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해지자

RPG인을 위한 즉흥 기법을 다루는 블로그 글 시리즈에서 Being Obvious라는 글이 크게 와닿더군요. 직역하면 ‘뻔해지기’ 정도인데, 문맥을 보면 ‘무리하지 않기’ 혹은 ‘억지 쓰지 않기’에 가깝습니다. 한 마디로 드라마틱하게 하려고, 혹은 무섭게 하려고, 혹은 웃기려고 무리하면 보통 역효과가 나고, 스스로 보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전개를 하는 게 가장 효과가 크다는 얘기입니다. 우선 억지를 부리면 티가 나게 마련이고, 별로 감동이나 재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모두 생각하는 게 달라서 자신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참신하고 놀라운 일이 많거든요.

뻔해지라는 것은 그렇다고 일부러 지루해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예를 들어 서부극에서 정의의 보안관이 자기 친구를 죽인 범죄자와 마주쳤는데 총도 뽑지 않고, 자기 정체도 드러내지 않고 지켜만 보다가 범죄자가 사라지는 걸 방관하는 건 지루하고, 앞뒤 사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의외로 RPG 참가자에게는 꽤 볼 수 있긴 합니다만…) 반면 결사의 총격전을 벌인다거나 협박을 주고받는 건 훨씬 자연스럽고, 또 재밌습니다. 갑자기 UFO가 내려서 두 사람 다 납치해서 사라지는 걸로 끝~이라면 웬만큼 특이한 서부극이 아니면 재미없고 억지스럽습니다. (근데 왠지 해보고 싶..)

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던 게, 저는 예전에는 극적으로 꾸미려고 너무 무리를 하는 일이 많아서 애를 먹었거든요. 요즘은 그런 경향은 많이 줄었지만 저 글을 보니 그때 뭘 잘못하고 있었는지 더욱 와닿았습니다. 요새도 가끔 빠지는 함정이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뭔가 참신하고 놀라운 걸 해보자는 건 특히 진행을 할 때면 강한 유혹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보통 참가를 진행보다 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참가자는 자기 인물을 생각해서 뻔한 것만 하면 되는 반면 진행자는 뭔가 대단한 걸 꾸며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진행자도 그냥 뻔하고 자연스럽게 해도 된다는 인식에서 시작해 이를 뒷받침하는 방법론과 기법을 쌓으면 진행도 훨씬 편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이 되고, 자유도와 극적 감동을 둘 다 성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는 뻔해도 남에게는 꼭 그렇지 않으니까 굳이 억지로 꾸밀 필요는 없다는 것, 뻔하고 자연스러운 전개에는 무리하게 꾸민 것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감동과 진실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훨씬 편하고 재미있는 플레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7/10/27 추가 부분 (승민님 답글을 보고 보충했습니다)

뻔해지자는 것은 ‘뻔하고 전형적인 이야기를 유지하자’는 뜻은 아니며 (제 첫 답글에서 그런 인상이 들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진행자 혼자 판단으로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유지하자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참여자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뻔하고 자연스럽게 하다 보면 집단 서술의 역동성에 힘입어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거죠.

예를 들어 친구를 죽인 남자와 술집에서 마주친 정의의 보안관이라면, 참가자가 생각하기에 그 보안관의 뻔한 반응 중에는 바로 총을 꺼내는 게 있을 수도 있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 옆에 자리잡고 협박하는 것도 할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살인자의 반응 중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뻔한 것도 마주 총을 꺼내는 것, 비웃음, 줄행랑 등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연스러운 진행을 하면 그게 상대에게는 종종 예상치 못한 반응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비교적 전형적인 이야기가 된다 하더라도 그 속에 직접 참여하는 재미는 변함없죠.

중요한 건 뻔해지는 걸 두려워하면 무리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진행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는 것도 그런 얘긴데, 예를 들어 보안관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악당이 갑자기 ‘날 못 알아보겠어, 빌리? 내가 바로 네 친구라고!’ 하면서 악당을 죽인 다음에 스스로 죽은 척하고 서로 정체를 바꿨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면… 뭐 하기에 따라서는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별다른 감동이나 개연성을 못 느끼면서 억지로 꾸미려고 하면 실패할 위험이 높습니다. 악당하고 싸우는 게 너무 뻔한 진행이라는 이유로 보안관이 갑자기 바에 뛰어올라 노래를 부르거나 악당하고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결국 극적 재미는 억지로 재미있게 꾸미려는 노력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게 결론이라면 결론입니다. ‘재미있게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나온다기보다는 관심과 공감이 가는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을 수 있죠. 진행자 혼자 참신해보려고 기를 쓴다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전형성이나 예측성을 거부한다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억지로 꾸미기보다는 인물과 상황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 상황마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전개를 해서 뻔해져보면 어떨까요. 

8 thoughts on “뻔해지자

  1. Speed

    특이함보다는 당위성있는 전형적인 이야기로… 기본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니까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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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전형적인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이유가 있죠. 말씀대로 말이 되고 공감이 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니까요. 정말로 참신한 재미는 재해석과 재창조에서 나오지, 사실 뜯어보면 정말 재밌는 얘기 중에 근본부터 완전히 참신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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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생수

    균형의 문제일 것 같아요. 저만해도 드라마틱을 추구할때랑, 전형성을 추구할 때랑 둘다 각각 따로 애써본 적이 있는데, 안뻔할땐 상대가 상황 적응이 힘들고, 뻔해지면 본인이 재미없어져서 의욕이 떨어져서 (‘내가 지금 뭐하는 건지…’) 캠패인 펑크가 나더군요. 게다가… 시나리오가 뻔해지면 리액션도 ‘기대했던 대로’만 나오는 경향이 더 강해지더군요 -_-;;;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혼자서 눈금조절하며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내가 뻔해지든 안뻔해지든 다른 사람들이 뻔해봤자 재미없고, 내가 뻔해도 다른 사람이 안뻔하면 재미있기도 하더군요. 각자 본인들도 자기가 뻔해지면 스스로 금방 질리고, 남이 신선하면 재미있고… 뻔하게해서 같이 앉아 있는 날 재미없게 하지 말라~며 서로 간섭을 막 해야할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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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기생수

    서설이 길었는데… 제 생각에는 공감 안되는 참신함 만큼이나 공감되는 진부함은 좋지 않습니다. 마스터라는 단일 개체가 혼자 꾸미고 뭔가 조절하며 결과 예측까지 하는 건 한계가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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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댓글을 보고 원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아 좀 더 보충했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제가 생각하기에 뻔해지기와 극적 전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극적 감동을 추구하려고 뻔해지자는 주장이죠. 기대한 대로 반응이 나오는 의미에서 뻔한 게 아니라, ‘참가자가 생각하기에’ 뻔한 것은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뻔한 것과는 다른 일이 많고 (그래서 참가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진행의 제1 원칙이 나오는 거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시는 상호 간섭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극대화하자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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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ddowan

    서로의 인식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로군요.(뭔가 거창합니다.)
    저는 전에 참신함이나 신기함, 기괴함을 위해서는 진부함을 미리 깔아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상식의 일치를 중심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쉽게 진행하자고 만들어놓은 진부한 문제가 문제를 일으키면 진행자도 힘들거 같습니다. 안풀려서 속상한 것은 참가자도 마찬가지 일거 같습니다. 적어도 퍼즐 부분에서는 공통된 진부함 만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상대방의 진부함에 익숙해지는 것도 문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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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로키

    Rrr…// 예, 그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ddowan// 서로 생각과 취향이 다르다는 점은 말씀대로 집단 서술의 장애물이 아닌 도전이자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퍼즐에서도 진행자에게 뻔한 것만 정답이 되지 않고 다양한 해결책, 즉 참가자에게 뻔한 것도 상식 내에서 인정한다면 훨씬 재밌어지지 않을까요?

    말씀대로 각자의 상식이랄까, 진부함이랄까 하는 게 적어도 서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는 있어야 같이 플레이하기가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참여자끼리 서로 맞는다는 진짜 의미일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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