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시성 플레이의 가능성과 도전 – 실전편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는 플레인스케이프를 배경으로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 규칙을 사용해서 플레인스케이프 세계에 있던 사건과 인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다룬 내용입니다. 위키를 통해 각자 글을 올리고, 서로 글을 참조하거나 의견이 대립하기도 하면서 함께 연구 대상, 그리고 그들을 연구하는 연구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내용이지요.

전에도 플레인스케이프를 배경으로 한 비동시성 플레이 바이 위키 플레이를 시도했지만, 참가 부진과 관심 부족 등의 이유로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비교적 지속적인 플레이 바이 위키를 하면서 혼자 생각하던 때하고는 또 다른 흥미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지난번 글에서도 얘기했듯 비동시성 플레이는 시간 활용이 우선 눈에 띄는 장점입니다. 다섯 명이 한꺼번에 시간을 내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플레이했다면 절대로 단기간에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각자 짬짬이 시간을 내서 글을 올리는 비동시성 플레이는 참여자가 동시에 모일 수 있는 짧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더군요.

물론 그렇다고 동시에 모여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의 가치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규칙  논의라든지 경매 등은 댓글로 처리하는 것보다는 직접 얘기해서 해소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간단하죠. 하지만, 동시성 플레이에서는 모두 모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을 논의로 흘려보내기가 아까운 반면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에서는 플레이 시간에 대한 부담 없이 논의만 할 수 있는 점이 편합니다. 연구원 사이에 생기는 입장 차이라든지, 경매 동맹(..?) 체결이라든지, 앞으로 이야기가 갈 만한 방향 등을 자유롭게 논하는 시간은 플레이의 또 다른 재미이며, 플레이를 원활하게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플레이를 원활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비동시성 플레이에 어울리는 규칙입니다. 동시성 플레이용으로 만든 규칙을 게시판과 같은 비동시성 플레이에 사용하면 플레이가 늘어지고 재미없어지기 쉽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참여자 간에 서술권 분할이 있으니까요. 참가자는 자기 주인공 행동만 서술하고 나면 외부 세계나 조연에 대한 서술권이 없어서 진행자 글을 기다려야 하고, 진행자도 묘사와 조연 행동을 쓰고 나면 주인공에 대한 서술권이 없으니 참가자 글을 기다려야 합니다. 즉 누구도 완전한 글을 쓸 수가 없으니 감질나고 답답할 수밖에요.

애당초 비동시성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만든 ‘수정주의 역사’는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 그리고 참가자와 참가자 사이의 서술권 분할을 없애서 모든 참여자가 완결된 글을 쓸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다른 참여자가 글을 올리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 없이 자기 글만으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지요.

이런 형태의 놀이가 돌려가며 소설을 쓰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나의 수끌리어는 이렇지 않아!’라든지 ‘마라켄라반투스는 천생연분이야!’ 같은 의견 충돌을 어떻게 해소하는지 말이죠. 그 해답은 수정주의 역사가 규칙이 있는 놀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 점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반박 경매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방향에 대해 의견 충돌이 발생하면 이를 해소할 방법은 규칙에서 명시적으로 정하고 있죠. 연루된 인물에 대한 연구원의 권위도에 연구 자금을 합산한 ‘입찰액’을 서로 겨루고, 다른 연구원들도 연구 자금을 투자해서 어느 한 쪽을 도우면서 연맹과 대립을 거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 경매에서 양쪽을 다 돕기도 했지만..(..)) 진행자의 결정권이나 참여자 간 역할 배분을 경쟁적 규칙으로 대체한 셈이죠.

물론 경매까지 가는 것은 비교적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패배의 위험과 연구 자금 손실 가능성 등의 이유로 다들 경매에는 아무래도 신중해지죠. 반대로 말하면 경매 규칙은 직접 사용하지 않을 때도 놀이 속 의사결정과 의견 충돌 해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남의 글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반박 기사를 쓰지 않겠죠. 반면 중요하게 느끼는 사안이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반박을 하는 등 이익과 손실을 합리적으로 저울질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박 경매 규칙은 플레이 내 의사 결정에 중요한 변수입니다. (이러한 속성은 규칙의 영역 중 두 번째 효과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규칙을 사용하지 않아도 규칙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예라면 평소에도 강하게 작용하는 경쟁 심리입니다. 글을 쓰는 만큼 권위도와 연구 자금이 올라가고, 권위도와 연구 자금이 높을수록 반박 경매에서 유리하므로 반박 경매 규칙은 경쟁적 글쓰기를 유도하죠. 이러한 경쟁 심리는 지속적인 흥미와 참여를 유발하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반면 글의 분량이나 질이 아닌 편수에 따라 권위도와 자금을 올리므로 자칫하면 졸속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은 부작용일 테고, 이 점은 서로 늘 감시하고 지적해야겠죠. 눈치가 보여서 너무 졸속은 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고요.

진행자가 없다는 점은 플레이 내적 서술뿐 아니라 플레이 외적 구조에서도 훨씬 수평적인 의사 결정을 유도합니다. 거의 항상 진행자 역할이다 보니 제가 뭔가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 익숙한 편인데, 진행자 역할에서 벗어나고 보니 제가 안 끌고 가도 다들 알아서 잘 하십니..(퍽) 규칙 논의, 위키 페이지 구조 변경, 새 연구 대상 추가 등등, 다 능동적으로 하시니까 참 마음이 편하더군요.

물론 다들 경험이 있는 RPG인이고 성격 자체가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분들이 모여서 그런 면도 있겠죠. 하지만, CBMaster님의 글 게임 밖의 마스터: 팀 리더? 에서도 엿볼 수 있듯 진행자라는 역할 자체에 자잘한 플레이 외적 결정까지 떠맡게 되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가자가 귀찮아서 그럴 수도 있고, 왠지 참가자에게는 의사 결정을 주도할 권한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이유가 되겠죠. 그래서 요즘에는 수정주의 역사처럼 진행자 없는 플레이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평적 의사 결정 구조는 위키라는 매체의 속성에서도 크게 도움을 받습니다. 편집 권한이 있으면 누구든지 편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리자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고, 연구자금과 권위도 관리나 링크 추가, 페이지 구조 변경 등을 모든 참여자가 자유롭게 할 수 있죠. 모든 변화를 관리자가 직접 반영해야 했다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그 관리자에게 권력 집중 현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공동 편집 외에도 위키의 편리한 기능은 플레이 효율에 크게 기여합니다. 예를 들어 이전 버전 추적 기능으로 누가 언제 어떤 편집을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는 점은 투명성에 필수적이고, 풍부한 편집 구문은 글을 한결 예쁘게 만들어주죠. 댓글 플러그인은 위키에 게시판의 편의를 더했고, RSS 피드를 통해 새로운 편집과 댓글이 올라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태터툴즈나 텍스트큐브 쓰시는 분은 RSS 리더 플러그인으로 블로그와 위키를 연계할 수도 있고요. (이 블로그 왼쪽 사이드바의 Recent RSS 항목에서 PBW를 누르면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 피드가 나옵니다.)

전에 위키를 다룬 글에서 위키를 가리켜 기능성은 최고, 사용성은 꽝이라고 한 적이 있지만, 위키 사용성이 반드시 낮다고만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너 캠페인에 거쳐 캠페인 위키를 사용해본 결과, 참가자들도 완전 바보는 아니던데요? (퍽퍽) 개인적으로 굉장히 편하게 쓰고 있어서, 관심 있으신 분이 있다면 제가 도쿠위키를 설치하고 저에게 맞게 이것저것 바꾼 과정을 글로 올리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를 플레이하며 느낀 점을 적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플레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참여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게시판 플레이 등 비동시성 플레이를 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얘기였으면 좋겠습니다.

2 thoughts on “비동시성 플레이의 가능성과 도전 – 실전편

  1. Wishsong

    이전에 하셨던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와 지금의 것을 비교해보면서 ‘어떻게 해서 더 활성화될 수 있었던가’를 한번 듣고 싶네요.

    어떤 점에서 더 잘 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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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좋은 문제제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전에 했던 플레이 바이 위키는 외전 성격이어서, 본편 캠페인의 문제가 외전 플레이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이건 현재 플레이하고는 큰 상관 없으니까 차치하죠.

      그 외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위키 플레이 외전을 참가자들이 원해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제 사정으로 동시성 플레이를 계속하기가 어려워서 대체물로 제안했다는 태생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논의하면서 훨씬 흥미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애당초 참가자들이 별로 원한 플레이가 아니었으므로 다른 문제들을 극복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플레인스케이프를 배경으로 글을 쓰는 데 심리적 부담이 컸다는 점입니다. 워낙 방대하고 다소 난해한 배경이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지식 수준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식 설정을 그대로 읊는 것보다는 배경에 흥미를 가지고 재해석과 재창조를 하는 게 훨씬 재밌으니까요.

      따라서, 진짜 문제는 참가자들에게 플레인스케이프는 ‘마스터가 정한 배경’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는 점이었죠. 사실 플레인스케이프처럼 접근성이 떨어지는 배경은 배경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굳이 사용할 의미가 없기도 하고요. 여기에 위에서 말한 태생적 한계까지 겹쳐서 플레이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는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부터 이미 위에서 말한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위키 플레이이고 플레인스케이프 배경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으니까 참가자 자발성과 배경 흥미도는 이미 갖춰졌죠. 참여자 적극성도 높고요.

      아마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지속적인 흥미 유발일 것 같은데, 이것은 글에서 말한 대로 경쟁심리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겠죠. 다만 경쟁심리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참여하지 않을 위험도 있으니까요. 지속적인 흥미와 참여는 정말 쉬운 해답이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처럼 집착이 심한 성격이면 도움은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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