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죽여버려라

본격 비정 에로 추리 음모 활극 로맨스 RPG…일 리는 없고 (퍽), 그저 캠페인을 진행하다가 느낀 것입니다. 제목은 제임스 패트릭 켈리의 Murder Your Darlings를 번역해본 것입니다.

진행자는 캠페인을 하다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전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자기만의 ‘최상 시나리오’를 꾸미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상이 커지다 보면 자칫 집착에 빠져서 스스로 생각하는 최상 전개에 반하는 참가자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하는 등 독불장군식 진행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피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캠페인에 대해 품은 자신의 상상과 최상 전개, 즉 로망을 참가자들에게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서로 얘기해서 조정하는 것입니다. 각 참가자 역시 자신이 바라는 로망이 있을 테니까 대화를 통해 서로 욕구를 조화하는 거죠. 세션 등지에서 얘기가 나오는 합의에 의한 플레이가 이런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방법이 바로 ‘사랑한다면 죽여버리기’입니다. 이런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다. 저런 전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대신, 모든 것을 플레이의 역동적 긴장 과정에 맡겨두고 그 결과에 놀라는 것을 스스로 즐기는 방향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이 서로 정면 대치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는 공통 요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합의 플레이를 논하면서 성일님은 의외성이 차지하는 위치 또한 얘기하고 계시죠. 또 저는 미리 합의한 계획보다는 밀고 당기는 플레이 과정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결과를 중시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과정의 초기 조건 (인물의 동기, 판정 승패의 결과 등)에 대한 합의는 열심히 합니다. 욕구를 서로 터놓고 얘기해서 조화하는 것과 욕구대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당겨서 전혀 새로운 결과가 나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는 중점의 차이일 뿐.

그래서 뭐, 현재 제 생각은 이런 식입니다. 어떤 장면이나 전개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욕구가 캠페인에 대한 상상력을 지배할 정도로 커진다면 미련없이 죽여버리자. 어차피 참가자들의 욕구와 충돌해서 서로 깨지고 다듬어지면서 지금 상상하는 어떤 전개보다 훨씬 멋진 결과가 나올 테니.

만약 정 죽이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참가자들에게 이러이러한 전개를 하고 싶다고 솔직히 얘기해서 자신의 욕구가 실현되도록 협조를 구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참가자가 진행자의 마음을 읽기를 기대하거나, 참가 기능의 핵심인 선택권을 제한당해 가면서 진행자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른 채 닥치고 따라오는 걸 즐기라고 강요하는 진행은 재미없어지기 쉽다고 봅니다.

8 thoughts on “사랑한다면 죽여버려라

  1. nefos

    이것저것 하고싶은게 많은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욕심이 도를 넘어 집착이 되면 위험하죠. RPG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집착한다 싶으면 바로바로 정리,청소하는게 좋은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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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그렇죠. RPG 기준으로 얘기한다면, RPG는 사회적 놀이이지 진행자만의 개인적 상상 공간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특정 전개에 대한 진행자의 욕구가 강해지면 그걸 참가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알 수 있게 해서 모두의 상상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모두가 만들어갈 상상을 위해 포기하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참가자들이 공유하지 않는 로망이 캠페인을 지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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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rr...

    에테르 스코프(맞나?;) 처럼 판정에서 성공시 묘사를 플레이어가 한다거나, 처음부터 플레이어가 미리 원하는 장면을 텔러에게 말해주면 ‘모두의 로망’을 실현하는 플레이가 가능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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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호.. 에테르스코프에 그런 서술권 분배가 있었나요. 확실히 서술권 분배라든지 활발한 토의와 제한은 모두의 로망을 실현시키는 데 필수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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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Rrr...

    한 장면이나 일정 시간동안 특정 플레이어에게 장면의 묘사권을 넘기는(심지어 다른 플레이어의 PC의 대사와 행동까지) 하우스 룰도 있다고 하지만, 특정 플레이어의 로망만 반영될 소지가 있는 양날의 검같은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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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다른 참여자들이 적절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안 될 건 없겠지만, 문제는 한 사람만 얘기하는 원맨쇼가 되기 쉽다는 점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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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염기도

    murder your darlings…
    초기에는 미련없이 상대도 나도 죽이며 합의안을 도출했는데
    어느새 원맨쇼로 전락했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까지는 원맨쇼의 주인공을 비판하고자 하는 열정정도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는 죽이지 않고 스스로를 죽이며 진행되는 회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합의안에 대해 누구 하나 만족스러워 하지 않기 때문에,
    회의도, 회의 이후의 업무 진행에 있어서도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글과 댓글 보며 어휘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분들이 사회 어딘가에 또 계신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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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쉽지 않죠, 합의를 도출하면서도 무기력해지지 않는 게… 그래서 요즘은 양보보다는 서로 욕구를 정확히 전달하는 대화가 더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해서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하는 건 좋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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