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스 마기카 4판

요즘엔 아르스 마기카 (Ars Magica) 4판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참고로 4판은 무료입니다. 회원 전용 자료실에도 올라온 걸 봤고, rpgnow.com에서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엔 5판도 나왔더군요. 그건 무료가 아니지만요.) 라이언 램팬트가 처음 출판해 화이트 울프,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 그리고 현재는 아틀라스 게임스로 넘겨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시스템은 처음 나온 80년대부터 정교한 디자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D&D 3.5의 조나단 트위트가 디자인한 시스템이기도 하지요.)

뭐 시스템 메카닉을 나열하자면 한도끝도 없으니까 제가 맘에 드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사회성을 전제로 한 시스템

1 플레이어에 1 캐릭터가 원칙인 대개의 게임과 달리 아르스 마기카(이하 AM)에서는 1 플레이어가 적어도 3인의 캐릭터를 갖습니다. 즉 마법사 1인, 전문가 1인, 일꾼 1인이지요.

각 캐릭터 종류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AM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무대는 요정과 드래곤과 악마와 천사와 마법사가 모두 현실인 13세기 유럽으로서, 중심이 되는 곳은 헤르메스 계열에 속한 마법사들의 공동체입니다. (헤르메스 계열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들도 존재하지만 이야기의 주축은 헤르메스계 마법사들입니다.) 시스템의 가장 주요 인물은 물론 마법사들로서 이들은 마법연구와 개발에 일생을 바치며, 한편으로는 마법사 사이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자기 입지를 넓히고 더욱 많은 이익(돈, 실험재료, 영향력 등)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실험실에 틀어박혀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다가 마법적 재능을 가진 이들 마법사는 일반 사회로 들어가면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마법의 기운을 느낀 동물들이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고, 마법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그 기운을 느끼고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죠. 따라서 일반사람과의 반응굴림에서 자동적으로 -3의 페널티를 얻습니다.

이런 마법사들을 구제(?)해 주는 존재가 전문가로서, 직업은 기사, 바드, 도둑, 학자, 한량귀족(…) 등 다양하지만 마법사와 일반 사회 사이에 가교가 되어준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들은 마법능력은 없지만 다양한 경로로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음양으로 마법사들을 도와주면서 자신도 보수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법사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서는 하인, 경비, 요리사 등등이 필요한데, 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일꾼입니다. 엘리트는 아니지만 이들도 자기가 하는 일에서 나름대로 전문인이며, 궁수, 검사, 요리사 등 모험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이들은 고용주인 마법사들이 모험을 떠날 때 함께 따라가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 캐릭터들은 사회에서의 위치와 서로와의 관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고, 마법사들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해서 부대끼고 살아갑니다. 마법사가 연구하고, 전문가가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어슬렁거리고, 일꾼이 고되게 일하는 곳. 고립된 던전에서 몬스터 잡는 세계를 메카닉의 기본으로 상정한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이서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기본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아르스 마기카는 던전탐험을 기반으로 한 D&D와는 반대의 시점에서 출발합니다.

2. 마법, 마법, 마법

몬스터 잡아서 레벨이 오르면 마법이 더 생긴다? 아닙니다. AM의 마법사들이 새로운 마법을 얻는 방법은 오직 연구와 공부입니다. 잡일만 죽어라 시키고 가르쳐주는 건 더럽게 없는…아니지, 자상하시며 훌륭하시며 사려깊고 학식 높으신 스승께 배워서 정식 마법사가 된 후에는 자신이 스스로 마법을 발명할 수도 있고, 다른 마법사의 연구노트를 보고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가 암호라도 걸어놓았으면 그거 푸느라 또 몇 달 끙끙. 자기 연구의 성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적었을지도 모르므로 자칫하면 아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부적이나 마법지팡이가 필요하면 어떻게 할까요? 드래곤 레어를 습격해서 슥삭? 뭐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아크메이지 정도 되어서 드래곤을 건드리면 매우 위험, 보통 메이지가 드래곤을 건드리는 건 그냥 자살입니다. 어쨌거나 스스로 마법을 걸지 않은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마법효과를 알아내는데 또 시간을 바쳐야 하고, 고약한 원주인이 보호 마법이라도 걸었으면 꼼짝없이 걸릴 수도 있죠. 아주 별볼일 있는 물건 같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안정적인 방법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법을 걸려는 물체의 재질과 크기, 형태를 가지고 보너스와 페널티와 다양한 작용효과를 확인하고, 실험재료와 시간을 투자해서 원하는 마법을 겁니다. 하늘을 나는 벨트, 치유의 마법지팡이, 불이 나오는 장갑…. 뭐든지 좋습니다. 다만 마법 이론과 해당 마법의 레벨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니 충분해도 운나쁘게 주사위 잘못 나오면 시간과 마법재료를 날릴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이렇게 맨날 연구만 하면 한평생도 모자라겠다고요? 걱정 없습니다. 수명연장 시약을 만들면 되니까요. (말이 시약이지 문신 같은 것도 괜찮은.) 시약을 만들어 마시면(혹은 새기거나 등등) 100살은 거뜬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수명연장 시약은 시약을 마신 그 나이에 마신 사람의 생명력을 붙들어두므로 일단 시약을 마시고 나면 생명력을 정상적으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일단 마시면 영구 불임이 된다는 소리죠. 어차피 마법사야 연구에 온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마법사의 실험실에 몰래 들어가 생명연장 시약을 마시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유서 쓰고 공증인 세우고 가야 할 겁니다. 실험실은 마법사의 성역이므로 같은 마법사도 남의 실험실에 들어가면 헤르메스 마법사의 법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가 없고, 각 시약의 공식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 만든 걸 마셨다간 뒷일은 책임 못 지거든요.

연구실에서 늘 시간을 보내기가 쓸쓸하십니까? 마법사야 태생적으로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만큼 고독감을 느끼진 않겠지만, 때로는 외로울 수도 있죠. 다른 마법사들이래봤자 전부 당신의 실험성과나 영향력을 뺏으려는 못믿을 족속 뿐이니. 이럴 때는 패밀리어를 만들어 보세요! 마법적 능력을 조금 가진 짐승이 마법사를 자기 의지로 완전히 받아들일 경우 실험실로 데려와 1년에 걸친 패밀리어 과정을 밟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마법사와 동물 모두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그만큼 둘의 마법력과 마음과 몸이 연결된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단 패밀리어를 만들면 마법사에게는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로움도 달래주고 심지어는 마법연구의 성공률도 높여주는 충직한 동료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까마귀를 패밀리어로 둔 마법사가 가끔 깃털손질하는 까마귀처럼 어깨로 얼굴을 닦는 버릇이 생겨도 놀라지 마시길.

아르스 마기카의 세계에는 심지어 다른 마법사와의 무혈 결투를 위한 룰도 따로 있습니다. 이른바 케어타멘인데, 마법사의 가문(헤르메스 마법계열에는 각자 다른 능력과 역할을 가진 열두 가문이 있지요)에 따라서는 스승과 결투해서 이겨야 정식 마법사가 될 수 있는 무서운 곳도 있죠. 하지만 결투는 반드시 두 마법사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니 싫은 결투를 억지로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체면이 깎이는 건 감수해야겠죠.

3. 모험은 왠 얼어죽을 모험? 난 연구해야 돼!

AM에서는 다른 게임들처럼 모든 캐릭터가 사이좋게 모험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행을 떠나는 게 해로울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중인데 열흘 넘게 실험실을 비우면 실험 성공률은 점점 떨어지죠. 바꿔 말하면 모든 플레이어가 모든 세션에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한 명이 없으면 그 캐릭터의 마법사가 한 계절 동안 연구하는 걸로 하고 미리 연구성과 다이스를 굴리게 하면 되니까요. 나머지 캐릭터들은 요정의 숲으로 고고.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모험은 (실생활에서도 그렇듯이) 꽤나 위험한 일입니다. 절벽에서 한번 잘못 떨어졌다간 꼬박 28일을 침대에 누워 지낼 수도 있죠. 치유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80일을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험이나 전투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아, 전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평생 실험실에나 박혀 지내는 마법사는 순 골샌님일 것 같다고요? 그런 말씀은 마법의 화마가 적진을 초토화시킨 다음에나 하시길. 아르스 마기카의 마법사 역시 전투에서 휘황한 능력을 보입니다. 다만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실험실에서의 많은 시간과 자신을 삶을 바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성취는 더욱 값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 보고 무서워하거나 신기해하는 그 마법은 인간적인 삶을 희생하고 그 자리에 수많은 마법노트와 실험물을 남긴 그들, 자손도 없고 친구도 없지만 늦은 밤까지 실험실에 불을 밝히며 탐구욕을 불사른 마법사들이 살아간 흔적이니까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