔해를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세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

평소의 장난기는 조금도 없이 우수어린 하프다크엘프의 눈빛에서 아스타틴은 또 다른 다크엘프 혼혈, 이제 세상에 없는 이를 떠올렸다. 아시타가 몇 발짝 떨어져 세계수를 묵묵히 바라보는 동안 아스타틴은 늘 가슴에 달고 다니는 애도의 브로치를 어루만졌다.

“돌아왔어요.”

브로치에 꼬아넣은 은백색 머리카락 위로 손가락을 쓸며 그는 속삭였다. 어쩌면 텔루르의 추억 때문에 이곳 허무의 대지는 그에게 더욱 잿빛일지도 모른다.

“아닌 척 했지만… 그리워했던 곳으로.”

그는 브로치를 손에 꼭 쥐었다.  그의 양어머니 텔루르는 나서 자란 이 땅에 대한 그리움을 한 번도 내색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가끔 북쪽으로 눈을 돌리던 그녀의 눈빛은 세계수의 잔해를 보는 아시타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그들에게 흐르는 다크엘프 피 때문일까, 아무리 배척받고 차별당해도 세계의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천형은.

고운 잿빛 흙을 품은 바람이 불어오자 아스타틴은 외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앉은 언덕 왼편으로 화살이 거의 닿을 만한 거리에는 언덕 위에 선 다크엘프의 수도 메타포노비아를 두른 목책과 그 위로 나온 지붕이 몇 개 보였다. 아래로는 주변의 언덕과 평원에 작은 민가와 가축우리, 밭 몇 뙈기가 메타포노비아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다크엘프의 지도자인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하러 온 노스탤지아 대원들에게 다크엘프들은 (혼혈과 심지어는 인간도 있는 일행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연락기지에 있으라고 무뚝뚝하게 지시했지만, 아시타는 답답하다면서 결국 아스타틴을 밖으로 끌고나왔다. 역시 먼지바람을 피해 얼굴을 가리며 이쪽으로 돌아서는 아시타를 보며 아스타틴은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 서쪽 언덕은 메타포노비아를 제외하고 주변에서 세계수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고, 왜 인간 혼혈 따위가 세계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지 시비걸 다크엘프도 없었다.

발치에서 커다란 하품소리가 들리자 아스타틴은 미소지으며 내려다보았다. 텔루르의 가우르 루테리온은 쭈욱 기지개를 켜고 입맛을 다시며 편안하게 그의 발치에 누웠다. 등을 쓸어주자 낮게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뼛속까지 기분좋은 진동으로 전해왔다. 지시를 어기고 메타포노비아를 나서는 그들을 경비가 굳이 저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녀석 때문이었으리라. 거대한 사냥꾼의 따뜻한 진회색 털과 주변의 잿빛 흙의 빛깔을 비교하며 아스타틴은 그도 루테리온도 처음 와보는 허무의 대지였지만, 루테리온의 조상에게는 고향이었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 아시타처럼 루테리온도 이곳에 애착을 느끼고 있을까? 마치 피를 통해 전해오는 기억처럼…

“태평한 놈이로고.”

올려다보자 아시타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루테리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런 아시타 방향으로 잠시 눈을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 꼬리를 탁 털고 눈을 감았다. 그 반응에 아시타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녀석 타기도 해?”

루테리온을 흥미롭게 보며 아시타가 묻자, 아스타틴은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내며 미소지었다.

“아… 날 태워주기엔 저녀석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녀석, 사람보는 눈은 있군.”

낄낄거리는 웃음이 밉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이후 분노와 자책에 빠져지냈던 그를 아시타가 내버려두지 않고 말도 걸고 장난도 쳤을 때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네 일이나 신경쓰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아준 아시타에게 이제는 감사하고 있었다. 비록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시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아주 가끔이지만 자존심을 굽혀주기도 해.”

텔루르가 죽고 나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인간 장교를 살해한 후에, 쫓아오는 병사들에게서 헐레벌떡 도망치던 그를 루테리온이 등에 태우고 달린 일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폭풍을 탄 것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와 영원히 달리고 싶은 희열의 기묘한 연금술은 그를 취하게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 후, 루테리온의 거죽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싸매주며 미안하다고 되뇌이던 아스타틴의 사과는 어느새 루테리온이 아닌 이제 이곳에 없는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마침내 더 참지 못한 채 루테리온의 목을 끌어안고 밤새 목놓아 울었을 때 루테리온은 그저 조용히 체온을 빌려주고 얼굴을 부비며 차가운 새벽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 여러모로 위로를 받는달까. 루테리온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어느새 아스타틴은 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텔루르 이후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속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기쁨인 동시에 떨리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군사훈련을 받은 가우르인데 저대로 평생 둘 생각이야?”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추궁 역시. 조금의 전력이라도 더 필요한 전황에 훈련받은 가우르 하나가 놀고 있다는 것은 아시타가 보기에는 낭비일지도 몰랐다.

“음…”

아시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루테리온을 그저 유용한 무기로만 볼 수 없는 아스타틴은 자신이 이 상황에 대해 객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값만 해도 꽤 나갈 텐데.. 뭐 팔아버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면서도 한쪽 어깨를 으쓱하는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분명 제안이 들어있었다. 아스타틴은 순간 불쾌감을 느꼈다.

“팔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라면 남동생이나 누이를 팔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아스타틴은 참았다. 아시타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둘째치고라도, 루테리온은 텔루르와 전투를 함께 하던 군용 가우르이지 애완용 고양이가 아니었다. 가끔 녀석의 눈이 먼 곳을 보는 것은 아스타틴도 알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없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이미 텔루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랑 없는 조용한 용맹, 세상이 뭐라 하든 절대 꺾이는 일 없던 긍지, 그러면서도 내밀한 순간에 보여주던 그 따스한 마음. 그래서 아직까지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런 주인을 기억하는 한 어떤 이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다소 안심하는 자신이 아스타틴은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수는 없겠지.”

루테리온을 아낀다고 하면서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 슬픔에 가슴이 조여왔지만, 루테리온이 가겠다면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닌 우정의 시간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호~ 짐승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거야?”

아시타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루테리온이 원한다면 헤어질 수 있겠어?”

자기 이름이 들리자 루테리온은 한쪽 귀를 쫑긋했다. 그 모습에 아직 눈도 못 뜨고 낑낑거리던 자그마한 새끼 가우르가 겹치자 아스타틴은 새삼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아려왔다.

“.. 저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이뻐라 우유먹이며 키웠으니까.”

그는 애써 웃음지었다.

“좀 자신 없기도 해. 근데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달까.. 저 녀석 태어나는 것도 좀 힘들었고..”

루테리온의 어머니 히말은 가우르에게 드문 거의 흰색에 가까운 털이 돋보였었다.(주:오체스님에 따르면 히말은 히말라야에서 따왔고, ‘눈’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비노 가우르를 떠올렸어요 ㅋㅋ) 몇 번이나 임신을 하지 못하고 한 번은 새끼를 사산한 히말이 이미 죽은 새끼를 계속 핥아주던 모습을 텔루르는 차마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렸었고, 아스타틴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시체를 떼어놓았었다.

그랬던 히말이 많이 나이가 들어 근 하루에 거친 힘든 진통 끝에 마침내 작고 유달리 약한 루테리온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동시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 조그만 생명을 살리려고 젖을 못 먹이는 히말 대신 손가락에 우유를 묻혀 빨게 하고, 갑자기 토하는 녀석을 안고 한밤중에 약초사를 찾아 달리던 시간들 끝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건강하게 자라줘서 기뻐.”

손을 뻗어 귀를 쓰다듬어주자 루테리온은 귀를 뒤로 젖히며 가릉거렸다.

“그리고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아스타틴은 메이는 목을 살짝 헛기침을 해 풀었다. 역시 먼지바람 때문이리라.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고 싶어.”

언젠가부터 아시타가 아니라 루테리온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으며 그는 가우르의 머리에서 목을 따라 긁어주고는 손을 떼었다. 루테리온은 다시 크게 하품을 했다.

“뭐 그렇다면야.”

아시타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좀전에 아스타틴이 그랬듯 루테리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녀석 날 선택해주지는 않겠느냐아?”

루테리온은 뒤돌아보면서 고개를 들더니 아시타의 손에 대고 확 깨물었다. 물리기 전에 아시타가 웃으면서 손을 빼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미소지었다. 장난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면 아시타도, 아스타틴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손을 물어챘을 테니까. 역시 루테리온은 성격이 좋은 녀석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아시타는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그럼 난 보고서 정리하러 들어간다.”

그는 아스타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섰다.

“응응…”

언덕을 내려가는 아시타의 발걸음이 등뒤로 멀어져갔다.

“역시 넌 여기가 좋을까나…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루테리온 옆에 쪼그려앉아 등을 쓸어주었다. 루테리온이 반쯤 눈을 감고 바라보는 거친 풀섶과 황야, 민가와 가축우리를 내려다보며.

“아시타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녀석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루테리온은 동의한다는 듯 가릉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아스타틴에게 비볐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며 루테리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스타틴의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때였다. 이런 순간이면 텔루르의 기억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때 루테리온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긴장하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작은 짐승을 보거나 냄새맡은 태도와도 비슷했지만, 사냥할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냥할 때보다 훨씬 깊은 열중이 매끈한 근육의 긴장감에 역력한 채 가우르는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라… 어디가…?”

아스타틴을 휙 돌아보는 루테리온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다시 앞을 향하며 가우르는 순식간에 언덕을 달려내려가 풀섶 사이를 내달리더니, 다른 언덕을 돌아 사라졌다.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정신없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이런 모습의 루테리온은 처음이었다. 허무의 대지 특유의 거친 풀섶과 그 잎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큰뿔염소를 지나, 루테리온이 마지막으로 보인 언덕배기를 돌아 작은 집을 지나쳐 얼마나 걸었을까, 허무의 대지의 잿빛보다 한결 어두운 얼룩 같은 루테리온의 모습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도 들려왔다.

“꺄아 나비야아… 나비나비나비.”

목소리는 어린아이 목소리처럼 높고 들떴지만, 주변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구걸하는 노인처럼 웅크린 초라하고 작은 나무들 어귀의 땅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루테리온뿐이었다.

나무들의 흐릿하고 앙상한 그늘로 들어서면서 아스타틴은 이 예상치 못한 장면을 살폈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여자는 다크엘프였고, 이곳 전사들이 그렇듯 가죽이 주조를 이루는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다크엘프 전사는, 아니 다크엘프는 처음이었다.

“놀자놀자~ 나비.”

깔깔 웃으면서 여자는 루테리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벼대더니 자기 얼굴을 루테리온의 목에 갖대대고 비볐다. 목소리나 말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도 경계심이나 체면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아이 같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루테리온의 반응이었다. 텔루르와 아스타틴 외에는 아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보이던 가우르는 처음 보는,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게 틀림없는 여자에게 ‘나비’ 같은 굴욕적인 이름을 들으면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몸을 기댔다.

‘아… 텔루르…’

텔루르가 죽은 이래 루테리온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애교를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잿빛 피부와 은백색 머리, 가벼운 갑옷 차림이 오랜 기억들을 고통스럽게 헤집었다. 입을 여는 그는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루테리온.”

루테리온이 돌아보자 다크엘프 여자도 그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듯 올려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니…?”

부드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다크엘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테리온을 보았다.

“누구야 이쁜 아이~? 아는 사이?”

왜 둘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지, 바보같은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여자에게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저기… 아가씨…”

“음?”

루테리온의 목을 쓸어주며 여자는 그의 존재를 거의 잊은 것 같았다.

“그건 제 가우르거든요…”

아까 아시타에게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내것이라고 하기는 좀 남사스럽기도 했지만,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적어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리라.

“음? 니아 아가씨 아냐 애엄만데 우리 샤나 못봤어요?”

재잘거리다가 다크엘프–아마 니아?–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가우르르르르? 나비??”

“아는 사람에게 받았긴 했지만요. 잠깐 뛰어나가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아가씨에게 갔나보네요..”

입술을 핥고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뭔가 불길했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루테리온을 데리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싫어!!”

찢어지는 목소리에 근처 나무에서 파닥거리며 새가 몇 마리 날아올랐다. 니아가 루테리온의 목을 갑자기 콱 끌어안자 루테리온은 아팠는지 캬옹! 하면서 목을 뺐다.

“니아 나비야랑 놀거야아~ 나비~”

“아… 그렇게 안으시면 아파해요…”

당황해서 아스타틴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루테리온은 목을 뺀 후에도 여자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점점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저런 정신나간 여자를 뭐하러 루테리온이 일부러 쫓아온 걸까.

“..데리고 가도 괜찮지요?”

아스타틴은 루테리온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섰다.

“그리고 나비가 아니에요.”

“가지 마 나비, 으응?”

니아가 가우르의 귀를 잡아당기자 루테리온은 다시 캬옹.. 고개를 돌렸지만 아스타틴을 따라나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타틴이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니아는 갑자기 뭔가 본 듯 루테리온 왼편의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 샤나 거깄었어?”

“허…”

아무리 봐도 루테리온 왼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니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눈이 좋거나, 아니면…

“나비야는 엄마랑 있는 게 좋지? 샤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이쁜 우리딸~”

마치 어린아이가 서있는 것처럼 허공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쳤다. 역시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여자가 완전히 미쳤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아스타틴은 긴장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루테리온 이리와.”

그의 명령에 루테리온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다가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웃고 얘기하는 니아를 돌아보다가 다시 아스타틴을 마주보았다. 마치 고뇌하듯이.

“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루테리온은 주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불안해했던 날이 정말 오늘, 바로 이 순간이라면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자신과 루테리온에게 그렇게 약속했으면서도 아스타틴은 갑자기 자신이 없었다.

“예쁜아이 일루와봐~”

‘샤나’에게 할말은 다 했는지 니아는 아스타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옆의 땅을 탁탁 쳤다. 진회색 눈이 아주 맑았다. 이리 오라니 뭘? 무슨 짓을 하려는지 불안해졌다.

“얘기하자~ 응?”

아스타틴이 경계하며 보고만 있자 니아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루테리온이 이 여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조심조심 다가섰다.

“…이야기요?”

“응응, 나비얘기!”

니아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샤나가 좋은 생각을 얘기해줬어. 역시 똑똑하지 우리딸?”

다시 소름이 끼치면서 아스타틴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분명히 이곳에는 노스탤지아 일로,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한다는 아주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임무를 띠고 왔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시타도 메타포노비아도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가우르한테 물어보자~ 응?”

니아는 말을 이었다.

“나비야는 니아 따라올래 이쁜아이 따라올래? 그렇게 말야.”

“물어보다니…. 루테리온의 의사에 따르자는 건가요?”

그는 니아와 루테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루테리온의 선택에… 정말로 루테리온이 이런 상대를 선택할까? 그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우리 딸이 그랬어. 샤나가!”

니아는 아주 만족스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아, 그래요?”

아스타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이런 선택을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정말로 그것이 루테리온의 선택이라면 그대로 해야 했다. 루테리온이 그러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아스타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텔루르의 잔영이 함께할 루테리온이 어떻게 그럴까.

“그렇게 해요, 아가씨.”

그말에 니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아냐~ 나 애엄마다? 나이도 하나.. 둘.. 스물.. 열다섯.. 백..”

니아가 손을 꼽으며 엉터리로 수를 세는 것은 아스타틴은 냉정하게 끊었다.

“떼는 적당히 부리고요.”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요.”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이래 쭉 함께했던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 상실의 기분을 니아가 이해할 수나 있을지, 상관은 하는지 생각이 미치자 뜨거운 것이 속에 치밀었다.

그의 말에 마치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순간 시무룩해졌던 니아는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알았어, 그럼 숨바꼭질하자!”

그녀는 달려가며 뒤돌아보고 노래하듯 말했다.

“이쁜아이도 빨리 숨어~”

니아가 돌 던지면 닿을 거리까지 달려가 풀섶에 몸을 숨기자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루테리온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니아가 있는 풀섶과 곁의 아스타틴을 번갈아 보았다. 발이 움찔… 니아 쪽으로 움직였다가 루테리온은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아가씨가 마음에 들은 거니?”

루테리온은 노란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양옆으로 꼬리를 쉬익- 쉬익- 흔들었다. 그 진지한 표정을 보며 아스타틴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스쳐갔다. 루테리온은 이제 온기를 찾아 그의 외투에 파고들던 조그만 새끼가 아니었다. 그 연약하고 위태위태한 털뭉치가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서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난 세월의 의미 아니었던가.

잘 알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네가… 선택한 사람이야?”

루테리온은 니아가 숨은 방향을 한 번 돌아보고, 다가와서 아스타틴의 손 밑으로 따뜻한 머리를 들이밀며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스타틴은 그 모습에서 오래전 그에게 끼잉거리며 고개를 들이밀던 주먹만한 새끼 가우르를 떠올렸다. 15년과 한평생 전, 그들이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의 시작. 루테리온의 눈빛은 마치 이해를 구하는 듯했다. 슬픈 기색은 아스타틴 자신의 바람일 뿐일까.

“루테리온…”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아스타틴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시타에게 말한, 니가 원하는 존재가 그 누구라도 괜찮다고 한 건 사실이야.”

이미 다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원할 때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으면, 각자의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니가 선택한 건 누구라도 상관없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이제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루테리온은 위로하듯 나지막히 가르릉거렸다.

“넌 내가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준 친구고..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 영원히 그럴 거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장난치고, 그저 함께 앉아있었던 그 많은 시간이 이제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나갔듯, 텔루르가 떠나갔듯 이제 루테리온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그 기억만으로 버텨야겠지. 루테리온 같은 친구가 곁에 있었던 시간은, 언제까지나 서로 마음과 기억 속에 함께한다는 사실은 따뜻한 위안인 동시에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그걸로 됐어…”

아스타틴의 목소리는 쉰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시종일관 그를 똑바로 보고 있던 루테리온은 묵직한 온기를 그의 다리에 잠시 기대었다가 아스타틴의 손을 한 번 축축하게 까끌까끌한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떨어져서 몇 발짝 걸어가더니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밥을 굶긴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면 돼. 우리 이쁜이.”

눈앞이 눈물로 뿌얘서 루테리온의 모습이 잿빛으로 흐릿해졌다.

“자, 가렴.”

마치 이해했다는 듯 루테리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빠르게 뒤돌아서 니아의 은빛 머리칼이 빼꼼히 보이는 풀섶을 향해 긴 걸음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있을 곳을 향해 내달리는 그 모습을 아스타틴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디에도 속할 곳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있을 자리는 사랑하는 이들 곁이었는데, 이제 그의 자리는 어디일까. 루테리온처럼 저렇게 자신이 선택한 자리로 달려갈 날이 있을까?

루테리온이 고개를 풀섶에 들이밀자 니아가 꺄아~ 하고 좋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풀섶에서 튀어나와 루테리온을 쓰다듬고 입맞추었다. 저렇게 털 역방향으로 쓸어주면 싫어할 텐데, 평소에는 그러면 바로 도망가던 루테리온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주인 앞에서는 싫어도 참겠다는 것일까 생각하자 가슴이 작게 아파왔다.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갑자기 니아가 떠드는 소리가 조용해지더니, 그 앞에까지 가자 니아는 멍한 표정으로 루테리온을 마주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또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저희 아이를 잘 부탁해요, 아가씨.”

아스타틴이 입을 열자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본 유쾌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그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에서 아스타틴은 순간 적과 마주했을 때의 텔루르를 떠올렸다.

“넌 누구지?”

일어서며 말하는 목소리와 말투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 가우르의 주인인가? 하프엘프가…”

하프엘프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은 경멸로 더욱 차가워졌다.

“네 주인에게 가거라.”

그녀는 루테리온의 어깨를 아스타틴을 향해 밀었지만, 가우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주인을 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했지요.”

이미 작별인사는 한 터였다. 앞으로 더 아프고 더 보고 싶겠지만, 그건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었고 익숙했다. 이제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여인에게 루테리온의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자각시키는 게 먼저였다.

“주인?”

여자는 가느다란 눈썹을 혼란스럽게 찌푸렸다. 정말로 모르겠다고 할 참인가.

“나비야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냉랭한 목소리에 분노를 완전히 숨기기가 어려웠다. 루테리온은 그녀에게는 그저 물건일지는 몰라도 아스타틴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녀석을 데려간다면 최소한 진지한 태도는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이 여자는 왜…

“그렇게 떼를 부려놓고 데려가더니 이제와서 시치미이십니까?”

묘하게도, 그 말에 다크엘프 여자의 얼굴에 스쳐간 당혹감은 진짜였다. 이내 찾아온 체념한 깨달음도.

“내가 그러면… 설마…”

그녀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직하게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최소한 정신이라도 온전한 주인을 골라야지,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이 이제 시치미까지 뗀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스타틴은 분노로 몸이 굳으면서 목소리가 더욱 딱딱하게 나왔다.

“저도 댁같은 미친 다크엘프에게 소중하게 받은 가우르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아니, 사실 주인이 누구라도 싫었지만, 놓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루테리온 저 녀석이 선택했으니까요.”

선택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루테리온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가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희생이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이면 이 아픔이 그칠까.

“그런 그녀… 미친 여자를 선택했다는 말이냐.”

니아, 혹은 니아의 모습을 한 여인은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루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판단력이 좋지 않구나.”

루테리온이 만족스럽게 가르릉거리는 동안 그녀는 이번에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오랫동안 함께했느냐.”

“저 녀석이 태어난 직후였죠. 마사다 요새 함락 직후로 기억합니다.”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루테리온에게 말했다.

“내가 가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루테리온이 계속 그녀를 보며 가르릉거리자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젓더니 아스타틴에게 말했다.

“공짜로는 받지 않겠다.”

그녀는 귀에서 꽤 값이 나가보이는 보석 귀걸이를 떼어 내밀었다.

“나머지는 기회가 되는 대로 갚을 터이니 일단 받거라.”

“굳이 주지 않아도…”

그의 손을 붙잡아 귀걸이를 억지로 쥐어주는 손길이 억셌다. 전사답게 굳은살이 박힌 손의 감촉은 다시 본의아니게 텔루르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지 않았느냐, 신세지지 않겠다.”

신세지지 않겠다는 말은 호의도, 염치도 아니었다. 인간과 엘프 혼혈인 그, 아스타틴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뜻일 뿐. 그 생각에, 그리고 루테리온을 넘기고 돈을 받는다는 거부감에 그는 억지로 손을 빼고 귀걸이를 든 손을 내밀었다.

“이건 돌려드리죠. 밥이나 굶기지 말아주세요.”

눈에 고여오는 눈물을 그는 이를 악물면서 참았다.

“아까처럼 털 역방향으로 문지르지 말고요.”

손바닥 위의 귀걸이가 천 근은 되는 듯 무거웠다. 이 순간의 무게가, 시간과 마음과 외로움의 무게가 너무나.

“목 졸라서 숨막히게 하는 것도 위험해요.”

그런 그를 보다가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기억하겠다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내가… 아까같을 때 다시 주의줄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 여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10대 이래 그보다 작았는데도 언제나 거인 같던 텔루르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그만큼 양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일까.

“언제까지나 작은 고양이 같은 그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친구를 잃는 것을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귀걸이 위에 아스타틴의 손가락을 쥐어주었다. 굳은살 박힌 손이 따뜻해서 왠지 목이 더 메였다.

“그렇게라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너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싶지는 않구나.”

여인은 그의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니 받지 않겠다면 이곳에 내려놓고 가거라. 나는 대가 없이 이 소중한 아이를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니.”

그녀와 곁에 의연하게 선 루테리온을 보며 아스타틴은 귀걸이를 쥔 손을 조용히 떨구었다. 그녀 말대로 귀걸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에 못이긴 뗑깡일 뿐이라고 타이르는 텔루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루테리온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정말로 다시 한 번 등에 태울 만한 기수를 만난 것일까, 아스타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나는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라고 한다. 아라, 혹은..”

그녀는 뼈아픈 농담을 떠올리듯 쓴웃음을 지었다.

“니아라고도 하지.”

“아스타틴.. 아스타틴 라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양친과 그리고…”

텔루르의 이름은 아직도 말하기가 고통스러웠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텔루르가 떠오르는 이 여인 앞에서는 더더욱… 아스타틴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프다크엘프 텔루르의 양아들.”

“텔…루르?”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꿈틀했다.

“혹시 적검의 타하이샤가 아니냐? 내 기억이 옳다면…”

뭔가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던 아라니아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지.”

타하이샤?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텔루르라는 이름은 가명이라고 그녀가 얘기한 적은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생각의 갈피를 미처 잡기도 전에 아라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 허락한 선물에 감사를 표한다, 아스타틴 라펠.”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했다. 남자이며 혼혈인 그에게 다크엘프 여인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허무의 대지에서 추방당한지 여러 해가 지난 텔루르도 남자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너에게 무운이 함께하기를.”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에게 마주 인사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그는 아라 곁에서 노란 눈을 빛내는 가우르를 마주보았다.

“루테리온 너에게도.”

‘루테리온…’ 하고 중얼거리며 아라는 돌아서서 메타포노비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녀를 쫓아가던 루테리온은 문득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마치 망설이듯이, 마치 벌써 그리워하듯이. 아스타틴 자신이 이미 그렇듯… 그런 가우르를 아라니아카는 돌아보지 않고 불렀다.

“가자, 아사나스.(주:아스타틴의 ‘아스’ + 다크엘프어로 ‘아이’라는 뜻인 ‘아나스’, 즉 ‘아스타틴의 아이’)”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는 그 목소리에 몸을 돌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이의 당당한 걸음으로 주인을 쫓아갔다. 혼자 선 아스타틴이 하염없이 지켜보는 동안 전사와 그녀의 가우르는 그렇게 잿빛 정경 속으로 멀어져갔다.

소감

전부터 얘기한 장면이기는 했지만 막상 해보고 또 소설로도 써보니 예상한 것과 다른 새로운 극적 의미가 겹겹이 나와서 재미있네요. 오체스님 얘기를 바탕으로 구체화한 아스타틴과 루테리온이 함께한 일화들도 쓰기 재밌었고, 또 소중한 이가 모두 떠나간 아스타틴의 외로움을 표현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시점에는 이미 명이 얼마 안 남은(..) 아시타의 쾌활한 모습, 여기서는 왠지 사람같이 나오는 아라도 흥미로웠고요. 오체스님 말씀마따나 노예생활하고 샤나를 잃기 전에는 꽤 괜찮은 성격이었을 듯하네요. 아스타틴도 아라도 플레이를 거치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RPG에서 즉석으로 대사를 칠 때하고 소설로 쓸 때하고는 재미나 매체의 특성이 약간씩 다른 것도 좋은 도전입니다. 로그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면 소설의 경제성이랄까, 압축해서 콕 찌르는 언어의 맛은 좀 덜하기도 해요. 아스타틴의 후반부 대사에는 뒷받침할 만한 내면 묘사가 바닥난 기분도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여기서도 로그에 있는 대사를 몇 군데 자르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소설화 작업에는 좀 더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고 압축하는 게 소설의 특성을 더 잘 살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고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 제노님,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에는 이제 본편이군요. 첫 본편 리플레이와 소설도 기대해 주세요! (왠 기대)

5 thoughts on “이오닉스 외전 – 어떤 작별

  1. Xenosia

    어제 또 퍼질러 잔다고[..]

    아스타틴의 행동이나 말투가 꽤 여성스러워보이는데 기분탓이려나요[..]

    Reply
    1. 로키

      으음 일단은 남자로 하기로 정하셨던데 무의식적으로 성전환이…? (..)

      Reply
    2. orches

      타틴이는 남성으로 확정. 로키님께도 이야기했지만 전 홍일점을 뺏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어요 (웃음) 그리고 타틴이 말투는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일종의 버릇이 아닐까해요. 낯설거나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존재 앞에선 ‘~요’체를 사용하는 듯.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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