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론

어둠과 화염의 환상

많은 판타지나 역할놀이 인물들 보면 배경이 이렇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아무개의 가족/마을이 몰살당해 아무개는 어쩔 수 없이 여행을 시작했다.’ 그럴 때면 전 항상 궁금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무개의 가족/마을을 몰살시켰을까? 그 사람들도 사람일텐데 (혹은 오크거나 트롤이거나 마왕이거나…), 무슨 심리로 그랬을까? 물론 많은 판타지 소설에 이들 악당이 나왔지만 그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심리는 종종 별로 깊이가 없고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지요. 물론 가끔 별 고민없이 신나게 팰만한 대상이 있는 건 좋죠. (저녀석의 사회악 게이지는 250%다!) 하지만 제 의문을 해소하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 생각해낸 것이 마하트 프리야나, 혹은 마하트 바야라는 인물입니다.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로 마을의 몰살을 명령하고, 지치고 피에 굶주린 병사들을 무방비의 민간인에게 풀어놓는 생지옥을 연출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세계에서 전쟁이 어떤 식으로 수행돼 왔는지를 생각하면 (힌트: 바로 위와 같은 방식..) 지극히 평범한 지휘관일 뿐입니다만, 어쨌든 그 수많은 아무개들의 수많은 가족/마을을 없애버린 판타지 악당들에 대한 제 호기심을 탐구할 기회가 되어 주었습니다.

마하트 바야는 무엇보다도 ‘사람’입니다. 판타지니까 꼭 인간 얘기가 아니라, 지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고민도 있고, 사랑도 하는 지적 생명체죠. 그리고 그녀는 행동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히어로 가족/마을 몰살작업 투입용 악당’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명령으로 초토화된 많은 마을들에서 미래의 수많은 ‘가족/마을을 잃은 아무개’ 히어로들이 배출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니면 모든 것을 잃은채 유랑하다가 비참한 거렁뱅이로 죽어갔거나…

그리고 그만한 악당인 바야는 똑같은 ‘사람’으로서 성기사 마하트 프리야나가 됩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도 않고, 그동안 마법적으로 조종되었다는 깜짝 선언도 없이. 그리고 그녀가 몰살시킨 가족/마을에서 졸업한 미래의 판타지 히어로가 만약 그녀를 찾아온다면 프리야는 아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와 어떤 식으로든 대면해야겠죠. 아무리 성기사가 되었으면 뭐합니까? 그렇다고 그녀의 한마디에 끝나거나 망가진 수많은 삶들이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때로 가장 의미있는 질문들은 대답하기 불가능한 것일 수 있죠.

제가 ‘어둠과 화염의 환상’을 통해 탐구해 보려고 한 의문 몇가지!

첫번째: 악당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가?

재밌는 점이라면 바야는 특별히 피에 굶주린 인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그 이유가 도덕적인 건 전혀 아니죠.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고려 때문입니다. 정말로 공포작전으로 나갈 거면 저항하면 싸그리 다 끔찍하게 죽이고, 대신 항복하면 존중해 주는 편이 낫겠죠. 이렇게 장기적으로 길게길게 끌면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약탈과 살해는 오히려 적의 증오를 키운다는 점에서 역효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초점이 다른, 혹은 어긋나는 현상은 이야기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바야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군사적 효율이지 점령지 주민들의 고초가 아닌 거죠.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악당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악당’이 될 수 있는 조건 말이죠. 특별히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쪽으로 생각이 가질 않는 겁니다.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의가 아닐까요.

두번째: 악당은 어떻게 악당이 되었는가?

강아지와 함께 놀던 어린 소녀, 어머니에게 너무나 소중한 아이여서 ‘소중하다’라는 이름을 붙은 아이가 ‘힘’이라는 이름이 붙은 냉혹한 지휘관이 되는 과정은? 사실 강아지 살견사건(…)은 좀 오버죠. 단 한번의 충격보다 훨씬 더 큰 건 ‘일상’이라는 괴물. 반복적인 조건반사, 훈련생의 삶과 심리를 통제하는 각종 수단을 통해 인간성을 천천히, 꾸준히 침식하는 과정이 더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건 엘리트 암흑기사 양성과 같은 특수한 목적이 아니어도 사회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과정이죠. 다만 극도로 효율이 중시되는 군대의 특성상 군사적 성격의 조직에서 좀더 응축된 모습으로 나타날 뿐.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하자면 많은 아마추어 소설 (물론 제가 쓴 것도 포함)의 맹점은 이 점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한번의 충격으로 변하는 경우도 물론 많지만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삶의 과정…하루하루의 삶이 그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인데 말이죠. 다만 그걸 좋은 허구로 표현하는데는 훨씬 더 실력과 노력이 요구되죠.

강아지 죽이는 장면은 이야기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지만 서술의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꼈고, 또 제가 아주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에 대한 오마쥬이기도..(퍽)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2권인가 3권인가에 보면 전세계 최정예 노예군대의 훈련 얘기가 나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시작하는 인간성 말살 과정에는 1년간 키운 강아지를 살해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나중에는 어머니의 품에서 갓난아이를 빼앗아 죽이는 경지까지 발전(?)하죠. (물론 노예인 갓난아이의 주인에게는 은전 한닢으로 보상합니다.) 그러니 악신 헥스터의 암흑 기사 훈련이 어찌 뒤처져랴! 라는 의욕에 불타서 썼습니다만…역시 역량의 차이를 느낄 수밖에.

개인적으로 저는…반드시 성악설까지는 아니지만, 어린아이들은 한없이 잔혹할 수 있다고 봅니다. 벌레 다리를 뽑아서 몸통만 남긴채 꿈틀거리게 하고, 잠자리 꼬리를 잘라 짚을 끼워 노는 우리의 ‘순수한 동심’을 자랑하는 아이들이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탓하는 건 아닌 게, 순수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거든요. 아직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어둠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감이랄까, 인지상정이랄까, 그런 걸 가르치는 건 ‘불의하고 부조리한’ 어른과 사회라는 존재죠. 하핫… 그래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반쯤 미친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도 아니죠. 한가지 이해의 요소는 될지 몰라도…

세번째: 악당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악당이 사람에서 괴물로 가기 위한 첫 조건은 사랑을 할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저의 악당 바야는 사랑을 하는 여느 보통사람이어야 했죠. 실제로 많은 악당이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지극히 평범하겠지만, 그래도 둘다 헥스터의 암흑 기사씩이나 되는 두 연인은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악당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면 ‘권력을 탐한다’… 그렇다면 자아와 존재 자체를 건 권력다툼이라고 할만한 사랑에는 더더욱 크게 적용될 일.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칼장난(?)은 그런 생각에서 나왔죠. 마치 자동차가 아닌 칼로 하는 ‘치키’ 게임과 비슷합니다. (두 차가 서로를 향해 전속돌진. 어느쪽이 먼저 선회할까?) 다가선다는 그 동작에 들어있는 친밀과 지배의 역설. 이라지만…결국에는 ‘왜 이게 갑자기 할레퀸 소설이 되는 거지!’라고 절규하게 만든 장면..(…)

네번째: 악당은 어떤 사회에서 나오는가?

이야기에서 나오는 헥스터 암흑 기사단의 설정은 거의 100% 창작입니다. 그 이미지는 스타워즈 게임 ‘옛 공화국의 기사단’에 나오는 시스를 상당부분 참조했고요. 권력과 승리가 곧 정당성이다. 강한 자만이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꽤나 합치가 잘 되더군요. ‘일그러진’ 진화론의 발로랄까요. 헥스터 교단에서는 그래서 기사단장 자리를 두고 피를 흘린다는 게 그들의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딸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충격적일 수 있는 상황도 상당히 자연스럽죠.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저 자연 법칙일 뿐인 걸요. 어려서부터 신전에서 자라서 그런 사상을 주입받은 바야에게는 더더욱… 그렇다고 사람인 만큼 아주 태연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울며불며 난리칠 일도 아닐 수 있는…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도 아주 조금은 있는 게, 바야가 아버지의 잘린 머리에 축배를 드는 장면은 증오나 자책이 아닌 조금의 애정, 조금의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장면이 될 수 있었죠.

다섯번째: 악당이 보는 세계는?

마지막으로, 위에서 얘기했던 ‘초점이 다른’ 부분입니다. 바야의 부친살해 부분도 그렇죠. 정상적인 중심 갈등은 ‘어이, 너 지금 너네 아빠 죽이고 있는 거야!’일텐데, 역시 세상을 보는 방법이 너무나 특별한(…) 그 동네 분위기상 정작 초점은 승리와 영광, 결국엔 권력에 대한 것이 됩니다. 맨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죠. 한 마을이 지금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철저히 유린당했는데 바야가 생각하는 것은 전략적 득과 실이나 병사들의 사기 뿐입니다. 또 첫 장면에서, 냇물이 피로 붉게 흐르는 건 그저 말타고 지나가며 눈치채는 아주 작은 사실일 뿐이라거나…

바야는 한마디로 자신의 명령으로 벌어진 참상을 ‘지나가며 구경할’ 뿐입니다.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얘기는 다른 것이니까요. 마을 사람들을 특별히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든 아니든 똑같이 나쁜 일이지만) 자기 일을 하는 사이에 힘없는 사람들이 치일 뿐이죠. 판타지에서 보면 악당이 지나치게 주인공들을 괴롭히는데 혈안이 된 것 같아서 심리묘사에 깊이가 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죠. 악당들도 특별히 주인공을 괴롭히기보다는 그저 자기 일을 하고, 자기 목표를 달성하려는 보통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전세계 정복 계획을 가진 경우 제외)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얘기도 ‘주인공들이 몰려와서 날 괴롭혀! ;ㅁ;’ 일지도…(…)

뭐, 이상과 같은 것이 느낀 바입니다. 재미있는 실험이었습니다. 악당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라… 여러분, 그들을 사랑해 주세요! 그들은 깊이없는 심리묘사의 희생양일 뿐입…(퍼억) 어쩌면 악당은 우리 모두 안에 숨어있는 약간의 비겁함, 약간의 무관심에서 나오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안에도 의외의 영웅이 숨어있을지 모르니까요. 우리 모두 안에 그렇듯이..^^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