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의 도박 (공화국의 그림자)

21화에서 헤어진 쟈 공주입니다. 지금 올리긴 하지만 실제 여기 나온 사건이 벌어지는 시점은 일행의 넬반 체류가 끝나갈 때쯤입니다. 공화국의 그림자는 논리적인 시간 순서를 포기한 지 오래인 겁니다. (당당)

내용 면에서는 다룬 시점에서 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의 이름의 이면이기도 합니다. 경호원 얀 타빈은 오체스님과 한 1:1에서 나온 다룬의 여자 다룬의 보좌관 셀린 헤리아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알사피 야외 시장의 따스한 공기는 온갖 향신료의 톡 쏘는 향을 품고 눈부시게 빛났다. 햇살과 향료를 가득 들이쉬며 쟈네이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십 언어로 하는 호객과 흥정과 말다툼이 귀를 때려왔고, 늙지 않는 크림을 권하는 아쿠아리쉬와 짤랑거리는 목걸이를 양팔에 걸고 내미는 트윌렉, 개조 피스톨을 싸게 준다는 로디안과 ‘예블람의 떨이로 파는 부품상’을 광고하는 구식 드로이드에게 부대끼는 동안 호위는 쉴 새 없이 긴장했다.

“괜찮아요, 얀.”

그녀는 키 큰 청년의 팔에 잠시 손을 얹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아무도 모르니까, 오히려 경호원처럼 행동하면 더 눈에 띌 거에요.”

“예.”

후드 그림자 밑으로 얀의 긴장한 턱선이 보였다. 쟈네이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충직한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얀 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었다. 위험하다고 딱 잘라 반대하는 그에게 결국 왕가에 대한 충성까지 들먹여가며 반강제로 동의를 얻어낸 지난밤의 대화는 쓴 뒷맛을 남겼다.

그 생각을 몰아내듯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그릇이 늘어선 좌판을 구경했다. 원가에 판다며 그릇을 권하는 상인에게 건성으로 답하며 그녀는 도자기 그릇을 하나 집어들고 살폈다. 귓가에 바로 얘기할 수 있게 얀이 자세를 낮추자 쟈네이딘은 되풀이하기 싫은 싸움에 대한 불안에 얼굴이 굳는 것을 느꼈다.

“다시 생각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얀도 내키지 않는 말투였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가 그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어서겠지. 짜증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쟈네이딘은 그릇을 좌판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대답은 조용했다.

“어제저녁에 이미 끝난 얘기잖아요.”

물론 왕족의 권위를 앞세워 강제로, 불공평하게 끝낸 얘기기는 했다. 도망치듯 인파를 헤치며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얀은 긴 걸음으로 따라왔다. 낮은 목소리에는 절박감이 묻어났다.

“최소한 무슨 일인지라도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제 임무를 방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에 계실지, 무슨 위험이 있을지라도 알아야…!”

반쯤 무너진 담벼락의 그늘 속에서 쟈네이딘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분주한 저잣거리에서 한두 발짝 벗어난 곳에 있는 그녀와 얀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갔다.

걸음을 멈추면서 얀은 마치 막을 수 없는 주먹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를 물었다. 다룬 오르가나하고 친해지더니 이제는 왕족의 명령이 우습게 보이느냐고 전날 쏘아붙인 기억에 쟈네이딘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차라리 뺨을 때렸으면 이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에게는 모욕이 덜했을 것이다. 얀이, 그리고 알데란이 충성의 기묘한 모순에 빠져버린 건 그들 평범한 시민 탓이 아닌데…

‘그러니까 더욱… 그러니까 내가 나서야 하는 거야.’

쟈네이딘은 당당하게 턱을 쳐들며 얀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 비치는 오후 햇살이 눈부셨다.

“미안해요… 얀.”

그가 흠칫 놀라는 모습을 쟈네이딘은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분명 어제처럼 심한 말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겠지. 어제보다 더 부당한 소리를 했어도 그는 말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알아요. 어떤 근거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강요가 얼마나 가혹한지도…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건 이해해줘요.”

얀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짐작이 옳다면 수많은 다른 사람이 걸린 문제기도 했고… 그녀는 한 발짝 다가서며 얀의 시선을 붙들었다.

“게다가 혼자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다이 마스터가 같이 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씀입니다만…”

얀은 한숨을 쉬며 저잣거리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마스터 티로칸이 작동을 중지한 드로이드에 대고 뭔가 열심히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쟈네이딘도 속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막연했던 의심을 거의 확신으로 만들어준 정찰 정보를 단투인으로 가져온 장본인이 마스터 티로칸이었던 데다가, 제다이 수행이 아니었으면 무슨 말을 했어도 얀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스터 티로칸이 아니면 그녀의 지시만 듣고 두말없이 따라올 제다이가 있을 리 없었고.

“정말로 제가 같이 가면 안 될 일입니까, 왕녀님?”

혹시나 해서 물어보면서도 얀은 이제 포기한 기색이었다.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며 쟈네이딘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안해요, 얀. 이런 짐을 지워서.”

아무리 반대했어도 일단 약속한 이상 그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룬을 아무리 아끼고 존경해도 그에게마저…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만 오신다면 아무것도 미안하실 것은 없습니다.”

얀은 정중하게 목례했다.

“고마워요…”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마스터 티로칸 쪽으로 손짓했다.

“두 분 떠나시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쟈네이딘은 북적이는 저잣거리를 가로질렀다. 드로이드에게 할 말은 다 했는지 제다이 마스터는 이번에는 가게 앞에 진열한 허브를 뚫어져라 보며 뭔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살짝 어깨에 손을 대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가짜 같지 않느냐, 로어틸리아? 진품 엘롬산 덩굴뿌리에 이런 값을 붙일 리가 없지.”

“로어틸리아가 아니랍니다.”

흠칫 돌아보는 마스터 티로칸에게 쟈네이딘은 미소를 지었다.

“갈 준비는 되셨나요?”

“그럽시다.”

그녀처럼 외투에 후드를 눌러쓴 제다이 마스터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으쓱하며 돌아섰다. 쟈네이딘은 혼자 한숨을 쉬고 그 뒤를 따랐다. 사람을 꿰뚫어보듯 맑고 차갑던 나이트 로어틸리아의 시선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다이 일행이 서둘러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마스터 티로칸이 단투인 회합장에 도착한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을까.

적어도 그라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보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도 모르게 쟈네이딘은 걸음을 늦추다가 어느새 멈춰 서서 떨리는 손끝을 입술로 가져갔다. 환한 백금빛 머리와 정중하면서도 다정하던 미소, 단단하고 우아한 몸과 갈망의 열기를 떠올리며.

‘뻔뻔해, 쟌느!’

마치 기억에서 도망치듯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그 파란 눈동자를 그리워할 자격 따위 없다고,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날카롭고 달콤한 고통도 염치없는 사치라고 거듭 다짐했다. 그녀는 알데란의 왕녀. 지나가는 마음 한 조각에 모든 걸 망쳐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고개를 세차게 젓고 걸어가다가 쟈네이딘은 그녀를 잊은 듯 겅중겅중 걸음을 옮기는 마스터 티로칸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한쪽 골목으로 이끌었다.

“이쪽입니다, 선생님.”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보았다. 아까 얀과 얘기했던 담벼락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돌담 그림자만 오후 햇살에 길게 드리울 뿐. 새삼 치밀어오르는 불안을 억지로 삼키며 그녀는 제다이 마스터와 함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때처럼 날 칭찬할 건가요, 다룬?’

나지막한 사암 건물들이 드리우는 서늘한 그늘 속을 서둘러 걸어가며 그녀는 혼자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밤늦게까지 몰래 체스 책을 읽던 아홉 살 소녀가, 처음으로 허를 찔리자 늘 심각하던 검은 눈이 환해지던 열세 살 소년이 언제부터 전혀 다른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게 되었을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지… 적대할 수도, 굴욕을 줄 수도,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지만 끝내 미워할 수 없을 한 사람. 품 속의 블래스터와 조용한 후회의 차가운 무게를 느끼며, 낯선 행성의 거리 위에서 그렇게 쟈네이딘은 익숙하고 그리운 기억에 말 없는 작별을 고했다.

2 thoughts on “왕녀의 도박 (공화국의 그림자)

  1. orches

    의원님도 그렇지만 공주마마 역시 여러모로 노력하시는군요.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요..
    아우.. 로키님의 글은 제 뇌를 녹이신다는.. 살려주세요오 ㅠ

    <추신사항> 우리 셀린이 다룬 오르가나의 여자라니요오.. 그녀는 여러모로 현실적인 비서 중 하나일 뿐입니다? (‘믿으시면 아를란’ 이래놓고 도망갑니다아..)

    Reply
    1. 로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근데 셀린은 다룬 여자 맞잖아요? 분명 ○○도 하고 ××도 하고 딴청을..(도주)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