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그림자] To Kiss or Not to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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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에서 진리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불멸로 인도하소서

브리하다라니아카 우파니샤드 I.3.28 中
(배틀스타 갤럭티카 미니시리즈 OST To Kiss or Not to Kiss 가사)

 

동트기 직전 차가운 잿빛 어스름 아래 제다이 회합장은 고요했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분주하게 깨어 움직이겠지만, 이 순간은 혼자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침묵 속에. 창턱에 기대어 앉은 남녀도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그 고독, 혹은 친밀감을 즐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디부터 가는데?”

스무 살 전후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남자에게 편안히 등을 기댔다. 창턱에 등을 기대앉은 채 여자를 등뒤에서 감싸안은 남자는 둘이 함께 두른 갈색 제다이 로브를 꼭 여며주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벽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지만, 어느 쪽도 추운 기색은 없었다.

“온데론이라고 했던가? 그 다음은 젤트로스, 암브리아… 보고와 명령 들어오는 거 봐서 움직여야겠지.”

“외우주 한 번 지겹게 구경하겠네, 알데란 귀족 도련님이.”

말하며 그녀가 무심히 기지개를 켜는 틈을 타 남자가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여자는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황급히 줄이며 보복을 가했다. 결국은 같이 창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피하려고 진정해야 했지만. 흐트러진 로브를 다시 끌어올려 덮는 동안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여자는 남자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우릴 떼어놓으려고 널 보내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럴지도 모르지.”

조금씩 잿빛으로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내다보며 남자는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사람에 대한 집착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되고…”

그의 말에 여자도 합세하면서 둘은 동시에 말했다.

“두려움은 다크포스로 가는 길이니까.”

소리죽여 같이 웃다가 둘은 다시 침묵했다. 이윽고 여자는 가볍게 말했다.

“그럼 우리 비련의 연인 되는 거네?”

“같이 다크포스에 빠져서 공화국이라도 파탄내는 거 아냐? 스승님들 표정이 볼만하겠다.”

남자가 쿡쿡 웃으면서 로브가 흘러내려 드러난 하얀 어깨에 입맞추자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의 입가에 가볍게 키스했다. 어쩌면 망설임과도 같은 긴 순간 끝에 둘은 입술을 포갰고, 검은 머리와 갈색 머리가 섞여 차가운 바람에 날렸다.

동쪽 하늘에 동이 터오면서 그런 두 사람을 눈부시게 비추는 동시에 코루선트의 수많은 지붕과 탑들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리우며 정갈하고 검소한 방안으로 길게 손을 뻗었다.

 

“여긴 지독하게 춥다, 피나.”

홀로영상 속의 루바트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모닥불에서 눈을 들었다.

“낮에는 이렇게 더운 곳이 밤에는 이렇게 추울 줄은 상상도 못했어. 여기는 생활마저 극단적이야… 자비란 없지, 날씨에도, 사람에게도.”

그는 잠시 카메라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고 있었을 사막의 텅 빈 밤을 상상하며 피나틸리아는 가슴 한 구석이 가볍게 욱신거렸다.

“이곳의 실상을 보다 보면 정말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화국의 정의가 공화국의 경계까지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로는.”

그가 한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홀로영상에 희미하게 보였다. 로브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루바트는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는 있지만, 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은 걸 절감하게 된다. 내 힘이 얼마나 부족한지만 제대로 배우는 기분이야. 어쩌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퍼뜨리는 길은 제다이 몇이 뛰어다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돼, 답답할 때면.”

심각하던 표정이 갑자기 풀리며 그는 코웃음을 쳤다.

“동생놈은 온 우주를 구하려는 구세주 컴플렉스는 제다이 직업병이냐고 그러지. 언제 그 녀석 만날 일 있으면 나 대신 한 대 패줘, 피나. 그놈이야말로 진짜 잘난 척하는 귀족 도련님이거든.”

따스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피나틸리아는 책상을 손으로 가볍게 치기 시작했고, 홀로크론 속의 루바트는 마치 들은 듯 미소를 지었다.

“저 정신없는 루바트 녀석, 부탁한 얘기는 어디다 팽개쳐두고 신세타령이냐고 생각하고 있겠지. D-489 방풍벽 곁에 있던 그 마을 얘기는 확인해 봤는데, 거기 갔던 건 나이트 티로칸이 맞대. 그때는 인간 남자도 같이 있었다더군. 아마 제자? 더 알아볼 거 있으면 얘기해줘.”

루바트는 손바닥에 입김을 불며 두 손을 비볐다. 눈빛에 근심이 드리운 것은 착각일까 피나틸리아는 무심히 생각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귓가에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만이, 머릿속에 들끓기 시작한 상념만이 현실감이 있었다. 홀로크론 속에서 이어지는 루바트의 말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또 연락할게, 피나. 잘 지내고 있다고 모두에게 전해줘. 주무시는 척하면서 다 엿듣는 우리 스승님도 변함없이 정정하시- 악!”

카메라 범위 밖에서 나타나서 마치 공중부양한 것 같은 손이 루바트의 머리를 후려치는 모습을 피나틸리아는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네 녀석이 떠들어서 못 자고 있다는 마스터 모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동안 루바트는 고개를 싸쥐고 다시 카메라로 고개를 돌렸다.

“가볼게, 피나. 스승님이 언론 탄압을 하신다.”

딸깍 소리와 함께 홀로이미지는 하얗고 파랗게 번지며 사라졌고, 불분명한 말소리가 잠시 들려오더니 끊어졌다.

‘아무렇지도 않네…’

빈 홀로크론을 한참 쳐다보다가 피나틸리아는 천천히 홀로크론을 닫으며 일어섰다.

‘전엔 널 보면 그렇게도 애가 탔었는데.’

그에게 끌리고 같이 자고 싶은 마음은 곧 지나갈 기분이라는 것은 3년 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굳이 실행으로 옮겨야 했을까. 그게 발단이 되어 그가 아우터 림을 전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물론 그건 발단일 뿐, 1년 전의 재배치 제의를 루바트는 스승과 함께 거절했다. 어떤 종류의 지식은 사람을 바꿔놓게 마련이니까. 그래,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우습지? 부모라고 해도 얼굴도 모르는데.’

라이트세이버를 허리띠에 걸고 로브를 걸치는 동작은 마치 의례를 준비하듯 엄숙하고 정확했다. 문가에서 잠시 멈춰서서 피나틸리아는 방을 돌아보았다. 방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그런데도…’

공의회의 조용한 복도, 평생 살아왔으면서도 새삼 낯선 풍경을 지나치며 피나틸리아는 잃어버린 낙원을 생각했다. 금단의 욕망, 금단의 지식에 손을
뻗은 대가로 사라져간 낙원은 공화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소재였다.

‘후회하지 않아. 그때도, 지금도.’

멀리 있는 착한 친구의 좌절과 무력감도, 격류에 휩쓸린 자신의 존재도, 그 어느것도 그녀는 후회할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외면했어야 할, 어쩌면 참았어야 할 그 수많은 의혹과 갈망들을.

‘무지와 불위로만 붙들 수 있는 낙원이라면…’

명상실 문앞에 도착한 그녀는 문을 지켜선 파다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나이트 티로칸을 뵙고 싶습니다.”

‘그런 낙원이라면 나는 필요없으니까.’

인사하며 비켜서는 파다완을 지나쳐 피나틸리아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침없이 그 문턱을 넘어, 그 대가가 무엇이든 피하지 않을 진실을 향해.

 

예, 루바트와 피나틸리아 연인설(?)입니다. 첫 장면에서는 피나 18살, 루바트 22살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3년 후 루바트의 죽음 즈음. 원래는 첫 장면까지만 쓰려고 했는데, 루바트가 죽어서 피나가 시스화한 전개가 아니라고 시위하느라 좀 부연하게 됐군요. 어째 글에 나올 때마다 남자를 달고 나타나는 피나는 만인의 연인 분위기? (..) 정말 애인이 만 명은 아닐까 걱정되는 아가씨입..

동환님의 외전 어느 아침하고는 피나의 모습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4살 연상인 루바트를 거리낌없이 ‘너’라고 부르는 태도만은 여전하지만), 이때 당시 티로칸이 나이트가 맞나 등 순서가 헷갈리는 데도 있으니 이상한 데가 있으면 서로 얘기해서 조절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피나가 22세 당시에 나이트였다면 좀 이른 감도 있긴 하지만 그건 천재라서 통과! 라든지..

5 thoughts on “[공화국의 그림자] To Kiss or Not to Kiss

  1. 이방인

    굉장히 리얼한 애정묘사군요(…) 사실상 멀리 떨어져 몇년 지내는동안에도 변함없이 유지될수 있는 남녀관계라는건 존재하기 힘든 법이죠.
    그렇다고는 해도 판타지 셰계에서까지 이렇게 쓸쓸하게 변해버리는 리얼한 애정관계따위…에잇 (울면서 뛰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전 이번주에 결석할듯 합니다.(…무슨 상관인데?(…))
    인원보충도 없이 무작정 물건 납기를 이틀이나 당기라니 힘없는 쫄따귀들은 연장근무를 할수밖에요(…)
    이번주는 건너뛰고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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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년H

    초반만 보고도 누구들인지 짐작이 (…)

    뭐 그래봐야 어차피 제 외전에선 확실하게 시스화된(광기에 빠진) 피나니까요. 다만 티로칸이 그때 나이트라면 그 이후 마스터가 되었다는데 조금 애매한 면이..(뭐랄까 그 뒤는 오히려 점점 약화된 느낌이 강해서) 그리고 저 대화를 마스터 모트가 듣고 있었다면 여러 의미로 위험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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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이방인// 상심하신 나머지 결석하시는 거군효..(..) 일요일에 열심히 일하며 애정관계와 현실의 벽에 대해 명상하시길(??)

    소년H// 하긴, 미치기 전과 후의 피나는 많이 다르겠군요. 이 외전에서는 좀 암울한 분위기긴 하지만 그거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마스터 티로칸은 사실 로어틸리아 나이트로 키워낸 것 말고는 마스터가 될 이유가 별로 안 보여서, 로어틸리아가 나이트 된 게 마스터 서임 계기가 아닐까 해요. (사실 키워냈다기보다는 틸이 스스로 컸다..(..)) 틸이 나이트 된 게 언니 탈출 이후라고 하셨던 것 같으니까 로어틸리아가 파다완인 동안은 아직 티로칸이 나이트가 아니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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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소년H

    로키/ 그건 사실, ‘마스터가 되는 방법은’의 문제긴 한데 (…) ‘나이트 키워냈으니 마스터다’ 라면 마스터가 양산되지 않을까 싶기도 (십만 마스터 양산론? (…))
    저 같은 경우 마스터냐 아니냐는 딱히 공보다 ‘마스터들이 보기에 이런 레벨(..)로 보여서’란 느낌이라..티로칸이 그 뒤는 레벨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올라가기 어렵지 않나 싶었죠.

    그런 이유에서(?) 저도 일요일은 친척 공습으로 빠집니다. 아카스트님과 즐겁게 노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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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마스터가 되는 방법 문제인데, 나이트를 키워서 마스터라기보다는 나이트를 키워낸 계기로 그 동안의 공 역시 다시 평가해서 마스터를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마스터 티로칸이 문제는 좀 있지만(..) 공도 많이 쌓은 제다이고요. 그래서 틸이 나이트 된 계기로 마스터로 인정받았다는 정도면 적합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상심해서 도망가시다니! (흑흑 넘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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