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 취향을 넘어 기능으로

전에도 다루었듯 RPG계에서 규칙에 대한 논의는 민감한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분적으로는 인터넷 토론의 성격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규칙에 대한 논의는 흔히 기능이나 효용이 아닌 취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합니다.

취향은 근거 제시와 반론이 들어가는 생산적인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공감하거나, 존중하거나, 반대하거나, 싸움이 나거나 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게 아니므로 토론의 효과를 볼 수는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규칙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분일까요? 우리가 어떤 규칙이 좋거나 나쁘다고 할 때, 그것이 개인적 취향을 넘어 객관적인 토론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려면 무엇을 다루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의 목적, 혹은 기능이 아닐까 합니다. 즉 막연히 ‘좋다’ 혹은 ‘싫다’는, 처음부터 취향 얘기이거나 취향 얘기로 흐르기 쉬운 얘기가 아닌, ‘A 규칙책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스타일의 놀이에 적합하다’라거나 ‘B 규칙은 놀이 속에서 이러이러한 기능을 한다’는 식이죠.

예를 들면, ‘나는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 좋아’라든지 ‘나는 장면 신청 규칙이 싫어’는 공감이나 반감을 넘은 의미있는 찬성이나 반론을 할 수 없는 취향 표현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의 개들은 갈등에 새로운 수단을 도입할 때마다 추가로 주사위를 받으므로 상황이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극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는 데에 적합하다’라거나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 장면 신청 규칙은 참가자가 돌아가며 장면의 초점, 배경, 목적을 정하므로 진행자의 전통적인 장면 설정권을 상당 부분 참가자에게 이양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토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점점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므로 오히려 새로운 주사위를 끌어들이지 못하게 위축시킨다’거나 ‘진행자도 토론과 제안을 통해 얼마든지 장면 설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식의 반론도 가능해지죠.

즉, 어떤 규칙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가치 판단은 ‘어떤 목적에 좋은가? 어떤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고려가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개인 취향의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쓸모없는 규칙이다’라고 하면 포도원의 개들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싸움나기 딱 좋지만, ‘포도원의 개들은 주사위의 내용이 “절름발이 2d10″이든 “명사수 2d10″이든 서술에 넣는 상황이 달라질 뿐 규칙상 동일한 가치를 가지므로 치밀한 전술적 시뮬레이션에는 쓸모없는 규칙이다’라고 한다면 수긍하든, 반론하든 소모적인 언쟁을 넘어선 토론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규칙과 그 목적, 혹은 기능에 대해 생산적 토론이 필요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몇 가지 효용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자기가 하려는 플레이에 적합한 규칙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규칙을 사용하는지는 취향이나 친숙도, 시간 사정, 경제성 등 여러 가지 고려가 들어가므로 순수히 기능성만으로 규칙을 고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자신이 하려는 플레이를 원활하게 하는 규칙을 선택할 사정이 된다면 규칙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규칙을 고르는 데 도움을 주겠지요.

두 번째,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규칙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규칙 중 자기가 원하는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혹은 더 좋게 고칠 방향이 있다면 기능 중심적 생각과 토론은 플레이에 적합한 경향성을 만들도록 규칙을 수정하는 지침이 될 수 있죠.

세 번째, 규칙을 새로 디자인하는 사람에게 특히 규칙에 대한 토론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내가 지금 만드는 규칙이 플레이중 어떤 기능을 할 것인지, 다른 규칙과 어떤 식으로 맞물린 것일지 생각하는 것과 안 하는 건 차이가 크죠. 특히 ‘HP 규칙은 다들 쓰니까’ 하는 식의 타성에서 벗어나 HP가 실제로 플레이중 어떤 기능을 하는지, HP가 원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지원하는지 하는 고려가 막연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효용이 클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적 취향을 넘어 (비교적) 객관적인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규칙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방법과 효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규칙에 대해 보다 평화적인(?) 토론을 하는 데 일조하면 좋겠습니다.

2 thoughts on “규칙 – 취향을 넘어 기능으로

  1. Asdee

    많이 공감이 가네요. 비슷하게 아는 분과 이야기하면서, 각 시스템들이 가진 ‘색깔’을 규정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GURPS 같은 범용룰이라도 뭔가 나름의 특색이 있어서요. “어떤 세계”를 구현하는가(혹은 어떤 세계를 구현하는데 적합한가)…의 문제겠지요. 아마.

    룰의 “기능성”은 그러한 지향점을 얼마나 잘 살리며, 또 어떤 한계나 모순을 지니는가이겠죠? 흔한 경우로, 대체로 잘 돌아가지만 몇몇 경우에서 밸런스가 깨진다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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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그런 식으로 기능적으로 분석하면 어떤 규칙의 최적의 활용법이라든지, 하려는 놀이에 최적으로 고칠 방법이라든지 하는 게 많이 나오지 않을까 해요. 밸런스 자체도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떤 목적의 밸런스인지가 중요하겠죠. 전투력, 서사 형성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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