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 스트레스와 참가자 서술권

며칠 전에 승한님과 진행자의 필요성과 서술권 분배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떠오른 생각인데, 많은 참가자가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원인이 서술권 분배 방식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RPG 역할 분배에서 진행자는 주변 세계와 조연에 대한 것을 서술하고, 참가자는 그 참가자가 맡은 주인공이 하는 언행을 서술합니다. 주인공이 하는 판정은 참가자의 서술 영역과 진행자의 서술 영역 사이에서 일어나므로 판정 규칙은 성공 여부에 따라 참가자의 서술권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살로 오크의 눈을 꿰뚫습니다.” 하는 참가자 선언과 그에 따른 판정을 생각해 보죠. 성공했을 때는 참가자의 서술이 진행자의 서술 없이도 진행자의 서술 영역인 주인공 외부에 작용하며, 참가자가 서술하는 목적인 극적, 게임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같은 극적 목적이나 오크를 쓰러뜨리는 게임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동이라는 제한적인 서술 영역에서마저 참가자의 서술을 관철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공보다 실패가 재미없어지고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게 됩니다.

물론 판정 실패가 판정 성공보다 불리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또한, 게임적 관점에서 보면 캐릭터 성장이나 전술적 판단을 통해 판정 성공률을 높이려는 노력 자체도 게임의 재미이지요. 그러나 그 점을 보존하면서도 판정 실패에도 극적 재미나 게임적 도전을 부여하면 참가자의 재미가 주사위 굴림에 의존하는 현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갈등 판정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판정에 무엇을 걸지 결정해서 성공과 실패가 둘 다 재미있도록 조절하는 것이죠. 판정에 성공하면 화살로 오크 눈을 맞추고 실패하면 헛손질로 끝이 아니라, 성공하면 휘황한 궁술을 본 오크들이 겁을 먹고 못 쫓아오고 실패하면 성난 오크들이 일제히 추적해 온다든가.

갈등 판정에서는 무엇을 걸지 않는지 하는 문제가 무엇을 거는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놀라운 궁술을 선보이는 건 같게 해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충족하되, 성공하면 오크 수장을 일격에 쓰러뜨려서 오크가 조직적인 저항을 못하게 하지만 실패하면 졸개를 쓰러뜨려서 괜히 이쪽이 숨은 위치만 들키고 오크들이 조직적으로 반격해 온다든지요.

갈등 판정의 승패에 거는 결과 결정에는 참가자가 참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가자의 극적 욕구가 진행에 직접 반영되며, 실패도 참가자에게 재미있을 가능성이 더 커지니까요. 이것은 참가자의 서술권이 전통적인 참가자의 서술 영역보다 넓어지는 결과가 되므로 가상현실의 환상은 깨지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외부 가상현실이 있다면 활을 쏘는 행동의 극적 결과를 참가자가 정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요.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재미가 중요하다면 갈등 판정의 결과는 진행자가 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진행자의 권한이 강하고 가상현실 경험을 중시하는 RPG에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실현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통해 뭔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는데 그 실현이 판정 성공에 달렸다면 재미가 확률에 의존하는 데다, 진행자에게 극적 권한이 대부분 있으니 참가자가 원하는 상황이 나오는 것도 안정적이지 않죠.

그래도 팀내 의사소통이 활발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진행자가 활발하게 반영한다면 많이 보완할 수 있는 점이니까, 게임성과 가상현실 경험을 보존이 중요하다면 진행자 중심 체제를 유지하면서 의사 소통의 활성화로 참가자의 극적 욕구 충족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가자에게 폭넓은 서술 권한을 주는 편이 참가자의 극적 욕구 실현에 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가상현실 경험보다는 극적이고 역동적인 공통 서사와 극적 욕구 실현을 중시하는 제 취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는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문제라, 목적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좋은 방법이란 없으니까요.

물론 특정 목적을 실현하는 데 어떤 방식이 적합한지는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 판정 개념 도입은 실패가 성공보다 재미없는 현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목적에는 참가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가상현실의 환상 유지라는 또 다른 목적이 중요하다면 진행자가 그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5 thoughts on “판정 스트레스와 참가자 서술권

  1. ddowan

    RPG의 시뮬레이션성 때문에 작은 좌절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어차피 이길 거 플레이 시간만 길어진다면서 맘속으로 투덜거렸었지요. (나중에 마스터에게 물어보니 졌을 때의 분기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규칙과 확률과 도전이 중요하다면 보드게임이나 워게임을 하면 되지 왜 dnd를 할까라는 기분이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서, 주사위의 스릴에 마음을 맡기니 즐거워지더군요. 이겨야 한다는 압박이나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확실히 실패도 성공만큼 재미있으면 즐거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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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말씀대로 부담 없이 전술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전술적 전투가 많이 즐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RPG에 대한 기대가 무엇이냐, 그리고 현재 플레이 스타일이나 규칙이 그 기대를 얼마나 충족하느냐 하는 부분이겠죠. 저는 극적 선택과 그에서 나오는 상황을 다루는 경량 규칙을 좋아하므로 D&D나 겁스는 잘 안 맞고, 마찬가지로 치밀한 전술적 전투와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를 좋아하는 취향에는 포도원의 개들이나 안방극장 대모험은 전혀 안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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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dowan

      실패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을 즐기는 룰은 재미있어보여요. 역시 택틱물은 실수나 실패를 즐기기에는 압박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라는 말이 갑자기 와닿는 군요. 간단한 이야기 지어내면서 맞춰가기 보다, 케릭터 스탯을 짜는 일이 더 부담없을 때도 있으니 어렵습니다.

      확실히 자신이 바라는 바와 맞는 룰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네요. 뭐라 해도 룰은 가지고 노는 것이니까요. 스토리텔링 쪽도 굉장히 재미있어 보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꼭 겪어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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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바보왕

    늦깎이 오알러입니다.

    로키 님의 블로그를 보고 여러 가지로 배우는 중인데요, 갈등판정 관련 개념을 보고 “이거다” 싶어서 카페에 소개하는 중에 로키 님의 포스팅 주소도 퍼갔습니다.

    자비를 베푸사 늦게나마 허락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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